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을 기억하세요?"
궁정 귀부인에 대한 연애 감정의 승화라고도 하고, 마리아 숭배의 세속화라고도 하는 이러한 정신 아래,
모험을 하고 무용을 이루는 것이 바로 기사도 문학이며, 이 기사도 문학의 원형이…….
*영국관광청에 있는 검을 뽑는 소년 아더왕 그림*
영국의 작가 월터 스콧은 자신의 소설 <아이반호>(1819)의 첫 머리에 ‘이 소설은 로맨스다’라고 선언해 놓았다. 로맨스? 요즘 소설 좀 읽어본 친구들은 남녀 간의 연애 이야기가 주가 되는 장르 로맨스 소설을 떠올릴 것이다. 보다 학구적인 친구들은 네이버 백과사전 같은 것에 의거해서 ‘프랑스, 에스파냐의 서정적인 가곡’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둘 다 틀렸다. 월터 스콧이 작품 활동을 하던 1800년대 초에 로맨스란 기사들의 모험과 전쟁 이야기를 다룬 소설, 즉 기사도 이야기를 뜻했다.
기사도 이야기는 12세기 중엽부터 유럽에 성행하던 기사도와 귀부인 숭배를 주제로 한 설화문학을 말한다. 흔히 기사도라 부르는 기사의 덕목으로는 무용(武勇)·성실(誠實)·명예(名譽)·예의(禮儀)·경건(敬虔)·겸양(謙讓)·약자 보호 등을 꼽을 수 있는데, 빠질 수 없는 것이 귀부인에 대한 숭배와 헌신이었다. 궁정 귀부인에 대한 연애 감정의 승화라고도 하고, 마리아 숭배의 세속화라고도 하는 이러한 정신 아래, 모험을 하고 무용을 이루는 것이 바로 기사도 문학이며, 이 기사도 문학의 원형이 바로 오늘 소개할 책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사진 우측)이다.
아서왕에 대해서는 수많은 책들이 나와 있다. 그 대부분은 아동을 위한 축약본, 즉 재미있을 부분만 추려서 엮어놓은 것인데, 그런 책을 읽었다 해도, 또 혹은 이야기로만 들었다 해도 이 글을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이라는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 것이다.
*사진 위는 영화 킹아더 홍보포스터 이미지*
마법사 멀린, 궁정의 바위에 꽂힌 신검 엑스칼리버를 뽑는 자가 왕이 된다는 전설, 그 어떤 지체 높은 귀족과 명성 자자한 기사들도 못 뽑은 그 칼을 심부름 온 소년이 단숨에 뽑아 결국 왕위에 오르는데 이 사람이 바로 아서왕이라는 것,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 용맹이 뛰어난 수많은 기사들을 휘하에 들이되 누가 높고, 누가 낮다는 서열을 없애기 위해 원형의 탁자, 즉 원탁에 둘러앉게 함으로써 ‘원탁의 기사들’이라는 이름을 유명하게 하고, 말년에는 조카와 왕비에게 배신당해 치명상을 입고 용사의 안식처인 아발론으로 떠났다는 이야기가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영국인들은 지금도 영국의 시작을 이 아서왕 전설에서부터 찾는다.
그런데 사실 아서왕은 실제로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아득한 옛날 영국 땅에는 원래 이베리아인들이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역사 기록도, 유물도 남겨두지 않은 채 사라져 버렸고, 그 뒤를 이어 영국땅을 지배한 것은 게르만족의 일족인 켈트족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400년 전부터라고 한다. 그러다가 영국은 기원전 5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지휘하는 로마군의 침공을 받아 약 3백년 간 로마의 식민지가 된다. 로마의 치하에서 벗어난 것은 약 3백년 후인데, 그건 로마 본토가 게르만족의 침입을 받아 위태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로마인의 지배를 피해 험준한 북쪽 산악지대로 도망가 살던 켈트족의 일파인 스코트족이 살기 좋은 남쪽 땅을 되찾기 위해 물밀듯이 내려온다. 3백여 년 간 로마군의 보호를 받던 남부 켈트족은 사나운 스코트족에게 대항할 방법이 없자 이번에는 지금의 독일 북부, 덴마크 남쪽 작센 지방에 살던 사람들, 이른바 앵글족과 색슨족, 합쳐서 앵글로 색슨족이라 부르는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늑대를 물리치려다가 호랑이를 끌어들였다는 이야기를 아는가? 당시 켈트족의 신세가 딱 그랬다. 색슨인들은 물론 스코트족을 물리쳐주기도 했지만, 그보다 자기들 살던 곳보다 훨씬 따뜻하고 기름진 땅을 가진 켈트족의 터전을 빼앗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아서왕은 이때 등장해서 활약한다. 켈트족 왕의 아들로 태어나 대마법사 멀린의 조언으로 어려서 버려져 남의 아들로 자라다가 신검을 뽑음으로써 자기 왕위를 되찾고, 그 후로 영국을 침범한 색슨족과 앵글족, 호시탐탐 남쪽을 노리는 스코트족, 여기저기 난립해서 왕국을 세우고 아서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군소 왕국들을 제압하고 퇴치하여 왕권 아래로 포섭하는 일이 아서왕의 일생이었다. 그 일대기가 그려진 것이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이다.
아서왕 이야기가 처음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12세기에 몬머스의 제프리라는 사람이 <브리튼왕 열전>에 포함시킴으로써 이루어졌다. 이 책은 1155년에 웨이스라는 사람이 프랑스어 운문으로 번역해서 <브뤼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이걸 다시 영국의 시인 레이어민이 영어 운문으로 번역한 것이 <브루트 이야기>이고, 이는 1200년 무렵의 일이다. 13세기에 접어들자 프랑스에서는 운문 로맨스를 산문으로 고쳐 쓰고, 그렇게 만들어진 산문 이야기들을 한데 묶는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아서왕 이야기도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근대 학자들이 ‘통속 연작’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거의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갖게 된 것이 이때다. 그 후 15세기에 이르러 토머스 맬러리가 <아서왕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통속연작’에 실린 이야기들을 정리해 영어권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지금 판본으로 참고하고 있는 책은 1860년에 제임스 놀스가 <아서왕의 죽음>을 간추려 청소년용으로 고쳐 쓴 것이다. 한국에서는 비룡소에서 2004년에 번역 출간했다.
이런 축약본이 아니라 원형에 가까운 것을 보고 싶다면 현대의 켈트 연구자인 장 마르칼이 쓰고 김정란이 번역해 북스피어 출판사에서 9권으로 출간한 <아발론 연대기>(사진 우측)한다. 다양한 도판과 연구서답게 상세한 각주가 붙어 있는 좋은 책이다.
<톰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핀의 모험>으로 유명한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은 시간 여행으로 아서왕의 시대로 간 미국인(양키)이 겪는 모험을 통해서 전설의 허황됨, 중세 기사도 문학의 과장을 비웃고, 현대 과학을 이용해 대마술사로 군림하는 이야기를 전개했다. 일은 그의 생각만큼 쉽지 않아서 마지막엔 상상도 못한 파국이 오는데……. 무척 재미있으니 한 번 읽어보시라.
한국에서는 <아더왕과 양키>,(사진 왼쪽)<아서왕과 코네티컷 양키>, 또 혹은 <아서왕을 만난 사나이> 등의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출처:문장 글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