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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6일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루카 18,1-8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믿음은 맞지만, 무엇을 위해서가 더 중요하다.
오늘 복음은 종말에 관한 이야기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어제 복음은 마지막 때가 노아의 홍수 때나 소돔 땅이 멸망하는 것과 같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지막이 오는 이유는 세상에서 ‘믿음’이 사라져 마치 ‘시체’가 되어버린 곳에 ‘독수리’가 날아드는 꼴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믿음이 사라지면 시체가 되고 그러면 독수리가 모이듯 마지막 때가 올 것입니다.
믿음이 사라지면 종말이 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이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모든 종교가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함을 가르칩니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열렬히 기도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면 그 모든 기도가 다 믿음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과부가 기도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여기에서 ‘올바른 판결을 내리다’로 번역한 ‘에크디케오’의 뜻은 ‘변호하다’, ‘보복하다’,
‘벌하다’, ‘복수하다’란 뜻입니다. 같은 단어가 로마서 12,19절에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복수하다”로 해석했습니다.
‘에크디케오’는 정의를 실현한다는 의미인데, 적대자에게 정의를 실현하는 일은 분명 ‘복수’입니다.
믿음이란 우리 적대자에게 복수를 실현하여 나의 권리를 되찾아달라고 멈추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복수하게 해 달라고 그토록 끊임없이 청해야 하는 대상인 ‘적’은 무엇일까요?
내가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혹은 롯의 아내처럼 세상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은 특별히 ‘교만과 돈’이 이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다른 사람보다 정의롭다고 여겨 타인을 깔보는 바리사이의 기도가 나옵니다.
기도하는데 자기 자신을 들어 높이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돈이 많아서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적, 혹은 원수라 여기는 ‘삼구’(三仇)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구에게 벌을 내려 그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는 믿음이 있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삼구를 모르고 하는 기도는 다른 종교에서 하는 기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사탄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교리서에서 삼구 교리가 사라지게 했기 때문입니다.
영화 ‘엑스마키나’(2015)는 천재 과학자 네이든이 자신의 회사 직원 칼렙을 자기 연구실에 불러 자신이 만든 A.I. 로봇 에이바를 실험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네이든은 칼렙이 애정에 목마르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인공지능 로봇 에이바가 그를 유혹해
탈출을 시도하게 만듭니다.
칼렙은 그것도 모르고 정말 인공지능 로봇의 유혹에 말려듭니다.
어쩌면 자신이 만든 로봇에게 인간인 칼렙이 이용당하여 인간인 자신보다 예쁜 로봇을 더 믿고 더 애정을 두는 것을 보며 즐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일부러 그 로봇에게 유혹당하게 만들고 인간보다 그것을 더 믿게 만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발명입니까?
그러나 칼렙은 네이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천재였습니다.
이미 로봇에게 유혹을 당해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안 네이든은 실험을 마치고 칼렙을 돌려보내려 합니다.
하지만 에이바가 문을 열고 나옵니다.
이미 칼렙이 문이 열리도록 프로그램해 놓은 것입니다.
결국, 간단한 실험으로 시작되었던 이것이 자신이 만든 로봇에게 자신이 칼에 찔려 죽음을 맞게 되는 결말에 이릅니다.
물론 그 로봇은 자신을 도와준 칼렙도 가둬놓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버립니다.
칼렙이 진짜 누가 적인지 모르게 에이바에게 유혹을 당하도록 실험을 했던 네이든의 운명은 결국 죽음이었습니다.
적이 누구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실험은 결국 자신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어쩌면 교회도 지금 이런 실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비자 교리를 몇 달 동안 받아도 내가 누구와 싸우고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다 보면 그 지향이 오히려 싸워야 하는 욕구를 강화하는 것들이 됩니다.
세속적인 종교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교회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어쩌면 네이든처럼 위험한 실험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영화 ‘오블리비언’에서 주인공은 외계인이 자신을 만들고 자신들을 위해 일하도록 한 것을 잊고
오히려 자기 동족인 인간을 학살하는 일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모를 때 기도를 열심히 해도 롯의 아내처럼 소금기둥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삼구 교리에 무관심해진 것은 근래의 일입니다.
로마 교리서를 바탕으로 만든 기존 교리서 ‘천주교 요리문답’에서는 이 교리가 명확히 존재했습니다.
“179문: 영혼의 세 가지 원수는 무엇이뇨?
답: 영혼의 세 가지 원수는 마귀, 세속, 육신 삼구(三仇)니라.”
“230문: 굳셈(견진)의 효험은 무엇이뇨?
답: 굳셈의 효험은 우리의 신력(神力)을 더해 삼구를 용맹이 대적(對敵)하고 치명(致命)까지라도 하게 함이니라.”
견진은 성령을 청하는 성사이고 기도의 목적과도 같습니다.
성령을 얻고 성령으로 삼구와 대적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교리가 명확했던 것입니다.
또 김대건 신부님도 신자들에게 한 마디막 편지에서 이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마음으로 사랑해서 잊지 못할 신자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어려운 시절을 만나 부디 마음을 허실(虛失)하게 먹지 말고, 밤낮으로 주님의 도우심(主佑)을 빌어, 마귀와 세속과 육신의 세 원수(三仇)를 대적하십시오.
박해를 참아 받으며,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여러분의 영혼을 위한 큰일(靈魂大事)을 경영하십시오.”
아빌라의 데레사도 같은 말을 합니다.
“이런 악마들이 우리를 계속 겁에 질리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명예와 재산과 쾌락’(마귀-세속-육신)과 같은 다른 애착을 둠으로써 자신을 겁에 질리게 만드는 탓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혐오해야 할 것들을 사랑하고 갈망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적이 되고 마니까요. …”(「자서전」, 제25장, 21항 ).
돈에 대한 욕심, 육체의 즐거움, 그리고 교만한 마음은 우리가 혐오하고 싸워야 할 적입니다.
그것과 싸우기 위해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것을 모를 때 우리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됩니다.
바티칸에서 나온 『가톨릭교회교리서』도 명확히는 아니지만, 세 원수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초부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세상에 대한 ‘다스림’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다스림으로 실현되었다.
관능적 쾌락, 세상 재물에 대한 탐욕, 반이성적 자기주장 등 이 세 가지의 욕망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인간은 흠 없고 질서 잡힌 존재였다.”(「가톨릭교회교리서」, 377항)
믿음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그 믿음이 그리스도교의 믿음이 되려면
그 기도의 지향이 삼구를 없애는 것이어야 합니다.
기도가 세 원수로부터 자유롭게 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청하는 기도가 되어 세속적인 종교가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교회가 네이든이 칼렙과 에이바에게 당한 것처럼 당하지 않으려면 자아와 삼구의 존재를 명확히 알려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교리서에서 삼구를 빼면 벌어질 일은 정말 기도하는 사람은 많아도 믿음이 없는 세상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서는 안 됩니다.
현재 우리 교회도 위험한 실험을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랑을 통해 주님께서 계시되시듯, 삼구를 통해 사탄이 풀려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16일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18,1-8
임마누엘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 한 가운데, 그리고 내 안에 굳건히 현존하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 하나를 선물로 주십니다.
해도 해도 어려운 것이 기도인 것 같습니다.
때로 열심히 기도하면서도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알쏭달쏭할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기도의 참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그렇게 어떤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남기셨는지를 유심히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오늘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말 마디 그대로, 표면적으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깊이 고민하고 성찰하고 묵상하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적당하게가 아니라 집요하게 졸라대는 과부처럼 하느님이 귀찮을 정도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너무 괴롭고 귀찮아서 청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뉘앙스입니다.
“하느님께서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 18,7-8)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한 군데 있습니다.
대체 무엇을 청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또한 오늘 우리는 무엇을 청하고 있습니까?
기도 지향, 미사 지향의 대부분은 가화만사성, 명문대 합격, 좋은 직장 취직, 좋은 배우자와의 만남, 승승장구, 무병장수... 등등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합니까? 한계와 결핍 투성이인 한 인간 존재가 불완전한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다보니, 자연스레 우리네 인생은 우리가 전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세상 든든했던 그, 영원히 나를 지켜줄 것으로 확신했던 그가 점점 약해지고 작아집니다.
결국 나를 홀로 두고 먼저 떠나갑니다.
유일한 희망이요 미래라고 여겼던 자녀가 갈팡질팡 흔들립니다.
마치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속절없이 세월이 흘러 인생의 끝자락에 서게 되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쇠잔해진 내 모습을 직면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바치는 기도 지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우리네 인생이 그렇게 흘러갑니다.
우리가 나이들어가면서 필연적으로 직면해야 할 엄중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청해야 하겠습니까? 집요한 과부가 청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올바른 판결이었습니다.
우리처럼 너무나 사소하고 자기중심적인 그런 청원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청원 기도가 내 위주의 청을 넘어 주님 마음에 드는 청원 기도로 성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휘황찬란한 대상들,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할 것 같은 우리네 인생도 한 순간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불로장생, 불사불멸을 청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가 집요하게 청해야 하는 기도는 성령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기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동적으로 머무실 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참으로 큰 은총이 있습니다.
매일의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임마누엘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 한 가운데, 그리고 내 안에 굳건히 현존하신다는 의식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결핍과 모순 투성이인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우리 신앙 여정의 충실한 동반자이신 성모님께서
항상 나를 인도하게 계신다는 의식 속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강론>
(2024. 11. 16. 토)(루카 18,1-8)
<신앙생활은 하느님 뜻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1-8)”
1)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의 가르침은, “세속에서는 끈질기게 졸라야만 마지못해 들어 주는 일이 많은데,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미적거리시는 분이 아니고, 지체 없이 들어 주시는 분이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6,8).
이 말씀에서 ‘알고 계신다.’는 ‘알고 계시고, 주신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는 분이고, 그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기도’는, 내가 원하는 그것을 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그것을 잘 받을 준비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그것’과 하느님께서 주시는 ‘그것’이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습니다.
또 하느님께서 주시는 ‘그것’을 내가 싫어할 수도 있고, 그래서 조금도 받고 싶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점들이 ‘기도의 어려움’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바치신 기도와 성모님의 응답은 모든 기도의 모범이 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2) 기도를 할 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고 느끼거나, 하느님께서 침묵을 지키시면서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드러내지 않으신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만 한다면, 그 뜻이 내 뜻과 다르다고 해도 순종하면 되는데, 아예 그 뜻을 모른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나는 내가 올바른 것을 청하고 있다고 확신하는데, 즉 내 기도의 지향이 올바르다고 확신하는데, 아무런 응답을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는 내 기도의 지향이 올바른지, 잘못된 것인지는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이런저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하나입니다.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끈질기게 기다리는 것.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니까 기도하고,
내 기도의 지향이 올바른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우니까 기도합니다.
이 말은, 말장난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마음속까지 살펴보시는 분께서는 이러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 8,25-27).”
이 말은,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 도와주신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도움을 잘 받는 방법도 ‘기도’입니다.
3) “하느님은 미적거리시지 않고, 지체 없이 들어 주시는 분이다.” 라는 말씀에 대해서도, “그것을 실감하기가 어렵다.
응답이 없거나 너무 오래 걸린다고 생각될 때가
많다.” 라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다릅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만, 또는 자기 편 사람들만 생각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인류 전체를, 또 우주 전체를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시간’에서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가
바로 ‘나에게(우리에게) 가장 좋은 때’이고,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는 때입니다.
그 ‘때’는, ‘지금’일 수도 있고, ‘조금 뒤’일 수도 있고, ‘먼 훗날’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때’를 모릅니다.
모르니까 기도하면서 잘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1절의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라는 말이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기도하고 있다면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끈질기게 기도하다 보면,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시간을 깨달아 알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그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