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8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루카 18,35-43
십자가는 자기 합리화의 도구가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리코의 소경은 구걸하며 앉아 있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소리소리 지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네가 뭔데 그렇게 소리를 질러?”하며 나무랍니다.
그러나 소경은 더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라고 물으시고, 소경은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당시에 눈이 보이지 않는다면 할 일이 없었고 그러면 가난해서 구걸하는 신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요즘 그런 상황이라면, “예수님도 가난하게 십자가에 돌아가셨으니, 너도 네 처지를 받아들이고 수긍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눈을 떠서 일해서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려는 그에게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요즘에도 신앙이 약간은 지금 자신의 처지에 수긍하고 안주하게 만드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어떤 신자분들은 정말 사명을 깨닫고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불쌍한 처지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닮았다면 위안하기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신앙은 모든 것을 희망하고 모든 것을 믿고 믿는 것을 위해 지치지 않는 노력을 함을 의미합니다.
고 정주영 회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공은 노력, 끈기, 그리고 위험을 감수할 용기의 결과다. 성공의 열쇠는 포기하지 않고 항상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실패는 끝이 아니라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다.
성공으로 가는 여정이 항상 쉬운 것은 아니지만, 항상 가치가 있다. 성공한 사람은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저는 이 모습이 오늘 복음의 믿음으로 구원받은 소경의 모습과 더 닮았다고 봅니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란 책이 있습니다.
1913년 이 책을 쓴 사람은 프랑스 한 마을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 지역은 나무를 잘라 숯을 만들어 파는 동네였습니다.
당연히 산은 벌거숭이였습니다.
그리고 각자는 경쟁과 미움, 술과 향락 등에 빠져
전혀 행복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벌거숭이 산을 지날 무렵 한 양치기를 만납니다. 그는 도토리를 땅에 심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1910년부터 나무를 심어왔고, 3년 동안 매일 좋은 도토리만 골라내서 심어 10만 개의 도토리를 심어두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쉰다섯 살의 ‘엘제아르 부피에’라는 이름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내와 자녀를 잃고 이 시골로 내려와 양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도토리를 심기 시작한 이유는, 그곳에 나무가 없어서 그 땅이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땅은 그에게 어쩌면 아내와 아들과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 땅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밤에 매일 좋은 도토리 100개씩 골라내어 낮에는 양을 치며 곳곳에 그 도토리를 심고 있었던 것입니다.
도토리 10만 개 중 2만 개가 싹을 틔웠고 그중 만 개가 조금씩 자라고 있었습니다.
지은이가 마지막으로 엘제아르 부피에를 만난 건 1945년 6월이었습니다.
그의 나이는 어느덧 여든일곱 살이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예전의 그 황무지가 있던 그 지역에 있었지만, 그곳은 더 이상 황무지가 아니었습니다.
버스가 빠른 속도로 지나다니고 사람 사는 냄새,
나뭇가지 사이로 바람이 부는 소리, 샘물이 흐르는 소리가 있는 살아있는 곳이 되어 있었습니다.
베르공 마을에서는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있었고, 공동작업을 한 희망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채소밭에는 열매들이 맺혀 있었고, 그곳에는 젊은 부부 네 쌍을 포함한 스물여덟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살아있는 곳이자, 살고 싶은 곳이 되었던 것입니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여전히 예전의 그 황무지가 있던 자리에서 아직도 황무지인 것처럼 그곳에 묘목을 심고 있었습니다.
2023년 4층에 살던 두 아이의 아빠가 아래층부터 화재가 발생하여 7개월 된 아기를 안고 뛰어내리다가 아이는 살았지만, 아빠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 일이 있었습니다.
아래에서 쓰레기 분리 수거장의 푹신한 포대를 깔아놓고 큰 아이를 던졌는데 살았습니다.
그다음은 아내가 뛰어내렸고 가벼운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안고 뛰려던 아빠는 아래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고 뇌진탕으로 죽고 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와 같습니다.
아기에게 아빠와 같이 죽음의 십자가로 오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빠가 널 위해 죽었으니, 넌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소중한 존재야!”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보며 그분의 가난과 희생의 삶을 내가 꿈을 갖고 노력하지 않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참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처럼 영향력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믿음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18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 18,35-43
우리의 절박한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
이스라엘의 지형은 독특합니다.
해발 천미터 남짓되는 높은 곳에 위치한 도시가 있는가 하면, 해수면 보다 낮은 곳에 위치한 도시도 있습니다.
다양한 꽃들과 식물들로 온화하고 풍성한 지역이 있는가 하면 황량하고 척박한 광야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들르신 지역도 정말이지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예리코! 지구 상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자리한 도시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 예리코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심각한 시각 장애를 안고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간의 세월이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비장애인인 우리는 상상도 못할 고통을 그는 겪고 살아왔습니다.
앞이 조금도 안 보이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눈 떠도 깜깜 눈 감아도 절망! 그 삶이 참으로 혹독하고 절망스러웠습니다.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에서 살아가던 그, 이 세상에서 가장 가련히 살아가던 예리코의 시각장애인에게 어느 날 뜻밖의 행운이 찾아옵니다.
해방자요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코앞으로 지나가시는 소식을 전해 들은 깃입니다.
그는 직감으로 느꼈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젖먹던 힘까지 다해 크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수많은 군중의 말소리에 파묻혔을 법도 한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절박하고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의 간절함을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시고 마침내 그의 평생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오늘 우리를 향해서 주님께서는 자상하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강론>
(2024. 11. 18. 월)(루카 18,35-43)
<우리는 구원의 빛을 받아 빛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앞서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루카 18,35-43).”
1) 어떤 눈먼 이의 이름은 ‘바르티매오’입니다(마르 10,46).
바르티매오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바르티매오가 눈이 멀었다는 것은, 어둠 속에 앉아 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의 경우에, ‘어둠’은 죄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메시아를 아직 만나지 못했음을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바르티매오가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다는 것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인생을 살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의 경우에, ‘죽음의 그림자’는 구원의 길을 아직 모르고 있음을 뜻합니다.
<아직 예수님을 모르고, 그래서 구원의 길을 모르고, 인생의 허무함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인들은 ‘빛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고, 어둠과 죽음의 그림자에서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2) 바르티매오의 상황에서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도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1-5).”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라는 말씀에서, 코린토 2서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12,8-10).”
<우리는 어떤 질병이나 신체장애 같은 고통과 불행을 함부로 ‘죄’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는 주님 말씀대로, 그 고통과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들보다 더 주님의 권능과 은총을 드러낼 수 있고, 증명할 수 있습니다.>
3) 바르티매오는 메시아를 만나기를, 또 메시아의 구원을 얻기를 갈망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소문만으로도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믿었을 것이고, 예수님에게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처지에서 예수님을 만나러 갈 수는 없었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오시기를, 또는 그의 앞을 지나가시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39절의 ‘더욱 큰 소리로’ 라는 말은, 그의 간절한 심정을 나타냅니다.
4)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몰라서 하신 질문이 아니라, 바르티매오 자신이 자기의 믿음을 능동적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말씀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은 사람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입니다.
“그분께는 사람에 관하여 누가 증언해 드릴 필요가 없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요한 2,25).”>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는 말은, 겉으로만 보면 ‘시력 회복’을 간청하는 말이지만, 전후 상황을 모두 생각하면, 이 말은 예수님을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아’로 믿고 있음을 고백하면서 메시아께 구원을 간청하는 신앙고백입니다.
그의 시력이 회복된 것은, 예수님 덕분에 ‘구원의 길’을 알게 된 것을 나타내고, 눈을 뜬 다음에 예수님을 따랐다는 말은, 그 자신이 간절하게 원했던 그대로 ‘구원의 길’을 걷기 시작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길은 곧 ‘구원의 길’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