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브로마이드에서 늘 청순한 모습으로 자리했던 여배우 올리비아 허시(핫세)가 73세를 일기로 암과의 싸움에서 무릎을 꿇었다. '핫세'는 '허시'를 일본인들이 잘못 옮긴 것이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고전 가운데 영화로 만들어져 가장 많은 사랑을 얻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된 것이 열다섯 살 때인 1968년의 일이다. 영화가 개봉하자마자 그야말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아르헨티나에서 그곳 출신 오페라 가수 아버지와 영국 출신 법률 비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영국 런던에서 자라난 고인이 27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자택에서 사랑하는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고 그녀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성명이 전했다. 성명은 "이 막대한 손실을 안타까이 여기며 우리의 삶과 산업에 미친 올리비아의 지속적인 영향력을 자축하고 있다"고 밝혔다.
줄리엣 역할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얻었으나 몇십 년이 흐른 뒤 파라마운트 영화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열다섯 살 밖에 안 된 나이인데 나체 장면을 촬영하도록 성적으로 유린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녀의 다른 인상적인 배역으로는 TV 미니시리즈 'Jesus of Nazareth'(1977)에서의 예수 어머니 마리아 역할이었다.
고인은 1951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 런던으로 이주, 이탈리아 콘티 아카데미 드라마스쿨에서 공부했다. 이탈리아 거장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이 우연히 허시가 뒷날 역시 대단한 배우로 성장한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와 연극 'The Prime of Miss Joan Brodie'에서 공연하는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제피렐리 감독은 마침 어리면서도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영화로 옮겼을 때 가장 들어맞는 줄리엣을 연기할 여배우를 찾고 있었다. 해서 그는 당시 열여섯의 영국 레너드 위팅과 연기 호흡을 맞춰 보도록 했다.
이 작품은 오스카 작품상과 감독상 후보로 지명됐다. 허시는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로 지명되지 않았는데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퍼니 걸'로 이 상을 수상한 그 해 유달리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같은 해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허시에게는 벼락 출세 길이 열렸다.
수십 년 뒤 위팅과 허시는 파라마운트 영화사를 고소해 소송에 이르렀는데 2019년 먼저 세상을 떠난 제피렐리 감독이 이전에 나체로 찍는 일 없을 것이라고 확약해놓고도 자신들에게 나체 장면을 찍도록 은근히 압력을 넣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자신들이 받은 고통에 대한 위자료와 이 작품이 개봉된 뒤 벌어 들인 수입을 계산해 5억 달러 손해 배상 소송을 청구했다.
그러나 지난해 한 판사는 소송을 기각했는데 문제의 장면이 "충분히 성적이지 않았다"고 봤다.
1977년, 허시는 제피렐리 감독과 힘을 합쳐 'Jesus of Nazareth'란 작품에서 동정녀 마리아 역을 연기했다. 일 년 뒤 애거서 크리스티 원작 '나일강의 죽음'에도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의 연기는 슬래셔 영화 '블랙 크리스마스'(1974)와 TV 영화 'Psycho IV: The Beginning'는 그녀를 스크림 영화 퀸으로 만들어줬다. 나중에는 프리퀄 작품에서 노먼 베이츠의 어머니로 깜짝 연기를 보여줬다. 몇 년 뒤에 그녀는 성우 배우로도 변신, 비디오 게임에 자주 등장했다.
그 뒤 로미오를 연기했던 위팅과 마지막으로 조우한 것이 2015년 영국 영화 '소셜 수사이드'였는데 엉성하게 꾸며진 로미오와 줄리엣 줄거리에 소셜미디어 시대를 투영한 것이었다.
고인은 세 차례 결혼으로 세 자녀를 뒀으며, 딸 인디아 아이슬리도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유족으로는 남편 데이비드 글렌 아이슬리와 자녀 알렉스, 맥스, 인디아, 손자 그레이슨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