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탈의 땅에서 빚어낸 지독한 생명력, 군산 보리맥(麥)걸리
다리가 불편한 어머님을 위해 전국의 향토 막걸리를 맛보게 하는 것이 내 인생의 작지만 소중한 목표다.
그동안 마미의 입맛에 맞는 막걸리가 몇 종 있다. 신안 지도막걸리와 나주 동동주. 그곳 하나로 마트를 지나면 여러 병 카트에 담는다.
이번 군산 여정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보석을 발견했다.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보리 맥(麥)걸리'가 그 주인공이다.
"와... 어쩜 이렇게 걸쭉하고 부드럽니."
잔을 비워내기도 전에 터져 나온 막걸리 감별사 마미의 찬사에 여행자의 뿌듯함이 차오른다.
군산의 특산물인 흰찰쌀보리로 빚은 이 술은 쌀로 만든 일반 막걸리의 가벼운 단맛과는 결이 다르다. 보리 특유의 묵직하고 구수한 풍미가 혀끝을 감싸며 기분 좋은 포만감을 안겨준다. 흰찰쌀보리는 일반 보리보다 찰기가 강하고 단백질 함량이 적절해 술로 빚었을 때 그 감칠맛이 배가된다. 한 모금 넘기고 나면 입안에 남는 은은한 잔향은 군산 옥녀삼거리 황금 들녘의 풍성함을 그대로 옮겨온 듯하다.
사실 군산의 들녘은 아픈 기억을 품고 있다. 일제강점기. 대야와 임피, 나포에 펼쳐진 광활한 평야는 풍요의 상징이 아닌 수탈의 현장이었다. 철길을 따라 군산항에 산더미처럼 쌓였던 쌀가마니들은 우리 민초의 허기를 채우는 대신 일본인의 배를 불렸다.
쌀이 많이 생산될수록 땅의 주인들은 풀뿌리를 캐고 거친 보리에 기대어 모진 춘궁기를 버텨야 했다. 그래서일까. 군산의 보리막걸리는 단순한 술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굶주림을 견디게 했던 그 보리가 이제는 가장 지독하고도 아름다운 생명력의 맛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군산 옥녀삼거리 청보리밭
그 싱그러운 생명력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다면 옥녀삼거리 청보리밭으로 향해야 한다. 매년 5월, 군산공항 인근의 대지는 바다보다 더 푸른 초록으로 일렁인다. 지평선 끝까지 닿은 광활한 보리밭 한복판에 우뚝 솟은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은 마치 낯선 이국의 서정을 자아낸다. 4월의 연둣빛 싹이 5월의 짙은 초록을 지나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과정은 농민의 정직한 땀방울이 빚어낸 한 폭의 예술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보리 줄기들이 부딪치며 내는 청아한 사각거림은 도심의 소음에 지친 영혼을 씻어내기에 충분하다. 꽁당보리축제에서 맛보는 보리아이스크림은 비비빅보다 진한 고소함으로 그 여정에 달콤한 쉼표를 찍어준다.
-이성당 보리진포빵
보리의 변신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군산의 상징인 이성당의 '보리진포빵'은 흰찰쌀보리의 찰기와 구수함을 빵 속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씹을수록 올라오는 은근한 단맛은 자극적이지 않아 깊은 여운을 남긴다.
-군산비어포트
째보선창의 군산비어포트에서는 국내 유일의 국산 맥아로 만든 수제맥주를 만날 수 있다. 금강의 낙조를 바라보며 갓 뽑아낸 맥주의 진한 풍미를 즐기다 보면, 군산이 왜 보리의 도시인지를 오감으로 깨닫게 된다.
-군산로컬푸드직매장
여정의 마무리는 군산로컬푸드직매장이 제격이다. 당일 수확한 싱싱한 야채와 생산자의 이름이 걸린 정직한 농산물들이 가득하다. 무엇보다 마미의 마음을 훔친 보리막걸리가 단돈 1,300원, 일반 생막걸리가 1,000원이라는 믿기지 않는 가격에 판매된다. 근대역사박물관 근처에 있어 여행의 마지막 코스로 쇼핑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다.
수탈의 아픔을 이겨내고 보리라는 이름으로 피어난 군산의 맛. 그 지독하고도 부드러운 생명력 한 잔에 나의 여행은 더욱 깊고 진하게 익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