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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3: 33 잠시 너희와 함께 - 요 13: 34 서로 사랑하라.
요 13: 33 잠시 너희와 함께 -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
이 말씀이 윗절(32절)과 무슨 연락을 가지는가?
그 연락은 이렇다.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주신 결과(32절 하반)로 그는 아버지의 계신 곳으로 가시게 된다.
그의 제자들은 당분간 그와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36절 참조.)
1]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작은 자들아 tekniva(테크니아)는 부모들이 자녀를 정답게 부를 때 사용하는 말로 "애들아"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단 한 번 이곳에서 사용하셨지만,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7번(요일 2: 1, 12, 28, 3: 7, 18, 4: 4, 5: 21)을 사용함으로 이 말을 좋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2]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그의 제자들은 지금 주님과 함께 그의 죽음과 그의 영광에 동참할 수 없으나, 후에는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3] 주님이 얻으신 영광 (요 13: 31-33)
예수님의 구속 사역은 성 삼위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일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실 일을 눈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다고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영광은 서로 깊은 연관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아들은 아버지로 인하여 영광을 얻고, 아버지는 아들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는 것이다.
(1)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
예수님은 미래적인 사건이나 사실에 대하여 현재적으로 표현하실 때가 많으셨다.
① 인자가 영광을 얻으심은 그의 부활하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의 죽으심은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신 그의 가장 낮아지심이다.
이 부활로 주님은 그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시게 되었다.
② 예수님이 얻으신 영광은 그의 높아지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그의 부활과 승천을 의미한다.
주님의 승천은 곧 그가 하나님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③ 예수님이 영광을 얻었다는 말씀은 만물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사실을 가리키신 것이다.
* 마 28: 18 -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2) 하나님이 얻으신 영광
예수님은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다”고 말씀하셨다.
① 하나님은 아들로 인하여 사랑을 나타내심으로 영광을 얻으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죄인을 위한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셨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얻게 하셨다.
② 하나님은 아들을 통하여 그의 뜻을 이루셨으므로 영광을 얻으셨다.
* 요 6: 40 -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③ 하나님은 아들로 인하여 의로우심을 나타내심으로 영광을 얻으셨다고 말씀하셨다.
* 롬 3: 25-26 –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3)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영광 관계
예수님은 이곳에서 아들과 아버지와의 영광을 연결시킴으로 아들이신 예수님이 아버지와 동등의 영광을 가지신 분임을 나타내셨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다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아들이신 예수님은 어떻게 이런 영광을 하나님으로 얻게 하셨으며, 하나님이 예수님께 영광을 주시게 된 연유는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① 예수님은 영광의 보좌를 포기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으로 태어나심으로 이루셨다.
“모든 만물이 예수로 말미암아 창조함을 받았고 또 그를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가 이 세상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마구간에 태어나신 일, 시련과 고난을 당하시되 묵묵히 참으신 일, 비방과 모함 속에서 그의 생애를 지내신 일, 죄 없이 정죄하심을 받아 십자가 형틀의 처절한 형벌을 받으신 일, 이 같은 낮아지심이 하나님으로 영광을 얻으시게 하셨으며 또 아버지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게 하셨다.
② 예수님은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셨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에서 이처럼 아뢰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7: 4).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마지막으로 외치신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이야말로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을 다 이루었다고 하신 외침이었다.
③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이 일을 이루셨다.
* 빌 2: 8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아버지로 영광을 얻으시게 하시려고 고난을 당하셨다. 우리가 이 말씀으로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얻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이 보내신 그의 독생자를 믿을 때
우리 하나님은 영광을 얻으시고 우리에게 그의 영광을 주시는데 이 영광이 곧 영생의 면류관이다.
* 요 5: 24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 우리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은 이 같은 영광을 얻으시고 우리에게도 그의 영광을 주신다.
* 마 5: 10-12 –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 우리에게 오는 시험을 잘 참을 때 또한 그러하다.
* 약 1: 12 -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 우리들이 많은 열매를 맺을 때
또한 이런 영광을 받게 된다.
* 요 15: 8 -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요 13: 34 서로 사랑하라.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다. 그 내용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옛날 모세 시대에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과 대조된다. 옛 계명도 그 요점은 사랑이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 마 22: 37-40 –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러나 이제 주께서는 단순하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신다.
1]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여기 "새 계명"이란 말에 대하여 우리가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배반자 가룟 유다가 빠진 자리에서 나머지 11명의 제자에게 새 계명을 부여해 주신다.
(1) "새 계명"이란 명칭의 이유.
창조 질서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천하 만민을 한 혈맥으로 지으셨다고 하였다.
* 행 17: 26 -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남들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될 근거를 성립시켰다. 그러므로 구약에도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계명이 있다(레 19: 18). 구약의 계명도 사랑 중심이다.
* 롬 13: 8-10 –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은 독특한 동기들을 제공한다. 이를 종말관적 동기라고 본다. 그것은 "사랑하라"는 계명이면서도 구약의 예언적인 것이 성취된 종류이다. 그러므로 종말관적이다.
* 요일 2: 8 -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예수님의 보혈로 이루신 속죄를 믿는 자들은, 그가 우리를 사랑하심 같이(34절 하반), 다른 신자들을 위하여 희생하며, 필요하면 그들을 위하여 죽을 처지에 있다.
즉 영원한 기업의 동기. 같은 혈맥에 속한 자들 중에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마침내 영원히 나누인다.
* 행 17: 26 -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하여 구원을 받은 형제들은 영원히 나누이지 않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 한 자리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서로서로 위하여 희생할 처지에 있다.
(2) 새 계명을 지키는 방법.
그것은 물론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34절 하반에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그는 우리를 위하여 희생하시는 것으로써 사랑을 보여 주셨다. 그것이 바로 13장의 제목이 되어 있으니, 곧바로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실이다.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이 지극한 사랑이라고, 1절은 말하고 있다.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겸손이지만(겸손도 사랑이다. - 고전 13: 4), 그가 그들의 죄를 씻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10-11절).
그는 희생의 정신으로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대속의 희생은 될 수 없으나, 남들의 짐을 자신이 걸머지게 되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 그것은 큰 사랑이다.
* 갈 6: 2 –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우리가 이 진리를 이론으로 배우면서도 실제로 남들을 위해 희생할 줄은 모른다. 우리가 남들에게 대하여 이렇게 무관심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계명을 지켜야만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 나 자신이 머물게 됨을 모르기 때문이다. 요 15: 10에 말하기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내가 남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일을 해 보지 않기 때문이다. 자녀를 기르노라고 온갖 희생을 한 어머니는 기른 자녀를 잊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그 자녀를 위하여 희생한다.
그러나 어머니를 위하여 희생해 본 일이 없는 자녀들은 어머니를 쉽게 잊어버린다. 그러므로 내가 남을 사랑하려면 먼저 그를 위한 희생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또 다른 이유는 천국 운동의 필요성을 뜨겁게 느끼지 못한 까닭이다. 신자들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마치, 양 몇 마리가 많은 이리 가운데 있음과 같고, 몇 백만 군대에게 포위된 것과도 같다.
이 세상은 불신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가? 우리는 그 세력을 복음으로 이겨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서로 시기하거나 험담하지 말고 서로 아끼고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신자가 영원한 나라를 기억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리스도께서도 그 백성을 그렇게 사랑하시게 된 동기가 그의 가실 영광의 나라를 생각하심에 있었다(1, 3절). 32-34절의 문맥도 이 내용을 보여 준다.
곧, 그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영광(내세에 들어가심)을 받으시게 될 것을 염두에 두시고(32절) 이 새 계명을 주셨다.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자는, 이 세상의 것은 그 무엇이든지 초개와 같이 생각하고 희생한다.
한 번은, 구세군 사관들 109명이 아일란드의 황후(Empress of Ireland)란 배를 타고 가다가 파선되어 다 물에 빠졌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함께 빠진 자들의 구명대(救命袋) 없음을 보고 자기들의 것을 벗어 주면서, "나는 당신보다 잘 죽을 수 있다"라고 하면서 희생하였다.
그들은 내세를 확신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죽기까지 사랑을 베풀었다. 내가 남을 위하여 희생할 의용이 끝까지 생기지 않으면, 한 가지는 해야 될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남들을 위하여 죽기까지라도 희생할 책임감은 가져야 한다.
이 책임감을 가진 자는 그대로 행치 못한 처지에도 극도의 겸손을 소유하게 된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 약 4: 6 -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3)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신 목적.
예수님의 새 계명은 모세의 10계명을 폐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와 그의 사도들은 모세의 10계명을 그대로 세워나가셨다.
* 마 22: 37-40 –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롬 13: 8-10 –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그는 진리이시니,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계시 된 구약의 계명들을 폐지하실 리가 없다. 하나님의 계명은 선(善) 자체이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곧, 선은 피조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본질적 의지이다.
종교와 도덕(선과 관련된 것)은 서로 달라도 서로 독립된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함께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된 방면이다.
하나님의 의지 자체인 선의 표현 곧, 계명은 어느 시대의 것이든지 페지되지 않는다. 모세의 율법 중 유대인들만을 위한 제도들은 신약 시대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인류 전체를 위한 도덕적인 십계명은 폐지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십계명 중 제 4 계명에 쉬라고 한 것은 보편적 도덕 요소이다. 쉬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을 위한 것이며, 또한 사람과 짐승의 피곤과 쇠약을 막는 자비를 위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 계명은 창조 질서에 속한 선한 제도이다. 곧, 이것은 모세 이전에 온 인류를 위하여 제정된 것이었다.
다만 안식일을 지키는데 관계된 벌칙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므로 변동되었다. 구약 시대에 안식일을 범한 자를 죽인 것은 신정 국가(神政國家)의 시대, 곧, 정교 일체(政敎一體) 세대에 속한 것이었다.
안식일과 날자 순서도 본질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신약 시대에 날짜가 변한 것으로 보아서 알 수 있다. 구약 시대에는 제7일(토요일)이었던 것이, 신약 시대에는 7일 중 첫날(주일)로 변경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된 원인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창조(創造)를 기념했으나, 기독자는 그리스도의 부활(復活)을 기념하기 때문이다.
(4) 사랑의 방법
주께서는 천국으로 돌아가실 것이나 세상에 남아 있는 제자들 곧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제자들은 믿음으로 주를 섬기며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본장 앞부분에서 교훈하신 대로 용서와 연관된다.
서로 용서해야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서로 사랑해야 서로 용서할 수 있다. 사랑은 형제의 잘못과 부족을 오래 참고 용서하고 상대를 배려하며 선을 베푸는 것이다.
초대 예루살렘 교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
* 행 2: 44-45 –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사랑은 모든 계명을 완성하는 아름다운 덕이며 교회의 일치의 덕이기도 하다.
(5) 사랑해야 할 이유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는 주께서 친히 십자가로 본을 보이셨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으로 명하셨기 때문이다.
주께서 먼저 희생적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5: 1-2에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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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이 즐거워야 행복해 진다고 합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모든것이 긍정적으로 보이게 되므로
얼굴엔 늘 미소를 짓게되고 밝고 유쾌하게 된답니다.
얼굴에 환한 웃음과 함께 오늘도 멋지게 시작하시고요.
항상 웃음이 있는 그런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