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12월5일 [(자)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제1독서 이사야서 25,6-10ㄱ
복음 마태오 15,29-37
◈ [서울] 대림 제1주간 수요일
2018년 다해 12월5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미국은 국경을 넘어오는 난민들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유럽도
난민들을 잘 받아 주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난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고 합니다. 지금 미국을 이루고 있는
주류 사회는 대서양을 건너온 난민이었습니다. 유럽에서는 살기
어려웠기 때문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왔습니다. 그들은
난민이었지만 총이 있었고, 힘이 이었습니다. 지금 유럽은 부와
경제적인 힘을 식민지 시대에 착취한 노동력과 자원의 바탕 위에
이룩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금은 경제적인 발전을 이룩했지만 불과
100년 전만 해도 나라를 잃어버린 난민이었습니다. 연합군의 도움을
받았고, 경제 원조를 받아야 살 수 있었습니다.
자본주의와 물질주의에 익숙한 사회는 난민들을 경쟁에서 도태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람을 이익과 발전의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적자생존, 양육강식의 경쟁이라는 진화론에 익숙한 사람은 난민을
보듬어 주려하지 않습니다. 진화의 법칙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흘러갈 것입니다. 자연을 다스린다고
하면서 황폐화시키고, 언젠가는 썩어가는 연못 속에서 죽어가는
물고기처럼 우리도 그렇게 될지 모르면서 말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만드는 데는 엄청난 돈을 지출하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아픈 이들에게 약을 주고, 집이 없는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는 것에는 인색할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자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럴 힘도 없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믿는 우리만이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우리만이라도 세상의 패러다임을 벗어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변하는 그만큼은 세상이 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꽁꽁 얼은 강에는
어김없이 숨구멍이 있습니다. 그 숨구멍이 있기에 물고기는 숨을 쉴
수 있다고 합니다.
‘간디’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이 충분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탐욕을 채우기에는 늘
부족합니다.’ 요즘 우리들은 성서 말씀을 통해서 아름다운 미래와
꿈을 듣게 됩니다. 오늘도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날에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꿈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픈 사람들을 치유해 주시고,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돈과 명예와
권력‘이라는 기준에서는 성공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평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가치를 지니셨고, 그 꿈을
이웃들과 나누셨으며, 가난한 이들과 아픈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였지만, 오늘
날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통해서 희망을 찾고, 위로를
얻으며, 그분과 함께 할 때 참된 기쁨과 행복을 느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예수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을 채울 충분한 것들이 있다!” 다만 우리가 가진
것을 서로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성공을 바라기
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얻을 수 있는 보람과 기쁨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소수의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성공을 벗어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자괴감의 배고픔,
자긍심의 배부름
2018년 다해 12월5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자괴감의 배고픔, 자긍심의 배부름>
복음: 마태오 15,29-37
이기헌 주교님의 ‘함께 울어주는 이’란 책에 당신이 군종신부 하실
때 겪으셨던 정체성의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셨는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주교님이 강원도 양구에서 군종신부 하던 시절 사제로서의 정체성
문제로 무척 힘들어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힘들 때 아직 성당도
갖추어있지 못한 부대에 부임하여 그 외로움을 달랠 방법이
없었습니다. 처음엔 시간이 많이 남아 책도 실컷 읽고 음악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외로움만 더 커갔습니다. 결국 당신을
달래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선택한 것은 술이었습니다. 밤마다
나가서 술을 먹지 않고서는 잠자리에 들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술을
마시고 비틀거리며 복귀할 때는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인가?’라는 자괴감에 더욱 괴로우셨다고 합니다.
그날도 포장마차에 들렀다가 사제관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사제관은 부대 밖에 있는 일반 신자들을 위한 양구 본당 위쪽에
있었기에 성당을 지나쳐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성당에서
비치는 성체 등 불빛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신부님은 자신도
모르게 성당 문을 열고 들어가 성체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괜한
서러움이 몰려와 “예수님, 정말 힘듭니다.”하며 밤늦게까지 성체 앞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차츰차츰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습니다. “언제라도 힘들 때는 나에게 오너라.”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의정부교구 교구장으로 계시는 주교님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날 이후 저는 어렵고 힘든 일이 닥쳐와도 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성체 앞에서의 체험이 확신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사제생활을
하며 어렵고 힘들 때 조용히 성체 앞에 마주 앉으면, 그 어떤 힘든
일도 고독도 사그라짐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이기헌 주교님은 외로움을 세상 것에서가 아니라 성체 앞에서 채울
수 있는 법을 배우셨습니다. 그래서 성체 앞에 머무는 즐거움을 알게
해 준 그 외로움에 대해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 외로움을 세상 것으로만 채우려했다면 어땠을까요?
계속 자괴감이 커져 견딜 수 없는 지경까지 가야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배고픈데 물만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 순간은 배가
부른 것 같지만 더욱 큰 허기를 느끼게 되고 또 물을 마시지만 더 배가
고파집니다. 배고픈데 물만 마시는 자신이 한없이 바보처럼 보여 아예
물속으로 뛰어들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외로움을 이기헌 주교님처럼 참 양식을 만나는 기회로
삼아야합니다. 물을 마시는 것처럼 그 시간을 성체 앞에 앉아있는
것입니다. 그것만 하면 육체적으로 목은 좀 마를지라도 배가 차서
기분이 좋아지게 됩니다. 성체 앞에 앉은 이들은 모두 배고픈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함께 사흘 동안이나 머물렀던 사람들은 빵과
물고기를 배부르게 배급받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엾게 보셨기
때문입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예수님은 당신과 함께 머무는 이들을 가엾게 보십니다. 그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시고 그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일곱은 성령의 숫자이고 안식일의
숫자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말하고 성령으로 느끼는 배부름을
말합니다. 물고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우리 안에 모시게
됩니다. 그리고 일곱 바구니 안에 담긴 새로운 빵이 됩니다. 그들은
또 누군가를 그렇게 배불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배고픈데
누구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가운데 이제 자괴감이
아니라 자긍심이 생기게 되고 그것이 행복의 바탕이 됩니다. 어떤
행위들은 끊임없이 자괴감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어떤 행위는
자긍심을 줍니다. 어떤 것을 먹으면 배고프고 어떤 것을 먹으면
배부릅니다. 주님과 머물며 그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만이 배부르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는 길입니다.
http://www.수원교구영성관.com/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빵의 기적|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8년 다해 12월5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15,29-37: 많은 병자를 낫게 하시고, 빵의 기적을 베푸심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가시어 병든 이들을 기다리신다. 사람들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온다. 그분의 옷자락을 잡는데 그치지 않고 그분의 발치에까지
온다. 그들은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다리를 저는데도 불구하고
산으로 애써 올라왔고, 산에 오른 다음에는 그분의 발치에 있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으로 치유된 것이다.
사람들은 비록 외딴 곳이었지만,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에 지칠
줄 몰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나약성과 우리 육체의 건강을
위하여 음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예수님은 그들이 사흘
동안이나 당신 곁에 있었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32절)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더라도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배불리 먹일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33절) 하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북돋우고 그들이 더욱 동정심을 느끼도록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34절)고 물으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주린 자를 먹여
주신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자비, 불쌍히
여겨주시는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유대인과 다른
민족을 차별하시지 않고 골고루 대하셨다. 이 차별 없고 순수한
사랑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변화뿐 아니라 세상의
변화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는 삶이 우리는 진정 은총의
삶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다.
많은 군중에게 빵을 먹이신 기적사화는 두 가지 형태로 전해졌다.
하나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으로 더 오래 된 것으로 마태오는 이
두 가지를 다 전하고 있다. 복음은 이 기적사화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구약에서
엘리야가 사렙다의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
주었다는 사화(1열왕 17,8-16)를 알고 있으며, 엘리사가 보리떡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다는 기적 이야기(2열왕 4,42-44)를 알고 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엘리야나 엘리사보다도 더
훌륭한 분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모세와 같은 예언자라는
사상도 들어있는 것 같다. 그 옛날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로 먹인 것처럼 예수께서는 외딴 곳에서 백성을 먹이신다.
예수님은 기도하신 다음 빵을 나누어 주신다. 이제 우리는 이웃에게,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갖고 우리와 같은
형제로 대해주는 그래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 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태 15, 37)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8년 다해 12월5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태 15, 37)
감사 속에 빵이 있고 빵 속에 감사가 있습니다.
빵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배부르게 해주시는 빵은 분명 주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이 되는 빵으로 생명의 길이 펼쳐집니다.
사랑한다는 것이 무언지를 깨닫게됩니다.
사랑은 그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입니다.
빵으로 사랑의 성전을 지으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빵이 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배부르게 하십니다.
빵의 모습이 감사의 삶이 우리가 기다리는
성탄의 본모습임을 알게됩니다.
서로를 살리는 사랑의 양식이 오늘도 우리의 삶을
배부르게 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양식은 정직한 사랑입니다.
정직한 감사의 대림시기 되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기타] 12월5일 (수) - 바랄 수 없는 중의 믿음
오늘은 “바랄 수 없는 중의 믿음”에 대해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로마서 4장 18절 말씀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배워서 믿는 믿음과 하나님이 택정하여서 믿는 믿음 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바로 하나님이
택정하여 믿는 믿음을 배워서 믿는 믿음을 그대로 실행으로 옮기는
선두주자 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세전부터 택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믿지
않고 거부하면 당연히 믿음을 소유할 수가 없지요. 또 의심하면서
믿는 자는 그대로 의심하며 믿는 자로 머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주위의 환경 여건과 관계없이 하나님 택하심을
믿지 못한 상태에서 부르심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실행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지 않았습니까?
여러 믿음의 형태가 있지만 조건 없이 믿고 조건 없이 실행하여
믿음을 쌓아가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너무나도 귀하고 값지기만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를 원한다면 아브라함과 같이 명령하신
말씀을 가장 우선시 여기고 곧바로 실행하는 아브라함의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청주] 측은지심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다해 12월5일 대림 제1주간 수요일 (마태15,29-37)
품어 생각하면
아침잠에서 깨면서 ‘살아있구나’ ‘오늘 하루를 또 허락 하셨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날을 허락하신 이유가
있고, 기대하시는 바가 있는데 얼마나 알아듣고 그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반성합니다. 그리고 하루의 끝에서 어떻게 감사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새로워지면 매일이 새 날인데 새날을 만들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안고 삽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습니다.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왜
오늘날엔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냥 버려두십니까?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지 않으시는 주님이 야속합니다.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육체적인 질병을 고쳐 주셨고 육체적인 굶주림을 채워주셨던
주님께서 오늘도 여전히 당신의 능력을 밝히 드러내시길 기도합니다.
사실 세상의 굶주림은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나누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베풀면 세상의 기아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아무리 큰 기적을 하신다 해도 내가 베푸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굶주림은 여전히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신 의미를 품어 생각하면 능력의 주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매여 있으면 언제든지 풍요롭게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주님은 뵙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총의 열매보다도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감사를
드리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슴에 새겨야겠습니다.
예레미야서 31장 33절을 보면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게 된다고 하시며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하고 말합니다.
이스라엘백성의 하느님이 되신 그분이 오늘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켜주시고 앞길을 열어주십니다. 허물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위해 기적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도구 삼아 당신의 할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고 제자들이 다시 군중에게 나누어준 행위는 바로
나눔의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은 자기들끼리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모든 이와 함께 나눠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적을 보지 말고 오히려 주님의 능력에 응답하여
기적을 이루는 사람, 기적을 전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먹고도
남는 일곱 바구니는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측은지심, '가엾구나‘ 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바라보셨던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모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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