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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많이 시끄럽습니다. 구태여 일일이 열거를 하지 않더라도 대단히 많습니다. 그 세상 속에서 하느님나라를 만들어가고 있는 교회도 조용해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제 대한성공회 전국의회가 서울주교좌교회에서 있었는데, 저는 처음으로 참석해보았습니다. 아주 심각한 문제들을 이렇게 많이 안고 있는 공동체가 쓰러지지 않고 굳건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하느님이 이 공동체를 사랑하셔서 이끌고 가시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일상사도 마찬가지지요.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전혀 흔들림 없이 물 흐르듯 잘 지나가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또 개인적으로도 매일매일 이런저런 일들과 부딪히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기도 하지만 하루하루 잘 버티고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못 일어날 것처럼 몸도 마음도 몹시 아프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자리를 털고 다시 일어납니다.
삶이라는 거대한 물줄기에, 일상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급류에 내 몸을 내맡긴 것과 같습니다. 하루 24시간 중에 내가 내 맘대로 나를 위해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십니까? 통장에 있는 잔고는 분명 내 돈이지만 그거 내 맘대로 쓸 수 있나요? 지갑에 있는 푼돈도 어떤 때는 내 맘대로 쓰지 못합니다. 내 인생, 내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내 인생이고 내 삶이지만 내가 어쩌지 못합니다. 시간이라는 일상이라는 급류에 툭 던져져서 그냥 흘러갑니다. 거기에 빠지지 않고 물 안 먹는 것만으로도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면서 그냥 떠내려갑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들은 또 시간을 내서 오늘 여기에 앉아 있습니다. 일요일 오전시간이면 가장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그런 시간입니다. 늦잠 실컷 자고 일어나서 잠자리 복장 그대로 거실 바닥에서 뒹굴거리면서 리모컨 만지고 있을 그런 느긋한 시간입니다. 그러면서 오후에 어디 바람 좀 쐬러 다녀올까? 어디 맛집이 있다던데 거기 가서 점심이나 먹을까? 그런 유혹 다 떨치고 여기 앉아 계시는 겁니다. 특히 자녀들과 대동하신 분들은 모르긴 몰라도 아침시간에 전쟁을 치루었을 것 아닙니까? 가네 못 가네, 늦었네, 어쩌네 하면서 얼마나 소리를 질렀겠습니까. 그런 우여곡절을 겪어서 여기 앉아계시는 겁니다.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백 가지도 넘습니다. 천 가지도 넘습니다. 그러니까 구태여 못 나온 이유를 얘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 다 못 나올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래서 못 나왔구나.’ 다만 좋은 일 때문에 못 나왔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하느님 보러 오는 겁니다. (물론 제가 예전에 신자생활을 했던 교회에서는 이런 사람도 봤습니다만, ‘내 오늘 결단낼게!’ 하면서 씩씩거리며 싸우러 오는 사람도 봤지만, 그건 특별한 경우이고) 교회에 오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하느님을 보러 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하느님 보러 아침시간에 애들이랑 댓거리하면서 겨우 끌고 왔는데, 하느님을 왜 만나야 하죠? 하느님을 만나는 이유가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하느님한테 뭐 따지러? 아니면 뭘 받으러? 아니면 뭘 배우러? 아니면 이걸 전부 합쳐서?
과거 중세의 유럽에서의 교회는 그 사회의 중심이었습니다. 문화, 정치, 교육 등 모든 사람들 삶의 중심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재판을 하고, 교회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들도 교회에서 가르쳤습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었고, 교회가 모든 삶의 준거를 만들었고, 모든 이의 삶과 죽음까지 교회에서 관장했습니다. 종교기관이라기보다는 권력기관입니다.
120-30년 전 우리나라에 처음 개신교가 들어왔을 때만 하더라도 중세 유럽의 교회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당시 교회는 마을이라는 작은 지역을 이끌고 가며 앞장서는 선진적인 곳이었습니다. 또 그런 역할을 충분히 했습니다. 문맹퇴치를 위해 글을 가르치고 선진적인 과학문명을 소개하고, 현대적인 의료시설을 짓고 병든 이들을 치료해주고, 양반상놈이 평등하다는 사상을 주입시켰고, 당시 우리 백성들은 교회를 통해서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었고, 또 힘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물론 반작용도 많았지만, 교회가 우리 사회를 근대화하는데 나름 일조를 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또 가까운 70-80년대에는 교회는 뭔가 새롭고 선진적인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하더라도 어디 여학생과 교제라도 할라치면 교회 아니면 공식적으로 만날 장소가 없었습니다. 저는 교회를 안 다녔지만, 교회 다니는 아이들이 참 부러웠습니다. 교회 다니는 학생이 멋쟁이고, 여학생 친구도 있고, 세련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문집도 만들고, 시낭송회도 하고, 연극도 하고, 또 민주화운동도 그곳에서 했습니다. 분명히 교회는 앞장서서 이 사회를 이끌고 갔습니다. 아니라면 최소한 이 사회와 함께 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보십시오. 앞장서 선도하고 가는 것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함께 가기도 벅찹니다. 오히려 교회가 사회의 발목을 잡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중세 유럽에서 모든 삶의 중심이었던 교회는 현재 이 땅에서는 천덕꾸러기입니다. 부끄러운 짓 하지 않고, 또 말썽이나 부리지 않고 있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지금도 연애를 하기 위해서 교회를 찾는 젊은이가 있나요? 새로운 문화를 접할 기회는 오히려 교회가 적습니다. 더 많은 정보와 고급문화는 이제 교회 밖에 있습니다. 이미 교회는 모든 면에서 구태의연한 사고와 후진적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대학의 가장 커트라인이 낮은 과는 신학과입니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목회자의 수준은 평균 한참 이하입니다. 사회는 저만큼 달려가고 있는데 교회는 쫓아갈 엄두도 못 내고 있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무슨 말을 하든 끄덕거리는 교인 몇 명 앉혀놓고 천당지옥 하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는 교회가 대부분입니다. 아니면 재벌그룹 연수원보다 더 멋진 시설 해놓고 사람들 끌어 모아 온갖 축복을 주면서 순진한 신자들을 무뇌아로 만드는 곳이 오늘날 성공한 대형교회들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를 나와야 하죠? 얻을 게 하나도 없는데, 도움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도움을 주어야 하는데, 교회 와서 걱정을 더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걱정을 떠안고 가는데, 오히려 이 사회에 역기능 역할을 하는 교회가 대다수인데, 이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하지 않고는 나의 신앙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결코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한 행복한 신앙생활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이 해답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이 두 단락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주제는 같습니다. 첫 번째 단락의 행실이 몹시 나쁜 여자가 오히려 구원을 받고, 또 두 번째 단락의 악령 들린 여인들이 예수님께 치료를 받고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와 그 일행을 돕고 다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내용을 가지고, 일부 교회들은 ‘여자는 교회에서 헌신적으로 시중을 드는 것이 맞다.’고 얘기합니다. 참 괴이한 해석입니다. 이 이야기가 언제, 누가, 누구를 대상으로, 왜 썼느냐를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의 나에게 맞는 해석을 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루가복음은 공관복음서 중 가장 마지막에 쓰였습니다. 그 시기를 90-95년 정도로 봅니다. 예수님 부활사건 이후 약 60년 이후에 쓰였습니다. 이미 이스라엘 유대민족은 로마에 의해 식민지가 되었고, 초기기독교는 제자들에 의해 각지에서 공동체를 이루어 비밀리에 종교화작업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중에 하나였던 루가공동체는 철저하게 이방인을 위한 공동체였습니다. 당시 중앙 예루살렘 기득권층으로부터 소외받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였습니다. 특히 여인들을 위한, 여인들이 중심이 된 공동체였습니다. 사도(남성) 중심의 마태오공동체와는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유독 여인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여성들의 활약도 많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의 여인들은 인간으로서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재산 개념입니다. 레위기, 신명기, 민수기 등 율법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억압 받는 자들입니다. 더군다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여인들은 병까지 걸렸으니 오죽했겠습니까. 당시 병은 죄의 결과입니다. 병에 걸린 여인들은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그런 죄인을 대하거나 만지는 것조차 율법에서는 부정한 짓으로 금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여인들이 중심이 된 공동체가 바로 루가공동체입니다.
버림받고, 차별 받던 여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사람대접 받고, 따뜻한 사랑을 받습니다. 항상 죄인으로 숨어살던 중병 걸린 여인들이, 창녀들이, 소박맞은 여인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감동합니다. ‘누가 너희에게 죄가 있다고 하더냐. 너희들도 하느님이 똑같이 사랑하시는 귀한 자녀들이다. 가슴 펴고 당당하게 살아라.’ 그들의 죄를 예수님이 하느님을 대신하여 사해주었습니다. 물론 이런 죄의 용서는 당시의 종교적 표현입니다. 밑바닥 생활하던 여인들이, 죄인으로 얼굴도 들고 다닐 수 없었던 여인들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아들이란 자가, 하느님과 같은 분이란 자가 나타나서 죄를 사하여 주고 사람대우 해주니까, 변변하게 가진 것 없지만 그거라도 다 바쳐 예수님과 그 일행을 쫓아다니며 기쁜 마음으로 도왔다는 거 아닙니까. 이게 오늘 복음의 내용입니다.
사실 의롭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의로운 행동만 하고 있는데, 용서 받을 일이 없는데, 칭찬 받을 일만 있는데, 축복 받을 일만 있는데, 하느님의 용서가 뭐 필요하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자랑할 것만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눈에는 정죄 받을 죄인들만 눈에 보일 뿐입니다.
교회요? 바로 그런 죄인들이 오는 곳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닌,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 죄를 사함 받기 위하여 오는 곳입니다. 죄가 클수록 더 큰 용서를 받을 수 있으니, 더 큰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으니 그게 축복입니다. 자랑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죄를 용서 받으러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크고 화려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작더라도 누추하더라도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이 감돌고 서로를 격려해주는 진정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위로가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좋은 시설, 최신 설비 그딴 거 필요 없습니다. 두 사람이 교행하기도 어려운 그 비좁은 부엌에서도 마음이 있으니까 사랑의 음식이 나오지 않습니까. 복사기 없어도 주보는 잘 나오고요, 서로 상통하는데 아무 지장 없습니다.
또 교회가 크고 거창한 복지, 교육, 의료사업, 사회운동을 하기 위해 무리할 필요도 없습니다. 교회는 전문가 집단이 아니니까 그런 일들을 하는 전문가들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선한 방향으로 가도록 기도하고, 후원하고, 종이컵 하나라도 덜 사용하는 생활실천을 하는 곳으로 충분히 족합니다. 또 교회가 친교만을 위해서 이벤트를 펼치고 행사를 도모하고 예산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의 모든 친교는 성령 하느님 안에서의 한 형제요, 자매로서의 친교입니다. 그러니 사회에서의 단체들, 사적 모임, 계모임과는 반드시 구별되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사회가 빈약하고 미비하여 그나마 교회가 그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또 그럴 의무도 있었지만, 그 중심적 역할이란 것이 교회의 본질은 결코 아니며, 단지 외적 표현들입니다. 지금은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 그럴 능력도 안 되고, 그럴 위치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는데, 교회가 삶의 중심으로 들어가 중심적 역할을 하려고 하고, 또는 교회의 본질은 망각한 채 드러나는 외적 표현들을 가지고 종교의 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 위험합니다.
교회가 우리 인간들 삶의 중심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할수록, 인간들을 과거처럼 지배하려고 하면 할수록 교회는 사회와 고립되고 교인들은 또 다른 의무감으로 부담이 되고 불행해지기 마련입니다. 신앙은 우리 삶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녹아져서 그냥 삶 자체여야 합니다. 무엇이든 중심에 비집고 들어가려고 할 때 교만해지고 실족합니다. 결국 망신당하고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못 났으면 못 난대로, 그 자체로 녹아져서 스스로 없어져 생활과 하나가 될 때 우리는 모든 죄를 용서 받는 죄 많은 여인처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게 몹쓸 병이 생겼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거 한 번 고쳐보려고 안 다니던 새벽기도를 열심히 다닙니다. 죄송하지만 그 새벽기도로 절대 병은 낫지 않습니다. 그 새벽기도로 얻은 희망과 용기로 병원을 열심히 다니고 투병을 해야 병이 낫습니다. 철야기도로 부부사이가 절대 좋아지지 않습니다. 철야기도로 생긴 인내와 자기비움으로 배우자에게 다가갈 때 부부 사이가 회복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의로워서 그거 상 받으려고 교회에 온 것이 아니라 죄가 많아서 그 죄 용서 받으려고, 맺힌 게 많아서 그거 풀려고 교회에 왔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오늘 그런 거 다 예수님께 꺼내놓고 대신 하느님의 사랑과 위로와 용기를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아멘~~
설교문을 읽는데 신부님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습니다^^ 죄가 크면 은혜도 깊겠지요. 맺힌 게 많으면 자비도 넓을 겁니다. 오늘의 아픔이 내일의 소망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