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연필이요, 호미화방표가 아니굽쇼, 너구리가 슬쩍 찔러준 것입니다.
야, 너 왜 빈 손으로 오구 그랴? 이거라도 드려.
이렇게 눈치 주면서 옆구리 쿠욱 찔럿지요.
20년 전을 기억하는 사람 흔하냐? 빨랑 줘어--
이래서 제가... 그거를... 죄송합니다.
다음에 뵐 일이 있으면 진짜루 호미화방표 하나 선물합지요.
(미리 희망목록 받습니다. 알려주세요. 다음엔 지우개로 할까요?)
--------------------- [원본 메세지] ---------------------
어줍잖은 참석에 어이구, 내가 낯가리게 되면 어떻하나 걱정도 했습지요.
둘레 분들은 눈치 못 채셨을지 모겠지만, 술이나 퍼먹어 아사 무사해져야 낯가림이 사라지는 체면이고 보면 늘 걱정되는 일이 아닐 수 없어요. 그런데 다행이었습니다. 술에 기대지 않아도 그 시간은 아주 짧았으니까요.
서울 나가는 길에 이리저리 볼 일을 묶어야 했습니다.
석달만에 나가니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래도 미안했습니다. 노래방에 하냥갔으면 더 좋았을 거신디...
노래방을 마지막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던 분들은 저희 큰형을 못보셨겠지만, 저희 삼형제는 그렇듯 이물없이 지낸답니다. 형제이지만 서로간 친구나 동료 같은 심정을 불러일으키지요.
청진옥에 오신 분들은 보셨겠지만, 큰星은 예전 <새들>이라는 아동 극단에서 활동한 연극배우였어요. 제가 아주 어릴 적에 큰 성이 알뜰히 노트한(자랑 같지만, 자의식이 만면하신 분이어서 자신은 인정 않지만 제눈으로는 희대으 명필입죠. 충무로 이전 스카라 극장 맞은편에 '황소집'이란 괴깃집이 있어요. 그 글씨가 큰형 글씹니다^^) 대학 공책을 뜻도 모른 채 뒤적이면서 야술이라는 아우라에 덜커덩 걸려들었었지요. 시방은 중핵교 미술성생님인 작은星은 저와 같이 서양화를 전공했구요. 하늘이 낸다는 삼형제라는데, 정작 아들 셋을 둔 울 아버지 참으로 난감하셨을 것입니다. 떡두꺼비같은 숫넘덜 셋을 낳아, 이젠 되얏다! 이젠 우리 집안도 불같이 일어나것다! 하셨을 터인데, 이넘들 하는 짓들이 모두 밥 비러먹을 딴따라 일이었으니. 하하하^^
제가 그 잘난 대학에 입학하던 날 예의 우덜 큰星은 술자리를 만들었겠지요.
그 날 큰 성의 말쌈이 잊혀지지 않고 제게 남아 있습니다.
"흐음...그래, 우리 집 피는 이쪽이야......"
이 묘한 말쌈은, 자신이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없었던 연기자의 길에 대한 형의 회한에 힘입어, 제게는 어느 결에 귀울음으로 남아 버렸습니다.
제가 들락거리는 홈피가 여럿 있는데 어제를 보태면 두 번의 정팅에 나간 셈입니다.
그 때마다 정신이 어리뻥해지면서 기분이 참 묘해요.
사이버상에서만 제 이야기를 하던 활자들이(늘 그 곳에서만 가능하리라 알게 모르게 속아 버리는), 현실 공간에서 실제의 얼골로 나타나(이거 시뮬레이숑 아녀?^^) 온기를 담은 채 말도 하고, 술도 묵고, 떠들고 노래하다니! 하하하하^^
반갑고 두루 고마웠습니다.
바늘쌈은 곤사님의 바늘이 녹슬지 않게 꽂아두겠습니다.(곤사님이 그러더군요. 이 안에 머리칼이 들었니? 명주솜이라는데요. 예전에는 머리칼을 넣었어. 그러면 녹도 안슬고 아주 오래가지.)
호미화방 깜장 스판을 입은 연필은 이쁘게 깎아서 밤늦도록 사각사각 잘 쓰겠습니다.(연필아 연필아, 내 그림 좀 어떻게 해다오. 나도 화가 쪼매 되야보자.^^)
스킨로숀은 서울 나갈 적 생뚱맞은 처자 만나러 갈 때 쓰지 않고 반다시 큰 형수 코 앞에 나타날 적에만 쓰겠습니다.(얘들아, 나 쪼매 이쁘게 맹기러 주라.웅? ^^)
스킨로숀 곽에 들어있던 전자시계는 제 작업대 앞에 놓고 허구헌날 노려보겠습니다.(시계야 시계야, 지금은 공부할 때라고, 네가 죽비가 되어주렴. 하루 해는, 인생은 무쟈게 짤브니라 함서리^^)
<국화>는 국화가 지기 전에 읽도록 애쓰겠습니다. '국화'하면 떠오르는 게 박정희씨가 그린 황국과 미당의 국화 옆에서와 일제 강점기와 당시를 견뎌 낸 조선땅 식민지 백성들이 생각납니다. 가을이면 온 들판에 일렁이는 금대리 감국은 어델두고!^^;
인사동풍 청자빛^^으로 투각한 붓통은 작업실 예제서 이산의 아픔을 겪고 있는 색연필을 담아서 쓰겠습니다. 봄, 여름, 갈, 겨울...(색연필아, 이제 너희도 함께 살 수 있게 되얏구나^^)
그리고 그리고, 저와 눈맞춰 인사 나눈 분들, 이름은 갈차줘도 기억을 못하니 얼골만은 머리에 세겨놓겠습니다. 몇몇 아이디와 함께. ^^
*사실, 돌아오는 길이 가관이었습니다.
새벽녘 청진동에서 한사코 노래방을 주장하시던 큰 성의 덕에 새벽이 부윰했더랬지요. 마지막 남은 전사덜과 헤어져 저는 청량리 가는 전철을 탔겠지요. 그리고 꾸벅꾸벅 졸았겠지요.
헌데 전철은 저를 청량리로부터 아주 멀리로 떼어놓고 있었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한번은 '신길역'이었고, 한번은 '영등포역'이었고 도대체 청량리가 되지 못하고 '성북역'이 되고 그랬습니다. 부리나케 성북역에서 내릴 때, 이런 이런!
우산과 함께 들고있던 국화꽃이 전철 안으로 떨어지며 문이 닫혔습니다. 참으로 무안했어요.(과연 의정부로 가는 전철에 떨어진 국화는 어떻게 되었을까... 전철 안 누군가 주웠을까? 아님 북부의정부 빈 전철에 오르신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가 떨어진 국화를 반색하며 '우리집에 애들방에 꽂아주어야지!' 했을까? 그랬음 좋겠다...큰형수, 뉘우치는 마음으로 제가 담에 시월 하늘에 핀 감국 한아름을 드리겠습니다. 북한강물에 몸 담근 금대리 감국!^^)
결국 여덟시 오십분 기차로 가까스로 가평에 도착, 종묘사에 들러 무씨를 사고 열몇시간 한 데서 보냈을 제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어 시속 30킬로로 북한강을 보면서 집에 왔네요. 텃밭을 보니 어제 팽개쳐 둔 삽이며 괭이며 쇠스랑이 예서제서 이슬에 축축했겠지요. 비몽사몽 대문을 열고 "어머니, 저여요."했는지 어쨌는지.
밀린 잠을 한숨 자고 해저물녘 곤사님과 텃밭을 갈았습니다. 몇번의 삽질에 땀이 비오듯 했어요.
누적된 술이 빠져 나갔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지! ^^
암튼 밭구럭이 제법 드러났을 때 지나가던 금대교회 목사성생님이 들러 우리를 보며 인사를 했습니다.
"아휴, 곤사님 밭일 해보셨어요?"
"칠십년 되엇나? 이전에 해밧지유. 덕산으루 시집와서유"
두분 대화가 벼랑 살갑지 않길래 제가 퉁새맞게 껴들어 한마디 했어요.
"목사님, 한 삽 하시지유. 도 닦는데는 땀흘리는게 최곱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