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장이 남은 커피를 다 마신 후 온화한 표정으로 한얼이를 응시했다.
"아닙니다. 세례명이예요. "
"아무튼 좋아요. 완전히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태라는 거죠?"
"예. 심한 충격으로 정신착란 증세까지 보이고 있어서 질문조차
해볼 수 없는 형편이예요."
다시금 한얼이의 감정이 우울한 색채로 변해갔다.
실비아와 아름이는 곧 같은 존재로 실비아에 대한 얘기 끝에는 항상
아름이의 슬픈 눈동자가 떠오르곤 했다.
"이 경우에는 글쎄요,
해볼 수 있는 방법이라면 텔레파시를 이용한 방법이 있을 수 있겠는데...
텔레파시를 통해서 실비아의 꿈을 읽어내는 것이죠.
전례는 없지만 시도해 볼 만은 한데..."
박소장은 턱수염을 만지작거라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 일을 할 수 있는 상당한 능력의 초능력자가
있어야 하겠고..."
쉬운 방법은 아니지만 방법이 있긴 있는 것이 아닌가!
흥미진진하면서도 황당한 설정에 자신도 모르게 의구심이 생겼다.
"소장님, 그게 현실성이 있는 것일까요?"
무심코 질문을 던진 후 바로 후회스러움이 밀려왔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상황임에도 뇌 속의 조건반사적인 의문부호가
자꾸 작동했다.
긴장하자!
그러나 박소장은 여전히 온화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 의문은 누구든 가질 수 있다고 이해하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그 세계로 몰입해 오는 사람이 갖는 지적 호기심으로
반갑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 했다.
"1964년 뉴욕의 마이모니데스의료센타에서 정신분석학자 어윈박사라는
분이 인간은 꿈을 꿀 때 ESP능력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꿈은 초능력을 전달하는 매개체라고 할 수 있죠.
즉, 수면은 텔레파시를 전달하기에 가장 적합한 조건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죠.
다른 고증을 예로 든다면 프로이드는 텔레파시가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원시적인 통신방법이라고 했어요.
꿈은 고대 통신수단의 흔적이며, 인류가 진화해오는동안 그 기능이
용불용설에 의해서 많이 감퇴되었다고 볼 수가 있죠.
아무튼 우리는 실비아의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있던 고통스러운 경험이나
기억이 꿈에서 튀어나오길 기대해야 하겠죠.
그 역할은 초능력을 지닌 사람만이 할 수가 있어요."
그제서야 박소장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편안히 앉는 자세를 취했다.
한얼이에게도 약간의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자.
실비아의 머릿속을 꿈을 통해서 들여다볼 수가 있다면 모든 것이
쉬워질 것이다.
여기까지 온 것만도 반은 성과를 거뒀다고 볼 수있다.
그런 능력을 가진 자와 박소장을 실비아가 있는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한다.
시간이 촉박하다.
이제부터는 무조건 부탁을 해야한다.
아름이가 죽은 원인을 알아내야만한다는 것을 느끼게 해줘야한다.
내 느낌이 그대로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분은 그런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이니까...'
한얼이는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박소장에게 매달리며 실비아에게 시도를 해보자는 부탁을 했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떠났을 때의 가슴 가득 퍼지던 공허함.
그 공허함이 다시 온 몸으로 퍼지는 순간 지금까지 억압되어있던 무의식이
파노라마처럼 한 장면 한 장면 떠오르며 이내 곧 사라져갔다.
입 밖에도 내지 않았던 아름이에의 처절한 사랑이 무의식을 치밀고 올라왔다.
정말 사랑했었구나!
무의식의 바닥에 깔려있던 아름이에의 사랑은 의식 속의 그것보다 훨씬
더 깊은 것이었다.
자신이 지독한 이 고통 속에서도 삶에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오직 한가지
이유는 이렇게라도 아름이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꾹꾹 참아왔던 상실에 대한 번민이 묘하게도 지금 분출구를 찾아 튀어
나온 것이다.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한얼이에게서 박소장은 이해 이상의 부담을
느꼈으리라.
그러나 한얼이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통쾌한 카타르시스였다.
다시 말해서 영혼이 씻겨져 정화되는 맑은 한풀이 굿같은 것이었다.
안타까운 청년의 마음을 박소장으로서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함께 서울로 올라가겠다는 말로 승낙의 뜻을 대신했다.
한얼이는 아마도 이 세상 누군가에게 언젠가는 터트릴 지도 모를 아니
터트릴 수밖에 없는 이 감정들에 다소 심하게 흥분한 자신을 이해해주고
어려운 부탁을 들어준 박소장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 미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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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리의 엄마인 강숙자는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조선 팔도의 무당의 어머니인 성모마고(저자 주:옛날 천신의 딸로 8명의 딸을 낳아
모두 무당으로 키워 팔도에 보냈다고 함)상에게 기도를 드리고 굿을 하기 위해서였다.
뱀사골의 물줄기를 하나로 묶어 흐르는 엄청강변을 따라 산 속의 호수와 같은 용류담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 강숙자는 넋굿을 시작했다. 신을 청하는 청신부터 시작했다.
그 다음 풍류와 음식으로 신을 만족스럽게 했고 그녀의 소원을 신에게 고하는 오신을 했다.
유리의 영혼이 저승으로 가고 유리의 몸이 다시 태어나 자기의 영혼이 그 몸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는 시점에서 강숙자는 몸을 부르르 떨었고 굿판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녀는 양손에 칼을 쥔 채 몸을 흔들어댔다.
자기의 의지대로가 아닌,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조종하는 듯한 몸놀림이었다.
땀으로 온 몸이 적셔진 그녀는 거의 탈진상태에 이르렀고 신을 본디 장소로 돌려보내는
송신으로 굿을 마감했다.
그리고 무슨 의미에서인지 칼을 땅바닥에 던져 칼 끝이 어느 쪽을 향했는가를 유심히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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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형사는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오후 5:00를 막 넘어가고 있었다.
핸드폰의 뚜껑을 열고 다시 한얼이에게 전화를 했다.
오늘 벌써 몇 번은 한 것 같은데 연결이 되질 않는다.
신경질이 솟구쳐 올라왔다.
"이자식 대체 어떻게 된거야?"
정기혁의 가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주차시키고 시트를 뒤로
제낀 채 멀뚱거린 것이 벌써 두 시간을 넘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정기혁을 찾아가지 않았다.
잠복근무는 이렇듯 늘 피곤한 것이었다.
하루종일 뒤를 밟아보기로한 날 한얼이라도 있었다면 무료하지는
않았을텐데...
궁시렁궁시렁 혼잣말도 해가며 지루한 시간을 달래고 있었다.
정기혁의 차트를 열람하는 것이 가장 급했지만, 밤마다 정기혁에게
붙여놓았던 경찰들의 미행에도 나름대로 결과 아닌 결과는 있었다.
밤마다 집에 가는 길에 집과는 방향이 다른 방배동의 어느 아파트
근처에서 서성거리다 떠난다는 것이었다.
그걸 놓칠 수는 없었다.
생각하되 뛰면서 생각하자.
그것이 양형사의 평소 지론이었다.
얼핏 정기혁이 가게 문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은 채 머리를 숙이고 보폭을 아주 좁게 걷는 것이
묘하게 보였다.
더운 날씨에 어울리지않게 그의 모습은 꼭 추위에 웅크리고 걷는 듯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먼 거리였지만 양형사는 그것을 감지할 수가 있었다.
그는 주변을 살피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짧은 보폭이, 그리고 머리를 앞으로 숙여 자신을 최대한 숨기려하는 것이
은연 중에 나타나는 제스쳐였다.
며칠씩 들락날락 거리던 경찰이 갑자기 나타나지 않으니 이젠 끝난건가
하고 마음의 안도도 왔을테지만 이면에는 확인해보고자 하는 심정이
고개들게끔 되어있는 것일테니까.
그는 100M정도 거리의 슈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오래 걸리지 않아 가게에서 나와 다시 천천히 비닐봉투를 하나
들고 그의 가게쪽으로 걸어갔다.
이번에는 훨씬 동작이나 걸음걸이가 부드러워 보였다.
확인할 걸 확인했다는 뜻일까?
"그래, 편안해라 이놈아. 편안해야 나한테 뭔가를 보여줄 것 아니냐!"
핸드폰을 애타게 꼭 쥐며 혼잣말을 계속 해댔다.
물론 시선은 잠시도 정기혁에게서 떼놓지 않고 있었다.
한얼이한테 이 사실을 빨리 알리고 싶어 애가 탈 지경이었지만 전혀
다른 곳인 대전에 가 있는 한얼이에게서 전화가 올리는 만무했다.
차 안의 라디오도 켰다가 밖을 서성거리기도 했다가 차바퀴를 괜히
차보기도 하면서 오직 정기혁이 나오기만을 승냥이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지루하기만하던 시간이 8:00를 막 넘겼을 무렵 드디어 정기혁이 다시
나왔다.
햄버거를 먹으며 허기를 달래고있던 양형사는 반가운 친구를 만난 듯
즐겁기까지했다.
어두웠지만 그 사이로 정기혁의 싸늘한 미소를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역력했다.
그러나 양형사의 긴장은 정기혁의 안도와 반비례했다.
먹던 햄버거를 그대로 종이봉지 안에 구겨넣은 후 짧은 심호흡과 함께
더욱 바짝 긴장의 끈을 조였다.
정기혁이 큰길쪽으로 걸어나가 택시를 잡으려는 듯 손을 휘젓는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아까는 보지 못한 검정 가죽가방같은 것이 어깨에 들려져 있었다.
택시에 올라타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한 후 양형사는 차를 출발시켰다.
빠르게 그러나 실수없이...
그것은 그의 단골 메뉴였다.
차 두 대 정도를 사이에 끼워넣고 유유히 정기혁이 탄 차를 뒤쫓았다.
차는 예상대로의 길을 가고있지 않았다.
택시는 정기혁이 며칠간 서성거렸다던 방배동쪽을 더 지나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정기혁의 집 방향도 아니었다.
놈은 분명 트릭을 쓴 것이다.
며칠간 서성거렸던 그 곳은 아무것도 아닐 것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은 놈의 실제 목적지일 가능성이 높았다.
'교활한 놈'
핸들을 잡고있는 양형사의 두 손에는 땀이 배어났다.
큰판을 휩쓸 카드를 쥐고 쓸어담을 순간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그런
심정이었다.
엑셀레이터에 지긋이 힘이 가해졌다.
- 이상한 행동
잠실 부근에 이르렀을 때 정기혁이 탄 택시가 서서히 오른쪽으로 꺽이고 있었다.
어느 아파트촌이었다.
아파트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서 그는 내렸다.
양형사는 그를 가로질러 입구로 먼저 차를 몰고 들어갔다.
택시에서 내려 멀찍이서 걸어 들어오는 정기혁을 룸미러로 보고 있었다.
정기혁은 누구를 만나러 온 것일까?
집까지 찾아올 정도라면 가까운 관계임에는 분명한데 누구일까?
무더운 날씨에 긴장까지 되다보니 이마와 등줄기에서는 연신 땀이 흐르고,
그것을 쉴새없이 닦아내느라 얼굴에서 손수건이 떠나질 않고 있었다.
그러기를 2-3분.
분명히 지금쯤은 입구로 들어서야 할 정기혁의 모습이 룸미러에서
사라졌다.
차에서 급하게 내려 입구 근처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찾아 보았지만
그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속았다!
눈 앞에서 그것도 가만히 앉아서 놓친 것이다.
온몸에서 땀이 비오듯 흘렀지만 닦을 생각도 않고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다.
담배를 꺼내 물었지만 가뿐 숨으로 담배연기가 기도를 심하게 자극해
담배 맛도 느낄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젠장!"
담배를 바닥에 내 팽개치며 막 몸을 돌리는 순간 눈에 익은 얼굴이
유리창 뒤로 언뜻 스쳐 지나갔다.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정기혁은 호프 집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양형사는 얼른 몸을 숨겼다.
다행히 정기혁은 양형사를 보지 못한 듯 그 자세 그대로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니, 저 녀석이 여기까지 와서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는거야?'
어쩌면 누구를 만나러 왔는지도 몰랐다.
양형사는 땀을 흘리며 그 호프집을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만나러 온 사람이 있었다면 벌써 왔었을 30여분이 훌쩍 지나 10:00가
넘어가고 11:00가 거의 다 될 때까지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인내의 한계가 올 무렵 정기혁이 그 호프집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확실히 미친 놈은 미친 놈이군. 혼자서 여기까지 와서 술을 쳐먹고...'
양형사는 정기혁이 접어든 비교적 큰 골목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뒤 쫓았다.
드디어 그가 목적지에 도달한 것 같았다.
술을 먹고 찾아가야 할 정도로 긴장되는 상대란 과연...
변심한 또 다른 애인? 아니면 원한 관계?
몇가지 예상은 정기혁의 다음 행동에서 모조리 빗나가고 말았다.
제법 그럴듯한 집 문앞에서 무엇인가를 확인한 후 그 집과 마주보고는
있지만 제법 떨어진 인적이 드문 사무실 건물같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지켜보는 그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걸까, 저 놈은?'
그의 최종 목적지는 그 건물인 것 같았다.
건물 현관 앞에서 좌우를 살피는 그의 모습이 현관문을 따는듯 하더니
곧바로 안으로 사라졌다.
그가 열고 들어간 현관문을 보며 양형사는 따라 들어갈 것인지
밖에서 지키고 있을 것인지를 망설였으나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5층인가 6층의 창문이 유난히 밝은 달빛 속에서 서서히 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정기혁이 현관에서부터 올라갔을 시간과 거의 일치했다.
틀림없이 정기혁일 것이다.
창문이 반쯤 소리없이 열렸다.
환한 달빛을 받고있는 창가에 가끔씩 나타나는 자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정기혁이었고 손에 들고있는 것은 망원경 같았다.
창문에 빛이 반짝거리는 것은 아마도 망원경의 렌즈가 달빛에 반사된
것이리라.
이 늦은 밤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그는 뭔가를 관찰하고 있다.
아까 잠깐 서성이던 그 집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 꿈
두어 시간이 더 지난 후 정기혁이 그 건물을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양형사 발 밑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히 쌓였다.
과연 정기혁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양형사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까지도 한얼이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정기혁이 두 시간여를 망원경을 갖고 꼼작않고 있던
지금은 닫혀진 창문과 건물의 위치를 몇 번이고 눈으로 새겨넣었다.
-----
꿈을 이어 받을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사람, 박소장 그리고 한얼이가
대전역에 도착한 시간은 밤이 늦은 시각이었다.
초능력자의 외관은 생각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흔히 가질 수 있는 선입견과 전혀 달리 극히 평범한 외모에 말수가
비정상적일만큼 없다는 것 뿐이었다.
병원에 도착할 수 있는 최대의 예정시간이 새벽 1:00경.
실비아가 자고 있다면,시도하기에 최적의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차에서도 한얼이는 흥분상태를 가라 앉히기가 힘들었다.
금방이라도 뭔가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한얼이의
가슴 속에서 꿈뜰거렸다.
초능력자에게 몇마디를 던져 보았지만 그는 의례적인 말 외에는 거의
하지를 않았다.
물론 그를 부른 박소장은 그의 그러한 면을 잘 알고 있는듯 개의치 않았다.
한얼이는 그것을 나름대로 이렇게 해석했다.
결전의 순간에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아끼고 있는 것이라고...
한가지 다행스러운 사실은 그도 이 일자체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배우긴 했지만 꿈이라는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고 있었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의 세계가 글로써 또는 강의로써 머리에 주입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단 한번의 이런 경험이 백 번의 강의보다 더 생생하게 터득될 것이다.
궁금한 점이 자꾸 떠올라 옆 좌석에서 지긋이 눈을 감고있는 박소장에게
말을 건넸다.
"도착해서 실비아가 잠을 자고 있으면 바로 시작할 수 있는 건가요?"
"물론이죠. 그렇지만 그렇다고해서 바로 결과가 나온다곤 할 수 없죠.
수면 중이라고해서 항상 꿈을 꾸고있는 것은 아니예요.
거의 속파수면기에 꿈을 꾸는거죠."
박소장은 그의 전문분야에 관한 지식을 자상하게 설명하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지루할 수도 있는 것이었지만, 지금의 한얼이로서는 금싸라기같이
소중한 보물들이었다.
"속파수면기라면 REM SLEEP을 말씀하시는거죠?"
"잘 아는군요. 아, 참 의대생이라고 그랬죠?
알기 쉽게 설명하려던 참이었는데 다 알고 있다면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군요."
박소장이 흥이 떨어진 듯 말을 거두려고 했다.
"아니요, 소장님. 용어 정도만 아는 거예요.
설명을 좀 더 해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내용은 하나도 모르거든요."
"좋습니다. 간략히 얘기하자면, 수면시간을 대략 8시간 정도로 볼 때
서파수면과 속파수면으로 나눌 수가 있지요.
속파수면은 전체 수면시간의 20% 정도에 해당되죠.
속파수면에 나타나는 현상에는 몇 가지가 있어요.
그 때는 육안으로도 이 사람이 지금 속파수면기에 있구나 하는걸
알 수가 있죠. 꿈의 80%정도는 이 속파수면기에 나타나요.
이때는 목이나 그 밖의 근육긴장이 완전히 사라지질 않죠.
그리고 안구가 빠르게 움직이고 사지의 근육이 돌발적으로 수축하기도
하고, 또 외부에서 주어지는 자극에도 잘 반응하지 않아요.
꿈이란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매일 꾸는 것이지만 사실 많은 것들을
암시하고 가르쳐주는 매개체가 되기도 하죠.
꿈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을
무의식 속에서 반복 기억시켜 주는 소중한 장치라고 할 수 있죠.
이를테면 성인의 경우는 속파수면기가 전체의 20%정도에 불과하지만
갓난아이의 경우에는 그 비율이 50%를 차지한다고 하죠.
그 뜻은 아직 낯설은 세상의 모든 것을 눈 뜨고 본 후에 꿈을 통해서
무의식 속의 기억을 반복시키고자 하는 위대한 조물주의 작품 중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죠.
꿈의 역할은 또 있어요.
무의식이나 잠재의식 속의 것을 마음의 눈을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
시켜주는 것이 바로 꿈이예요.
또한 외부로부터의 자극이나 과거에 겪었던 체험, 마음 속의 소망이나
공포같은 것도 종종 꿈으로 나타나죠.
실비아의 꿈을 제대로만 읽어낸다면 그 학생의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욕망과 불안, 심지어 그 불안 속에 있는 낱개의
심리요소까지도 인지할 수 있을 지 몰라요."
장황한 박소장의 설명은 거기서 일단락이 되었다.
그가 마치 강의를 하는 교수처럼 보였다.
그 어떤 유능한 교수보다 명강의를 하는 그런 교수로 여겨졌다.
REM SLEEP!
아름이의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기대감을 가지면서 남은
서울까지의 시간동안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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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도착시간은 예정시간과 거의 일치했다.
담당자의 허락을 받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실비아의 정신상태상 1인 병실을 이용하고 있는 관계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시도
다만 실비아의 침대 옆에 있는 보호자 침대에서 근심에 쌓여 망연히
눈을 뜨고 누워있는 실비아의 어머니에게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했다.
단, 납득할 수 있게끔 하기위해서 선의의 거짓말도 보탰다.
단순히 실비아의 꿈을 읽어내려 하는 것만은 아닌
'PSG 검사'도 곁들일 수 있는 유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환자인 실비아에게 혹시 해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호자로서는 당연했다.
"PSG 검사라는 것이 뭐죠?"
석연치않다는 듯이 실비아의 어머니가 물었다.
"자는 동안 변화하는 몸의 상태를 확인해서 정상적인 혹은 병적인
변화를 포착할 수 있습니다."
박소장이 대답해 주었다.
"그 검사를 해서 뭘 알 수 있는거죠?"
실비아의 어머니는 아직도 미덥지않다는 듯이 물어왔다.
"에ㅡ, 진단할 수 있는 병으로는 폐색성수면무호흡증(저자 주;수면 중에
호흡에 장애를 받는 질환)이나 주기성사지운동장애(저자 주;주기적으로 팔,
다리가 마비되는 질환) 혹은 기면증(저자 주;잠을 억제할 수 없는 질환)이나
수면발작증 같은 것의 여부를 밝혀낼 수 있습니다."
박소장의 근엄하고도 인자한 외모나 말투가 실비아의 어머니에게
신뢰를 준 것이 확실했다.
드디어 허락이 떨어졌고 이미 잠들어 있는 실비아에게 행해질 실험에는
더 이상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만일 실비아에게 조그마한 해라도 입힐 가능성이 있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으리라.
한얼이 스스로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나 그 결론에는 100%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합리성을 부여했다.
실비아와 아름이의 사고원인을 알아내기만 한다면
그런 거는 상관없다고...
한얼이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실비아의 머리에 전극을 연결했다.
그 전극의 끝은 뇌파 탐지기에 연결되었다.
"뇌파는 뇌피질 내 신경세포의 억제성 및 흥분성으로
인한 전위에 의해서 생성됩니다.
수면과 각성을 관할하는 부위는 뇌의 시상하부와 뇌간이라는 곳이죠."
뇌파 탐지기를 장치하면서 박소장은 알아들을 듯 말듯한 몇 마디의
전문용어들을 자꾸 사용했다.
아마도 실비아의 어머니에게 안도감을 주려는 그의 배려인 것 같았다.
아무 염려 하지말라는 그런 뜻이 담긴...
실비아쪽이 끝나고 다음은 옆의 침대에 가지런히 누운 초능력자에게도
똑같은 장치가 연결되었다.
박소장의 신속한 동작이 믿음직스러웠다.
"꿈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초자아의 잠재의식의 정신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건한 박소장의 마지막 묵시적인 한마디를 끝으로 방안의 불은 옅은
미등으로 바뀌고 모든 준비는 완료되었다.
초능력자와 실비아 두 사람이 깊고 고요하게 잠을 이루는 일만 남아 있었다.
모두들 숙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 재시도
누군가가 한얼이의 몸을 흔들었다.
한얼이는 번쩍 눈을 떴다.
잠깐 잠이 들었나 보다.
제일 먼저 박소장이 그리고 옆에는 초능력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을 바라보자 자고 일어났을 때의 멍한 기분은 사라졌다.
그들의 실험 결과를 듣고 싶었으나 그들은 별로 말이 없었다.
대신 그들은 한얼이의 손을 이끌고 병원 밖으로 나왔다.
상쾌한 아침 공기가 정신을 맑게 했다.
시계를 보니 7:40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얼군, 오늘 실험은 별로 큰 소득이 없는 것 같군."
박소장이 심호흡을 크게 하며 한마디를 했다.
"왜죠? 혹시 꿈을 꾸지 않았다는 건가요?"
한얼이가 답답해하며 박소장과 초능력자 두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크게 말했다.
"아니, 그런게 아니고 아마 이 분의 초능력이 오늘은 크게 발현이
되지 않은 것 같아요. 생리적으로나 체력적으로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로 실험을 했기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박소장의 말이었다.
"그럼 아무것도 본 것이 없나요?"
가장 애가 타는 건 한얼이 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요. 몇 장면은 생각이 나요. 그러나 그것이 명확한 것이 아니고
해서 분석할 만한 가치가 없을 것 같다는 거죠. 내 꿈이었는지 그
아가씨의 꿈이었는 지도 확실히 구분 못하겠고... 장거리 여행으로
초능력이 평소보다 떨어졌던 것 같아요. 오늘까지 제가 머무르며
다시 도와 드리죠. 오늘은 가능할 거예요."
초능력자가 어제 이후로 가장 길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한얼이가 큰 소리 칠 수 있는 상황이 결코 아니었다.
이렇듯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감지덕지한가!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저로서는 정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만 너무
폐가 되지는 않을지..."
한얼이로서는 정말 두사람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힘이 되어줄 지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아니야, 한얼군. 이왕에 돕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오늘 하루 더
시간 못내겠는가! 자ㅡ자, 어디가서 해장국이나 한 그릇 합시다."
박소장이 분위기를 바꾸는 의미에서 큰소리로 모두를 격려했다.
"그런데 오늘 꾸신 꿈은 도대체 어떤거였나요?"
혹시라도 한얼이가 알고 있을 지도 모를 어떤 것은 없었나 하는 생각에서
병원 밖을 터벅터벅 걸어나가며 초능력자에게 물었다.
"내가 본 것은 확실치는 않은데 두 여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울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또 하나는 아주 옛날 유럽의 중세시대같았어요.
어떤 남자아이... 그런 정도였던 것 같아요."
"그 여자들 얼굴은 기억 안 나시나요?"
혹시 실비아의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한얼이의 생각이었다.
"얼굴은 전혀 기억할 수가 없어요. 남자아이의 모습도 기억이 안나요."
초능력자는 몹시 무안해하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다.
오늘 하루 더 기회는 있으니 다시 한번 그의 능력에 기대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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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간 양형사는 청량한 아침 공기를 폐부 깊숙히 들이 마시며
낡은 차의 시동을 걸었다.
단 한번에 시동이 걸리긴 실로 오랫만이었다.
'부르릉 부르릉...'
시동 소리도 경쾌하게 들렸다.
일이 잘 풀리려나 하는 기분좋은 느낌이 왔다.
아무래도 정기혁의 차트를 포기할 수 없었다.
사건을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는 유일한 행로는 역시 그것 밖에는 없질
않은가.
그러기 위해서는 또 한번 김상우를 만나야만 했다.
별로 내키지 않는 상대이긴 했지만 감정적인 사적 이유로 큰 것을 포기
할 수는 없었다.
시계를 들여다 보고 쓸 수 있는 시간을 대충 체크한 양형사가 차를 하나
병원으로 몰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기위해 기다리면서 김상우를 회유할 만한 시나리오를 구
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딱딱하고 사무적인 그를 합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방편
이 뭐가 있을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 속에서 내리는 몇몇 사람들.
살짝 비켜서며 무심코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중의 낯 익은 얼굴 하나.
애써 짜내려던 시나리오는 그 중년의 여인의 얼굴에 가려 뒤죽박죽이되
어버리고 말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는 그만 그 여자를 어디서 봤었을까하는
의구심이 구상했던 김상우와의 할 말을 뒤덮어 버렸다.
그녀도 분명히 양형사를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눈이 마주치자 얼른 얼굴을 돌리고 쏜살같이 밖으로 걸어가 버린 낯익은
여자.
엉겁결에 도달해 버린 신경정신과.
준비고 뭐고 다시 한번 부딪치는게 상책이었다.
양형사는 더 망설이지 않고 방문을 노크했다.
아무 대답도 없는 김상우의 방.
다시한번, 이번에는 약간 세게 두들겼다.
그제서야 간호사가 삐끔 문을 열고 양형사를 맞아 주었다.
"과장님 좀 뵈러 왔는데요."
"과장님, 세미나 가셨어요."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수화기로 보아 누군가와 통화중인 것 같았다.
"언제쯤 들어오시죠?"
"오늘은 못 들어오실 것 같은데요."
퉁명스러운 그녀의 목소리에서 낯선 방문객이 어서 사라져 줬으면 하는
기색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다시 돌아나오며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선 순간 양형사는 용케도 아까 봤
던 중년여인의 기억을 떠 올릴 수가 있었다.
'아하!' 최유리의 어머니.
아니 그녀가 여긴 무엇 때문에?
또 하나의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양형사를 괴롭혔다.
그러나 양형사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스트레스때문이었는지 애써 그 의문점에
비중을 두려하지 않았다.
그는 병원을 빠져나와 잠실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한얼이한테서 아직까지도 연락이 없다는 것에 약간의 짜증이 났다.
어젯 밤과 똑같은 길임에도 불구하고 차는 시원스럽게 잘 빠졌다.
한얼이에게서 연락만 온다면 더욱 기분좋게 그 아파트까지 도착할
수 있었을텐데...
양형사는 어제와 똑같이 그 길을 되짚어보기로 했다.
차를 그 아파트에 세워 놓고 정기혁이 있던 호프집을 지나 오른쪽으로
제법 큰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호프집의 셔터는 내려져 있었고 길은 비교적 깨끗했다.
똑같은 길을 걷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아마도 힘들었던 하루를 접는 밤과 새롭게 시작하는 아침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우중충하다고 기억되었던 그 주택가는 아침의 상쾌한 공기 탓인지
무척 깨끗하고 어떻게 보면 세련된 곳이라고까지 여겨졌다.
똑같은 장소와 사물이라도 시간과 관찰자의 시각에 따라 이렇게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 신기했다.
곧게 뻗은 길을 걷다가 정기혁이 잠깐 서성였던 2층짜리 양옥주택
앞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곧장 걸어서 바로 어제의 그
건물까지 걸어갔다.
그 건물은 7층 짜리였다.
1층은 한의원이었고 조그마한 사무실들이 입주해 있는 그런 건물이었다.
정기혁이 망원경을 들고 서 있던 5층의 그 창문을 관찰하기 위해,
양형사가 서 있던 곳에는 아직도 피우고 버린 담배꽁초가 수북했고
용변자국도 그대로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똑같은 곳에서 5층의 창문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정기혁이 거기 그대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제의 그 지독했던 더위와 기다림의 고통이 물씬 되살아났다.
어제와는 다르게 자물쇠는 열려져 있었고 관리인인 듯한 초로의 노인이
바닥을 쓸고있다가 아침 일찍부터 찾아 온 낯선 사람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양형사가 관리인에게로 바짝 다가섰다.
"무슨 일이오? 아직 출근한 사무실은 없는데..."
그 관리인이 퉁명스럽게 양형사를 맞았다.
아침 일찍부터 그런 식으로 염탐하듯 찾아온 사람을 반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혹시 이런 사람 아십니까?"
양형사가 신분증과 정기혁의 사진을 같이 꺼내서 관리인에게 보여주었다.
관리인은 신분증을 보고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 추측
아침 일찍부터 찾아 온 형사!
기분 좋을 리 없었지만 협조해야만 했다.
관리인은 천천히 안경을 꺼내 쓴 후 건성으로 사진을 들여다 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오만..."
"자세히 좀 봐 주시겠습니까? 중요한 일이니까 확실하게 확인해 주셔야
합니다. 이 건물 내의 사무실에 들린 적이 있습니까?"
양형사가 조금 강하게 말했다.
성의를 갖게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는 요모조모 그 사진을 살펴보는 것 같았다.
"아니예요. 처음 보는 사람이예요. 내가 여기 10년이상 있었수.
늙었어도 정신은 말짱해서 본 사람은 다 기억해요. 여기 한번도 온 적
없는 사람이요."
관리인이 자신있다는 듯 단언했다.
그 정도면 됐다.
한두번 왔었다한들 그것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정기혁과 이 건물과는 별다른 연관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런 곳에 밤 늦게 찾아와서 어떤 행동을 한다는 점.
바로 그 점이 중요했다.
뭔가를 훔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저 5층 창문이 있는 저 곳은 뭐하는 곳이죠?"
관리인이 양형사의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고정시켰다.
"거긴 화장실인데요. 거긴 왜요?"
화장실이라면... 자명해진다.
정기혁과 이 건물과 관련성은 없다고 봐도 된다.
다만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한 도구로 쓰여졌을 뿐이다.
"잠깐만 들어가 봐도 되겠죠, 저 화장실에?"
관리인이 대답도 하기 전에 양형사는 훌쩍 건물 안의 엘리베이터로
몸을 실었다.
5층에서 관찰한 것이 무엇이었을까를 확인해야 했다.
과연 그 위치에 있는 것은 조그마한 화장실이었다.
창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앞을 보니 하향각으로 첫 눈에
시야에 잡히는 곳은 바로 그 2층 양옥집이었다.
그 집에서도 시선이 가장 편안하게 닿는 곳은 거실인듯한 공간과
그 옆의 침실이었다.
반쯤 열려진 창 사이로 민망할 정도로 시야가 잘 확보되었다.
정돈이 잘된 집이었다.
망원경이 없어도 보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정기혁은 그 집의 무엇인가를 관찰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을 이렇게 찾아냈다는 것이 아닌가?
놀라운 집중력이였다.
이렇게까지 적합한 곳을 찾아내기까지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만한 노력을 하면서까지 저 집을 지켜보아야 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혹시...?
생각은 어렵지않게 그 곳에 가서 멈추었다.
살해 대상!!!
조그맣게 시발점이 되었던 의심은 눈으로 확인해 갈수록 머릿속에서
엄청나게 크고도 빠른 속도로 증폭되며 굳어져갔다.
일을 저지르기 위한 준비 과정일 가능성이 크다.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었다.
아까 왔던 길을 쏜살같이 뛰어갔다.
'딩동딩동' 정신없이 여러번 초인종을 눌러댔다.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대문 안에서 앙칼지게 튀어나왔다.
그런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결혼 한 중년의 부부.
40대 초반의 화목한 가정, 경제적으로나 그들의 직업상 혹은 사회적
통념상의 어떤 잣대를 갖다대도 문제를 일으킬만한 요소는 아무것도
없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여자아이...
모두가 출근하고 청소를 하고 있던 그 집의 파출부가 알려준 것은
그런 것들이었다.
남편의 직업은 교수, 아내의 직업은 내과 의사.
듣기만 해도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그런 소위 말하는 지식층의
가정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해서 정기혁의 목표가 되었을까?
너무 어울리지 않는 상호관계였다.
어쨌든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했다.
정기혁이 노렸을 대상을 압축시켜야만 했다.
당연히 아내쪽을 택했다.
최유리가 여자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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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마
파출부가 가르쳐 준 병원은 그 집으로부터 가까운 곳에 있었다.
차로 20여분을 달려 쉽게 찾아낸 그 병원은 조그마한 내과의원이었다.
여의사의 이름은 김재숙.
간호사 두 명과 임상병리사 그리고 원장으로 구성된 의원이었다.
형사라는 신분을 바로 드러내서는 안될 것 같았다.
환자로 가장해 김재숙을 만나보는 방법을 선택했다.
환자는 꽤 많았다.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려야했다.
양형사는 병원을 체질적으로 싫어했다.
흰색 가운만 봐도 알레르기 반응이 생겼고 약 냄새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에게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애써 다른 생각을 했다.
아니 굳이 애를 쓰지 않았음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어느새 그런
생각들이 들어 앉았다.
반드시 한번쯤 생각해 봐야할 것이 있다.
만약에 정기혁이라면... 그 놈이 실비아에서부터 최유리까지 그리고
또 이 여의사를 노리고 있다면...
그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궁금한 사항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이 먹이감을 골라낸 것일까?
또 실비아와 아름이는 어떻게 알게 됐을까?
우연히?
그럴리는 없다.
우연히 어울리게 되기에는 분명히 교류할 수 있는 공통적인 부분이 없다.
여대생과 공구상, 여의사와 공구상.
전혀 어울리지가 않는다.
먹이감의 선택 기준의 공통점을 찾아내야 한다.
"양두혁씨 들어오세요."
그를 부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몇 번은 불렀을 거예요."
간호사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양형사를 안내했다.
친절한 병원.
이 곳에 손님이 많은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 보였다.
간호사의 상냥한 미소만큼 원장실의 여의사 김재숙의 미소도 상쾌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김재숙의 미모는 훨씬 뛰어났다.
첫 대면의 그 황홀함은 오래오래 기억 될 것 같았다.
도저히 40대 초반으로 생각될 수 없을 만큼 젊음을 간직하고 있는
도발적이면서도 기품있는 아름다움의 소유자였다.
정기혁의 기준은 미모였을까?
단지 그 이유뿐이었을까?
젊음과 미모 두가지 다는 어떨까?
아무래도 정기혁의 차트에 많은 것이 숨어 있을 것 같았다.
"어디가 아프시죠?"
당연한 의사의 질문이 생소하게 들렸다.
어떻게 둘러댈 지를 생각해 뒀어야 했다.
가슴쪽이 적당할 것 같았다.
그 순간에 그런 생각이 떠 오른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생각해 보니 평상시에 가래가 끓고 가슴이 답답했던 것 같기도 했다.
"폐가 시원치가 않은 것 같아서요."
가슴 부위를 지긋이 누르며 의사를 쳐다보았다.
"담배 피우시나요?"
그 여의사가 청진기를 귀에 꽂으며 옷을 위로 걷어올릴 것을 요구했다.
모든 것을 잊고 그 여의사의 손길에 자신을 맡기고 싶었다.
'여자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지적인 매력이외에도,
보여지는 모습 그 자체로 많은 것을 판단하게 만든다.
아름다운 여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남자를 황홀하게 한다.
윗옷을 걷어 올리며 양형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몰핀처럼 뇌를 녹여내는 여자의 신비로운 힘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청진기의 차가운 감촉이 서늘하게 가슴에 닿았다.
곧 이어 X-RAY촬영.
이렇게까지 하니 정말 폐에 이상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플라시보 효과'라고 TV의 건강 코너에서 본 기억이 났다.
예를 들면 두통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영양제를 두통약이라고 말하고
먹여도 그 두통이 없어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건 반대의 경우가 아닌가' 라고 생각되자 피식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X-RAY실에서 나오자 간호사가 다시 밝은 미소로 대기실에서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했다.
X-RAY 결과가 나올 때까지 조금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도 덧 붙였다.
예쁜 카페처럼 꾸며 놓은 대기실에는 아까보다 손님이 몇명 더 와 있었다.
벽 쪽으로 눈을 돌렸다.
병원이 으례히 그렇듯이 벽에는 의사의 이력을 자랑하는 출신 학교와
유학을 갔었던 듯 노회한 외국 의사들과 나란히 찍은 기념사진 등등
액자가 여러 장 걸려 있었다.
출신 학교?
다시 한번 흘려 보았던 졸업장을 바라보았다.
낯이 익은 졸업장이었다.
어디서 봤던가를 기억해 내는데는 잠깐이면 충분했다.
졸업 연도마저 똑같은 숫자로 쓰여 있었다.
김상우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정기혁을 치료했던 정신과 전문의 김상우의 방에 걸려 있던 졸업장과
똑같은 것이 분명했다.
우연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그만일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의 육감은
그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미묘한 시기에 김재숙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정기혁을 통해 등장했고,
김상우라는 의사와 희미하게나마 관련 있는 듯한 그래프를 그리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이렇게 난마처럼 얽히며 벌어지고 있는 걸까?
양형사는 흥분도 긴장도 아닌 가슴 밑 바닥을 타고 흐르고 있는
기류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굳이 그것을 말로써 표현하자면 본능이 아니었을까!?
두려움보다 더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심연의 본능이
자극받고 있었다.
자칫 자신을 놓아 버릴지도 모를 정도의 강렬한 본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