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시대 복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물론 현존하는 평양의 강서고분 무영총등에 남겨진 고구려여인도를
통해서 알아 볼수 있다.
박선희
고구려에서는 매년 3월 3일 왕과 신하 및 5부의 군사들이 모두 낙랑에 모여 사냥하고, 여기서 잡은 멧돼지와 사슴을 제사의 희생물로 바쳤음을 알 수 있다.
『삼국지』오환선비전 부여전에 의하면, (부여 사람들은)국내에 있을 때, 가죽신을 신었다 외국에 나가면 두텁게 짠 사직물(繒)옷, 물들인 오색실로 사직물에 수놓은(숙錦) 옷, 푸른 새털로 짠 모직(계) 옷을 즐겨입고
겹실로 짠 것을 겸이라 한다.
부여에서 두터운 사직인 繒을 짠 것과 달리 남방에 위치하고 있던 진한이나 변진에서는 겸布를 짰는데, 겸포는 이반 견보다 좀 성글면서도 매우 치밀하게 짠 것으로
서기전 1000년기 초로 그 연대가 확인된 길림성 열길현 성성초 유적 17호 돌널무덤에서 시체의 얼굴을 덮었던 양털실과 개털실을 섞어서 짠 모직물이 출토되었다.
고구려 사람들도 돼지털로 짠 모직물인 障日을 생산했다.
『후한서』동이열전 마한전에서는, 금, 보화, 물들인 실로 짠 금과 푸른 새털로 짠 계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으며...라고 했다. 계는 꿩과의 갈치의 털로 짠 푸른빛의 모지무링다. 즉 계는 춘주시대 고조선이 중국에 수출했던 服과 같은 종류일 것이다.
신라에서는 계뿐만 아니라 모포 와 모직 보료와 모포가 생산되었고, 백제에서도 탑등을 생산하였던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설문해자』에 따르면, 이 모포 , 모직 보료 등은 모두 동물의 털로 실을 만들어 짠 것으로, 덮개나 깔개의 용도로 쓰였다.
첫째,『삼국사기』, 잡지에서는 "4두품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모두 모직 보료,모포, 호피, 중국 담요의 사용을 금한다"고 하여 신라의 모직물과 중국의 모직물을 구별해 설명하고 있다. 둘째, 신라의 경덕왕은 당 대종이 불교를 숭상한다는 말을 듣고 오색 모포를 만들어 보냈는데, 이는 신라의 특산품이었다. 셋째, 갈치의 털을 짠 공服과 같은 종류의 고급 모직물인 계는 고조선 때부터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널리 생산되었다.
상대 후기에 속하는 하북성 고성 대서촌 상대 유적에서 출토된 마직물에서 양모 한 오라기가 나왔을 뿐 모직물이 발견된 예가 없다. 한대에 이르러서도 모직물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고그 수준이 낮았던 것 같다. 따라서 모직으로 만든 옷은 가난한 사람이 입는 옷으로 인식되었고, 고급 모직물은 한민족이나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등에서 수입되었다.
현재까지 출토된 유물에 따르면 한반도는 중국보다 앞서 직기를 사용했고 따라서 마직물을 생산하기 시작한 연대도 중국보다 훨씬 앞섰을 가능성이 있다. 이 같은 가능성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출토된 가락바퀴의 무게의 폭이 중국의 것보다 매우 다양한 점에서도 나타난다.
중국의 가랏바퀴는 채색 질그릇에 보이는 채색문양을 하거나 등문 혹은 팔각등문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胡 등 북방민족의 가락바퀴는 거의 무뉘가 없다. 이와 달리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가락 바퀴는 다양한 모양의 새기무뉘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는 고대한국이 중국 및 북방지역과 다리 독자적 생산양식을 갖고 발달했음을 알려준다.
고구려에서는 대마로 *布를 만들고, 線麻 와 檾麻를 길러 전과 종을 만들었다고 하갰다.『설문해자』에 영은 '고屬'이라 하고, 고는 '麻'리라고 하여 경과 시를 모두 마과로 분류했으며, 이 가운데 경에서 가늘게 뽑은 거슬 전이라 하고 거친 것을 종이라고 했다. 고구려는 전포보다 더 구운 세백포와 60종포를 생산했음이『발해국지장편』의 다음의 기록에서 혹인된다. '발해 때에 흑수말갈이 60종포를 바쳤고,...'
『설문해자』에서 종은 '機縷'라 했고, 縷는 '線'이라고 했다. 종은 바디를 말하고 보통 직기는 1개의 종을 사용하는데, 60개의 종을 사용한 것은 무늬를 넣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60종포는 무늬 있는 전을 말한다.
고구려 서민들은 褐옷을 입었다. 갈옷은 어떤 옷이었을까? 중국 학자들은 고대중국인들이 사용했던 갈옷은 毛와 麻의 혼방으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고대중국의 갈은 진제국시기까지는 주로 조마로 짠 것이었고, 한제국시기에는 거친 毛布로 짠 것을 가리켰다. 이로 보아 중국에서 이후 갈옷이 혼방으로 만들어진 것은 고구려에서의 영향일 가능성이 있다. 신라에서는 면과 실크의 합사섬유인 細布와 시*세포를 생산했듯히 고구려에서는 모와 마의 합사섬유를 생산하여 널리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서기 4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길림성 집안현 마선구1호 고구려묘에서 기계의 몸체를 갖춘 '기직도'가 그려져 있는데, 앞에 사람이 앉은 것이희미하게 나타나고 직기 전면에는 직물을 감는 기구의 흔적도 보여...서기 5세기 초와 5세기 중엽 사이로 추정되는 평안남도 용강군 대안리1호묘의 남벽에서 고구려 여인이 옷감을 짜는 모습을 그리 '기직도'가 발견되었다. 이 고분벽화는 심하게 손상되어 직기의 모양이 정확하지 않으나 경사직기의 모양만은 확연하다. 우리나라의 직기는 腰機로 분류된다 대안리1호묘 기직도 직기의 경사도는 오늘의 우리나라 베틀의 경사도와 유사하다 이 같은 고구려의 직기는 동한 화상석 등에 보이는 중국의 사직기와는 전혀 다른 형태이며, 동한에서도 요기를 사용했으나 고구려의 요기와 달리 경사도가 매우 가파르다.
『후한서』동이열전 序에서는, '동이는 거의 모두 토착민으로서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기를 좋아하고, 변을 쓰고 물들인 누에실로 짠 錦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고 하고,『후한서』동이열전 고구려전에서는을 보면 고대에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위치했던 한민족이 일반적으로 금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고 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공공모임에는 모두 금과 수놓은 옷을 입었다.
중국에서 금과 숙의 옷을 입었다는 문헌자료는 춘추시대이후이다.
중국의 금은 여러 색실로 문양을 짠 것을 말한다. 그러나 고구려의 금과 숙은 웃옷, 치마, 바지 등 여러 옷을 하나하나 다른 색실로 짜로 옷 전체를 아름다운 색의 조합으로 만들고, 아름다운 문양을 곳곳에 수놓아 조합의 예술적 성취를 끌어올렸다. 다시 말해, 고구려는 옷 전체를 금과 숙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絹은 보리줄깅처럼 두터운 누에실로 짠 사직물이다.
면포(細)눈 굵은 실로 두텁게 짠 사직물로 예에서는 면포를 생산했고 한에 속한 마한에서도 누에를 길러면포를 생산할 줄 알았다.
그 외에 고구려는 실을 겹쳐 두텁게 짠 겸과 *, 그물처럼 성근게 짠 羅, 무늬를 넣어 두껍게 짠 綺,여러 겹으로 촘촘히 짠 素, 무늬가 얼음 결 같은 綾, 누에실을 꼬아 짜지 않아 얇고 고운 紗, 누에실을 바싹 꼬아 짠 穀, 누에실을 먼저 물들은 뒤 딴, 사직물을 탈색하여 희고 깨끗하게 한 練, 생누에실로 두텁게 짜 희게 보이는 것으로 날실과 씨실의 간격을 벌려 성글게 보이는 소 등을 생산하였다.
고대한국에서는 매우 일찍부터 야생의 초면을 가지고 며직물을 생산했다. 고려 말 문익점이 원에서 꽃이 크고 생산량이 많은 인도 면종인 목화를 들여오면서 초면은 급격히 사라졌다. 따라서 우리나라 면방직이 문익점과 정천익으루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았던 것은 바로 인도면이 처음 길러졌다는 것일 뿐이다.
『한원』번이부에 인용된 고려기의 기재에, '(고구려)사람 또한 금을 만들었으며 紫地*文아런 곳아 맨 위이고, 다음이 五色錦, 그 다음이 雲布錦이다. 또 白疊布와 청포를 만들었으니 특히 아름답다'고 하여, 고구려에서 백첩포를 생산했음을 밝히고 있다. 신라에서는 백첩포를 생산했다.이어서 고려도 백첩포를 생산했다. 백첩포가 어떤 직불인지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현응은 『일체음의』의 대방등대집경 음의에서 첩포에 대해, 버들개지와 같은 솜으로 만든 포를 첩포라고 불렀다고 했다. 『남사』의 고창국전에서는 백첩자로 만든 포로 기재하고 있다. 또한 『신당서』의 지리지에서는 고창국에 속한 서주에서 생산한 첩포를 공물로 보냈다고 했다. 『사기』식화열전의 익포 대해 안사고는 거칠고 두꺼운 포로 백첩과는 다르다고 했고,『사기정의』에서는 백첩은 목면으로 짠 것이며 중국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로 본다면 백첩포 는 모직물이 아니라 면직물이며, 당대까지 중국에서는 생산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은 한대에 서역 및 인도 등과 교역하면서 면직물을 알게 되었으나 목화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당대에 이르러서이다. 당대에도 목화 재배는 일부 특정지역에 그쳤다가 송과 원을 거치며 널리 재배되기 시작했다.
책도 변에서 변화를 가진 것으로 고구려의 책은 收가 없고 중국의 책은 收가 있다. 이는 중국에서 책은 漢初에 처음 출현하는데 관에서 변화를 가진 것이 아니고 무장들이 쓰던 두건에서부터 발생한 것으로 자연히 수가 발생된 것이다. 그러나 고대한국의 책은 고조선시대부터 사용되던 변에서부터 변화를 가진 것으로 중국에서와 가은 巾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히 수가 없는 것이다.
덕흥리 고분벽화나 쌍영총 주인도의 청라관이 섬세한 그물로 표현되는 것은 왕관인 백라관보다 성근 羅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양진남북조시대에 진한시대의 복식제도를 그대로 이어 기본적으로 건책을 썼고, 수당에 오면 위가 높은 건책과 책두가 크게 유행한다.
중국에서는 대부분의 관이 紗로 만들어졌는데,...
(중국의것은) 덧관이 속관의 앞부분에서 거의 연결죄는 것이다. 안악 3호 고분벽화 주인공의 관은 덧관이 속관의 뒷부분에서 연결되어 씌워져 있다.
고대 문헌에 나타난 고구려 웃옷에 관한 명칭은 대수삼, 유, 삼간수, 삼용* 이다. 이를 정리하면 고구려의 웃옷은 크게 삼과 유로 구분된다.
고구려 남자들은 웃옷으로 衫을 입고 여자들은 웃옷으로 유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겉옷으로 입은 포는 긴 길이와 넓은 소매를 특징으로 하며 남녀 모두 입었다.
『삼국지』오환선비전 부여전에 따르면, '(부여 사람들은) 국내에 있을 때의 의복은 무늬가 없는 것을 숭상했으며, 무늬 없는 포로 만든 큰 소매의 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라고 한다.
고조선시대의 청동기문화층에서 출토된 흙으로 만든 남자 인형들은 모두가 서있는 형태로 아랫도리가 넓게 퍼져 있거나 긴 길이의 포를 입고 있는 모습인데...부여와 같이 포를 입은 나라는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한이 있었다.
고구려의 의복이 부여와는 다른 점이 있으나 동옥저와 배제 그리고 신라와는 같다고 했는데, 이는 부여는 주로 포를 많이 입었고 고구려 등의 나라들이 포 외에 삼과 유를 많이 입었으을 말하는 것이다.
상대부터 전국시대까지 중국의 임형은 좌임과 우임이 혼용된 착수의 옷을 주로 입었다. 이후 진제국시대부터 주로 우임이었지만,
상시대와 주시대의 경우 모두 窄袖였다. 춘추전국시대에 와서야 대수와 관수가 출현하지만 窄袖가 여전히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진 한시대에는 대수와 窄袖를 병행했다. 삼국양진시대의 복식은 진 한의 것을 따랐으나 남북조시대의 복신은 한족의 의복과 북방민족들의 호복이 병행되어 대수와 窄袖가 병행했다. 호복은 窄袖와 간수를 특징으로 한다.
고대의 호복은 전국시대부터 선이 출현했으나 크게 강조되지 않았고 한시대에 와서 보편적으로 선을 달기 시작하여 삼국양진남북조시대에 해당하는 시기 호복의 특징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 양식은 포의 경우 선이 끝동과 도련에 둘러진 것, 깃과 끝동에 좁은 선이 둘러진 것, 깃과 섶 및 끝동과 도련에 폭이 매우 넓은 선이 둘러진 것, 선이 둘러지지 않은 것으로 분류된다. 유의 경우는 깃과 끝동에 좁은 선이 둘어진 것, 깃과 섶에 좁은 선이 둘어진 것으로 분류된다. 수당시대에 오면 호복은 번령과 대금 및 窄袖 특징인 긴 겉옷이 유행 하는데 주로 목둘레와 끝동에 선을 둘렀다.
(1)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포, 유, 삼과 이에 두른 선은 중국의 경우에서와 같이 문식 있는 천으로 만들어진 것이 없고 모두 단색이거나 닽은 계통의 색으로 문양이 짜여져 이색지지 않는다.
(2)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포와 유 및 삼의 선은 크게 깃과 도련 및 끝동만을 두른 경우와 끝동과 깃에서 섶을 지나 도련까지 두른 경우의 두 가지로 나타난다. 그러나 중국의 상시대부터 춘추전국시대까지의 모든 포와 유는 반드시 끝동과 깃에서 섶을 지나 도련까지 모두 선이 둘러진 거슬 특징으로 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포의 깃과 끝동에는 반드시 선을 둘렀다. 섶의 경우 선을 두를 것이지의 여부는 여민새와 관계가 있다. 대금곡령과 합좌직령의 경우에는 섶에 선을 두르지 않았다. 조임직령과 우임직령의 경우에도 앞여밈새를 옷그름으로 처리한 경우에는 섶에 선을 두리지 않았다.
안악 3호분의 포와 유에서 길고 짧은 옷고금이 나타나므로...
(3) 중국 여자의 포는 전국시대에는 진거단의, 곡거포가 출현하고 진 한시대에는 요금심의 직거포가 출현했는데, 이들 포는 모두 옷 전체에 매우 넓은 폭의 선이 휘감아 둘려져 있다. 또는 긑동에 두른 선의 색상과 폭이 깃과 섶이나 도련에 두른 선의 색상이나 폭과 서로 다른 경우가 있다. 고구려에서는 포의 깃 소매 섶 도련에 같은 색과 같은 색과 같은 폭의 선을 두르는 것을 기본적인 양식으로 하고 있으며, 신분에 따라 선의 양식에 다양한 변화를 주었다. 중국은 수당시대에 오면 짧은 웃옷에 긴 치마를 입고 그 위에 착수와 익령의 긴 웃옷을 입기고 하였으나 고구려에는 이 같은 양식이 보이지 않는다.
진한시대로 오면 남자의 는 주로 대금곡령으로, 소매는 대수이며 깃과 끝동은 문식 있는 천으로 선을 둘렀다. 진한시대에 이어 양진남죽조시대에 이르기까지 포의 도련에는 선을 두르기도하고 두르지 않기도했는데 도련 부분이 그대로 길게 드리워진 그리고 포의 길이가 무릎 아래에까지 내려오고 도련이 굴곡지거나 삼각형이 중첩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의 두 가지가 있다. 그러나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포에는 이같이 도련이 곡서느로 되거나 삼각형으로 된 것은 없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포의 경우 도련이 전부 선으로 둘러졌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체로 모든 계층의 포에서 도련이 선이 둘러진 것으로 보아 포의 도련에는 반드시 선을 둘렀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고구려의 포는 깃 끝동 도련에 반드시 선을 두르는 것을 고유 양식으로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같은 야익은 남녀의 구분이나 계층과 신분의 구분이 없이 동일하게 적용되었음도 알 수 있다. 수당시대에 오면 중국의 일반 남자들은 원령의 포삼을 주된 양식으로 하였고, 문관은 예복으로 치마 위에 긴 길이의 대금의 대수삼을 입었으나 고구려 복식에는 이 같은 양식이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의 궁고는 당이 있는 고를 가리키는 것이다. 실제로 고구려 고분벽화에 보이는 신분과 계층의 큰 구분 없이 입은 대부분의 고는 당이 있는 궁고로 폭이 넓은 대구고이며 중국이 개당고나 북방지역의고와 그 양식에서 근복적인 차이를 갖는 것으로 고습의 양식이 아니다.
한~위시대 고는 당이 있는 군이 있는데 이 당을 끈으로 묶어 통하지 못하게 한 것을 궁고혹은 혼당고라했고, 당이 있으나 끈으로 묶지 않아 통하게 한 것을 개당고라 했다. 또한 당의 역할을 한 군이 고와 부리되어 군을 먼저 입고 고를 입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구은 당시 고보다 짧은 것으로 지금의 속옷과 같은 역할을 했고 이후 길이가 짧은 겉옷으로의 고가 출현하면서 이를 군으로 부르게 되었다. 따라서 이같은 특징을 갖는 중국의 궁고 또는 궁당고는 고구려의 궁고들과 그 양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고구려의 고는 모두 당을 대었지만 끈을 사용하지 않고 재봉으로 여밈새를 처리했으며 바지폭은 다양했다.
중국은 상시대부터 춘추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통이 매우 좁은 바지를 주로 입었다. 진 한시대에 오면 곡거심의 아래에 비교적 통이 넓은 바지를 입었는데 무릎 밑에서 동여매었다. 양진남북조시대에 오면 포 안에 폭이 넓은 긴길이의 바지를 땅에 끌리게 입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복식에는 이같은 중국 고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의 고는 폭은 크게 넓은 폭과 보통 폭으로 구분되며 길이는 긴 것과 무릎 아래에서 여며지는 것이 있는데 이는 신분을 나타내기보다는 하는 일에 따라 폭과 길이에 변화를 주어 편리성을 도모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서기 6세기까지 계층과 신분에 관계없이 고의 바지부리를 여미었으나 서기 7세기에 오면 여미는 대신 선을 두르는 양식이 출현했다.
3국 이전 우리나라에서는 여자만 군을 입었으나, 남자는 군을 입은 적이 없다.
중국에서 군은 여자만 입었던 옷이 아니라 남녀 모두 입었던 것이며, 외출할 때 입었던 것이 아니라 집안에서 통처럼 만들어 입은 것이었다. 즉 군은 본래 옷에 속했다기 보다 발과 같이 옷에 따른 부속물이었으나 점차 옷으로 바뀌고 상이라는 독자적인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남자와 달리 여자들이 입은 여러폭으로 만든 군을 협의라고 불렀다.
중국에서는 후한 말에서 삼국 때에 남녀 모두 상과 함께 군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의 군은 속옷으로의 협의라기보다 외출복으로서의 군으로 바뀐 것이고, 남자의 옷에서는 고가 군을 대치하기 시작했다.
첫째, 군은 도련까지 주름이 잡힌 군과 허리에만 주름이 잡힌 군으로 구분된다. 도련까지 주름에 잡힌 군은 그 주름의 폭이 큰 것과 좁은 것이 있는데, 덕흥리 고분벽화 우교차도의 내용과 수산리 고분벽화 시녀도의 내용으로 보아 신분에 따른 구분은 아닌 것 같다. 허리에만 주름이 잡힌 군은 큰 폭과 작은 폭이 있는데, 일하는 여자들은 주로 작은 폭의 군을 입었다.
둘째, 군을 입은 모든 여자들은 군 안에 바지부리가 여며진 고를 입고있다. 다라서 고구려의 여자들은 겉오스로 반드시 군을 입고 속에 고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유나 포와 함께 입은 군은 모두 도련에 선이 둘려져 있는데, 유에 입은 군의 선은 가늘고 포에 입은 군의 선은 이보다 넓다.
넷째, 수산리 고분벽화의 부인도에 보이는 주인공이 입은 큰 폭으로 줄므잡힌 군의 주름이 여러 색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 군보다 화려한 못브인데 이는 신분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상대와 주대의 남자들은 짧은 길이의 포와 유에 군을 입었다. 전국시대에 오면 조와 중산국이 호복을 받아들여 착수의 짧은 유에 주름이 없는 보통폭의 군을 입었다. 또한 겉옷의 길이를 길게 하고 폭을 넓힌 곡거심의 안에 큰 폭의 주름진 군을 입기도 했다. 진한대에 오면서 나자들은 포 안에 주름이 없는 보통 폭의 군을 입었다. 양진남북조시대에 오면 지배계층 여자들은 도련이 삼각형으로 중헙된 잡거수발여복 아래 군을 입었다. 또한 가슴 아래에서 대금을 한 넓은 소매의 유 아래에 큰 폭의 주름진 군을 입고 그 위에 다시 길이가 짧고 굴곡진 도련의 군을 이중으로 입고그 위에 속대를 했다. 일반 평민들은 남녀 모두 대금과 착수의 유와 보통 폭의 군을 입고 가슴 아래에서 길게 솓대를 늘어뜨리는 복식이 유행했다. 수당시대에 오면 짧은 웃옷에 비교적 폭이 좁거나 넓은 치마를 입었다. 북방지역에서는 현재까지의 출토된 자료를 보면, 중국의 동한시대에 속하는 신강 민풍현 니아 고묘에서 폭이 넓고 주름이 없는 군이 있다. 그 착용 방법에서 고구려와 중국은 모두 포와 유의 아래에 군을 입었는데 중국은 유의 길이가 매우 짧고 군의 도련에 선을 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고구려는 유의 길이가 길며 모든 군의 도련에 반드시 선을 둘렀다. 북방지역에서는 여자들도 주로 고를 입었으나 고구려의 여자들은 군 안에 바드시 고를 입는등, 고와 함께 군을 복식의 주요 양식으로 하고 있었다.
문헌자료에 의하면 고대한국의 시은 리와 화로 나눌 수 있고, 화는 다시 목이 긴 화와 목이 짧은 둘로 나눌수 있으며, 이와 관련된 것으로 무,무유,화대 등이 있다.
고구려의 귀족과 대신들 및 이란 남자들은 모두 '혁리'를 신었다.
무는 발을 감싸는 것으로 머저 무를 신고 그 위에 신을 신었음을 알 수 있다.
목이 높을 뿐만 아니라 바닥에서 목까지 하나로 이어져 있어 리나 화와 다르다. 이것이 무유가 아닌가 생각된다.
전국시대에서 당대까지 리가 기본 양식이었으며, 앞이 높게 들리고 폭이 넓은 규 등을 의례의 양식으로 하였다.
우리 리는 앞과 뒤가 수평을 이루는 양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을 뿐 중국의 규와 같은 변형을추구하지 않았다....우리 민족은 변형을 가하지 않고 얇은 금동판 등으로 덧씌우고 그 위에 장식을 달아 의레용으로 삼았다고 하겠다.
북방민족은 목이 짧은 화를 신었고, 이 화에느 발목에서 정강이 중간까지 얇은 가죽이나 천 등을 이어 붙였다.
당 태종 정관 연간에 목이 긴 화로 바뀌었다.
고구려에는 목이 짧은 화만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도 일반화된 것이 아니라 묘주 등 특수계층만 신고 있다. 즉 고구려 평양지역 쌍영총 묘주 앞에 화대가 있는 화가 높여 있고, 집안지역의 매산리 사신총에 그 비슷한 모양의 신이 있을 뿌이다. 또한 집안지역의 무용총에 묘주는 화를 신고 있다.
『삼국사기』잡지의 고구려악조에서는 둥가 지은 『통전』의 자료를 인용하여 악공과 부인의 신을 설명하고 있다.... 고구려의 음악은 당 무태후, 즉 측천무후 때 25곡이 연주되었으나 현종 때는 거의 없어지고 한 곡만이 남았을 뿐이며, 복식 또한 고구려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고 했다. 고구려의 악공이 적피화를, 무인이 오피화를 시었다고 '화'를 기재한 것으로 보아 이들이 신은 것은 못이 낮은 화였다. 여기서 두우가 참고한 고구려 복식은 고유한 복식이 아니라 상당 부분 당의 것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고구려가 철갑옷을 입은 시점은 건국 이전까지 소급될 수 있을 것이고,...
고조선시대에는 병사들만 입던 철제 찰갑옷이 여러 나라 시대로 오면서 전쟁이 빈번해지자 말에게도 입혀진 것으로...
당군은 안시성을 공략할무렵 고연수, 고혜진등으로 부터 얻은 전리품중에...명광 갑옷 1만이란 기록이 있는데 갑옷의 생산 규모가 매우 컷음을 알수 있다.
동한시대에 속하는 산동성 기나현에서 출토된 화상석묘 전실남벽에 갑개가 새겨져 있어 어린갑의 갑옷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갑개는 어깨에서 팔꿈치까지 한 벌로 되어 있고 가슴을 보호하는 부분은 어린 갑편으로 연결했다. 즉 이 갑옷은 윗부분과 어깨부분이 철갑으로 되어 있고 가슴부분만 아래가 넓은 원형의 어린갑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는 진대의 갑옷을 그대로 계승한 모습이다. 동한에서 삼국시대로 바뀌면서 철개의 제작이 활발해지는데, 이 철개를 강개라고도 한다. 이 철갑옷은 양진兩晋시대에 주로 사영되면 용수개로 생각된다.
용수개는 동한의 개갑에서 발전한 것으로, 아랫부분이 넓은 원형인 탈을 어린처럼 연결하여 원용모양으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또 앞과 뒤가 이어져 있고 어깨부분에 어깨를 보호하는 좁고 기다란 소매가 있어 용수개라고 불린다. 삼국양진남북조시대에는 전쟁의 확대와 함께 북방의 소수민족들이 대거 남하하게 되는데, 황하 유역의 한족과 섞여 거주하면서 이들의 생활습속은 점차 융합된다. 이에 따라 한족은 좁고 긴 소매의 짧은 웃옷과 허리띠가 있는 호복을 입기 시작했다. 용수개도 이 같은 호복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이다.이러한 용수개는 서기 280년 서진이 전국을 통일한 뒤 개갑의 주요 양식이었음이 서진묘에서 출토된 도용을 통해 확인된다. 동진 에서도 용수개는 크게 유행한 갑제였는데, 넓은 자앙형의 갑편을 연결한 모습도 보인다 이러한 자료를 근거로 볼 떼, 용수개 갑편의 양식은 아랫부분이 넓은 원형인 찰갑편과 넓은 장방형의 찰갑편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고 하겠다.
용수개를 입은 무사는...귀가 덮힌 투구를 썼다. 이 투구들은 주물쇠투구이다. 북주의 병사가 쓴 투구는 가죽투구이다.
남북조시대에 오면 기병이 군대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갑옷은 더욱 발전하여 육ㄱ바과 배갑으로 이루어진 양당개가 생산되었다. 출토된 도용과 벽화에서 이 시대 기병들이 철양당을 입고 투구를 썼음을 알 수 있다.
수 대업 11년의 무덤인 서안 백곡원 유세공묘에서 출토된 무사용은 목둘에서부터어깨까지 개갑으로 연결된 보다 발전된 양당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이 갑옷의 모습은 지금의 고차 부근에 위치했던 서역의 귀자국의 병사들이 입었던 갑옷의 특징인 가슴 좌우부분에 어린상 타원형의 호심원을 짜 넣은 모습은 그대로 모방 하고 있어, 이 당시 중국의 갑옷은 서역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경우 지금까지출토된 단갑으로 가장 이른 연대의 것은 전국 말기에서 서한 초기에 속하는, 운남성 강천(江川) 이가산(李家山)묘에서 출토된 청동으로 마든 단갑이다. 이 단갑은 앞가슴과 등부분은 큰 통판으로 연결되었고 팔갑옷과 정갱이갑옷의 경우는 전체가 긴 통으로 되어 있어 활동성이 고려되지 않은 매우 미숙한 모습이다.
말갑옷의 경우 4세기 중엽에속하는 안악3호분과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해당하는 약수리 벽화무덤에 보이는 개마의 경우 가죽갑옷과 철갑옷이 함께 나타난다. 안악3호 무덤의 대행렬도에는 철갑옷 대오와 가죽갑옷 대오가 따로 분리되어 행진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가죽갑옷의 행렬은 적은 수이며 5세기경에 해당하는 벽화에는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후대의 고구려 군대의 개마들은 모두 철갑으로 무장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함양 저장만 북주묘(서기 6세기경)의 개마기용과 서안 草廣坡1호묘(서기 5세기경)의 개마기용 및 북조시대의 서기 5세기~6세기 경에 속하는 하남 등현 채증화전도상에서 보이는 개마들은 모두 말투구가 씌워져 있지 않다. 북방지역의 서위 대통 5년(서기 539년)에 그려진 돈황285굴 서위벽화에 보이는 한 개마의 경우도 말투구가 씌워지지 않았다. 고구려의 말투구는 아래턱이 자유르럽게 된 금속판으로 만들어졌는데 귀막이와 볼포호용 구조면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북방지역의 돈황285굴 서위 벽화에보이는 말투구는 말의 앞부분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철갑으로 감싸고 있어 비교족 자유롭지 않게 보이고 고구려의 말투구에서 보이는 귀막이와 볼보용 구조면이 없다. 맥적산 맥찰127굴 북위 벽화(서기 5세기~6세기경)에 보이는 말투구는 전체를 철파으로 씌웠는데 입이나 코부분이 자유롭지 못하게 보이며 역시 귀막이와 볼보호용 구조면이 없다.
고구려의 말갑옷은 서기 4세기경의 고분들인 태성리1호 고분, 약수리 고분벽화에 그려진 개마들은 아래부분이 쇠패쪽을 연결한 찰갑오슬 말발굽만 보일 정도로 길게 드리웠고 말잔등에는 갑옷을 덧씌웠다. 맥적산 맥찰127굴 북위벽화에 보이는 개마는 가죽갑옷에 철편을 드문드문 박아놓은 것이다. 함양 저장만 부주묘 개마기용은 6각형의 찰갑을 연결하여 만든 것으로 말의 몸만을 가리우고 있어 말의 다리부분은 그대로 드러난다. 서안 초장파1호묘 개마기용은 말의 몸부분만을 갑옷을 씌우고 말머리와 말의 목부분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고조선에서는 소매가 큰 옷을 입었으며,...
고구려ㅡ거란
"(예 사람들은) 남녀 모두 곡령을 입는다" <<후한서>> <동이열전>
"(예 사람들은) 남녀 모두 곡령을 입는데, 남자는 넓이가 여러 촌(寸)되는 은꼿[銀花]을 옷에 꿰메어 장시한다"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곡령은 여밈새를 가리키기도 하고 웃옷의 명칭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위의 기록에서는 웃옷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그들의 공공모임에서 모두 물감을 들인 오색실로 섞어 수놓아 짠 사직물옷에 금과 은으로 장식했다" <<후한서>> <동이열전>
"동이는 거의 모두 토착민으로서,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기를 좋아하고, 변弁을 쓰거나 금錦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 <<후한서>> <동이열전>
변은 <<석명>> <석수식>에서 두 손을 서로 마주칠 때와 같은 모양이라고 설명했는데, 아마도 고깔 모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수삼衫,유襦,삼통수,삼용부는 고구려 웃옷의 명칭이며, 복삼은 백제 웃옷의 명칭이고, 위해와 장유襦는 신라 웃옷의 명칭이며, 곡령은 예 웃옷의 명칭이다. 신라의 의복은 고구려나 백제와 같고, 여자는 장유를 입었다 고 하므로, 위해는 유襦 로 분류된다. 곡령은 예濊에서 유襦를 가리킨 이름이었다. 따라서 이를 정리하면 고대문헌(후한서에서~신당서까지:옮긴이가 추가한것임)에서 보이는 웃옷은 크게 삼과 유襦로 구분된다.
이렇게 고구려의 남자들은 웃옷으로 삼을 입고, 여자들은 웃옷으로 유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 삼은 부인복으로, 진시황 원년에 명을 내려 궁인들에게 모두 입게 했는데, 반의半衣로 시중들기 편리하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삼을 반의로 설명하는 것에서, 길이가 포보다 짧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유는 단의短衣라고 하며,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길이의 옷이라고도 설명하고 있어, 유와 삼은 긴 웃옷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진시황의 중국통일 이전 중국에서 삼은 여자의 웃옷이었으나 진시황 원년부터 남자들도 입게 되었다. 중국과 달리 고구려(책에는 고대 한국이라고 인쇄되어있었느나 옮긴이가 임으로 바꾼 것임)에서 삼은 남자의 웃옷을, 유는 여자의 웃옷을 가리켰다.
포袍는 중국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하기 전에는 집안에서 입는 간편한 옷으로 관계官階를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한나라에 심의제가 정착 되었을 때 심의를 입지 못하던 하급관리들이 심의 대신 포를 입기 시작하면서 복제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부여 사람들은) 국내에 있을 때의 의복은 무늬가 없는 것을 숭상했으며, 무늬 없는 포布로 만든 큰 소매의 포袍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부여전'
백白은 일반적으로 흰색으로 번역하여, 백의는 흰옷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백은 무늬가 없거나 단색이라는 의미도 있으므로 백의는 무늬가 없는 옷 또는 무늬가 있어도 바타생과 같은 계열의 색으로 무늬가 있어 전체적으로는 같은 색으로 보이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고조선(?)시대의 청동기문화층에서 출토된 흙으로 만든 남자 인형들은 모두가 서 있는 형태로 아랫도리가 넓게 퍼져 있거나 긴 길이의 포를 입고 있는 모습인데 (중략) 한韓에서도 북방의 동부여와 마찬가지로 포를 입었다.
고구려의 의복은 부여와는 다른 점이 있으나, 동옥저와 백제, 신라와는 같다고 했는데, 이는 부여가 주로 포를 많이 있었고 고구려 등의 나라들이 포 이외에 삼이나 유를 많이 입었음을 말하는 것이다.(중략)
동부여는 큰 소매의 포를 입었고, 백제의 왕은 큰 소매의 자줏빛 포를 입었으며, 일반 남자의 의복은 대략 고구려와 같고 부인의 의복은 포와 같은데, 소매가 약간 크다고 했다.
웃옷과 겉옷은 크게 삼과 유나 포로 구분되는데 남자들은 삼을 입고, 여자들은 유를 입었으며, 포는 긴 길이와 넓은 소매를 특징으로 하느 겉옷으로 남녀 모두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아래옷인 고(袴,바지)와 군(裙,치마)에 대하여 알아보자. 중국의 문헌자료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귀족과 대신 뿐만 아니라 평민들도 모두 '통이 큰 바지'를 입었고, 부여와 동옥저에서도 고를 입었다.(중략) 궁고는 바로 '통이 큰 바지'이며 당襠 이 있는 고를 말한다. 고대 한국의 고는 모두 당을 대었지만 끈을 사용하지 않고 재봉으로 여밈새를 처리했으며 바지폭은 다양했다. 백제에서는 바지를 곤이라 부르고, 신라에서는 가반이라고 부르는 등 그 명칭이 달랐을 뿐 모두 고구려와 같이 '통이 큰 바지'를 입었다.
한나라 이전부터 중국은 당이 있는 곳이 터지 고를 겉에 입고 그 안에 (치마-옮긴이) 군을 걸쳤지만, 고구려 등이 이 같은 바지를 입지 않고 당으로 막은 바지를 입었다. 고구려에서는 남자들은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 길이가 허리까지 오는 웃옷만을 입었기 때문에 중국의 당이 터진 고를 입을 수 없었다.
사천성 삼성퇴에서 출토된 상商의 청동으로 반든 서 있는 사람의 모양은 좁은 촉의 포 안에 꼭 붙는 좁은 바지를 입고 있다. 바지의 끝 부분에는 두 줄로 된 무늬 있는 좁은 선을 둘렀다. 이후 춘추 중기로 추정되는 산서성 후마 상마촌 13호 유적에서 나온 인물 도범은 둘다 반라 무늬의 긴포 안에 통이 좁은 바지를 입었다. 전국시대로 오며, 서역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조나라 등이 고습(북방계통의 胡服)을 입기도 했다. 진,한시대에 오면 일반 남자들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웃옷 안에 비교적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무릎 밑에서 동여 매었다. 양진남북조시대의 시중드는 사람들이 포 안에 입는 바지는 길이가 길고 폭이 너무 넓어 땅에 끌리게 입었다. 또 통이 넓은 바지를 무릎 아래에서 동여매고 발등을 덮을 정도로 ㄱ;ㅣ길게 입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보면, 중국의 고는 상나라 부터 양진남북조시대에 이르기까지 길이가 길고 폭이 넓은 형태나 통이 좁고 긴 형태가 공존했음을 알수 있다.
삼국 이전 우리나라에서는 여자만 군(치마)을 입었으며, 남자는 군을 입은 적이 없다. 이는 고분 벽화나 문헌자료를 가지고 확인할 수 있다. 군이라는 글자는 중국에서 서한 중기 이후에 나타난다. 중국에서 군은 본래 옷에 따른 부속물에서 점차 옷으로 바뀌고 상裳이라는 독자적인 이름을 갖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동한 말에서 삼국시대에 남녀 모두 상과 함께 군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의 여자의 군은 속옷으로 입던 협의脅衣에서 외출복인 군으로 바뀐 것이고, 남자의 옷은 고가 군을 대치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동수삼과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흰 가죽띠를 하고 누런 가죽신을 신었다...부인은 군과 유를 입었고, 도련과 끝동은 모두 선을 둘렀다." <<주서>> <열전> '고(구)려전'
"부인의 군과 유에 선을 둘렀다." <<북사> <열전> '고(구)려전'
한(삼한)에서도 모든 여자들이 신분의 구별 없이 같은 치마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신이 삼한의 의복제도는 들었으나 염색은 듣지 못했습니다. 다만 꽃무늬는 금해졌고....옛 풍속에 여자의 옷은 무늬 없는 저로 만든 황색치마였는데, 위로는 공족과 귀가에서 아래로는 평민과 처첩에 이르기까지 한 모양이어서 구별이 없습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부인'
첫째로 군은 도련까지 주름이 잡힌 군과 허리에만 주름이 잡힌 군으로 구분된다. 도련까지 주름이 잡힌 군은 그 주름의 폭이 넓은 것과 좁은 것이 있는데, 덕흥히 고분 벽화 우교차도의 내용과 수산리 고분 벽화 시녀도의 내용으로 보아 신분에 따른 구분은 아닌 것 같다. 허리에만 주름이 잡힌 군은 큰 폭과 작은 폭이 있는데, 일하는 여자들은 주로 작은 폭의 군을 입었다. 둘째로 군을 입은 모든 여자들은 군 안에 바지부리가 여며진 고를 입고 있다. (중략)여자들은 겉옷으로 반드시 군을 입고 속에 고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로 유나 포와 함께 입은 군은 모두 도련에 선이 둘려 있는데 유에 입은 군의 선은 가늘고 포에 입은 군의 선은 이보다 넓다. 넷째로 수산리 고분 벽화의 부인도에 보이는, 주인공이 입은 큰 폭으로 주름잡힌 군의 주름이 여러 색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 군보다 화려한 모습으로 신분의 차이를 보여 준다. 그러나 그 양식에서는 신분의 차이가 없었다.
고대 중국에서 남자들도 군을 입었다. 중국의 상 시대와 주시대의 남자들은 짧은 길이의 포와 유의 아래에 군을 입었다. 전국시대에 오면 조와 중산국등이 호복을 받아들여 좁은 소매와 짧은 유에 주름이 없는 보통 폭의 군을 입었다. 또한 겉옷의 길이를 길게 하고 폭을 넓힌 곡거심의 안에 큰 폭의 주름진 군을 입기도 했다. 진,한대에 오면서 남자들은 포 안에 주름이 없는 보통 폭의 군을 입었다. 북방 지역에서 현재까지 출토된 자료를 보면, 중국의 동한시대에 속하는 신강 민풍현 니아 고묘에서 출토된 폭이 넓고 주름이 없는 군이 있다. 그러나 이들 군이 언제부터 그런 형태로 발전했는지 현재로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후에는 주로 고를 입었음이 확인될 뿐이다. (중략) 고대 중국은 유의 길이가 매우 짧고 군의 도련에 선을 두르지 않았다.
고대에는 한민족(?)이나 중국 모두 목이 없는 이履를 신의 기본 양식으로 하였다. 차이가 있다면 중국은 혜鞋와 같이 앞을 높이 들린 모양을 의례로 삼았고, 한민족은 모양을 바꾸지 않고 금이나 은 등으로 장식하는 것을 의례로 삼았다. (중략)고구려의 귀족과 대신들이나 일반 남자들은 모두 누런 가죽으로 만든 이를 신었다. 부여의 지배계급은 '혁답'을 신었다. (중략)한韓에서는 '혁교답' 또는 '혁리' 외에도 '초리'를 신었고, 백제의 왕은 '검은 혁리'를 신었다.,
4세기에서 6세기까지의 고구려 고분 벽화를 보면 고구려 사람들은 신분이나 관직에 관계엇이 이를 신었고 안악 3호분 묘주 부이늬 신만이 붉은색일 뿐 다른 신들은 검은색이거나 흰색이다. 이는 고구려에서 신분이나 관직에 따라 신의 색을 구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중략)한韓의 남부에서 신었다는 '교답'은 어떤 신일까. 가죽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재료의 차이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 이에 정이 달린 장치를 달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의 출토자료나 문헌자료를 정리하면, 전국에서 당나라 까지 이가 기본 양식이고, 앞이 높게 들리고 폭이 놃은 혜등을 의례의 양식으로 하였다. (중략) 고구려(원래는 우리라고 되어 있음) 이는 앞과 뒤가 수평을 이루는 양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을 분 중국의 혜와 같은 변형을 추구하지 않았다. 중국이 모양을 변형시켜 의례용으로 삼은 것고는 달리, 우리 민족은 변형을 시키지 않고 얇은 금동판 등으로 덧씌우고 그 위에 장식을 달아 의례용으로 삼았다고 하겠다.
고구려에서는 목이 긴 화靴는 나타나지 않고, 목이 짧은 화鞾만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도 일반화한 것이 아니라 묘주 등 특수계층만 신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