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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물과피와성령(water and blood and the Holy Spirit) 원문보기 글쓴이: 새언약
시한부종말론을 부추기는 한국교회(2)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살후2:2)
시한부종말론을 부추기는 주장은 이단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정통교회 목사들도 자주 사용하는 단골 메뉴중에 하나이다. 임박한 종말론을 강조하면 교회의 충성을 강요하기에 쉽기 때문이다. 물론 일부 목사이고 일부 교회이겠지만, 이런 잘못된 종말론을 가르치는 곳이 있기 때문에, 이단들의 시한부종말론이 교인들을 미혹하기에 쉬워진다. 만약 건전한 성경관과 종말론을 교회에서 가르쳤다면 이단들은 한국교회에 발을 딛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인류의 역사를 구약 4000년, 신약 2000년으로 보는 세대주의적인 관점의 종말론에 따르면, 6000년이 끝나는 2000년에 예수가 재림하여야 한다. 실제로 서기 2000년에 소위 Y2K라는 컴퓨터 오류의 재앙이 있을 것이라는 종말론이 성행하였던 적이 있었다. 또 지금도 가장 많이 남용되는 시한부종말론은 666을 베리칩으로 해석하는 주장으로서 곧 국가에서 베리칩을 강제로 받게하는 때가 곧 임박한 것처럼 주장한다. 초대형교회 J 목사, 너무 바뻐서 초청예약도 어렵다는 유명한 부흥사 J목사, 성경을 목사들에게 가르쳐 왔다는 E 단체의 N 목사등을 포함하며, J 장로교회의 N 목사, 미주 LA의 L 목사, J 목사등...., 그리고 유튜브를 보면 이런 설교동영상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한국교회에 성행하는 시한부종말론의 유형을 살펴보면 다음 4가지가 있다.
1) 1948년 이스라엘 독립을 무화과나무로 비유하고 한세대 안에 종말이 온다는 시한부종말론
2) 인류의 역사를 6000년으로 보고, 2000년 이후부터 종말이 시작된다는 세대주의 종말론
3) 구약의 절기를 인류역사의 시간표로 해석하여, 가을절기에 예수가 재림한다는 시한부종말론
4) 666과 베리칩에 대한 시한부종말론
5) 직통계시에 의한 시한부종말론 : 직통계시는 더 이상 없다. 특히 성경과 다른 계시를 인정할 어떤 이유도 없다. 5번은 분별하기에 어렵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이런 시한부종말론에 미혹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은 한국교회가 성경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한다.
그렇다면 5번을 제외한 4가지의 종말론에 대해서 살펴보자
1) 1948년 이스라엘 독립을 무화과나무로 비유하고 한세대 안에 종말이 온다는 시한부종말론
이미 전에 올렸던 글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지지하는 몇몇 이단들은 마태복음 24장의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 독립 1948년으로 해석하여, 한 세대가 지나기 전에 종말이 온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이단에게만 국한된 주장이 아니며, 적지 않은 정통교회의 목사들도 이와 같은 주장을 해왔다.
유대교 랍비 가정에서 태어난 키이스 인트레이터의 “그날이 속히 오리라”라는 책의 첫머리에 KIBI 대표인 온누리교회 송만석 장로는 마24:32-33 성경구절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로 추천의 글을 시작한다. 특히 O 교회는 기독교의 신학을 대체신학이라고 표현하는 세대주의를 주장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입니다. 전세계에 흩어졌던 유대백성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이스라엘이 독립국가로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지가 연해지고 새 앞이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이 속히 오리라, 송만석의 추천 글)
구원파의 주장도 동일하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비유하시며 말라 죽게한 무화과나무가 다시금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다. 즉 겨울 동안 말라 죽은 것 같은 무화과나무도 여름이 가까이 오면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가 나오듯, 멸망했던 이스라엘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날이 가까이 되면 다시 회복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1,900년이란 긴 환란의 겨울이 지나고 이제 회복될 때가 된 것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이스라엘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한다. 1948년 5월14일 이스라엘은 독립했으며, 1967년 6월 6일간의 제3차 중동전 때 예루살렘을 도로 찾았다. 그리고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은 계속 이스라엘로 돌아오고 있다. 이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적이다. 무화과나무는 이미 싹이 나왔다. 주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를 주님이 다시 살리신 것이다.”(이요한, 하나님께로 가는 길, 영생의 말씀사, 1997년, 228-229쪽)
“이제 여러분 눈에 환하게 보일 것입니다. 왜 지금 세상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그렇게 말썽이 많습니까? 그 나라는 1948년에 독립했습니다. UN에 가입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 나라에 대해서 그렇게 말이 많습니까? 성경 속에 기록되어 있는 선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민족으로 말미암아 세계 역사가 흘러가고 모든 일들이 이루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의 복구,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된다는 것은 바로 이 세상이 끝나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증거입니다.”(권신찬, 성경은 사실이다, 기독교복음침례회, 2007년, 125쪽)
특히 구원파는 수십년 전부터 종말이 임박했다고 주장해 왔고, 이요한 목사는 살아서 곧 예수를 영접할 수 있다고 주장해 왔다. 권신찬 목사는 “기차가 종착역에 도착했습니다”라고 말해왔지만, 그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2) 인류의 역사를 6000년으로 보는 세대주의 종말론
17세기 중반, 어셔라고 하는 성공회의 주교가 성경의 연대기를 계산하고 지구는 BC 4004년에 창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즉 지구의 역사가 6000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인들에게도 웃음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황당한 주장이다. 그들은 그러한 주장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6일에 대해서, 하루를 천년으로 비유하여 6천년이라고 해석하여, 일곱째 안식일을 종말로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성경본문은 하루가 천년이라는 내용이 아니며, 주님의 시간적인 개념은 사람이 생각하는 시간적인 개념과 다르다는 의미이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하루를 천년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면, 마찬가지로 천년을 하루로 해석하여야 하지 않는가?
베드로후서 본문을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사 모두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하여 오래 참으신다고 말하고 있다.
3) 구약의 가을절기에 예수가 재림한다는 시한부종말론
특히 몇몇 이단들이 봄절기와 가을 절기로 분리하여 봄절기는 예수님의 초림을 상장하고 가을절기는 예수님의 재림을 상징하는 시간표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재림은 나팔절에 있을 것이라고 하는 자들이 있고, 속죄일이라고 하는 자들도 있으며, 추수를 상징하는 장막절에 재림할 것이라고 주장 하는 이단들도 있다. 안식교에서 첫째 천사의 기별이라고 부르는 윌리엄 밀러라는 자가 다니엘서의 2300 주야를 2300년으로 계산하여 성전 중건 때부터 2300년 후, 1844년 태음력 7월10일 대속죄일에 예수가 오신다고 주장하다가 빗나간 시한부종말론이 되었으며, 이것을 안식교에서 여선지자라고 불리는 엘렌 화잇이라는 여자가 예수님이 조사심판을 위하여 지성소에 들어간 날짜라고 재해석함으로서 안식교가 시작되었다. 2000년이 일곱째 날이고, 가을절기 초막절에 예수가 재림하신다는 주장은 은혜로교회(신옥주)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를 성경적으로 말하면 일곱째 날, 여호와의 날, 그리스도의 날, 주의 날, 그 날, 심판 날, 큰 안식일 날, 나팔절, 속죄일, 희년, 초막절등이 실제 이루어지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 때로서 이때야 말로 하나님의 택하신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이 거룩해지는 시기이다. 즉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신다고 언약하신대로 이루어지는 시기로 전 우주적인 가을(추수 때)철 절기인 나팔절과 속죄일을 지금 지내고 있으며, 앞으로 초막절만 남아있다"(신옥주, 성경과 다른 거짓말, 98쪽)
“그러므로 이제는 정말 더 이상 시간이 없다. 전 우주적인 “대 속죄일”이 지금 지나가고 있는데, 이 대 속죄일에 지난 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예수 이름을 사용하여 지은 죄에서 진리로 돌이키지 아니하고 있다가 대 속죄일이 지나고 나면 회개할 시간도 은혜도 주시지 않는다고 이미 예언되어 있다. 그 때가 오기 전에 깨닫고 돌아서자“(신옥주, 교회 안에 무당, 59쪽)
구약의 절기에 맞추어 예수가 재림하신다는 이러한 종말론을 극단적인 세대주의와 일부 신사도운동 단체들 그리고 최근에는 메시아닉이라고 하는 단체에서도 가르친다. 김주성이라고 하는 목사는 메시아닉 교단을 만들었는데,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또한 여호와의 일곱 절기는 메시야의 인격과 사역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한마디로 여호와의 절기는 전체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다. 봄의 절기는 메시야 초림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를 담고있고, 가을 절기는 메시야 재림에 대한 예언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유월절은 메시야의 죽으심, 무교절은 메시야의 장사되심, 그리고 초실절은 메시야의 부활에 관한 예언이다. 여기까지가 메시야의 초림에 대한 봄절기의 예언인데 그대로 성취되었다. 가을절기로 넘어가서 나팔절은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있게 될 메시야의 재림에 대한 예언이다. 또 대속죄일은 이스라엘의 속죄와 회복에 대한 예언이고 초막절은 메시야 왕국에 대한 예언이다. 아직 가을절기의 예언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데 메시야의 초림이 1세기 초에 봄 절기의 날짜에 맞춰 정확하게 이뤄졌듯이 메시야의 재림도 이제 곧 가을 날짜의 날짜에 맞춰 정확히 진행될 것이다.(토라의 회복, 김주성, 메시아닉, 94-95쪽)
이러한 주장은 김주성목사가 공부했다는 미주 전윤근목사의 히브리신학교의 홈페이지에서도 나타난다.
“여호와(예슈아)의 절기를 크게 ‘봄의 절기’와 ‘가을 절기’로 나눈다. ‘봄의 절기’는 예슈아의 초림의 그림자이다. Passover(Peshach)유월절, Unleavend Bread 무교절, 1st Fruit 초실절, Shavuot(Pentecost 오순절(칠칠절)은 출애굽기 19장에 이스라엘백성이 시내산에서 모세가 아훼하나님으로 부터 토라를 받고 언약을 맺음으로 카할(광야 교회)가 시작되었으며 부리트 하다샤(신약)에서는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강림사건으로 초대교회가 재 탄생(언약의 Renewal)되었다. ‘가을 절기’는 예슈아의 재림의 그림자이다. 앞으로 이뤄질 것을 대비하게 한다.
Rosh Hashanna 나팔절=공중재림, 휴거, Yom Kippure 대속죄일=지상재림, Feast of Tabernacle-Sukkot 초막절=메시아닉 왕국, Simchat Torah=새하늘과 새땅“ (전윤근, 히브리신학교 홈페이지 참고)
이러한 주장은 유대교 출신 목사인 키이스 인트레이터의 “그 날이 속히 오리라”라는 책에도 나타난다. 즉 일부의 견해가 아니라, 메시아닉 운동과 극단적세대주의의 보편적인 견해라고 말할 수 있다.
“봄의 절기들은 이와 같이 예수님의 초림과 연관이 있었기에 재림의 사건들은 가을의 절기들과 같은 연관성이 있으리라는 것을 쉽게 예축할 수 있다. 초림 시의 사건들이 전통에 따른 봄 절기에 정확하게 일어났다면, 재림의 사건들을 역시 전통에 따른 가을 절기의 정확한 때에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견할 수 있다”(그날이 속히 오리라, 키이스 인트레이터, 두란노, 189쪽)
그러나 성경을 잘 살펴보자.
예수님의 초림이 언제였는가? 예수님의 오신 날을 정확하게 말하면 성탄절이 아니며, 예수님이 언제 이 땅에 오셨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고 있고, 당연히 봄절기가 아니다. 단지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이 유월절이었으며, 부활하신 날은 구약의 절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요일이었다. 기독교가 안식일에서 주일로 예배를 바꾼 것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메시아닉은 봄의 절기가 예수님의 초림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예수님의 초림은 봄절기와 아무 상관이 없으며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예수의 재림은 왜 특정한 절기와 상관이 있다는 추측을 하는가? 지난 2000년 동안 구약의 절기는 계속 2000번을 반복되었을 뿐이다.
예수님이 재림하는 그 날과 때가 나팔절이든지, 대속죄일이든지, 장막절이라는 어떤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가? 오히려 구약의 절기는 그림자이며 예표이고, 예수님이 실체가 되신다고 성경은 말한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4-17)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다시 구약의 절기에 재림을 짜맞추는 종말론을 주장하지 말자. 종말의 때와 시간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며 하나님만이 행하시는 절대주권적인 시간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을 뿐이며, 예수님은 도적과 같이 오신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 피를 인방과 문설주에 바름으로 하나님의 재앙을 Pass-over 시킨 유월절의 어린양의 역할을 성취하기 위하여 유월절에 돌아가셨지만, 재림은 더 이상 죄와 상관이 없으며, 심판을 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7-28)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버지 외에 아무도 모른다고 하는 그 날과 때를 왜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미혹을 하는가?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1:7)
4) 666과 베리칩에 대한 시한부종말론
성경을 잘 살펴보면 “인”(印)에 대해서 두가지 유형이 나타난다.
첫째는 하나님의 인, 하나님의 이름을 이마에 인받은 사람이고, 둘째는 짐승의 표를 이마에 받은 사람이다. 성경은 “카라그마”(표)와 “습흐라기스”(인)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으나 그 구별은 거의 없으며, 모두 “인, 도장, 표”를 뜻하는 동의어이다. 그런데 그 두 단어를 구체적으로는 살펴보면, “카라그마”(표)라는 단어는 “노예에게 표시하는 낙인”이라는 좋지 않은 의미를 갖고 있고, “습흐라기스”(인)는 “도용을 방지하기 위한 표식, 봉인”이라는 좋은 의미의 뜻을 갖고 있다. 하나님의 인에 대해서는 “습흐라기스”라는 단어가 주로 사용되었고, 짐승의 표에 대해서는 “카라그마”라는 단어가 주로 사용되어 있다.
이러한 용어가 나타난 유래가 무엇일까?
유대인들은 원래 유목민이었으며, 기르는 가축을 구별하기 위하여 소유자의 상징적인 마크를 낙인했다. 그것은 가축들의 소유자를 구별하기 위함이다. 즉 인침이라는 것에 대해서,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소유, 짐승의 인을 받은 사람은 그 소유를 의미하는 상징적인 표현임을 알 수 있다.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신 6:8)
유대인들은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양피지에 기록하여 손목과 이마에 표로 붙이고 다녔다. 그것을 ‘경문갑’이라고 불렀는데, 외식적인 유대인의 풍습이다. 과연 성경구절을 이마나 손에 붙이고 다니면 구원을 받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성경구절이 실제적으로 삶에 적용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지, 이마나 손에 달고 다니는 것이 구원의 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마와 손목의 이 표시가 곧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는 표라고 이해하였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을 받았다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 혹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이며, 하나님의 소유라는 의미로써 성령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즉 “짐승의 인을 받았다는 것”도 사단의 소유로서 사단의 영, 미혹의 영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아래 성경은 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인과 짐승의 인으로 구별되는 구절들이다.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 (계 7:3-4)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 (계 9: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니” (계 20: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계 22:4)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계 14:1)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으면 이마에 예수 혹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실제로 낙인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위 구절들이 실제 이마에 이름을 쓴 것으로 해석이 되거나, 이마에 낙인이나 도장을 받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면, 그 사람은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러한 표현은 성령의 보증을 인치심, 즉 하나님의 소유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상징적인 표현을 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면 아래 이마와 손에 받는 짐승의 표는 실제로 받는 표로 해석이 될까?
“또 다른 천사 곧 세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계 14:9)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계 13:16-17)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계 17:5)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계 19:20)
만약 이마에 이름에 기록되었다는 것과 짐승의 표를 받은 것을 베리칩이나 바코드라고 문자적인 해석을 하여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령의 인과 동일한 원리를 적용시켜서 하나님의 인을 받은 자녀도 어떤 베리칩이나 바코드를 이마에 받는 것이라고 해석하여야만 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소유나 소속”을 의미하는 ‘표’라는 단어를 현 시대의 베리칩이나 바코드라는 것으로 해석하는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과연 사도요한이 2000년 후의 현대과학을 미리 알고 일곱교회에 이런 편지를 썼다고 생각이 드는가?
특히 이러한 해석은 구원론에서 심각한 문제점을 나타나게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나 단체가 짐승의 인을 받는다는 것을 실제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어떤 베리칩이나 바코드같은 것으로 해석한다면...., 동일한 원칙으로 하나님의 인을 받았다는 것도 어떤 물질이나 형식적인 표라고 해석하여야만 된다. 또한 성령의 인치심이 “믿음에 의한 성령의 보장”을 뜻한다고 해석이 된다면, 짐승의 표도 마귀의 영을 받는 자들을 의미하며 역시 짐승을 숭배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된다.
현재 베리칩의 발달은 고가의 애완견이나 치매에 걸린 노인들의 행방을 추적하기 위한 장치로까지 사용되고 있으며, 최근에 성범죄나 범죄성이 위험한 사람들의 행방을 추적하기 위한 시도로도 사용될 계획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중대하고 위험한 질병(예를 들면 심장병, 고혈압등)에 걸린 사람의 생체 상태를 수시로 파악하기 위한 장치로도 사용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오바마 대통령 때에 몸 안에 삽입하는 의료기구를 적용하는 의료보험 법안이 만들어진 것이다. 베리칩이라는 내용은 전혀 없었으며, 의료기구를 1-3급으로 분류하는 법안일 뿐이며, 몸 안에 강제적으로 베리칩을 삽입한다는 내용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의료법은 신앙과 불신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법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몸 안에 의료기구를 삽입하였다고 하여 구원을 잃게 되는가?
불과 십수년 전만 해도 컴퓨터가 666 이라는 견해가 난무했던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구원파를 비롯한 이단들과 극단적 세대주의도 이런 주장을 하였지만, 정통교단의 유명한 대형교회 목사들도 666을 은행 제로시스템이라고 하였고, 매매를 못하게 한다는 내용으로 인하여 바코드라는 주장과 은행카드라고 하는 주장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과연 예수를 믿고 거듭난 사람이 은행카드를 사용하거나 바코드의 물건을 사면 구원을 잃는다고 생각하는가? 그러한 주장은 단순한 개인적인 견해 차이나 실수가 아니라, 구원론에서 심각한 오류를 초래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성경 66권이 말하는 구원과 멸망의 핵심적인 멧세지는 언제나 “신앙과 불신앙”이었다. 어떤 형식이나 물질적인 표를 받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를 믿는 신앙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구원에서 완전한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온전히 구원을 받는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이마나 손에 어떤 표를 받는 결과로 구원을 잃게 된다면.....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의 효력과 권세를 불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 되어진다.
물질적인 표와 아무 상관없이, 예수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를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그것이 복음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이미 구원을 보장받는다. 성경이 ‘짐승의 인’에 대해서 경고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짐승을 숭배하면 안된다는 것이며, 오직 예수 십자가의 보혈만이 구원의 핵심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 10:28-29)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치매가 걸려서 아무 곳이나 가기 때문에 행방을 찾을 수 없는 기독교 노인에게 행방을 찾을 수 있는 칩을 내장하면 구원을 잃는가? 심각한 급성 심장질환을 알기 위하여 응급신호를 보내는 칩을 몸에 내장한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잃는가?
그리고 현재 어느 국가에서 물건을 구매할 때에 몸 안에 삽입한 베리칩을 통하여 결제를 하는 곳이 존재하는가? 또 국민들에게 이러한 베리칩을 강제로 삽입할 것을 강요한 국가가 있는가?
물질 자체는 선하고 악한 것이 없다. 예를 들어 칼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유익하기도 하고 범죄에 사용하기도 하는 것이며, 칼을 가졌다고 하여 무조건 범죄인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표나 물질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는 이러한 주장은 성경을 헛된 무용지물로 만들고, 예수 십자가 죽음을 헛된 것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므로 이단적인 주장으로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엡 4:30)
사도요한이 과연 그런 뜻으로 계시록을 기록하였는지 생각을 하여 보자.
사도요한을 비롯한 사도들은 성경을 통하여 줄곧 짐승, 곧 사단을 경배하지 말고 예수를 믿으라는 뜻을 전하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에는 로마 황제를 하나님의 아들로 숭배하는 강제법령이 있었다고 한다.
과연 AD 90년 경에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2000년 후에 있게 될 베리칩을 염두에 두고 계시록을 썼다고 생각이 되는가? 만약 그런 가정이 사실이라면, 지나간 교회사 2000년은 베리칩과 아무 상관이 없었으므로 2000년 동안은 계시록의 666에 대한 구절이 적용되지 않았다.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이니라” (계 13:16-18)
히브리인들은 그 언어의 문자를 숫자로 표시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실제 예를 들면 다이스만이라는 학자는 “나는 숫자가 545인 여자를 사랑합니다”라는 폼페이벽의 낙서가 발견되었다(다이스만, Light from the Ancient East). 이것을 감마트리아(암호표기법, gamatria)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라는 구절은 무엇을 뜻할까? 본문은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 성도들에게는 경제적인 제재가 가해질 것을 뜻한다고 성경학자들은 해석한다(Johnson, Mounce). 실제로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은 로마정부에게 재산을 몰수당하거나 그 산업을 빼앗겼으며, 또한 한때 시장에서 기독교인들을 범죄인으로 간주하여 물건을 팔 수도 없고, 팔지도 않았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히 10:34)
혹간은 로마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주화를 뜻한다고 해석하기도 하였고, 물건을 판매하기 위하여 로마로부터 받는 허가증을 말한다고 해석한다.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매매를 할 수 없다”는 의미로 본다면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고 보여진다.
666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것을 자세하게 살펴보자
-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성경은 666에 대해서 짐승의 수, 이름의 수라고 말하며, 그것이 곧 사람의 수라고 말한다. 즉 감마트리아(암호표기법)를 뜻한다. 666을 베리칩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짐승의 수이고 이름의 수라는 것에 대해서 설명을 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 표가 짐승의 이름이고 그 이름의 수라는 내용에 대해서 (1) 어떤 사람을 가르키는 숫자라는 견해 (2)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숫자라는 견해의 두가지가 있다.
가장 보편적인 견해는 (1)번의 견해로서 ‘로마제국’을 뜻한다는 견해와 ‘네로황제’를 뜻한다고 보며, 일차적으로 이 견해는 분명히 옳다.
네로황제라는 히브리어 음역(네론 카이사르)을 모두 합하면 그 숫자가 666 이 된다. 또 네로를 라틴어로 표시하면 (NERON) 그 숫자의 합이 616 이 되는데, 어떤 사본에는 616 으로 기록된 구절도 발견되어지기 때문에 이 주장이 가장 신뢰성을 갖고 있다.
권성수교수의 요한계시록 291쪽을 보면, 네로는 AD68년에 자살했으나 그가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로마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고, 심지어 네로가 부활하여 다시 올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으며, 심지어 AD 88년에는 가짜 네로가 나타난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사도요한이 계시록을 쓸 당시에 소아시아 지역에는 에베소교회와 서머나교회등에서는 로마 황제 숭배를 강요하는 일이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과거적이며 문자적인 해석만으로 국한시킬 수 없기 때문에 (2)번의 경우로 적용시켜 상징적인 개념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예를 들면 완전한 숫자 7에서 하나가 모자라는 6이라는 숫자를 셋을 나열함으로서 짐승의 숫자로 표시하려는 의도라고 해석하는 견해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이름을 합산하면 888이 되기 때문이며 사도요한은 이러한 생각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666에 대해서 오히려 너무 많은 해석적인 견해들이 있어서 혼란을 가중시켜 왔다고 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완전수인 7의 기준에서 6은 하나가 모자라는 불완전한 수로 이 불완전한 숫자를 고의적으로 셋을 반복한 것이라는 견해로서 이것 역시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는 견해 중에 하나이다. 사람이 창조된 것이 여섯째 날이며 하나님의 안식은 일곱째날이었다는 점과, 예수라는 이름을 합하면 888 이 된다는 것도 유력한 증거이다.
더욱이 666을 받는 사람들과 그 상황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666 표를 받고 짐승에게 경배하는 자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자들로서 생명록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 13:8)
만약 이 짐승의 표가 베리칩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베리칩을 받지 않는 사람을 모두 죽여야만 성경적인 내용이 된다. 성경은 우상을 경배하지 않는 자는 모두 죽이고,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다 짐승의 표를 받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이 현실적으로 어느 국가에서든지 일어난 적이 있었으며, 앞으로 이런 일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베리칩이 은행카드라고 목소리를 높혀서 주장했던 사람들은 생각하여 보라. 그런 주장을 했던 사람들은 지금 은행카드가 없는가? 그리고 지금 은행카드 발급을 거부하면 죽임을 당했는가? 모든 사람들이 바코드있는 물건을 구입하고 있지만, 바코드 있는 물건을 구입하면 죽임을 당했는가? 지금 모든 사람들이 컴퓨터를 실생활에서 사용하고 있지만, 컴퓨터 사용을 거부하면 죽임을 당했는가?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계 13:15)
중요한 점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이 숫자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숫자로서, 단순히 물질적이거나 외형적인 숫자로 해석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성도가 어떤 표나 기호를 받는다고 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며, 짐승의 소유가 된다는 주장은 비논리적이며 비성경적인 주장이 되기 때문이다.
또 최근에는 주님이 자신에게 나타나 계시를 하셨으며, 한반도의 전쟁 날짜를 알려 주었다고 하거나, 재림의 시간을 깨달았다고 하는 자들이 자주 나타난다. 이러한 자들은 종교를 사칭한 사기꾼으로 생각하면 옳다. 무엇보다도 언제 오실지 알 수가 없다고 기록된 성경과 전혀 다른 주장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반복하여 언급하지만, 하나님의 인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문자적인 표나 도장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곧 내면적인 믿음과 성령의 보증을 뜻한다. 즉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들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어느 물질적인 표가 아니라 내면적으로 짐승을 숭배하는 것과 짐승의 영에 사로잡힌 상태를 의미한다. 즉 짐승을 숭배하는 그들의 자녀를 뜻한다. 표는 하나님의 소유인가 사단의 소유인가를 말하는 개념이다.
요한계시록은 사도요한이 소아시아 지방에 있는 일곱교회에게 쓴 편지이다. 그 내용은 무시무시하고 공포가 가득 찬 미래의 심판의 내용이 아니라, 초대교회에 행하여진 고난과 박해에 대해서, 조금만 더 신앙을 지키고 이기면 영광의 구원을 얻게 된다는 희망의 멧세지이다. 사도요한에게 편지를 받은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베리칩이나 은행카드, 바코드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들어 본 적도 없었다는 사실은 666에 대한 극단적세대주의의 주장을 웃을 수도 없는 코메디로 만든다.
요한계시록은 자의적으로나 임의적으로 가감하지 말라고 사도요한이 말하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하여야만 할 것이다. 예수를 믿고 거듭난 성도들에게 이러한 666은 큰 의미를 갖지 않으며, 베리칩으로 해석할 하등의 근거가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 1:13)
-이인규-
첫댓글 요한계시록 강해등을 하며 시한부 종말론을 은연중 퍼트리면 얼마나 좋게요 돈이 저절로 들어오고
목사 신발끈이라도 잡고 천국 가려고 군기가 저절로 들어 성도가 목숨 내놓은 노예처럼 변하는데 그걸 마다할 목사 당연히 없겠죠
이런 설교라도 하는 교회가 낫지 않나요?
교회 생활 5년이 되도 십계명, 재림이 뭔지도 모르는 성도, 다닌지 일년만에 집사 되면서 십일조 강조하는 교회, 목사한테 잘하면 복받는다고 가르치는 교회, 주일성수 록펠러 십일조 강조해서 록펠러가 아주 싱앙적으로 대단한 인물인줄 아는 성도들, 교인이 잘못해도 실족할까바 아무말 안하고 목사 자녀 목회자 될때 양복해주면 복받는 다고 기도해 주는 교회, 교단이 CC가입했다고 알려주니가 목사들이 알면 가만 있겠냐고 지식만 들었다고 싫어 하고 이단에 빠져서 목사한테 반기 든다고 하는 교회, 그런 교회들 보단 그래도 낫다고 봅니다.
교회 실족하면 천국못간다고 합니까?
제대로 거듭나지 않아서 못가는거지.
교인들이 너무 문제가 많아서 물어 보니가 문제 많은거 아는데 본인 만나서 많이 좋아진거라고, 교인들 수준이 떨어져서 그렇다고 말하는 목회자는 뭔지...
누가 그렇게 만든건지는 생각안하고...
그 안에 있을 땐 그래도 참고 예배는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제가 다녔던 교회가 글들에 있는 교회만도 못했네요. 근데 그 문제가 한 교회에 있는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문제라는거지요.
교회에서 제대로 성경을 가르쳤다면 이런 문제가 생길까요?
그리고 어느정도는 맞는 얘기 아닙니까?
성경에 나오는 절기를 빼고 카톨릭에서 만듣 절기를 가르치니가 이단이라고 하는데서 가르치지요.
이젠 교단들이 WCC 가입해 놓고 사랑 이라는 이름으로 성도들 눈을 속이고 배도 하게 한게 더 문제라고 봅니다.
그 죄값은 더 크지 않을까요?
내 눈에 들보부터 보고 회개 해야 할때지, 이단들 뭐라 할 때가 아닌듯 합니다.
아니, 지금은 가 이단인지 모를 때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