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하서(洪河瑞)
[생졸년] 1683년(숙종 9)~1741년(영조 17) / 향년 5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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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랑 홍공 묘갈명(佐郞洪公墓碣銘) - 이재(李縡)
나는 홍 의령[洪宜寧, 홍백순(洪百順)] 선생을 위한 묘비문을 쓰고서 얼마 뒤에 박성원(朴聖源) 군이 지은 좌랑공의 행장을 읽어보니, 공이 바로 의령 선생의 현손이었다. 아! 의령 선생은 판결공[判决公, 홍봉세(洪奉世)]을 조부로 두었고 공 또한 의령 선생을 조부로 두었다. 후손이 선조를 잘 계승하는 경우는 고금에 드문 일인데, 홍씨 가문은 어찌 이리도 현인이 많은가.
공의 휘는 하서(河瑞)요 자는 연일(演一)이니 남양(南陽) 사람이다. 을유년(1705, 숙종 3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병오년(1726, 영조 2) 문과에 급제하였다. 공은 본래 명경과(明經科)를 전공하였는데 획수(畫數)가 부족한지라 제술과(製述科)로 합격하여 승문원에 분관되었다.
경술년(庚戌年,1730,영조 6) 수석 박사로서 분관을 주관하였다. 이때 정시(庭試)의 신방(新榜)에 대해 국론이 시끌벅적했는데 고관(考官) 이덕수(李德壽,1673~1744)의 아들 이산배(李山培,1703~1732)에 대한 말이 특히 심했다.
이덕수의 지위가 높아서 사람들은 감히 따지지 못했는데, 공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힘써 막아내어 산배는 결국 교서관으로 돌아갔으니 사론(士論)이 통쾌하게 여겼다. 그 무리가 공을 논핵하여 심문하기를 청하니, 공은 진술서에 곧이곧대로 말하고 흔들리지 않아 결국 죄를 받아 삭직당하였다. 물러나 고향 집에 은거하면서 종일 단정히 앉아 독서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집이 매우 가난하여 거친 밥도 제대로 먹질 못하였지만 편안하게 생각하였다.
계축년(癸丑年,1733,영조 9) 부친상을 당하여 정도에 몸을 상할 정도로 슬퍼하였다. 상복을 벗게 되었을 때 친지가 벼슬에 나아가라고 권하면 공은 대답하기를,
“부모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사람이 지금 관직을 얻은들 누구와 함께 그 영광을 누리겠습니까.”
하였다. 문을 닫고 자숙하며 수년 동안 한 번도 도성을 출입하지 않았으니, 서재의 편액을 가은(稼隱)이라고 하였다.
정사년(丁巳年,1737,영조 13) 여름에 고을 사람이 마침 당시의 정승집을 방문하였다.
당시의 정승이 6품에 오른 문관은 거의 다 부직(付職)되었다는 얘기를 하자, 그 사람이 말하기를
“저희 고을에 홍 아무개라는 자가 있는데, 6품에 오른 지 5, 6년이 지났는데도 단지 사과(司果)의 허함(虛銜)만 있습니다.”
하였다.
당시의 정승이 괴이하게 여겨 정리(政吏)를 불러다 물어보니, 정리가 대답하기를
“이 사람은 죽은 지 이미 오래입니다.”
하였다.
당시의 정승이 그가 죽지 않았다고 알려주어 공은 비로소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다. 공은 객지살이 수개월 만에 결국 풍비(風痺)에 걸려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기미년(己未年,1739,영조 15) 사헌부 감찰, 예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경신년(庚申年,1740,영조 16) 현릉 영(顯陵令)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에 병조로 옮겼는데 또 사직을 청하여 체직되었다. 신유년(辛酉年,1741) 8월 18일 세상을 떠나니 공이 태어난 계해년(癸亥年,1683, 숙종 9)으로부터 59년이 되는 해였다.
공은 어려서 고성 군수(高城郡守)를 지낸 이식(李栻,1659~1729)에게 수학하였는데, 의리(義理)와 관련된 여러 서적을 공부한 이후에는 궁하게 지내며 송독하는 일 외에 어떤 일도 일삼지 않았다. 성명(性命)과 같은 심오한 이치에 대해서 마음으로 깨달아 묵묵히 아는 것이 많았는데, 일찍이《심경》을 작은 책자에 정사(凈寫)하여 출입하면서 살펴보았다.
자신을 단속하고 마음을 세우는 요체와 집안에서 일을 처리하는 방도는 한결같이 예법을 따랐으니, 공을 아는 자는 공이 가학을 실추시키지 않았다고 하였다. 판결공 휘 봉세(奉世)는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뛰어난 제자로 선생이 기묘사화에 희생되었을 때 상사(喪事)를 주관하였으니, 홍씨의 가학이 실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성품이 졸렬하여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는데, 공만은 기미(氣味)가 서로 가깝다고 여겨 나와 왕래하며 지냈다. 때론 종일토록 담론하기도 했는데 도량의 아정함과 언의의 엄정함이 실로 남들이 미치지 못하는 경지였다. 나는 간간이 남들에게 말하기를,
“홍 아무개는 그 사람됨이 옥과 같아 옥당에 있어야 마땅한 사람이네. 하물며 세덕(世德)이 저와 같은 경우에랴.”
하였는데, 듣는 사람은 대부분 믿지 않았다.
용인(龍仁)에는 충렬서원(忠烈書院)과 심곡서원(深谷書院) 두 개의 서원이 있는데, 내가 외람되이 산장(山長)을 맡게 되었다. 하루는 웃으면서 공에게 말하기를,
“세상이 공을 알지 못하고 공 또한 세상에 아무런 뜻이 없으니, 나를 위해 강사(講事)를 맡아주지 않겠는가.”
하였다.
공은 정암의 사당이 있는 심곡서원이 다른 서원과 다르다고 생각하여 한두 번 강회에 참석했으나 병으로 지속하지 못하였다. 공이 일찍이 성균관에 있을 때 마침 문묘종사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 어떤 이가 박 현석(朴玄石, 박세채)도 함께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공은 불가하다는 주장을 견지하여 다만 두 분의 송 선생(宋先生)만 종사하기를 청하였다.
평소에는 시사에 대해서 일절 말하지 않았으나 때때로 근심하고 강개한 마음이 일어나 탄식을 금치 못하고 말하기를,
“내가 언관의 자리에 있다면 응당 유자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崇儒重道〕을 제일의 의리로 삼을 것이다.”
하였으니, 언론의 대체가 이와 같았다.
공은 청렴함을 스스로 지켜 명분이 없는 음식이나 의롭지 못한 선물은 일절 취하는 법이 없었고, 득실과 영욕에 대해선 담박하여 마음에 두지 않았으니, 온 세상 사람들이 명리에 급급해하는 시대에 공이 곤궁하게 살았던 것은 본디 형세상 당연하다. 하늘 또한 공의 수명을 연장시켜 그로 하여금 구도(求道)의 뜻을 다 펼치지 못하게 하였다.
옛날의 이른바 세상 사람들과 합치되지 않으면 필시 하늘과는 합치된다는 것이 과연 어디에 있단 말인가.
공의 초취(初娶) 여산 송씨(礪山宋氏)는 1녀를 두었는데 사인 안석집(安錫楫)에게 시집갔으며, 후취(後娶)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1남 천택(天澤)을 두었다.
공을 광주(廣州)의 율촌(栗村)에 안장하였다. 나는 지금 세상 사람들 가운데 조금이나마 공을 아는 자라고 생각하기에 한마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어 마침내 공을 위해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내 옥처럼 온윤한 저 사람을 생각하노니 / 我懷伊人兮溫如玉
늙도록 가은이 있는 고을에서 곤궁히 살았구나 / 白首窮餓兮稼隱之里
쑥대가 자라도록 두문불출하니 / 掩席門兮蓬蒿
도성은 약수만큼 아득하였네 / 朝市邈其弱水
공은 이미 이 세상에 뜻이 없었으니 / 公旣無意於斯世
남들이 이미 죽었다고 전하기도 하였네 / 人或相傳爲已死
저들은 밤낮으로 내달리며 / 彼奔騖於日夜
명리에 성명을 내버렸네 / 決性命於名利
그러나 사단은 민멸되지 않으니 / 然四端之未泯
공의 행실을 보면 부끄러워하지 않겠는가 / 視公行兮得無愧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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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좌랑 홍공 묘갈 :
저자가 홍하서(洪河瑞, 1683~1741)를 위해 쓴 묘갈문이다.
[주02] 나는 …… 쓰고서 :
본서 제31권에 수록된〈현감 홍공 묘갈(縣監洪公墓碣)〉을 가리킨다. 홍백순(洪百順)은 인조반정 이후 포의의 신분에서 의령 현
감(宜寧縣監)에 제수되었다.
[주03] 획수(畫數) :
각종 시험에서 얻은 점수를 가리키기도 하고, 참여한 일수를 가리키기도 한다. 사학 유생 및 경향의 유생을 과시(科試)하여 얻은 성
적, 각 아문의 취재 시험에서 얻은 성적 등에 두루 사용하는 용어이다.
[주04] 허함(虛銜) :
실제 직무가 없는 명칭만의 관직을 이른다.
[주05] 쑥대가 자라도록 :
곤궁하게 사는 처지를 뜻한다. 후한(後漢)의 은자 장중울(張仲蔚)은 박학다식하고 시부(詩賦)에 능했는데, 어려서부터 같은 고을의
위경경(魏景卿)과 함께 몸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늘 궁핍하여 그가 사는 집에는 사람이 묻힐 정도로 쑥대가 우거졌다고 한
다.
[주06] 약수(弱水) :
아주 먼 거리를 뜻한다. 신선이 산다는 중국 서쪽의 전설적인 강으로, 중국의 장안에서 서남쪽으로 3만 리 또는 4만 리의 거리에 있
다고 전해진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