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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학자 儒賢 스크랩 다산 정약용과 풍석 서유구 [선택! 역사를 갈랐다]
이장희 추천 0 조회 75 14.05.07 20:5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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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역사를 갈랐다] (20)

다산 정약용과 풍석 서유구

 

다산은 ‘조선의 제도’ 개혁을 꿈꾸고 풍석은 ‘사대부 일상’ 개혁을 꿈꾸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조선 최고의 스타다. 풍석 서유구(1764~1845)는 조선의 무명스타다. 서로 두 살 터울. 다산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조명했다. 풍석은 너무했다 싶을 정도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았고,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고, 18년이라는 정치적 유폐기를 거쳤고, 유폐기에 대작을 저술했고, 조선의 융성을 위해 노심초사했고, 남양주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사후 많은 사대부가 추앙했다.

다산만의 얘기라 생각하는가. 풍석도 꼭 그랬다. 그럼에도, 두 위인의 학문적 지향은 전혀 달랐다. 후생들은 결국 다산에게 마음을 기울였고, 풍석은 거의 뒷전이었다.

 

 

▲ ‘스타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왼쪽)은 올해 탄생 250주년을 맞아 다각도로 조명되고 있다. 반면 풍석 서유구는 18~19세기를 복원할 수 있는 ‘임원경제지’ 같은 방대한 저술을 남겼음에도 지나치게 덜 부각되고 있다.

 

 

다산은 풍석의 과거 선배다. 요샛말로 다산은 1789년에 급제한 89학번으로 60명 중 2등, 풍석은 1790년에 급제한 90학번으로 46명 중 24등이었다. 두 사람 모두 직부전시(直赴殿試) 명을 받았다.

 

이는 여러 절차를 생략하고 곧장 최종 과거에 응시하라는 왕명이다. 이러면 급제는 따 놓은 당상이다. 급제 후 곧장 초계문신이 되었다는 점도 같다. 초계문신은 정조의 최측근 문신 집단이다. 다산의 승진 속도는 풍석보다 빨랐다. 고위직인 정3품 당상관 품계를 5년 먼저 받은 것이다. 정조가 군주이자 학문적 스승을 자처하며 왕권을 강고하게 행사할 때까지, 둘은 겉으로 보기에 같은 쪽을 향하는 듯했다.

 

다산은 한미한 집안 출신이다.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면서 고초를 겪기도 했으나, 정조의 두터운 신임은 여전했다. 이에 반해 풍석은 최대 문벌 중 하나인 대구(달성) 서씨의 후예다. 게다가 진퇴에 신중했기에 큰 반대에 부딪힌 적이 없다. 다산이 ‘문제적 범생’이라면 풍석은 ‘범생’ 그 자체다.

 

●정약용·서유구 정치적 공백기 18년

 

정조는 집권 초부터 젊은 문신 양성의 일환으로 ‘경사강의’(經史講義)라는 재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이 중 시경(詩經)을 분석하는 ‘시경강의’에 두 사람이 동시에 참여한다. 이 시경강의는 16년 동안 25회에 걸쳐 실시했던 경사강의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정조는 590문제를 출제했고, 초계문신에게 40일이 주어졌다. 이로도 모자라 20일을 연장했다는 다산의 고백에서 얼마나 힘든 테스트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에는 이 중 579개의 문제와 답을 적어두었다. 수험자가 18명이니, 1인당 32문제꼴로 답안이 채택되어야 평균이다. 누구 답변이 가장 많이 채택되었겠는가. 우리의 영웅 다산일 거라 짐작한 독자에게는 미안하다. 풍석이 독보적이다. 풍석의 답안은 총 181개로, 전체의 31.3%다. 시작과 끝 문제의 답안 역시 풍석의 것이었다. 다산의 답안은 117개가 실렸으며 총 20.2%를 차지한다. 다산의 것도 결코 적은 비중은 아니나 풍석의 월등함에 빛이 바랬다.

 

시경강의는 두 사람에게 큰 이력이었다. 다산은 인생에서 가장 큰 영광의 추억으로 이 시경강의를 들었다. 다음과 같은 정조의 어평(御評)을 두고두고 써먹었다. “백가(百家)의 말을 두루 인용하여 그 출처가 무궁하니, 진실로 평소의 온축이 깊고 넓지 않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으랴.” 자신이 남긴 ‘시경강의’ 서문에는 물론이고, 스스로 쓴 묘지명에도, 가장 존경했던 형 정약전에게도, 아들에게도 그날의 기억을 되풀이했다. 또 자신의 답안이 최고였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압도적 수석인 풍석은 이 기억을 되새기지 않았다. “책을 열자 바로 개안하는 느낌이다.”라거나 “근거가 분명하고 충분하며 언어가 알맞고 정연하여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이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는 등 총 6군데서 어평을 받았으면서 말이다. 그래도 젊은 시절 풍석은 분명히 경학의 당대 최고 실력자 중 한 사람이었다.

 

다산은 정조 사후 천주학 타도 바람에 휘말려 귀양살이를 시작한다(1801년). 풍석은 이 바람과 무관하게 승승장구했다. 그러다 5년 뒤 김달순 옥사를 계기로 풍석의 탄탄대로에 탈이 났다. 작은아버지 경기감사 서형수는 유배형을 받고, 재종숙부 영의정 서매수가 정계에서 축출되면서 가세는 급격히 쇠락한다. 연좌의 공포에 휩싸인 풍석의 선택은 귀향이었다.

 

●정약용, 이상적 통치 목표 ´경학·경세학´ 몰두

 

억울하게 유배지에 갇힌 다산과 죄 없이 죄인을 자처하며 낙향한 풍석. 과정이 어쨌든 불우한 처지이기는 피차일반이었다. 정치적 공백기 18년.

 

그러나 여기서부터 이들의 길은 판이하게 갈린다. 다산은 유학의 정통 분야인 경학과 경세학(經世學)에 몰두했다. 조선 유자의 지향점을 요약하면 수기(修己)와 치인(治人). 수기는 자신의 몸과 덕성을 수양하는 일이요, 치인은 백성을 다스리는 일이다. 수기는 치인을 위한 인문학적 토양이고, 치인은 자기 수양의 경세론적 확장이다.

 

다산은 61세에 자신의 학문을 이렇게 정리했다.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로 자기 몸을 닦고 1표(表)와 2서(書)로 천하·국가를 다스리니, 본말을 갖추었다.” 육경과 사서는 경학이고, 수기의 세계다.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심서는 경세학이고, 치인의 영역이다. 저술은 경집(經集) 232권, 1표2서를 포함한 문집 260여 권으로 총 500권이 다 된다. 다산의 지향은 조선 제도를 개혁하는 일이었다.

 

반면 풍석은 파주 장단으로 귀농하고서 경학과 경세학을 철저히 외면했다. 경학을 해봐야 옛 사람의 중언부언이고, 경세학을 해봐야 결국 ‘흙 국’이나 ‘종이 떡’처럼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서 ‘잡학’ 마니아가 된다. 풍석의 잡학은 ‘임원경제지’(林園經濟誌)에 질서 있게 배열되었다. 농학, 천문학, 공학, 수학, 요리학, 의학, 어업, 예술, 상업 등 총 16분야다. 경학과 경세학의 언어를 빌리지 않고서 113권으로 마무리했다. 종류는 다양하지만 주제는 하나다. 시골에서의 자립적인 삶을 위한 지식 체계. 풍석의 지향은 사대부 일상을 개혁하는 일이었다.

 

풍석은 18년 공백 후 정계에 복귀해 15년간 고위직을 두루 거쳤다. 그 와중에도 시골생활 백과사전 정리를 그치지 않았다. 임원 생활을 대비했고 임원을 동경하기도 했다. 반면 다산은 해배 후 야인으로 머물러야 했다. 그래도 여전히 경학, 경세학 정리와 심화에 몰두했다. 국정 참여의 뜻을 꺾지 않은 듯하다. 묘한 대비가 아닐 수 없다.

 

다산과 풍석은 일생을 어떻게 정리했을까. 다산은 ‘자찬 묘지명’(1822년, 61세)을, 풍석은 ‘오비거사 생광 자표’(1842년, 79세)라는 다소 긴 이름으로 자신의 묘지명을 썼다. 환갑 때 쓴 다산의 묘지명은 분량이 아주 많다. 주요 개인사를 모두 적었고 저술 체계도 매우 상세히 서술했다. 글자 수가 자그마치 1만 2316자!

내가 아는 자기 묘지명 중 가장 길다. 1000자 내외가 대부분이다. 가슴에 묻어둔 한이 많았던 걸까.

 

이와 대조적으로 풍석은 평생을 다섯 시기로 구분하여, 그 시기를 모두 허비했다며 반성으로 일관한다. 심지어 40년 가까이 공 들인 ‘임원경제지’ 저술도 인쇄할 뒷심이 없어 낭비였다고 회고한다. 자신을 오비거사(五費居士)로 칭한 이유이기도 하다.

 

다산의 묘지명은 828자인 풍석의 것보다 무려 15배나 많다. 파란만장으로 말하면 누군들 할 말이 없을까마는, 다산은 거의 회고록 콘셉트이었고, 풍석은 반성문 콘셉트였다.

 

●서유구, 현실에서 적용되지 않는 지식 외면

 

다산은 농사를 짓지 않고 농업 원론만 얘기했다. 풍석은 논두렁 밭두렁을 돌아다닌 체험으로 구체적인 농사 기술을 제안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여기서 비롯된다. 풍석은 입으로만 농사를 짓지 않았고, 글로만 물고기를 잡지 않았다. 그리고 온갖 정보를 조직적으로 정리했다. 그뿐만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실행되거나 실행되어야 할 선진 기술을 전달하려는 노력이 역력하다.

 

다산은 스스로 말한다. 자신의 경세학은 “지금의 쓰임에 구애되지 않고 기준을 제시해 우리나라를 새롭게 하려는 연구다.”라고. 당대의 활용보다는 이상적 통치 기준을 만들겠다는 포부다. 하지만, 풍석이 흙으로 끓인 국 즉 토갱(土羹)이요, 종이로 만든 떡 즉 지병(紙餠)이라 비판했던 저술은 바로 이런 거였다.

 

풍석은 이상을 추구하되 반드시 이 땅의 현실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울 정도의 철저한 현실론을 견지했다. 실현할 수 없는 지식은 ‘토갱지병’이다! 이상적 기준을 제시하고서 현실을 이상으로 밀고가려 했던 다산의 방법론과는 대조적이다. 풍석의 이용후생론은 바로 이런 실용학이었다.

 

다산 탄신 250주기를 맞아 여기저기서 다산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조선의 다빈치’라는 평가도 나온다. 그럼에도, 그의 위대성을 유학사상과 정치철학에서 찾으려는 경향은 여전하다. 다산의 저작을 폄하하려는 마음은 없다. 그러나 다산에게서 조선의 모든 잠재성과 가능성을 찾으려는 경향은 지나치다.

 

풍석의 평생 역작 ‘임원경제지’는 제도적 개혁을 주장하지 않는다. 개혁은 일상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게 풍석의 신념이었다. 풍석은 ‘놈팡이 선비’를 제일 혐오했다. “곡식만 축내며 보탬이 안 되는 자 중에 저술하는 선비가 으뜸이다!” 선비들이여, 농업·공업·상업 알기를 똥으로 아는 그 엘리트 의식부터 싹 뜯어고쳐라. 버러지처럼 놀고먹지 마라. 경서를 공부하되 제 식구 먹을거리, 입을거리, 살 곳은 유지하면서 하라. 방 안에 틀어 앉아 공맹과 성리를 논할 시간에 밖에서 바지 걷어붙이고 쟁기질하라! 그물 던져 물고기 잡아라! 짐 지고 나가 장사하라! 몸놀림을 혁신하라.

 

땀 흘려 일해서 벌어먹는 일을 점점 기피하고, 종일 컴퓨터로 하루를 보내는 일이 사람다운 노동이라고 여기는 우리가 여기서 얻을 힌트는 과연 없는 것일까.

 

정명현(임원경제연구소 소장)

/ 서울

 

 

 

[광화문에서/이진영]

89학번 정약용, 90학번 서유구

 

대제학을 지낸 할아버지는 ‘여러문제연구소장’이었다. 천문 지리 농업 언어 등 다방면에 저술을 남겼고, 부인이 “붓과 벼루는 멀리하고 요리를 가까이 하시려나” 걱정할 정도로 부엌 출입도 잦았다.

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냈는데 역시 수학과 천문 분야의 최고수였다. 이런 다빈치적 유전자를 물려받은 이가 풍석 서유구(楓石 徐有矩·1764∼1845)다.

풍석은 올해 탄생 250주년을 맞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 못지않은 르네상스인이었다. 나이는 두 살 어리고, 1789년 다산에 이어 1790년 과거에 급제했으니 과거시험 기수로는 다산의 한 해 후배가 된다. 두 사람 모두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조선왕조실록에 다산이 38회, 풍석이 62회 등장하는 엘리트 관료였다. 재야로 내쳐진 후 불후의 명작을 남긴 점도 같다. 다산은 18년간 유배 생활을 하며 실학을 집대성했고, 풍석도 관직에서 물러나 집중적인 저술 활동을 했는데 그 기간이 공교롭게도 18년이었다.

다산의 면모를 집대성한 저작이 여유당전서라면, 풍석의 대표작은 ‘조선의 브리태니커’ 임원경제지다. 둘은 여기서부터 다른 길을 걸었다. 다산은 벼슬길에 오른 선비가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해야 할 바를 제시한 반면, 풍석은 퇴임 후 고향으로 돌아가 사는 데 필요한 ‘잡학(雜學)’을 집대성하는 데 매달렸다. 벼슬 귀한 선비 집안에서 자란 다산이 경학과 경세학에 몰두하는 동안, 집안 대대로 고위 관료를 배출해낸 경화세족(京華世族)의 자손은 “토갱지병(土羹紙餠·흙국과 종이 떡)의 공허한 말장난이 싫다”며 비주류 실용학을 파고든 것이다.



다산의 저술 활동엔 18명의 제자가 함께했다. 하지만 풍석은 혼자 힘으로 밭 갈고, 옷 해 입고, 집 짓고, 병 고치고, 제사 지내고, 여가를 즐기는 데 필요한 ‘생활의 모든 지식’을 113권 54책 252만7083자에 담았다. 당시 지식인들은 나라 경영이 아닌 잡학 집필은 사대부가 할 일이 아니라고 여겼던 걸까.

다산은 국학 부흥운동이 한창일 무렵인 1930년대 정인보 선생이 동아일보에 실은 글을 시작으로 업적을 재조명받았다. 하지만 임원경제지는 1939년 보성전문(현 고려대)이 전질을 필사하는 작업을 동아일보가 보도하면서 최초로 언론에 공개됐을 뿐 그 전모는 지금껏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번역한 한국고전번역원도 두 손 들 정도로 내용이 방대하고 전문적이어서 완역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가출연기관이 포기한 번역 작업의 끝을 본 이들은 41명의 소장학자다. 이들은 ‘임원경제연구소’를 차리고 국문학 한의학 경제학 미학 수학 기계공학 등 전공을 살려 4개의 필사본과 임원경제지가 인용한 853종의 원전을 비교해가며 9년간 매달린 끝에 초벌 번역을 끝내고 최근 개관서를 출간했다. 개관서만 펼쳐 봐도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신기루 속 보물처럼 엿보기도 어려워라”는 독후감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연구소는 2014년 500쪽짜리 55권 분량으로 임원경제지를 완간한다는 계획이다.

벼슬길에 오를 때와 내려온 후를 두루 살핀 다산과 풍석 두 문성(文星)이 활약했던 시대가 조선의 르네상스였다. 임원경제지가 완간되는 2014년은 풍석 탄생 250주년이다. 몸소 밭 갈고 물고기 잡으며 천시 받던 공업과 상업에까지 두루 깊은 식견을 보여줬던 열린 지성 풍석과 그가 남긴 저작이 본격적으로 평가받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이진영 문화부 차장

 

 

 

 

아래 임원경제연구소 자료.

 

임원경제지와 서유구

 

"임원경제지"는 개인 저작으로는 조선에서 가장 방대한 백과사전이다. 총 113권 54책으로 250만 여 자이다. 도회지가 아닌 시골의 삶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16개의 범주로 묶었다.

임원경제지는 서유구(徐有?, 1764-1845)의 저작이다. 서유구는 약 36년 동안(1806-1842년) 임원경제지를 편찬하였다. 이 책은 농사부터 음식, 의류, 건축, 건강, 의료, 의례, 예술, 지리, 상업 등 조선 및 동아시아의 의식주 문화가 집약되어 있는 유서(類書)이다. 자신의 저서를 비롯한 852종의 한중일 문헌에서 가려 뽑은 기사를 16지 범주[志] 하에 각 항목마다 표제어를 제시하고 체계적으로 배열한 서술형식은 서유구의 독창적인 체제이다. 총 목차를 들여다보면 각 지(志)가 단일한 분야의 사전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유구는 이 백과사전을 아들 서우보와 함께 편찬하였다. 아들 우보는 임원경제지 전체를 교정하는 고된 작업을 맡았다. 그러나 힘든 작업의 여파 때문인지 33세의 나이(1827년)로 아버지보다 앞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서유구는 책이 완성된 뒤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혀 놓았다.

 

“내가 수십 년을 걸려 교정한 공든 책 임원경제지 100여 권을 근래에 겨우 끝마쳤으나, 다만 이 책을 맡아서 지켜줄 자식과 아내가 없는 것이 한이로다. 우연히 이 책을 열어보다 슬픔의 눈물이 오래도록 흐르는 지도 몰랐구나!” (금화경독기)

 

 

 

 

 

 

 

 

 

컨텐츠의 보물창고 임원경제지

 

풍석이 40년 가까이에 걸쳐 집대성한 개인저작 최대백과사전이자, 농촌생활백과사전인 ‘임원경제지’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있을까요.

 

이제 그 내용을 공개합니다. 지금까지 전체의 내용이 공개된 적이 없어 전모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이 글을 통해 방대한 백과사전의 컨텐츠를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짐작하시겠지만, 그렇다고 내용 전체를 짧은 내용에 다 담을 수는 없겠죠. (그럼에도 이 글의 분량이 상당히 많아졌습니다.)

 

우선 ‘임원경제지’에 관한 개괄적인 소개를 다시 드리면, 총 113권 54책입니다.

권은 주제별, 분량별로 엮은 책의 구성단위로 책보다는 작습니다. 책은 실로 묶어 하나로 만든 구성단위인데, 오늘날의 낱권인 한 권, 두 권 할 때의 ‘권’을 말합니다.

 

54책 중 51책은 16개의 분야의 컨텐츠를 다루었고, 나머지 1책은 이 책 전체의 세부목차가 담겨있으며 나머지 1책은 이 책에서 인용한 서적 총 852종의 이름과 저술 시대, 저자 등을 모조리 기록해두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1책은 총 서문과 16개 분야의 서문을 모아두었습니다.

 

글자 수는 250만 여 자입니다.

이 숫자가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별로 감이 없으실 겁니다. 그래서 다른 책들의 글자수를 잠깐 소개할까 합니다.

 

조선시대의 과거시험 필수과목인 ‘사서(四書)’ 즉,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의 원문이 총 6만여 자이니, 사서의 약 40배 분량입니다. 서유구의 1세대 후배 이규경(李圭景, 1788-?)의 박물학서인 ‘오주연문장전산고’는 150여만 자입니다.

 

정약용의 방대한 저술 ‘여유당전서’는 420여 만 자에 달합니다. 하지만 문집의 성격이 그렇듯이, ‘여유당전서’에는 시, 편지글, 비문(碑文) 등 여러 종류의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들어있는 ‘목민심서’나 ‘경세유표’ 같은 단일 주제의 저술만을 비교한다면 그 숫자는 훨씬 줄어들겠죠.

 

한편 조선시대 500년 간의 역사 기록물인 ‘조선왕조실록’은 전체가 4,700만 여 자로서 한글로 번역한 분량만도 440여 권에 달합니다. ‘임원경제지’는 ‘조선왕조실록’의 약 1/19에 해당되는 분량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수많은 사관들의 손을 거쳤습니다. 그러나 ‘임원경제지’는 서유구 한 사람의 저작이죠.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서유구와 그의 성실한 조교인 아들 서우보, 그 두 사람의 결과물입니다. 그것도 30여 년 동안에 완성한 겁니다.

 

‘조선왕조실록’은 한 나라의 정치, 외교, 경제, 사회, 문화, 과학, 기술 등 모든 분야를 망라했으나, ‘임원경제지’는 오로지 사대부의 생활문화에 한정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많은 정보를 수록했던 것입니다.

 

한 저술가가 일관된 주제를 유지하면서 이렇게 체계적이고 방대하게 정리한 책을 대보라고 하면 선뜻 꼽을 만한 책이 없습니다. 과문한 탓인지 조선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에서도 유례를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19세기 당시만을 통관하더라도 서유럽에도 이런 종류의 백과사전은 없었으리라 짐작됩니다.

 

이제 16개의 분야를 소개합니다. (표가 깨져 표 형식으로 배치했습니다.)

 

 

16지 내용 요약 권수(113권)

 

본리지(本利志) : 농사백과 곡물농사 13

관휴지(灌畦志) : 농사백과 채소농사 4

예원지(藝?志) : 농사백과 화훼농사 5

만학지(晩學志) : 농사백과 과일 및 나무농사 5

전공지(展功志) : 농사백과 의복만들기 5

위선지(魏鮮志) : 기상천문백과 농업기상예측 4

전어지(佃漁志) : 동물백과 가축기르기·사냥법·물고기잡기 4

정조지(鼎俎志) : 음식백과 요리하기 7

섬용지(贍用志) : 건축·도구백과 집짓기 및 일용품 만들기 4

보양지(保養志) : 건강백과 건강하게 사는 법 8

인제지(仁濟志) : 의학백과 치료법 전반 28

향례지(鄕禮志) : 의례백과 행사 치르는 법 및 마을공동체 윤리 3

유예지(游藝志) : 교양백과 몸공부·마음공부 8

이운지(怡雲志) : 문화예술백과 고상한 문화생활 8

상택지(相宅志) : 풍수백과 좋은 터 잡기 2

예규지(倪圭志) : 생활경제백과 상업 활동 5

 

농사백과 :

앞의 4개의 지인 본리지, 관휴지, 예원지, 만학지에서는 쌀, 콩, 조 등 곡류를 비롯 채소, 과일, 나무, 화훼 등 농작물의 수확량을 어떻게 늘릴지, 인간의 노력으로 자연재해를 어떻게 줄일 수 있을지를 다룹니다.

 

본리지에서는 벼는 올벼 18종, 중생벼 10종, 늦벼 28종, 찰벼 9종, 밭벼 4종,

중국 올벼 19종, 중국 늦벼 38종, 중국 이모작벼 4종, 중국의 찰벼 41종으로 총 171종(조선종은 69종)이 소개되었고, 기장 15종(6), 조 53종(32), 보리 16종(10), 밀 7종(3), 콩 46종(14), 팥 11종(11)을 소개하고 있습니다(괄호 안은 조선종의 수).

 

채소와 약초를 다루는 관휴지에서는 재배법과 함께 채소류 33종과 나물류 55종, 미역·다시마·매생이 등 바다채소 13종, 오이·호박 등 풀열매류 8종, 인삼·맥문동 등 약초 20종을 소개합니다.

 

화훼류를 다루는 예원지에서는 재배법과 함께 모란·양귀비·메꽃 등 꽃류 50종, 창포·파초 등 풀류 15종을 소개하고, 이 중 종류가 많은 모란·함박꽃·난꽃·국화 4종의 꽃 색깔에 따른 설명을 추가하고 있어요.

 

과실과 나무류를 다루는 만학지에서는 재배법과 함께 자두·매실·배 등 과일류 37종, 참외·수박·복분자 등 풀열매류 14종, 소나무·측백나무·옻나무 등 나무류 25종, 차·대·부들·담배 등 기타 초목류 13종을 소개합니다.

 

본리지는 곡물농사를 다루고 있지만, 기실 농업 전체를 모두 포괄하고 있습니다.

 

본리지의 토지제도에서는 먼저 양전법, 즉 농지측량법에 대한 원론을 검토하고 토지 측량의 기초가 되는 역대 척법을 자세히 논변했습니다. 또한 총 14가지 형태의 논과 밭도 다뤘지요.

 

수리(水利)에서는 준설법, 지세 측량법, 방죽 쌓는 법, 쌓은 둑을 잘 보존하는 법, 물을 모으고 저수지 만드는 법 등을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흙을 분별하는 법과 농시(農時)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도 알려줍니다.

 

작물 농사의 실제 과정에서 필요한 지식과 기술들도 당연히 들어있습니다. 먼저 사람이 왜 농사를 지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에 가까운 농사철학과 함께 농지 가꾸는 법을 정리했습니다. 이어서 황무지 개간법, 밭갈이법, 거름 만들고 주는 법이 농법에 대한 서론 격으로 소개되었습니다.

 

또한 심고 가꾸기에서 수확, 방아찧기, 저장까지 농사의 나머지 공정을 다루었는데, 모든 곡물의 종자 선택에서 씨뿌리기, 모내기, 김매기 등을 각 곡물마다 항목을 따로 설정하여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농사 피해와 그 예방법과 뒤처리법도 있습니다. 농가 달력을 중국식과 우리식으로 나누어 표로 제시하기도 했지요.

 

농사 연장과 기구 및 시설 등을 그림으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부친 서호수의 ‘해동농서’에도 그림이 일부 실려 있기는 하지만, ‘임원경제지’ 이전의 우리나라 농서에서는 거의 그림을 싣지 않았던 사실과 대비되는 대목이죠.

 

농사 연장과 관련된 삽화의 수는 갈이 연장과 삶이 연장 28폭, 파종 연장과 김매기 연장 14폭, 오줌 거름 주는 기구 1폭, 거두기 연장 9폭, 찧기 기구와 곡물 고르기 기구 24폭, 갈무리 시설과 그 기구 9폭 등 총 95폭입니다.

 

수리에 필요한 기구 및 시설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간단한 수리 기구 및 시설이 29폭, 좀더 정교한 기구가 22폭 등 총 51폭의 그림이 실려 있죠. 수리 기구 가운데 한역 서양 기술서인 ‘제기도설(諸器圖說)’에서 옮긴 학음(鶴飮)과 용미차(龍尾車)는 서유구가 실제로 활용하기도 했으며,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전라도 관찰사 시절 자승차를 제작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요.

 

특히 수리 기구 중 가장 정교하고 복잡한 것은 서유구와 동시대에 살았던 하백원이 제안한 자승차였습니다.

‘자승차도해’를 거의 전재한 이 부분에서는 부품도만 14개나 됩니다. 부품도와 해설만 보고도 복원이 거의 가능할 만큼 치밀합니다. 물론 보다 명료한 이해를 위해 보완 그림도 많이 필요하기는 합니다만.

 

이상의 본리지에 있는 내용 상당부분은 다른 농사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총론적 성격의 글이 많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의류백과 :

의류의 원료 생산부터 길쌈법까지 다루는 전공지에서는 뽕나무 재배, 누에치기, 고치 고르기, 실켜기, 길쌈, 염색 등의 비단과 삼·모시·어저귀·칡 재배와 길쌈 등의 삼베류, 목화 재배와 길쌈 등의 면류를 소개합니다. 거기다 누에치기, 뽕나무 재배, 모시 재배, 길쌈법 등을 총 77컷의 삽화로 보여주고 있어 시각적인 즐거움도 배가됩니다.

 

기상천문백과 :

천문과 기상현상을 다루는 위선지에서는 1년의 기상을 예측하는 방법을 달별로 점치는 법, 하늘, 땅, 해, 달, 바람, 비, 구름, 안개, 노을, 무지개, 천둥, 번개, 서리, 이슬, 눈, 우박, 얼음, 은하수, 초목, 곡식, 짐승, 곤충, 물고기, 달력 등 여러 자연현상과 사물을 보고 점치는 법을 소개하고, 이와 더불어 농사, 축산, 어업 활동 시 피해야 할 날을 소개했습니다.

 

또한 28수 별자리를 통해 예측하는 법을 28수의 모든 천문도를 그림으로 보여주면서 해설했고, 육십 갑자로 점치는 법도 들어있습니다.

농사에 중요한 기상현상인 비와 바람을 예측하는 방법에 대해 위에서 열거한 식의 20가지 자연현상과 사물을 통해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위선지 번역 과정에서 저희들이 난감했던 점은 한문 자체가 어렵지는 않으나 자연현상과 점, 육갑 등을 연결하는 논리구조를 거의 이해할 길이 없다는 점입니다.

위선지를 통해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합리적인 생각과 설명을 도출해내는 데 아주 곤혹스러워 하는 저희들이, 여전히 전통 시대의 세계관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점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동물백과 :

들짐승·가축·어류 등을 잡고 활용하는 법을 다룬 전어지에서는 마소·당나귀·노새·양·돼지·개·고양이·닭·오리·물고기·꿀벌 등 가정에서 관리가 가능한 동물들의 관리법을 이야기했고, 매·사냥개·총·활·그물·함정·끈끈이 등을 이용해 짐승 잡는 법을 소개했습니다.

여기서 가축 치료법도 자세히 이야기하는데, 말은 93종, 소는 28종을 비롯하여 나머지 동물에는 29종의 치료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짐승 사냥도 어떤 동물인지에 따라 다양한 사냥법이 있는데, 끈끈이를 발라 호랑이 잡는 법 같은 흥미로운 사냥법이 많습니다.

 

고기잡이를 위해서도 어종에 따라 어구와 어획법을 다양하게 설명했습니다.

 

이와 함께 조선시대 3대 어보(魚譜, 어류 백과사전)로 꼽히는 ‘난호어목지’를 거의 그대로 수록한 어류 소개에서는 민물 어류 52종, 해양 어류 80종에 대해 생김새, 생태, 어획법, 활용법 등을 소개했습니다.

해양 어류와 식물류 등 총 226종을 다룬 손암 정약전(丁若銓, 1758-1816) 선생의 ‘자산어보(玆山魚譜, 1814)’에는 생생함이나 어종의 수가 좀 못 미치지만, 16지 전체를 다루면서 이 정도로 많은 어종을 조사했다는 사실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음식백과 :

공기를 제외하고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음식을 다룬 정조지에서는 물 11종, 곡식 37종, 채소 74종, 과일 48종, 들짐승 11종, 날짐승 13종, 물고기 35종, 조미료 8종 등 음식의 원재료 정리로 시작합니다.

 

밥 10종, 떡 62종 만드는 법, 죽 39종 쑤는 법과 죽 48종의 효능, 조청과 엿 만드는 법 4가지, 미숫가루 13종, 국수 30종, 만두 15종.

탕 19종, 장 7종, 차 16종, 갈수(청량음료) 6종, 숙수(꽃·열매를 우린 음료) 6종.

밀전과(꿀로 조린 과자) 19종, 당전과(설탕으로 조린 과자) 9종, 건과 21종, 구운과자 5종, 법제과(치우친 성질을 없앤 과자) 8종, 산과 6종.

절인 채소 14종, 말린 채소 23종, 향신료 6종, 발효 채소(소금과 쌀로 발효) 7종, 발효 채소(짜고 매운 재료로 발효) 27종, 김치 9종, 삶은 채소 30종, 구운 채소 12종, 조린 채소 13종, 묵·두부류 6종.

삶은 고기 27종, 구운 고기 19종, 회 16종, 포 16종, 발효 고기 17종, 절인 고기 6종, 기타 고기 조리법 4종.

소금 제조 및 저장법, 장 20종, 메주 11종, 식초 28종, 기름과 발효유(타락) 12종, 누룩과 엿기름 16종, 양념 12종.

술의 기원과 술 총론, 11종의 술 103가지 빚는 법, 약주 63종, 술 고치는 법, 보관법, 음주법, 그리고 절기 음식 60종을 소개했습니다.

 

건축·도구백과 :

건물짓기와 일상용품을 다루는 섬용지에서는 집 짓는 법, 집 짓는 도구와 다음과 같이 일상에 필요한 용품을 만드는 법을 소개했습니다. 공업 분야라 하겠습니다.

 

나무하고 물 긷고, 음식 담고, 요리하고, 술 빚고, 곡물 갈거나 찧고, 기름 짜고, 밥상 차리고, 음식 보관하고, 옷과 장신구를 두르고, 잠자고, 옷 손질하고 보관하고, 몸과 머리 씻고 다듬고, 독서하고, 그림 그리고, 불을 밝히고, 불을 켜고, 불을 끄고, 말 타고, 여행하고, 육상이나 해상을 이동하고,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등의 일상에 필요한 용품들이 그것입니다.

 

섬용지 마지막 부분에서는 사대부도 공업을 결코 천시해서는 안 되며 시골에도 장인 교육이 제대로 되어야 한다는 풍석의 귀 귀울일 만한 주장이 들어있습니다.

사대부가 반드시 장인 노릇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장인의 일을 알아야 여러 기물을 제작하거나 손상되었을 때 수리할 수 있는 임기응변을 잘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건강백과 :

건강의 문제를 다룬 보양지에서는 섭생법, 섹스법, 호흡법, 마음조절법 등을 소개했고, 일거수일투족과 음식 조절하는 법, 하루의 때, 한 달의 때, 한 철의 때, 일 년의 때를 맞춰 생활하는 법, 마사지법, 약이 되는 음식 복용법, 어른 보양식 181가지, 출산법, 육아법 등이 세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중에는 눈 좋아지는 법, 치아 튼튼하게 하는 법, 머리카락 검게 하는 법 등 귀에 솔깃한 처방들이 자주 보이고, 노인들에게 좋은 음식도 증상별로 매우 자세히 기록했으며, 임신과 출산, 육아의 매우 많은 정보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불임을 고치는 법, 딸을 아들로 바꾸는 법, 태교법, 갓 낳은 아이 관상 보는 법, 태아 해독법 등 흥미로운 기사들이 많습니다.

 

이 책 마지막에는 월별 양생표가 있어 달 별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하기도 합니다.

보양지는 병이 걸리지 않도록 집에서 평소 수양해야 하는 예방의학 차원의 백과라 하겠습니다.

 

의학백과 :

이에 반해 치료의학 전반을 다루는 인제지는 의학 전 분야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총 28권 110여 만 자로, ‘임원경제지’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심지어 우리의 유명한 고전이자 세계기록문화유산이기도 한 허준(許浚, 1537-1615) 선생의 ‘동의보감’보다도 더 많은 정보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동의보감’ 이후에 저술된 중국의 여러 의서까지 섭렵하여 최신의 정보까지 전하고 있지요.

 

또한 흥미로운 점은 인제지가 분량이 너무 많다보니 급한 환자가 생길 때 짧은 시간에 처방을 할 수 있도록 처방 색인집인 ‘탕액운휘(湯液韻彙, 운으로 찾는 탕액)’를 따로 1권의 분량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인제지에서는 병의 원인에 따라 내부요인, 외부요인, 내외부를 겸한 요인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부인과, 소아과를 따로 두었으며, 외과에서는 가장 많은 치료법을 소개했습니다. 또한 응급환자 치료에 대해서도 여러 상황에 맞춰 설명했지요.

또 인제지는 의사 교육서가 아니라 가정의 의학 지침서이기 때문에 약재를 구하고 약을 제조하는 법까지 소상하게 적어 놓았습니다. 또한 침과 뜸 치료 법, 뼈 교정하는 기구 등도 알려주었지요.

 

인제지에 수록된 처방만 모두 5,000여 가지나 됩니다.

 

최근에는 인제지 책임 역자인 전종욱 박사(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가 인제지에 나오는 이 처방들을 모두 전산화하여 ‘텍스트 마이닝(Text mining)’이라는 최신의 접근법으로 특정 처방과 특정 약재의 상관관계 등을 매우 여러 층위로 분석한 연구성과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보도는 ‘한의신문’(2010년 7월 22일 자) 2면에 걸친 전종욱 박사의 인터뷰 기사(“한의학 고전·IT·BT 삼위일체 융·복합 연구”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 연구는 ‘임원경제지’의 여러 현대적 활용성 중 그 일단을 보여주고 있지요.

 

의례백과 :

집안과 마을의 의례를 다루는 향례지에서는 향음주례(향촌 선비들이 서원·향교에서 주연을 즐기던 의례), 향사례(향촌 교화를 위해 시행하던 활쏘기 의례), 향약, 관례·혼례·상례·제례의 의식 등을 설명했습니다.

풍석은 이런 의례 소개에서 중국의 사례를 먼저 정리하고 우리 식으로 재정리한 의례를 제시했습니다.

 

교양백과 :

사대부의 교양을 다루는 유예지에서는 독서법, 활쏘는 법, 수학 계산법, 글씨, 그림 등의 서예 익히는 법을 매우 자세히 설명했고, 매화·대나무·난 그림 그리는 법을 실제 사례를 그림을 통해 보여주며 설명했습니다.

 

또한 사대부의 악기인 거문고, 가야금, 양금(서양 가야금), 생황의 연주법과 악보를 소개했습니다.

이상의 내용에서 선비들이 추구했던 교양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을 겁니다.

 

문화예술백과 :

집안에서의 문화적 풍취를 다루는 이운지에서는 은거지에서의 정원, 각 용도의 건물, 가구배치 등을 소개하고, 평상·의자·침구류·음주도구·그릇 등 휴식에 필요한 도구들도 알려줍니다.

 

또한 임원에서 함께 하는 맑은 벗들이라는 주제로, 차·향·악기·꽃·돌·애완동물을 향유하는 방법에 대해 다각적으로 적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문방사우(붓·먹·벼루·종이)와 도장, 독서대 등 서재에서 쓰는 물건도 있지요.

 

구리기물, 옥기물, 도자기, 법첩(모범 글씨첩), 명화 등 골동품과 예술작품 구별법과 감상법도 빼놓지 않았고, 책 구입, 제책, 책 보관법과 함께 서울 이외 지역에 소장된 목판을 경전류 39종, 역사류 78종, 제자류 105종, 문집류 300종 소개해놓았습니다.

그 뒤에는 여가를 하루 일과별로, 계절따라 어떻게 즐길 것인지를 서술했고, 명승지 여행에 필요한 준비에 대해 26개의 주제로 설명했으며, 산을 오르거나 물 건널 때 필요한 주문이나 부적을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옛날에는 교통사고보다 이런 산천에서 생기는 불의의 사고로 죽을 가능성이 컸으니까요.

 

또 관심가는 대목은 당시 사대부의 놀이문화입니다. 주로 시를 지으며 술을 마시는 잔치를 말합니다만, 여기에도 종류가 다양합니다.

유상곡수(굽이진 시내에 술잔 돌리는 놀이), 투호, 구후사(과녁 9개에 활 쏘는 놀이), 시패놀이(시 짓는 법칙을 그때그때 정하여 진행되는 놀이), 남승도(명승지 유람 놀이, 요즘의 블루마블 비슷한 게임) 등을 하며 놀았는데, 요즘에 한 번 해보고 싶은 게임입니다.

 

또 세시풍속에 따라 이루어지는 놀이도 41개 항목으로 소개할 만큼 적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거의 잊혀졌지만요.

이와 더불어 경로잔치, 학생위로잔치, 뱃놀이, 생일잔치, 월례회 등 각종 모임 소개와 모임에서의 규약이나 예절을 역시 빠트리지 않았습니다.

 

풍수백과 :

살 곳의 선택에 대해 다루는 상택지에서는 지리적 조건, 물과 흙, 생업 조건, 인심 좋은 마을, 경치 좋은 곳 등을 집터를 잡을 때 고려해야 할 조건으로 보고 어떻게 좋은 집터를 고를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집터를 고른 뒤에 해야 하는 개간, 나무심기, 건축, 우물·못·도랑 내기 등의 일련의 작업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조언해 주고 있지요.

또 전국의 명당을 도별로 해설하고, 총 225곳의 명당을 소개했는데, 이 중 경기도가 80곳, 충청도가 53곳의 순서로 많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졌거나, 거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었겠지요.

 

생활경제백과 :

일종이 재산운영법을 다루는 예규지에서는 지출 조절법, 절약법, 재산이 새지 않도록 경계하는 법 등으로 재산관리에 대해 충고해주고, 귀가 솔깃해질 돈 버는 여러 방법도 총동원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장사, 돈놀이, 부동산 관리, 부지런히 일하기, 남에게 일 맡기는 법에 대해 상세한 해설이 있지요.

 

또한 장사를 위한 본격적인 정보로 어느 곳에 어떤 물산이 많고 적은지, 전국의 장시가 얼마나 있고, 어떻게 운영되는지 등을 알려주고, 더불어 서울에서 각 지역 간의 거리와, 각 도내에서의 읍 간의 거리까지 알려주고 있어, 당시 상업의 성행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예규지를 끝으로 이 책도 끝나는데, 서유구는 ‘임원경제지’ 시작은 본리지(곡물 농사)로 했고, 예규지(상업)으로 마무리지은 것은 근본인 농업을 중시하고, 말단인 상업을 가볍게 취급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대부도 장사를 비속한 일로 여겨서는 결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예규지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외딴 시골에서 홀로 수양하는 자들 가운데는 가난한 무리가 많다. 부모가 굶주리고 추위에 떨어도 모르고, 처자식이 아우성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모으고 무릎을 가지런히 해서는 고상하게 성과 리[性理]를 논한다. 어찌 사마천이 수치스럽게 여기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생계를 꾸리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방법에도 차이가 있다. 농사는 근본이고 장사는 말단이다.”

 

장사를 소홀히 할 수 없고, 공업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렇더라도 생계를 위한 근본 직업은 농사에 있다는 자신의 신념을 여기서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부족하나마 ‘임원경제지’를 후루룩 훑어보았습니다. 빠트린 내용도 많고, 부득이 하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소개도 있었을 텐데 (특히 음식백과 정조지의 해설에서 이해가 쉽도록 쓰다보니 오역으로 보이는 번역도 보일 수 있습니다) 대강의 규모는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자, 이 정도의 내용을 넣었다면, 풍석이 ‘임원경제지’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한 이야기에 깔린 엄청난 자부감을 느끼실 수 있을런지요.

 

“세상을 사는 데에는, 벼슬하거나 벼슬하지 않고 집에 들어앉아 사는 두 가지 길이 있다. 벼슬할 때에는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들에게 베푸는 것에 힘써야 하고, 벼슬하지 않을 때에는 힘써 일하여 먹고살면서 뜻을 기르는 것에 힘써야 한다.

세상을 구제하는 구체적 방법을 살펴보면 모두 정치와 교화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어서, 이에 대해 골고루 갖추어 서술한 책은 원래 많았다.

그러나 시골에 살면서 뜻을 기르는 데 필요한 책은 수집해 놓은 것이 거의 없다. 우리나라는 겨우 ‘산림경제’ 한 책밖에 없는 실정이나, 이 책은 군더더기가 많은 데다 채록한 내용도 협소하여 이것을 흠으로 여긴 사람이 많았다.

 

이런 이유로 여기에서는 시골에서 사는 데 필요한 내용을 대략 채록하여 부(部)로 나누고 표제어[目]를 세운 다음, 여러 책을 조사하여 채워 넣었다. 이 책에 ‘임원’으로 제목을 붙인 까닭은, 벼슬하여 세상을 구제하는 방법이 아님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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