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관심사 된 한반도 야경 사진
2006년 봄 남북 장관급 회담 취재차 평양에 갔을 때 일이다. 회담 둘째 날 저녁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유명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데 전기가 나갔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전깃불이 스르르륵 약해지더니 완전히 암흑이 됐다. 식당 접대원들은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재빨리 초를 가져와 켜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장관급 회담 같은 큰 행사가 열리면 북한 당국도 신경 써서 화력발전소 가동을 늘린다는데 이런 일이 생겼다.
▶요즘은 우주에서도 한 나라의 경제 사정을 볼 수 있는 시대다. 북한의 전력난, 나아가 경제적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한반도 야경 위성사진이다. 다양한 사진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북한은 영토 경계선조차 보이지 않고 평양 정도만 작은 점 하나가 찍혀 있다. 반면 밝은 불빛이 가득찬 한반도 남쪽은 북한 땅과 3면 바다의 어둠에 둘러싸인 섬처럼 보인다. 북한 정권이 주민 민생을 도외시한 채 핵·미사일 개발에만 매달린 결과를 이렇게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진도 없다.
▶이 사진은 많은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 같다. 도널드 럼즈펠드 전 미 국방 장관은 2005년 방한했을 때 한반도 야경 사진을 펜타곤 자신의 집무실에 놓고 매일 한반도 문제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민족인 한국과 북한이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도 2001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났을 때 이 사진 얘기를 꺼냈다. 로이터는 2014년 1월 국제 우주정거장에서 찍은 ‘한반도의 밤’ 모습을 ‘올해의 사진’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최근 한반도 야경 사진이 다시 한번 세계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번엔 인공지능(AI)을 둘러싼 개발론과 규제론의 충돌 과정에서 다시 소환됐다. 한 AI 개발 예찬론자(기욤 베르동)가 지난달 10일 ‘한국에 다녀오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X(옛 트위터)에 한반도 위성사진을 올린 것이다. 그는 AI 기술을 가속화하면 한국처럼 빛나고, 이를 막으면 북한처럼 미래가 컴컴해진다고 비유했다.
▶2023년 마지막 날엔 일론 머스크가 자신이 소유한 X에 한반도의 밤 이미지를 공유했다. 머스크는 ‘낮과 밤의 차이’라는 제목과 함께 ‘미친 발상(Crazy idea): 한 나라를 자본주의 반, 공산주의 반으로 나누고 70년 후에 어떻게 됐는지 확인해 보자’는 글을 달았다. 1일 현재 5000만명 가까이가 이 이미지를 보았다. 머스크의 이 사진이 한 국가의 체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일깨우고 있다.
세계 인구 80억명 시대
일찌감치 인구 규모와 출산율을 걱정해 왔던 로마의 출산 장려 정책은 역사가 꽤 깊다. 기원전 403년에 결혼하지 않은 노총각에게 벌금을 부과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이런 강력한 결혼·출산 장려 정책의 절정은 로마제국 전성기를 이끈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재위 기원전 27년~서기 14년)이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25∼60세의 모든 로마 남성은 반드시 결혼하게 했다. 20~50세의 여성도 남편이 사망하면 2년 이내에 재혼을 해야만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우리가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 갖지 않는다면 국가가 어떻게 보존될 수 있겠는가”라고 강조했다.
인구 증가가 국력을 저해한다고 여겼던 경우도 있다. 20세기 후반 특히 개도국들에서다. 이들 나라에선 폭발적인 인구 증가를 억제하는 것이 국가적 과제였다. 한국, 싱가포르, 대만, 중국, 태국 등은 정부가 나서 이른바 가족계획 사업을 벌였다. 그 결과 1980년대 들어와 출산율이 현저하게 낮아졌다.
미국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24년 1월1일 전 세계 인구가 80억명을 넘겼다. 새해 첫날 하루 동안 지구촌에서 1초마다 4.3명이 태어나고 2명이 사망하면서 총 80억1987만6189명이 됐다고 한다. 2023년 한 해 전 세계 인구는 총 7500만명 증가했다. 유엔은 2022년 11월15일 전 세계 인구가 80억명을 돌파했다고 선언한 바 있다. ‘전 세계 인구 80억명’을 놓고 미국의 전망과 유엔의 전망이 1년 넘게 차이가 나는 것은 서로 다른 조사 방법 때문이다.
존 윌모스 유엔인구국(UNPD) 국장은 “세계 인구가 80억명에 도달한 것은 인류 성공의 징표인 동시에 미래의 큰 위험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나라는 이제 국가소멸을 걱정할 정도로 출산율이 급감하고 있다. 통계청은 지난해 3분기 0.7명이던 합계출산율이 4분기에는 0.6명으로 더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이대로 가면 한국이 전 세계에서 ‘1호 인구 소멸 국가’가 될 것이라는 데이비드 콜먼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의 경고가 더는 과장이 아닐 것이다. 세계 인구가 명실상부하게 80억명을 넘은 올해 우리는 ‘인구재앙 극복’의 각오를 다시 한 번 다져야 하겠다.
양식(洋食)에 맛을 들인 고종(高宗)
조선말에 러시아에서 온 손탁(孫澤 : Miss Sontag)은 정동의 이화여자고등학교 내에 호텔을 건립하고, 내외국인의 사교장으로 사용하였다. 서울 최초의 이 서구식 호텔을 ‘손탁빈관(Sontag賓館)’이라고도 불렀다.
32 세의 손탁은 1885년 10월 초대 주한 러시아공사 베베르(Waeber, K. 韋貝)를 따라 내한하여 25 년간 한국에서 생활하였다. 개항 초기의 조선은 대외 교섭상 외국어에 능통한 인물이 절실하게 필요하였다.
손탁은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 등 각국어(語)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말도 재빨리 습득하였다. 이에 손탁은 베베르 공사의 추천으로 궁내부(宮內府)에서 외국인 접대업무를 담당하면서 고종 및 명성왕후와 친밀하게 되었다.
손탁의 제부 베베르 공사의 주선으로 명성왕후 민씨와 가까워진 끝에 그 녀는 왕실의 외국인 접대역으로 촉탁을 받았다. 이리하여 그 녀는 명성왕후 민씨에게 가끔 서양 요리 강습을 해 주었고, 손수 요리를 만들어 바치기도 하였으며, 고종에게 양식 맛을 가르쳐 주었다.
이에 1895년 명성왕후 민씨는 왕실 부속건물인 정동 29번지 소재의 한옥 한 채(현 이화여자고등학교 내)를 손탁에게 하사하였다. 그 녀는 종전대로 왕실의 외국인 접대를 맡아보는 한편, 왕실과 왕족, 그리고 상류사회 가정의 서양화에 대해 일일이 친절을 베풀어 주고 있었다.
조선왕실의 인기와 신망을 얻게 된 그 녀는, 고종이 1년간 러시아공사관에 있는 동안 정성을 다해 고종의 양식 시중을 들어 고종은 양식 맛을 들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손탁은 왕실의 양물(洋物) 일체를 취급하는 어용계(御用係)를 맡아 보게 되었다. 고종은 덕수궁에 돌아온 후에도 이따금씩 양식을 시켜다 들곤 했으나, 양식을 위한 모든 격식이 갖추어져 있지 않아, 만족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한편 손탁은 청나라 주차(駐箚) 조선총리 원세개(袁世凱)의 내정간섭이 심화되고, 이어서 청일전쟁 승리 후 일본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 하자 손탁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제3세력을 끌어들이는 인아책(引俄策)을 강구하였다. 손탁은 궁내부와 러시아공사관의 연결책을 담당, ‘한러밀약’을 추진하는 등 반일운동을 통해 조선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895년 10월 8일, 명성왕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한국 최초의 배일정치단체인 정동구락부가 친러파에 의해 발족되었다. 이들은 명성왕후 시해에 대한 복수와 친일내각 타도, 경복궁에 있던 고종 구출 등을 정치적 투쟁 목표로 표방하고, 정동에 있는 손탁 사저에 모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손탁 사저가 배일정객(排日政客)의 식당이고, 왕궁을 출입하는 외교관들의 회합 및 숙소를 겸하게 되자 그 녀는 배일파 집회소의 호스티스 노릇을 하였다.
이로써 그 녀는 왕실의 요리인으로부터 정객을 상대로 하는 비밀결사의 주인공으로 변모하여 고종 구출작전의 막후 인물로 활약하였다.
이 당시 정동구락부에 주로 드나들던 한국인은 유명한 이완용, 독립협회의 서재필, 미국에 유학했던 윤치호, 민씨 가의 수재 민상호(閔商鎬), 친러파이자 명성왕후 민씨의 사랑을 받은 이범진, 궁정의례에 정통한 이학균(李學均), 그리고 왕실의 살림을 뒤에서 보살폈던 부호 이봉래(李鳳來) 등이었다. 모두 신진파이면서 미국과 러시아에 호감을 가진 구미파(歐美派) 인사들이었다.
그 후 정치세력화한 손탁의 정동클럽은 차츰 친일세력을 배제하게 되었는데 손탁은 여전히 배일정객의 식당이고, 배일파 집회소의 호스티스 노릇을 하였다. 이로써 그 녀는 왕실의 요리인으로부터 정객을 상대로 하는 비밀결사의 주인공으로 변모하였다.
1902년 손탁은 궁내부로부터 건축자금을 지원받아 고종에게 하사받은 저택을 허물고, 그 자리에 2층 양옥을 신축해 1층에 커피숍, 2층에 객실 25개의 손탁호텔을 지었다.
일본인 기구찌(菊池謙讓)가 쓴 『한말에 등장한 여성』에서
「1909년 손탁은 조선은 떠나갔다. 그의 친구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기도 했거니와, 그가 친애하던 러시아가 패망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 녀가 조선에 왔을 때는 선망 받는 30여 세의 꽃 같은 미모였었는데, 떠나갈 때는 아름답던 얼굴이 파란과 비통으로 시들어 볼품없이 되어 버렸다. 두둑해진 돈 주머니의 무게도 반갑지 않게 쫓기듯 그 녀는 떠나갔다.
그 녀는 러시아에 돌아가자 명승지 칸에 아담한 별장을 지었다. 그 곳에 극동 왕국에서 벌어온 재산을 관리하여 여생을 보낼 계획이었으나, 동생 베베르 부인의 권유로 모든 재산의 대부분을 러시아 은행에 예금하였고, 나머지는 러시아 기업에 투자하였다.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러시아에 공산혁명이 일어났다. 적색정권은 그의 예금도 투자도 몰수해 버렸다. 극동 왕국의 패망을 보고, 또 극북제국(極北帝國)의 멸망을 겪은 그 녀는 한 때의 영화를 일장춘몽(一場春夢)으로 되씹으며, 1925년 러시아에서 쓸쓸히 객사하였다. 그 때 그는 71 세의 노처녀였다.」라고 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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