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을 반대하는 놈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대한 반공청년단의 신도환 단장은 연사가 흥분하면 흔히 그러듯이, 두 주먹 불끈 쥐고 반말까지 섞어가며 청중들에게 악을 썼다. 1959년 12월6일, 전주공설운동장은 추웠다. 전라북도 내 17개 반공청년단 지부에서 동원된 7000여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찬바람에 몸을 떨고 있었다. 고등학생이던 필자도 그렇게 '궐기대회'에 참석해 연설을 듣고, 만세삼창까지 한 뒤 시가행진에 나섰던 기억이 있다.
부정선거로 악명이 높은 1960년의 3·15 정부통령 선거를 불과 3달 남짓 앞둔 시점이었다. 따라서 행사내용도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반공전선을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대한반공청년단은 반공예술인단(임화수가 단장이었다)과 함께 자유당의 대통령선거 전위대였다. 단체 이름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당시에도 '반공'을 덮어 누를 가치는 없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대목은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노래가사처럼 그 반공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신익희나 조병옥이나 장면 따위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주인이 따로 있었다. 오직 이승만 박사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라와 국민의 명운이 걸린 반공을 제대로 해 내려면, 3·15선거에서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이 되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신도환 단장은 바로 그 점을 역설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신단장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한 '반공을 반대하는 놈'은 '이승만 박사를 반대하는 놈'이었고, '이승만 박사를 반대하는 놈'은 바로 '반공을 반대하는 놈'이었다. '반공'은 말하자면 '안보태세'다. 그 때나 지금이나 정상적인 국민치고 반대하는 사람 별로 없다. 문제는 반공하는 권리를 '독점'하고 있는 '반공 특권층'이었다. 그들은 줄곧 그 '특권'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3·15부정선거에 저항하던 사람들을 적색분자(빨갱이라고도 했다)라 몰아댔고, 유신말기 부마사태 때도 그런 소리가 나왔다. 자기들과 반대쪽에 서있는 사람들에게는 본능적으로 색깔을 덧칠해 '빨갱이'를 만들고자 기를 썼다. 박정희 씨도 그 반공 특권을 내 세우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第一義)로 삼는다'는 게 '혁명공약' 1항이었다.
그거 앞세워 '유신'도 감행했고, 그 핑계대면서 장기 집권을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가 망전필위(忘戰必危 : 전쟁했던 것을 잊으면 반드시 위기를 맞는다)라는 휘호를 자주 쓴 것도 반공권을 놓지 않으려는 몸부림 이었던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전두환 씨도 그런 부류다. DJ도 광주사람들도 그런 반공 특권에 쫓겨 빨갱이가 되었다.
'신도환'이후 반세기가 훌쩍 넘은 지금도 '반공 독점권'은 맹위를 떨친다. 반대파에 대해서는 걸핏하면 '종북'이라 하고 '좌빨'이라고도 한다. 반대(반공)하며 타도해야 할 대상에게 퍼주기를 해서, 그 돈으로 핵실험도 하고 미사일을 개발했다고 선전한다. 그러나 헛소리다. MB정권 들어 퍼주기 전혀 안했어도 북한은 핵실험도하고 계속 미사일을 개발해 쏘아대고 있다. 선거가 임박했으니 그런 소리 더 기승을 부릴 것이다.
다음은 아래 대한민국 깡패와 건달로 본 100년사중에서 정치깡패의 시대에 나오는 신도환입니다.
고대생피습사건의 피고인 17명에 대한
판결공판이 혁명재판 1호법정에서 개정되었다.
이 공판에서 임화수 사형, 신도환 무기징역, 유지광 12년형을 언도받았다.
사진 왼쪽부터 신도환, 임화수, 유지광 - 1961년 8월25일
신도환은 그후 신민당에 갔지만...잘 보십시요...1979년 신민당에서 한광옥이 신도환을 보좌했다면 순도 100%는 아닙니다.
1979년 5.30 전당대회 내용입니다.
1979년 5월30일에 열린 신민당전당대회는 '중도통합론'과 '참여하의 개혁'을 내세운 이철승(李哲承)과 '선명야당'과 '민주회복'을 강력히 주장해온 김영삼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김영삼은 5월23일의 기자회견에서 당수선거에 출마할 뜻을 공식으로 선언하면서 자유민주주의 회복과 긴급조치 해제를 위한 강력한 투쟁 그리고 정권인수 태세를 갖추겠다고 약속했다. 이같은 그의 출마결의는 당시 야당 내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김대중(金大中)의 지지를 받았으나, 또한 막강한 정부 여당의 방해를 불러왔던 것이다. (당시 이철승씨는 친여성향이 강한 인물이었고, 총재선거에 출마한 신도환(辛道煥)씨 또한 중앙정보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치열한 접전 끝에 실시된 총재선거는 1차투표에서 이철승 2백92표, 김영삼 2백67표, 이기택(李基澤) 92표, 신도환 87표, 김옥선(金玉仙) 11표, 무효 2표로 나타났다. 1차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자 제2차투표에 들어갔는데 사태가 역전되어 재석 대의원 7백51명 중 김영삼이 과반수선(3백76표)을 두 표 넘는 3백78표를 얻어 총재에 당선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