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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은 창조를
경남 남해군 서면 서호리
부녀지도자 제11기 곽 금 화
제가 살고 있는 곳은 우리나라 남단 남해라고 하는 큰 섬이지만 유명한 남해대교로 인하여 차츰 육지로 변모해 가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옛날부터 악착스럽고 부지런하기만 합니다.
우리 마을은 읍내에서 약 6km 서쪽으로 걸어오면 국도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바다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농사를 주로 하고 있는 가난한 마을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26년 전 열아홉 살 때에 이 마을에 시집을 왔습니다. 그 때 저의 남편은 농과 대학생이었고 양친부모와 시동생이 다섯이나 있었습니다. 대학을 나오게 되면 남들과 같이 좋은 데 취직하여 알뜰살뜰히 행복하게 살겠지 하는 부품 꿈을 가지고 시집을 온 저는 남편의 결심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자기는 졸업하면 축산을 부업으로 하고 영농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농촌에 살면서도 머리만 잘 쓰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조용히 자기의 계획을 말해주었습니다.
졸업 후 여러 선배님들의 취직 알선도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남편은 양계와 한우비육 사업으로 공무원 이상의 소득을 올렸는데, 그래도 저는 울상이 되어 짜증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 여러 가지 양묘사업을 했는데 이것도 상상외로 수입을 많이 가져왔습니다. 저희가 하는 일을 마을 사람들도 차츰 따라 하기 시작하여 집집마다 소를 기르고 양계를 하여 자녀들을 중고등학교에 보내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내가 상당히 부지런한 마을로 변모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1963년 재건국민운동이 시작되어 우리 마을에도 부녀회가 조직이 되었고 비좁은 농로를 리어카가 다닐 수 있게 넓히고 부녀회에서는 절미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한 때 한 줌의 쌀을 모으면 하루에 1홉이 되고, 한 달을 계속하게 되면 3 되가 되었습니다. 이 쌀을 걷어서 돈과 바꾸어 읍내에 있는 농협에다 예금하여 집집마다 통장을 만드는 것인데, 그 때만 해도 교통이 나빠서 저는 아이를 업고 6km를 걸어서 다녀와야 했습니다. 굉장히 힘들고 고단했으나 돈이 불어나는 그 재미로 우리들은 1년 반을 계속했는데, 저축실적이 남해에서 우수하다고 하여 농협에서 재봉틀 1대를 부녀회원 앞으로 상금으로 주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게나 기뻤던지 서로 번갈아 가면서 재봉틀을 어루만져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3개월 후 경로회에서 저희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재봉틀을 팔아 처분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저는 온 몸의 힘이 빠지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배신을 당한 것 같은 분노를 누를 길이 없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한사코 예금한 돈을 찾아 달라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왜정 때도 저금은 했지만 한 푼도 못 찾았으니 하루 빨리 찾아서 쓰는 것이 옳다고 했습니다. 실의에 빠진 저도 자포자기로 농협 사람을 졸라서 예금해 둔 돈을 찾아서 부락민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다시는 부락 일을 안 하겠다고 결심을 단단히 했습니다.
해가 바뀌어 66년도에 남편은 일본에 있는 남해출신 교포들의 초청으로 일본 애지현 원산농장(愛知縣遠山農場)으로 2개월 동안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연수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그이는 일본은 전후 불과 10여 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모든 것이 눈부시게 발달 되었고, 특히 농촌은 영농방법이나 생활양식이 근대화 되어 있어서 농민들 살기가 아주 좋더라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 농촌에서는 부엌개량부터 해야 된다기에 우리 집부터 시작했습니다. 저의 시어머님은 여태까지 자기는 이 부엌에서도 살림 살아 왔다면서 반대를 하시고 역정을 내셨지만 다 끝마치고 나니 역시 좋아하셨습니다. 그 후 마을 사람들도 부엌개량을 하는 집이 한 집 두 집 늘어났습니다.
68년도에는 우리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게 되어 마을 여자들은 더욱 부지런히 길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71년도에 우리 마을에서도 새마을운동이 활발히 전개 되어 부녀회도 66명으로 재조직 되고 제가 부녀지도자가 되었습니다. 72년도에 들어서서는 온 마을 사람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농로를 다시 5m로 넓히고 길이는 1,500m로 확장했습니다. 간이상수도도 두 곳에서 끌어오고 지붕개량도 많이 했습니다. 전화도 이해에 가설해서 자립마을이 되었습니다. 72년도 10월에 우리 부녀회에서는 엄중한 회칙을 만들고 절미운동을 다시 하기로 했습니다. 목표는 100만원으로 하고 이것이 달성 되면 어머니금고를 만들자고 굳게 결의했습니다. 총회 날은 매월 10일로 정하고, 절미 날은 매월 달이 밝은 보름날로 결정을 하고 또 다시 통장을 만들고 절미대를 만들어서 집집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70세 할머니도 꼬박꼬박 잊지 않고 달밤에 절미대(袋)를 가지고 마을회관으로 달려 나오시며 어린 아이들도 엄마가 바쁘면 고사리 손으로 무겁게 절미대를 들고 나오는 모습을 볼 때 정말 농촌이 아니고서는 못 보는 광경이며 저는 차츰 새마을지도자로서 보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73년도에는 우리 부녀회 과제로서 부엌개량을 하였는데, 자금이 부족 되는 집은 제가 농협에다 교섭을 해서 40만원을 융자 받아 공동으로 재료를 구입했더니 경비가 적게 들었다고 기뻐했습니다. 그 해 가을 추곡수매로서 융자 돈을 깨끗이 갚았습니다. 어떤 집은 융자도 이자가 있느냐고 하면서 저를 괴롭히기도 했습니다만 뒤이어 재료값이 오르게 되니 지도자 덕분에 부엌개량을 잘 마치게 되었다고 칭찬하는 이도 많았습니다. 가난하고 무식하지만 티 없고 순진한 마을 여자들에게 무엇이든지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부엌에는 급수시설을 하게 되고 공기창과 채광창을 꼭 두게 하여 어떤 집에서는 메탄가스도 설치하여 주부의 일손을 덜게 했으며 위생행주도 마련하여 깨끗한 부엌이 되었습니다. 73년도 농촌진흥원에서 부엌개량 심사 때는 경남에서 2등 했고 절미우수마을이라고 해서 농협에서 시상도 있었습니다. 절미저축 액은 73년 말에는 30만원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이해부터 가난한 살림살이나마 알뜰히 꾸며 보자고 가계부를 기입해 보았습니다. 어떤 회원은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아무리 고단해도 가계부를 기입하지 않고는 잠이 안 온다고 이야기했으며, 또 어떤 회원은 적은 수입이지만 저축 난에 기입해 놓고 돈을 아껴 쓴다고 했습니다. 어느덧 저축이 생활화 되어가고 있음에 틀림없었습니다. 74년도에도 가계부는 계속 쓰게 되고 절미저축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던 중 작년 9월 16일 새마을지도자연수원에 입교하여 1주일간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동안 수차에 걸쳐 교육을 받았지만 어느 때의 교육보다도 가장 인상 깊게 머릿속에 남게 되고 정신이 바짝 드는 것이었습니다. 연수원 곳곳에 걸려있는 대통령 각하의 진리와 집념을 담은 말씀은 저의 심금(心琴)을 울려 놓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국민들이 잘 살 수 있는 길로 이끌어주시려는 각하의 그 뜻을 받들어 헌신적으로 새마을지도자교육에 여념이 없으신 원장선생님과 여러 교관 선생님들은 거룩하신 순교자로 화신(化身)하여 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열기(熱氣)에 찬 동지들의 사례발표를 들었을 때 제가 걸어온 길은 온실같이 느껴져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잘 살아보려고 몸부림쳐 새마을운동의 횃불이 된 그들의 생생한 체험담을 들었을 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서로와 서로의 가슴속엔 말없이 동료애가 용솟음치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가슴 밑바닥에서 언제나 도회지를 그리며 흔들리는 마음도 사라졌습니다.
특히 경기도 시흥군 의왕면 왕곡리에 견학을 갔을 땐 저의 마을이 얼마나 초라하고 비생산적인 마을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공공사업체가 없다는 것인데, 이 마을은 공공구판장이며 공동사육장 그리고 봉제공장이 있어서 마을 여자들이 한 군데 모여서 생산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저는 정말 우물 안의 개구리라고 느껴졌습니다. 분임토의 때 저는 마을에 돌아가면 꽃길을 만들어 보겠다고 했지만 실은 그보다 더 큰 꿈이 가슴속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연수원에서 돌아와서 곧 가을추수가 시작 되었지만 거의 매일같이 밤이면 회관에 나가서 이장님과 새마을지도자를 만나서 우리도 협동 단결하여 마을에 알맞은 사업을 해보자 했더니 별로 재미가 없다는 듯이 부녀지도나 잘 해보라고 하면서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우선 부녀회에서 소규모로 하고 있는 구판사업을 늘여서 구판장을 만들자고 했더니 그것은 해볼 만한 사업이라고 해서 이장님이 허락해 주시고 적당한 장소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때를 같이하여 10월27일 연수원 원장님을 통해 고급공무원 제3기 수료생동기회에서 새마을사업에 보태 쓰라고 성금 3만원이 전달되었습니다. 우리들은 더욱 용기를 얻어 우선 그 돈과 공동자금 3만원을 합쳐서 각종 일용품과 학용품 등을 읍에서 구입해 가지고는 마을 여자들을 시장에 못 가게 하고 이익을 얼마 보지 않고 싼 값으로 팔았습니다. 그래도 그 동안의 순이익금을 마을금고에다 예금했더니 3만원이 다 되어 갔습니다. 이 돈으로는 75년도의 과제로서 농로 1,500m에 치자나무를 심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남해 3대 특산물 중에는 유자. 비자. 치자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인 치자나무는 다년생 식물로서 잎은 사시사철 푸르며 6월에 하얀 꽃이 향기롭게 피고 가을에는 노란 열매가 맺게 되는 데 이 열매는 물감이나 약용으로 쓰이게 됩니다. 남해에서는 치자나무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데, 한 때는 관당 800원씩 해서 농가 소득을 올렸으나 요즈음은 시세가 하락하여 400원을 하지만 언젠가는 호경기를 보게 되리라고 믿고 경로회. 청년회. 부녀회 그리고 4-H회원들과 모두 힘을 합하여 치자나무를 심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녹화사업이며 소득증대사업으로 직결 되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4월 5일 식목일을 기하여 작업을 하기로 결정했으며, 3년 후면 농로를 거닐 때 꽃향기가 온 마을에 가득 차질 것을 생각하니 다시 한 번 원장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 다음은 우리 마을에 사는 30대에서부터 40대의 여인들은 유명한 남해 모시 베를 짜내고 있어 월수입 3만원에서 4만원을 올리게 되는데, 40대서 50대 여자들은 눈이 어둡다고 해서 별로 할 일이 없이 지내는 것을 보고 우리 마을에도 가마니공장이 하나 있었으면 하고 항상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사업은 워낙 엄청난 생각이라고 아무도 귀담아 들어주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74년도 10월 25일 우리 마을이 절미저축을 잘 했다는 실적이 중앙회에 보고되어 제가 농수산부장관상을 받게 되었고 동시에 우리 부녀회에는 100만원의 융자금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열린다.’는 말을 음미하였습니다. 매일 회의를 열고 가마니공장을 짓자고 간절히 이야기했더니 거의가 찬성이었습니다만 기계만 사들이고 작업은 어디서 해야 하느냐고 걱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74년 12월 17일 경남 마산에서 우수새마을이라 하여 대통령 각하의 하사금 100만원을 지원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우리는 용기를 얻고 곧 공사를 착수하려고 했으나 75년1월에는 근로자 취로작업이 있어서 잠시 보류 되었다가 3월이 되자 공사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이 공사에 쓰이는 자갈과 모래는 부녀회 회원들이 내물 바닥에서 채취해 왔으며 온 동민이 힘을 합하여 참여했습니다. 새봄과 함께 우리 마을도 공동사업체가 마련되고 가난을 조금씩 멀리 하게 되었지요. 저는 또 한 가지 금년도 과제로써 불우이웃돕기를 하자고 했습니다. 우선 우리 마을 안에 있는 불행한 사람들을 돕기로 하고 구정에 떡과 쌀을 가지고 어머니가 없는 아이들 집에 갖다 주었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반가워했습니다. 우리들의 주변을 살펴보면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일손이 적은 농촌이고 보니 눈앞에 있는 일들도 못다 하게 됩니다.
그러나 새마을사업은 조급하게 해서는 안 되며 나 개인의 욕심을 버리고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끔 왜정 때 내선일체라고 하여 입으로는 그럴듯한 구호를 내걸고 우리민족을 학대하던 일인들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글, 우리의 말이 있어도 떳떳이 써 보지도 못했고 말해보지도 못한 채 압박만 받아 왔던 것입니다. 농사를 아무리 많이 지었어도 모조리 공출로 빼앗기고 굶주렸던 그 옛날의 모습들을 생각할 때 이젠 우리 글 우리말로써 자유로이 살게 되었는데, 왜 우리는 못 살아야 됩니까?
국가에서는 어떻게든지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배워주고 하는데 그것을 외면해서는 안 되겠으며, 국민이 총화 단결하여 난국을 타개해 나가야 되겠습니다. 저희 마을 회원들은 부지런히 일하고 저축해 놓은 공동기금으로 육지의 새마을을 견학하는 것이 소원인데 아마 금년 안에는 실현 될 겁니다. 모두가 힘을 합하면 안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신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