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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과 승천
(주의 이름을 부르는 '누림'에 더하여 우리는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의 '동행'이 있어야 합니다.)
창세기 5장 21-25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동행과 승천"이라는 주제로 여러분과 누리고 싶은 이야기는 에녹에 관한 것입니다. 에녹은 아담의 7대손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에녹은 인간이라면 그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절대적 운명인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하였습니다. 참 부럽습니다. 왜 부러울까요? 그야 말할 것도 없이 죽음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겉으로 표현하든 하지 않던 잠재의식 깊은 곳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생명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쾌락과 세상에 집착하는 裏面에는 이런 근원적인 두려움에 대한 投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며 인간은 그 어느 누구라도 피할 수 없는 이 절대적인 죽음을, 어떻게 에녹은 겪지 않고 승천할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창5장 24절은 “ ~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 하였더라”고 증언합니다. 이 에녹의 이야기와 또 한 사람, 육신의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한 엘리야를 보면서, 우리는 보통 그들이 죽지 않고 승천한 그 사실에만 호기심과 관심을 갖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해서 승천할 수 있었는지? 그 이유와 그리고 그 사건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A. 에녹의 승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에녹의 사건은 우리 안에서 이미 일어난 승천과,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살아야 할 승천, 그리고 장차 경험하게 될 승천을 말해 줍니다.
- 첫 번째 ; 우리에게 이미 일어난 승천이란?
이것은 이미 우리가 승천을 경험했고 소유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전문적 용어로 표현하면 ‘終末論的 先取’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음으로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우리가 지각하고 느끼지 못하였더라도 이미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승천했다는 것입니다. 엡2:6은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KJV ; And hath raised us up together, and made us sit together in heavenly places in Christ Jesus) 라고 이미 일어난 우리의 승천에 대해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습니다. 엡1:20에는 그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천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그 예수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 선취된 우리의 영적 위치에 관한 진리를 확실하게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그 이유는 첫째 ; 이 진리가 우리에게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소망을 주기 때문이며, 둘째는 ; 이 진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실된 출발점으로서,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겪게 되는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과 싸우되 이미 결론이 난 승리한 싸움을 싸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처럼 급하게 행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앉은 자리가 어디인지를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부터 영적 싸움을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이깁니다. 때로 낙심과 좌절에 빠져 있을 때 이 진리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 두 번째 ; 우리가 지금 경험해야 할 승천입니다.
에녹이 경험한 그 승천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 주는 진리입니다. 승천은 매일 매일, 순간순간 그리스도인이 누려야 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몸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하지만, 우리의 영은 언제나 승천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영을 승천에 둘 때 우리는 에녹이 죽음을 맛보지 않은 것처럼 우리를 죄와 육신과 사망으로 끌어드리려고 지금도 쉬지않고 역사하고 있는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을 승천에 두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면 즉각 생명의 영의 법이 작동하여서 우리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로마서 8장 1-6절에서 구체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위해서는 우리는 영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영을 따라 행하려면 그 영의 일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영의 일들을 생각하려면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두어야 합니다. 곧 우리의 생각을 영에 붙들어매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둘 때 우리는 생명과 평안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 느낌으로 인해 우리의 생각이 합당하게 영안에 있음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실행은 단 1회적으로 되어서는 안되고 지속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잠깐 실행하는 것도 소중하지만 영적으로 큰 의미는 갖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영은 승천하며 우리는 현재의 사망에서 해방받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을 영에 붙들어매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생각이야말로 사단과의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戰線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방심하면 사단은 우리의 생각 가운데 더러움과 가라지와 온갖 유혹의 것들을 뿌려놓음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생각에 있어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더러운 것과 함께 생각을 수동적 상태(사단의 역사 방식임)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서 우리의 생각을 영에 붙들어 매는 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하루 24시간 중 얼마나 그 영에 붙들어매고 있을까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 스스로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망은 준비하고 판단하고 망설이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사망은 즉각적으로 역사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영의 세계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 세 번째 ; 에녹이 경험한 승천은 장차 우리가 겪게 될 승천을 말해 줍니다.
비록 우리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장차 영광의 부활의 몸을 입는 승천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는 우리에게 다시는 아픔도, 눈물도, 애통함도 없을 것이며 이 우주는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소망을 붙들고 오늘을 인내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B. 에녹이 승천할 수 있었던 비결
우리는 에녹이 어떤 삶을 살았기 때문에 승천할 수 있었는지? 도대체 그의 삶이 다른 사람들과 무엇이 달랐는지? 그 비밀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창세기의 에녹에 관한 짧은 본문만 가지고는 에녹이 승천한 이유와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 단서를 잡기가 어렵습니다. 성경에서 에녹과 관련된 구절을 찾아보면 히브리서 11장과 유다서에 비록 극히 짧지만 중요한 단서가 있습니다.
창세기 본문에서 승천에 대한 단서가 될 만한 구절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5장은 1절부터 시작해서 아담의 자손에 대한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 내용인데, 아담부터 시작해서 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식을 언제 낳고 몇 년을 살다 죽었더라’ 이런 내용만 한결 같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태어났다 그리고 죽었더라, 죽었더라’ 이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유독 에녹만은 ‘죽었더라’는 말이 빠지고 대신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동행’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넣은 것이 분명하며, 그것이 승천의 이유가 틀림없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은 흔히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5절을 보면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았다는 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바칠 때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최초로 인정받았던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공인'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과 연관해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음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유다서 14-16절을 보면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여기에 그가 생전에 한 중요한 일의 한 가지 단서가 나옵니다. 에녹은 당시 타락한 사람들을 향해 장차 주께서 오셔서 모든 경건치 않은 자들을 심판할 것이며, 심판받을 자들이 어떠한 자들인지 경고했습니다.
성경에서 에녹에 관한 단 이 3군데의 짧은 단서이지만,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승천의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둘째 ; 그 동행한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고 그것이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게 된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가운데서 세상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외치는데 그의 생애를 바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동행'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에녹이 승천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동행'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eth halak'(엩 하라크)로서 '함께 걷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halak'는 '걷다', '가다', '오다'의 보통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eth'는 '함께'(with), '가까이'(near)란 의미 외에 그 유명한 신약의 전치사 '파라'( παρα / from with, from beside) ; 보혜사 성령의 나오심 (發出 ?)을 표현하는 헬라어에만 있는 독특한 전치사임) 와 비슷한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녹의 동행은 단순한 동행이 아니라 굳이 표현하자면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과 함께" 의 동행 곧 신약경륜에 있어서 영 안에서 영을 온전히 따름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자기 자신의 뜻을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온전히 순종하여 (뒤를 따라)함께 걸었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걸었지만 발자국은 한 사람의 것만 남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보통 우리들은 어떤 사람과 길을 함께 갔으면 그것을 동행했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러나 이런 동행은 비록 함께 갔더라도 서로 딴 생각을 하고 갈 수도 있고 다른 목적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에녹의 동행은 이런 동행이 아니었습니다. 에녹의 동행은 함께 가는 것은 물론이고 그 분의 뜻을 따라 철저히 한 걸음씩 옮겨 놓았다는 의미입니다.
에녹의 이런 동행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곧 온전히 만족케 하셨으며 이런 동행의 결과 승천이 있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런 동행은 신약의 경륜에서 볼 때 한 점도 한 순간도 남김없이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오직 생명의 영의 법만 역사하여 사망의 법이 전혀 역사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당연히 죽음을 보지 않고 생명으로 지내다가 그대로 생명의 곳으로 승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사실 이런 삶은 우리 모두의 삶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생명으로 살다가 ... 홀연히 영원한 생명의 곳으로 .. 할렐루야!)
그러므로 에녹이 이런 동행을 했다는 것은 하나의 그림자 곧 장차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온전한 순종의 삶 곧 동행의 삶과 그리고 그 결과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에 대한 하나의 예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삶을 살 수 있고 그리고 사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에녹은 언제부터 이런 삶을 살았을까요? 여기에 또 중요한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에녹도 처음에는 당시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름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이 결정적으로 바뀌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5장 21절을 보면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다른 사람들의 족보와 같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22절을 보면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 부분이 다른 사람과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통해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 그의 인생이 결정적으로 바뀌었구나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주의깊게 보면 그 비밀이 바로 아들의 이름인 ‘므두셀라’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므두셀라’는 “저가 죽으면 그것이 오리라”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것은 노아의 때에 온 홍수 심판을 말하는데, 그렇다면 에녹이 어떻게 아들 이름을 이런 뜻으로 지었을까요? 물론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에녹은 틀림없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그의 아들 이름을 심판에 대한 경고의 뜻을 가진 ‘므두셀라’로 짓고, 그 때부터 에녹의 삶은 완전히 변하여 하나님과 온전히 동행하면서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와 회개를 촉구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삼백년을 살다가 홀연히 하나님께서 그를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므두셀라가 죽었을 때 홍수가 왔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부터 족보를 따라 연대를 계산해 보다가 매우 놀랐습니다. 정확히 '므두셀라‘가 죽던 해에 홍수 심판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아담으로부터 계산해 보면 1656년 째 되던 해에 홍수 심판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바로 그 해에 므두셀라가 자기 이름의 뜻대로 죽었으며, '그 것' 곧 '홍수 심판'도 온 것이었습니다.
창세기의 족보에 따른 연대에는 많은 흥미있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옛세상'은 노아홍수 때까지 1656년간 존속했으며 단 10대로 이루어져 있음/ 아담이 9대손인 라멕 때까지도 살아있었고/ 한 세대의 평균 수명은 912세 정도로 계산되었음 등) 그 중에 특별한 영적 의미는 없지만 참고로 말씀드리면 노아의 죽은 해가 아담으로부터 시작할 때 꼭 2006년 째 되는 해입니다. 물론 우연한 일치이긴 하지만 작년이 主後 2006년 째 되는 해였습니다.
그리고 ‘므두셀라’의 이름 안에는 또 다른 비밀이 숨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자비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간 중에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바로 ‘므두셀라’입니다. 그는 969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에야 세상에 심판이 임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만을 보셨다면 그 동안 수도 없이 세상을 심판하셨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살아남을 자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 중에 가장 오래 산 ‘므두셀라’를 상징적으로 세워서 그의 생이 끝날 때 까지 세상의 심판을 참고 기다려 주심으로서 그 분의 사랑과 자비와 오래 참으심이 어떠하심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우리의 삶을 돌아볼 때 하나님의 이런 사랑과 자비와 참으심이 없으셨다면 예수를 믿을 기회도 갖지 못하고 심판받았을 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실 때까지 참아주신 하나님, 우리를 데려가지 않으시고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그날까지 기다려주시고 환경을 조성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과 오래 참으심의 신비를 우리의 어떤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오래 참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부모의 심정으로 문 바깥을 지금도 내다보고 계십니다.
회복 안에 있는 우리는 생명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누림이 무엇인지, 어떻게 누리는지 너무나 분명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에녹이 그러했던 것처럼 온전한 '동행'이 필요합니다. 집회 때나 혼자 말씀을 누릴 때의 만족과 기쁨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주님께 여기가 좋사옵니다! 주님 여기서 초막 셋을 지어 살고 싶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산을 내려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골방 가운데서, 집회 가운데서 주님을 충만히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곳이 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산을 내려와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에녹과 같은 '동행'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동행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중심이 나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동행은 나를 버리고 그 분에게 나의 모든 것을 맡길 때만 동행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야 할 길이며, 걸어야 할 길입니다.
주님을 부름은 우리를 살리지만, 동행은 우리를 죽입니다. 그러나 동행은 다시 우리를 부활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둘이 함께 할 때 우리는 건축할 수 있습니다!
첫댓글 아멘... 승천에 대한 가장 좋은 정의는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바로 [내 안에(in) 있는 그리스도와 보좌에 있는(upon)그리스도가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땅에서이면 "영안에서 행함(이기는생활,동행)"이요, 공중에서이면 "휴거(rapture)"요, 보좌에서이면 "승천" 이 될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끝임없이 습관적으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아멘..
형제님 잘 지내시지요.. 승천에 대해 제가 보지 못했던 부분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짧은 표현이지만 누림이 있고 아멘이 됩니다.....
에녹의 삻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삻이였읍니다. 영원히 사망의 고통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게 감사를 드리며 이러한 진리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또한 생명에서 동행하는 삶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주님의 손길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렸지만 세상에 사는 우리는 하나님을 따를려면 많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혼생명을 잃어버리고 영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부활생명을 사는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심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는 부활이신 그리스도 입니다. 부활생명만이 교회를 건축합니다. 형제님의 이러한 에녹의 하나님의 동행과 승천 에 대한 말씀 공급이 큽니다.
감사합니다.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