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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석화 시인의 시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천지
"백양정시군체"에 대하여 임망 송해천(宋海泉)의 백양정시기를 회상하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묘사가 있다: 한 무리의 젊은 남녀들, 백양정 집체호에 내려온 스무나무살의 젊은이들이 친인들과 멀리 떨어진 타향에서 통신과 교통상황이 모두 불편한 물가 마을에서 우연히 함께 만났다. 어스름이 깃들자 그들은 서로 작별하고 각자 자기들이 속한 마을로 헤어져 갔다. 물가 마을의 짙은 안개는 언녕 제방을 감싸버렸다. “우린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고요한 정적이 어둠을 감싸고 있는 가운데 홀연 달이 찰랑하고 호수에 떨어졌다. 금빛물결은 한 겹 한 겹 파문을 이루며 퍼져갔다. 어디선가 은은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그림자는 달빛 속에 파묻혀 보이지를 않지만 노래 소리로 우리를 바래주고 있음이 틀림없었다.”① 이러한 정경은 늘 나를 감동시킨다. 이는 우리세대가 함께 겪어온 역사의 한 배경이다. 70년대 초기를 화북 수향에서 고독, 추구, 우수와 희망을 함께 씹어 삼켰던 청춘, 바로 그 시절 시가 우리들 마음속에서 서서히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우리들에게 불행 중 다행이기도 했다. 백양정시군체(白洋淀詩群體)를 담론하려면 먼저 60년대 말로 눈길을 돌려야 할 것이다. “문화대혁명”이라는 특수한 년대를 겪은 한 무리 젊은이들은 낙후하기 그지없는 편벽한 시골에 강제로 쫓겨 왔다. 희망은 파멸되고 심령은 상처를 받고 미래는 어둡고 캄캄하기만 했다. 그러나 청춘에 대한 열정은 불같았고 그들이 겪은 심리적 갈등, 생명의 활력은 오히려 상호 모순과 융합 속에서 중국시사에 한 무리 우수한 시인들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1968년 하반 년, 모택동이 발동한 “무산계급문화대혁명운동”은 바야흐로 세 번째 해에 들어섰다. 1966년 6월부터 시작하여 모든 대학교, 중학교, 소학교는 문을 닫은 지 3년이 되었고 수백만명에 달하는 중학생들은 갈 곳이 없게 되었다. 이때 “지식청년들은 농촌에 내려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으라”라는 모택동의 최고지시가 내려졌다. 1968년 하반 년, 우린 끊임없는 송별로 나날을 보냈다. 나는 “문화대혁명”은 인류역사상 한 단락의 특수한 역사라고 믿고 있다. 이는 사학가들로 하여금 부단히 연구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부단히 사고하게 만드는 역사이다. 본 논문은 “문화대혁명”을 주제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배경으로 나타난 하나의 문학단체 “백양정시군체”에 대한 담론에 목적을 둔다. 백양정시가체가 산생된 사회배경 백양정은 화북평원의 늪지대이다. 고대에는 “조택(祖澤)”이라고 불렸고 깊은 역사가 깃들어 있다. 사람들 말에 따르면 이곳은 바로 전국시대, 연나라 태자 단이 진시황을 암살하러 가는 형가를 떠나보내던 곳이라고 한다. 그 송별식은 바로 백양정 남쪽 지금의 안주 땅인 역수에서 진행되었고 “바람은 세차게 휘몰아치며 역수는 차겁기 그지없어라. 장사는 떠나건만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절창도 바로 이곳에서 탄생한다. 이곳에는 “고추풍태비(古秋风台碑)”가 세워져 이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백양정은 화북평원에 있는 유일한 물가 마을이다. 북경과 150km 떨어져있고 태항산맥 동쪽의 아홉 갈래 하류가 이곳으로 흘러들어 “구하하소(九河下潲)”라고 불리기도 한다. 백양정은 둘레 몇 십 킬로 지역이 모두 크고 작은 호수로 되어있고 서로가 연결 되어 있다. 주변은 제방으로 둘러 쌓여있고 제방들은 굽이굽이 이어져있는데 이 곳 사람들은 “천리제방(千里堤)”라고 부른다. 호수 가운데 몇 십 개 자연촌락이 있어 주로 억새풀 기르고 고기잡이로생계를 이으며 들고 남은 모두 배를 이용한다. 그러나 이곳은 중국의 강남수향과는 달라 겨울에는 얼음이 얼고 봄에 얼음이 풀리며 가을은 다시 얼기 시작하는 곳이라 교통이 매우 불편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또 30, 40년대 중국의 유명한 항일근거지였다. 60년대 말, 백양정 지역은 중국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행정관리가 인민공사(人民公社) 형태였다. “문화대혁명” 때는 행정기구가 두 개 패로 나뉘어졌는데 한패는 현성을 근거지로 하고 다른 패는 비교적 큰 촌부락을 근거지로 삼았다. 당시 백양정은 인구가 많았으므로 지식청년들을 접수해야 된다는 조치가 없었다. 북경의 많은 중학생들은 주로 섬서, 흑룡강, 내몽골, 운남 등 먼 곳으로 배치되었고 백양정에 내려간 학생들은 “각 지역의 농촌동지들은 청년들을 환영한다”는 지시를 받들고 자유롭게 조직을 묶어 내려 간 학생들이다. 이들은 한 무리 사상이 긍정적이면서도 반항성을 띤 젊은들이었다. 양화(杨桦)는 그의 《백양정회억》이란 글의 “도망자들”이란 장절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군중들에게 독재받기 시작한지 여덟 달이 되는 1969년 초, 나는 드디어 허가를 받고 매주 한차례씩 집으로 갈수 있었다. 하지만 군중독재는 계속되었고 나는 산서로 가서 동학들과 함께 그곳 마을 집체호에 들어가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다가 양화는 어느 하루 친구 주탁(周舵)을 만났고 주탁 역시 그와 같은 처지였다. “주탁은 나더러 백양정으로 함께 가자고 하였다. 학교 내의 혁명적극분자들을 피할 수 있을뿐더러 백양정은 어미지향이라 고생이 적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북경과 가까운 거리기에 교통에도 편리하다는 것이다. 하여 나에게 있어 백양정에 가는 것은 군중독재의 도피로 큰 결심이었다. 곧바로 며칠 뒤에 나는 대부분 학생들이 하향하는 혼란을 타서 백양정에 갔다.” “1969년 3월, 나는 북경과 백양정을 세 차례 왕복하면서 근 스무명 되는 학생들의 집체호수속을 밟았다. 대충 손꼽아 보아도 나하고 친한 그들 중 80%이상은 문화대혁명로 가정이 피해를 받은 집들의 자녀들이였다.”② 양화가 서술한 것처럼 당시 백양정에 내려간 지식청년들은 대부분이 문화대혁명 중 박해를 받은 간부의 자녀나 지식분자들의 자녀였다. 그들이 살아온 생활경력은 다른 학생들처럼 맹목적으로 허구성이 진한 정치의 설법을 믿지 않게 하였으며 스스로 생각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일정한 문화지식을 갖춘 사상이 예민한 청년들이였다. 백양정 집체호에 온 몇 백 명의 학생들 가운데서 절반가량은 천진에서 온 지식청년들이었다. 북경에서 온 대다수의 학생들은 자유로 조직을 묶고 왔기에 관리하는 지도자도 따로 없었다. 그리하여 백양정의 북경 지식청년들은 다른 지방의 청년들에 비하여 속박을 적게 받았다. 뿐만 아니라 백양정은 북경과 가까운 거리에 인접하여 정보교류가 광범위했고 특수한 지리적 환경으로 하여 전국 각지의 우수한 지식청년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이로써 백양정시군체는 하나의 고립된 단체가 아니라 북경과 전국각지의 광범위한 청년들을 연결하는 개방된 체계로 군림했다. 송해천은 《백양정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백양정시군체의 산생은 그 자체의 문화전통과는 혈연적인 연계가 없다. 비문화적인 환경, 문화에 대한 홀시와 무관심이 오히려 상대적으로 관대하면서도 또 봉폐성을 띤 또 하나의 작은 생태테두리를 만든 것이다. 바로 이 테두리 속에서 시군체가 산생하고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백양정시군체의 뿌리는 북경에 있다. 백양정시군체는 하나의 문화현상이며 그 본질은 도시문화이다. 이는 5.4운동 이래 서방문화를 흡수하여 신 시학을 창건하는 노력의 발전이다. 다른 점이라면 도구주의적인 경향을 버리고 인간의 존재적 가치와 존재 상황의 종극적인 관심에도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백양정시군체는 《10년동란》에 맞선 굴곡적이고 견인한 투쟁이였고 백양정이라는 특수한 생태환경을 빌어 자기만의 결실을 빚어낸 산물이다.”③ 백양정 집체호에 갔던 반청(潘婧)은 그의 《마음의 길(心路历程)― <문혁>중의 4통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북대황이나 섬서, 운남 지식청년들에 대한 실화문학은 많은 사람들이 썼다. 그러나 백양정에 관하여 글을 쓴 사람은 얼마되지 않는다. 백양정에는 몇 명의 북경 지식청년들이 있었고 그들은 대부분 지식분자 가정이나 박해를 받은 간부들의 자녀들이였다. 이 작은 군체의 몇 안 되는 사람들은 몇 백만 지식청년들에 비하여 특수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강제성적인 명령과 안배에 불복하였고 원래 집단에서 도망쳐 자유로 지방을 찾아서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백양정에 모여들었다. 백양정은 하나의 이상속의 무릉도원이 되었고 시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호수를 품고 있었다. 최초로 손리(孙犁)가 산문에서 백양정을 ‘화북의 명주’라 묘사하였고 그 후 70년대 ‘몽롱시’의 발원지 역시 낭만이 가득한 이 백양정호수가 되었다… 설사 그 어떠한 고난이라도 실은 청년들의 낭만의 정취를 깨뜨리지 못한다. 그러나 그해의 마지막 겨울, 우린 원시적인 잔혹한 물질생활의 고난을 겪었다. 그렇게 한동안 정신과 물질, 이상과 현실은 극도로 분열된 상태에 놓여있었다.”④ 총적으로 백양정시군체가 산생된 데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소가 작용한다. 1, 한 무리 사상이 민감하고 독특한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이 있었다. 2, 상대적으로 관대한 환경이 주어 졌고 공간이 자유스러웠다. 3, 북경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였고 정보내원이 풍부하였으며 외계와의 교류가 편리하였다. 백양정시군체의 창작과 그에 관한 독서활동 등은 아래에서 진일보 더 설명한다. 백양정시군체의 호칭과 범위 백양정시군체의 호칭은 정확하면서도 합당하다. 1994년 중국의 유일한 시 이론 간행물 《시탐색》에서 백양정시군체에 대한 인터뷰를 실었다. 당년에 백양정 집체호에 갔던 시인과 70년대 문화 살롱의 참가자들 및 시인과 평론가 근 20여명이 자리에 모였다. 인터뷰에 모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백양정시군체라는 호칭에 긍정을 보냈다. 원로시인인 우한(牛漢)선생은 “군체라는 명칭 자체가 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참담하고 황당하면서도 또 불굴의 정신, 완강한 생존의 감각 등 여러 가지 느낌을 가져다준다. 이는 당시 시인들이 처했던 생활환경 및 창작배경과 어울리는 단어다.” 라고 지적하였다. 이에 앞서 여러 서적들에서는 “백양정시파”라고 명명하였다. 이러한 호칭은 부적절한 감각을 준다. 백양정의 시인들은 하나의 시단체가 아니며 또 하나의 유파도 아니다. 그들은 특수한 년대, 특수한 환경에서 우연히 모여 산발적으로 시를 썼던 창작자들이다. 그들은 유파와 비슷했으나 시의 주장과 창작의 방식에서 통일된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유파라고도 할 수 없다. 다만 한 무리 자연발생적인 시창작자들이다. 연구자들이 유의해야 할 점은 “백양정시군체”는 하나의 간단한 지역적 개념이 아니라 보다 크고 광범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백양정시군체는 당시의 북경의 지하문화 살롱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연계를 맺고 있었다. 시인 다다(多多)는 그의 글 《매장된 중국시인(1972-1978)》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1970년 초겨울, 북경청년들의 정신세계는 이미 봄이었다. 당시 베스트셀러로 되었던 《호밀밭의 파수꾼》과 《별을 단 기차표》는 북경청년들에게 한줄기의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이때 이들은 《낭자곡 및 이외의 것들》, 베케트의《의자》, 사르트르의《혐오하는 것들과 이외의 것들》 필여협(毕汝协)의 소설《9급파도》, 감회리(甘恢理)의 소설《연꽃이 필 무렵》 그리고 곽로생(郭路生)의《미래를 믿다》 등 《내부발행》도서를 두루 접할 수 있었다. 1972년 여름 북경국무원 숙소의 어느 한 방에서 자그마한 문화 살롱이 조직되었는데 서호연(徐浩渊)이 발기자 및 책임자의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인민대학부속중학교 고등학교 일학년 학생이었으며 “문화대혁명”중의 중점관리대상이였고 노 홍위병 대표였다. 그의 시 작품《만강홍》은 강청을 빗댄 것으로 찍혀 2 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으며 출소한 후 더욱 적극적으로 서방문화를 전파하는데 힘을 썼다. 다행스럽게 나와 악중(岳重)은 가수의 신분으로 이 문화 살롱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중에는 대부분이 화가와 시인이였다… 우리는 늘 함께 모여서 노래를 부르기도 그림을 전시하기도 하였고 도서교류, 생일파티, 여행 등 활동도 가졌다… 우리(망극 芒克, 악중 岳重, 다다 多多)는 16세 나이에 한배를 타고 백양정에 왔다. 백양정은 와룡장호(臥龍藏虎)의 땅이다. 역대의 이곳 사람들은 성격이 강하다고 하였다. 나는 백양정에서 6년을 보냈고 악중이 3년, 망극이 7년을 보냈다. 우린 그곳이 하나의 요람인지를 몰랐다. 당시 백양정에는 시인들도 여러 있었다. 송해천, 방함(方含), 그 후 북도(北島), 강하(江河), 감철생(甘鐵生) 등 시인들도 백양정에 다녀갔다고 한다......“⑤ 백양정 집체호에 내려갔던 주탁은 그의 글 《당년의 가장 훌륭한 친구》에서 이렇게 말했다. “70년대 초반, ‘문혁‘이 살판 치던 암흑한 년대, 우리같이 자유로 개입한 지식청년들은 몸을 의지할 수 있는 단위도 없이 타향에서 비공비농(非工非農― 농민도 아니고 노동자도 아닌 사이비한 신분)의 신세로 몰렸다. 집안의 어른들은 몇은 감옥으로 들어가고 몇은 개조하러 내려가고 우린 잠시나마 군중독재와 무관한 변두리에서 조금이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⑥ 백양정은 북경과 150km 떨어져 있고 기차를 타고 가다가 도중에 다시 버스로 바꿔 타야 했다. 보통 6~7시간이면 도착하는데 일부분 지식청년들은 자전거로 12시간씩 달려서 온다. 교통이 상대적으로 편리한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경상적으로 북경과 백양정 사이를 오고가고 하였다. 각 지방에 내려갔다가 북경에 돌아온 지식청년들은 북경의 빈번한 호구조사를 피하기 위하여 일부러 백양정에 거주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백양정의 각 촌마을에서는 지식청년들의 내왕은 빈번하였고 이러한 이유로 백양정시군체는 북경지하문학 살롱과 밀접히 연관되는 문화적 분위기를 갖게 된 것이다. 흑룡강에 하향했던 시인 마가(马佳)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를 시단에 인도한 이는 곽노생(郭路生)이다. 그의 문학적 성과와 그의 인생 및 불행은 언제나 하나같았다. 그처럼 성실하고도 정직하게 자신을 해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바로 그 정직성이 그로 하여금 정신분열증에 걸리게 한 것이다. 나는 그때 곽노생과 백양정 사이 중간점에 있었다. 내가 백양정에 들어가게 된 것은 북경에서 병 치료를 받고 있은 것이 계기로 된다… 밖에서 떠도는 걸 싫어하는 사람들은 늘 작은 단체에 가입하기를 좋아하는데 당시 백양정은 북경과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것이다. 이 군체를 무엇이라고 이름지을까?… 나는 한 마리의 철새처럼 남북 하늘을 가로지르며 비행했다… 바로 이렇게 특정된 역사적 배경에서 특수한 군체가 산생되는 것이다.”⑦ 이러한 서술들에서 우리는 백양정시군체의 발생은 북경의 당시 사회문화생활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 전 북경의 일부 문화청년들은 이미 전통적인 문화를 거스르는 잠재적 의식흐름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장랑랑(张郎郎)을 중심으로 한 “태양종대(太陽縱隊)”를 시작으로 곽노생의 “문혁”초기시절의 시창작, 70년대 초반의 북경지하문화 살롱, 백양정시군체 이러한 문화적 행보들은 그 후로 십 년 뒤 전국을 들썽케 했던 몽롱시의 창조에 튼실한 기초를 닦아놓았던 것이다. 백양정시군체는 백양정 집체호에 내려간 시인들을 위주로 하면서 또 백양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부분들은 백양정시군체를 이루는 하나의 유기부분으로서 소홀히 대할 수 없다. 백양정에는 당시 시창작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각자의 애호와 추구를 가지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철학이나 사회학을 좋아하고 어떤 이들은 경제학을 연구하였고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아 말하여 그들은 잔혹한 현실 앞에서 무너지지 않은 의지가 강한 젊은이들이였다. 그들은 상호교류를 통하여 상호진보하였다. 그 외 국내 각 곳에서 온 지석청년들과 문학을 지향하는 북경청년들은 백양정에 모여들어 백양정시군체의 탄생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나는 일전에 한 문장에서 백양정시군체에 대하여 이렇게 적은 적이 있다. “백양정시군체는 여러 부문의 시가 창작인들이 최종 합류 되여 형성된 것이다. ‘문화대혁명’전 중국고대의 시와 사에 흥취를 갖고 그 후 모택동 시와 사의 영향을 받고 창작을 시작한 청년들, ‘문화대혁명’전 당시 유행하던 낭송시의 영향을 받고 창작을 시작한 청년들, 서방의 사조와 러시아문학의 계발로 창작을 시작한 청년들. 이 세 부류의 청년들은 1972년 후, 당시의 특수하고도 황막한 환경 속에서도 《백피서(灰皮書)》와 《황피서(黃皮書)》(백피서(灰皮書), 황피서(黃皮書)― 문화대혁명시기 독서가 금지되었던 책) 의 계발로 현대주의시가창작을 계승하고 창작을 진행한 시가군체의 영합이었다. 이들은 80년대 초기에 흥행한 “몽롱시”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백양정의 청년들 중 시를 쓰는 젊은이들은 2,30명 가까이 있었다. 후기에 와서 현대주의시가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몇 명 없었다. 그 외 백양정 집체호에 들어가지 않고 백양정과 일정한 연계를 가지고 시 창작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강하를 례로 들수 있는데 그는 1969년부터 1973년까지 백양정에서 일 년간 거주하였다. 그의 처녀작은 바로 백양정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탄생하였다. 송해천은 그의 회억녹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마을은 지리적 위치가 현성으로 가는 길목이었기에 매일과 같이 학생들을 접대하였다. 하루 이틀 머물다가 간 사람들도 있고 한두 달 거주하는 사람들도 있다. 감철생(甘铁生)이나 진회자(陈淮子)가 그러하였고 우택(江河의 본명, 友泽)은 아마 제일 오랜 시간을 머물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우택은 우리들에게 신선한 문학적 배경을 안겨다주었다. 그는 브라우닝(Robert Browning, 1812-89) 의 《14행시집》 등을 전부 베껴왔고 지어는 책속의 목각그림마저 모사하여 왔다. 그 외 내부출판 간행물인 《현대자산계급문논선》도 가지고 왔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채남(寨南)에 있는 동안 우택은 시 창작을 시작하지 않았고 그의 처녀작은 1971년 바로 이 북하장 (림망이 하향했던 마을)에 완성된 것이다.⑧ 이외에도 손강(孫康, 방함의 원명)이 있었는데 그는 백양정과 30키로 떨어진 서수현 청묘영촌에 하향였었고 백양정의 시인들과 그 누구보다도 친밀하게 지냈다. 그리고 북도(北岛), 곽로생, 원가방(袁家方) 사보가(史保嘉)등 시인들도 백양정에 왔었고 감회리(甘恢理), 진개가(陈凯歌), 감철생도 백양정에 다녀갔었다. 백양정시군체는 지역적 제한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개방된 함의를 품고 있다. 이는 특수한 년대에 나타난 특수한 문학현상인 것이다. 이는 바로 백양정이라는 화북의 수향에 의탁하여 나타난 생명력과 잠재력이 강한 하나의 시군체의 형성인 것이다. 백양정시군체와 당년의 지하독서활동 송영의(宋永毅)는 《문혁시기의 황서와 백서》라는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문혁이전에 출판한 서방이론과 문학저작은 대략 1041종에 이른다… 이런 책들은 한 세기의 사람들이 세계와 소통하는 유일한 사상자원이였다. 당시 사람들의 회억과 탐방으로 얻은 자료에 의하면《내부간행물》이 문혁시기 사람들에게 미친 사상적 영향은 매우 큰 것이었다.” ⑨ 송해천은 37권의 책이름을 열거했다. 그중 내가 읽은 것은《사람, 세월, 생활》, 《얼음이 풀리다》, 《혐오하는 것과 이외의 것》, 《호밀밭의 파수꾼》, 《길 위에서》, 《낭자곡과 이외의 것》, 《별을 단 기차표》, 《눈이 많이 내리던 겨울》, 《모퉁이》,《하얀 배》등 10종이다. 내가 알기로는 그가 열거한 사회와 정치에 관한 서적 외에도 사회사상과 관련된 문선도 있었다. 존재주의적 사상이 깃든 일부 서적들도 청년들 사이에서 유전되었다. 동시에 서방현대회화와 음악도 청년들의 공명을 일으켰다. 반청(潘婧)은 그 시기를 회억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차례의 전면적인 역경을 치르고 나서 우리들의 정신세계는 곤혹에 빠져들었다. 십 여 년 간 우리들 머릿속에 주입해 들어왔던 사상모식이 완전히 뒤바뀌는 시간들이였다. 이는 트로츠키(Trotsky)의 ‘배반당한 혁명’, 질라스(Milovan Djilas)의 ‘신계급’등이 가져다준 충격이었다. 그 시기 우리들은 문혁 전에 출판된 내부간행물을 미친 듯이 수집하였다. 나의 중학교 동창생의 아버지는 작가이면서 문예부의 령도 자였는데 그녀의 집에서 나는 여러 권의 황서를 발견하였다. 그 당시 내게 계몽적 의의를 가져다주었던 책들로 일리아 에렌부르그(1891~1967) 의 《사람, 세월, 생활》,셉첸코의 시집 등이 있다. 그 외 한창 유행되던 《길 위에서》와 《별이 달린 기차표》역시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⑩ 서호연(徐浩淵)도 그녀의 책 《나의 반성》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한적한 겨울, 나는 돈이 없어 기차에 가만히 몸을 숨겨가지고 북경에 가서 여러 지방에서 올라온 지식청년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과 함께 토론도 하고 변론도 하였다. ‘중국은 앞날은 어디에 있는가?’, ‘중국 농촌은 어찌하여 이렇게 가난한가?’, ‘대약진은 과연 정확한 길인가?’, ‘중국의 현실적 계급을 어떻게 획분하여야 하는가?’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담론의 주제는 문학, 예술, 음악, 철학 등 그 종류가 수 만 가지었고 그 범위가 한없이 넓었다. 이 청년들의 지하 담론회는 현대 사람들에게 자발성적인 문학‘지하살롱’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는 예술에 대한 학습이며 도발성적인 창작이었고 마치 한 갈래의 서광처럼 문혁초기의 모택동에 대한 신적 숭배를 타파해버렸다.”⑪ 이 시기, 백양정 시인들도 자발성을 띤 계몽적 성격을 띤 독서와 창작활동에 참여하였다. 양화(楊樺)의 회억록을 보자. “대약진 마을에 내려갔을 때 최건창(崔建强), 송해천 등 지식청년들을 만났다. 그들의 책은 나를 감탄하도록 만들었다. 네 사람이서 책을 모아 하나의 소형 도서관을 만들었다. 두꺼운 나무상자로 큰 상자를 만들었는데 길이가 한메터나 되고 너비도 거의 한메터가 되었다. 상자전체가 책으로 꼭 찼다. 나는 헤겔의 《작은 논리》와 스탕달의《붉은 것과 검은 것》,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판단》을 빌렸다.”⑫ 나의 기억에 의하면 이런 독서활동은 하향운동전부터 있었다. 문혁이 시작된 후 학생들의 운동은 더 이상 주류가 아니었다. 공선대(工宣隊, 노동자선전대), 군선대(軍宣隊, 군인선전대)가 학교에 들어와 학생들을 관리하기 시작하였고 최초의 홍위병들도 부모들이 비판을 받게 되고 “개자식”으로 몰리게 되었다. 이들은 부득불 정치무대에서 퇴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때로부터 많은 청년들은 책속에 몸을 숨기기 시작하였다. 나도 바로 그시기에 근 백 여권이 되는 고금중외의 서적들을 독파하였는데 이는 그 후의 문학창작 생애에 하나의 크나큰 원천으로 되었다. “문혁”의 조우는 그 일대의 사람들을 각성시켰다. 그때로부터 그들은 진정으로 자아와 세계를 인식하게 되었고 그들의 창작도 생명과 내심 속에서 우러러 나오는 것을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문학예술의 뿌리를 찾기 시작하였고 그 시기 독서활동은 하나의 정화제로서 사람들의 심령을 맑게 씻어주었다. 백양정시군체와 연관이 있는 시인들 “태양종대”나 곽사영(郭士英)같은 이른 시기의 시인들을 제외하고는 시단의 영향력 있는 시인들은 거의 백양정시군체와 일정한 연결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곽노생(食指), 마가, 북도와 강하이다. 양화의 회억에 의하면 곽노생(食指)은 1969년 가을에 백양정 리장자(李庄子)란 마을에 내려왔다. 당시 하기방(何其芳)의 딸 하경힐(何京颉)도 그 마을 집체호에 있었다. 곽노생은 그곳 지식청년들뿐만 아니라 당지의 농민시인 리영홍(李永鸿)과도 교류를 가졌다. 그는 산서에서 백양정으로 오고 싶었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허나, 그가 어느 곳에 있던지 물론하고 곽노생은 그 시대의 개척자로서 백양정의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969년 강하가 백양정에 도착하였다. 그는 내가 있던 마을에 근 한 달가량 있었는데 《미래를 믿다》, 《담배》, 《술》등 곽노생의 단시 몇 수 가지고 왔다. 그해, 나도 낙서장에 시 몇 수를 긁적거렸다. 곽노생의 시는 오래 동안 나를 감동시켰다, 그 후 나는 또 송해천한테서 곽노생의 《해양3부곡》,《어촌3부곡》 (발표할 때 제목을 《물고기 3부곡》으로 고쳤다) 을 베껴왔다. 백양정에 있는 나날들 이 시편들은 줄곧 우리들과 함께 있었고 늦은 밤이면 모두가 모여앉아 함께 낭송하거나 혹은 누군가가 읽어줬다. 곽노생은 그 당시 시대의 선구자였으며 신 일대 시인들의 계몽스승이었다. 마가(馬佳)는 흑룡강에 하향하였었는데 병 치료로 북경에 오게 되었다. 그는 다다, 망각, 근자(根子), 팽강(彭剛) 등 십 여 명과 살롱을 조직한 적이 있다. 백양정에 있을 때 나는 마가의 시를 읽은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풍성한 가을의 과실과도 같이/ 나는 점점 무거워진다/ 나는 10월의 전부를 가졌다. 전부를” 이거나 “술, 그리고 또 술 / 20세가 되기 전/ 생활이란 늘 명절이 였다”등과 같은 그의 시구를 책에 베껴놓기도 했다. 마가는 비록 백양정에 몸을 담근 시인이 아니지만 백양정 시인들과 동일한 시가의 원천을 소유하고 있다. 바로 그 자신이 말한 것처럼 곽노생의 영향이 컸던 것이다. “나에게 진정으로 깊은 영향을 준 것은 곽노생이다. 곽노생과 우리 누나는 친구였고 그 둘은 나이가 같았다. 나는 줄곧 곽노생을 우러러왔으며 그와 늘 시나 외국시인들 및 황피서에 대해 담론하였는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곽노생이 나에게 추천한 책들이었다.” ⑬ 이처럼 마가는 곽노생과 백양정시인들 사이의 한 사람으로서 백양정시군체와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강하(江河)는 고중시절의 나의 동창생이다. 우리 둘의 관계는 아주 좋았다. 문화대혁명초기 우리는 몇 번이나 내왕한 적이 있다. 내가 백양정에 있는 동안 그는 여러 차례 나를 찾아와서 한동안씩 머물고 갔다. 앞의 말처럼 그의 처녀작은 바로 내가 있던 마을에서 창작해낸 것이다. 그는 선천적 심장병을 앓고 있었고 부모님들은 “문혁”중 박해를 받았다. 다행히 그는 북경의 자그마한 거리의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독서량이 풍부하여 북경의 청년시인들 중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는 초기의 작품과 백양정에서 쓴 시들은 발표하지 않았다. 당시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서정성을 띠고 있어 시인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지고 있었다. 허나 그의 발표작들은 전부 1978년 후에 창작한 것이며 시적 풍격 상에서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강하와 백양정시군체의 연계는 한마디로 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 이외에도 예술분야의 여러 사람들이 많은데 더 이상 상세하게 전개하지 않겠다. 초기와 말기, 백양정과 연관이 있던 마가, 다다 및 여러 사람들의 문장에서 보다 싶이 의군(依郡), 사보가, 원가방, 북도, 팽강(彭刚), 조연생(鲁燕生), 노쌍금(鲁双琴), 장료료(张廖廖) 등 시인들도 백양정과 연계가 있다. 물론 그 이후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백양정과 관계를 맺었는데 본고에서는 여기까지만 서술한다. 백양정시군체의 주요한 대표성 시인 시대의 변혁으로 말미암아 당년의 사람들과 사건들은 서서히 잊혀져 간다. 그 시기, 그 처량한 호수에서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필을 들어 시를 썼는지는 그 통계수가 명확하지 않다. 허나, 다른 문학작품들에 비하여 시는 상대적으로 행운적 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의 비 직접성, 정감성, 전달성으로 하여 그 시기의 많은 시작품들은 원고 그대로 보존되여 왔다. 비록 많은 시인들이 절망과 근심과 불안 속에서 혹은 정치의 박해와 압박 속에서 자신의 작품들을 잃거나 훼멸시켰지만 대부분은 그래도 남아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작품들이지만 충분하게 이들은 당대시가에 공헌을 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송해천은 백양정 지식청년들 중 연장자였다. 그는 1966년의 북경청화부속중학 고3학생이었다. 성적이 우수하고 심령이 착하여 “늙은 양”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그는 시험을 쳐 북경사범대학 화학계에 붙었다. 그는 현재 두 편의 장시를 가지고 있는데 《해적선가요》와 《유랑인의 노래》이다. 첫 편은 그가 당년에 여러 곳을 다니다가 백양정에 머문 조진선(赵振先)한테 베껴준 것을 20년 뒤에 조진선이 내게 넘겨주고 다시 내가 송해천한테 전해준 것이다. 두 번째 시는 줄곧 나의 수첩에 적혀있었다. 송해천의 작품은 주로 고전적인 풍격을 많이 갖추고 사상이 무겁고 슬픈 정감을 노래로 표현하였다. 그의 집은 늘 지식청년들이 모임을 갖는 장소로 사용 되었다. 그는 사회의 유명 인사들과 예술가 등 여러 방면의 사람들과 교류했으며 당시 그의 집에 자주 내왕하던 사람들로는 정의(鄭義), 감철생, 강하, 최건강, 류만강(刘满强), 고익(顾益)등이 있었다. 나의 시작품과 창작중의 소설을 일찍이 그의 집에서 낭독한 적이 있다. “늙은 양”의 인간관계가 좋고 또 그가 머문 마을이 현성으로 통하는 골목이기도 하여 수많은 타성의 지식청년들은 백양정에 오면 늘 송해천의 집에 머물었던 것이다. 방함의 본명은 손강이다. 북경 35중학교의 학생이다. 그는 백양정과 30km떨어진 서수현 청묘영촌에 하향하였다. 백양정에 있거나 북경에 있거나를 막론하고 그는 백양정 시인들과 밀접한 연계를 갖고 있다. 그의 집에서도 작은 모임이 여러 번 있었다. 70년대 초, 나는 그의 집에서 번역가 강풍(江楓)선생을 만나 인연을 맺었다. 손강은 문혁 때 정치서정시로 이름을 날렸다. 후에 그는 가르시아 로르카(Garcia Lorca,1898-1936)의 시풍으로 창작하여 인정을 받았다. 어느 해 설날, 손강이 우리 집에 놀러왔을 때 나는 그에게 새로 창작한 두 편의 장시를 보여주었다. 《26개 음절에 대한 회상― 잃어버린 세월에게 바친다》와 《1974년을 추도하다》였다. 그는 읽어보더니 괜히 시끄러움을 살 필요가 없다면서 다른 사람들한테 보이지를 말라고 당부하였다. 훗날, 그는 몇몇 친구들의 시를 함께 묶어 시집을 낸다고 하면서 나의 그 두 시를 가져갔다. 그러나 당시의 열악한 조건으로 하여 끝내는 시집을 낼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불확실한 운명 앞에도 여전히 시에 대한 희망만은 저버리지 않았다. 백양정시군체의 “삼총사”는 망각, 근자, 다다이다. 그들 셋은 북경 제3중학교 2학년 7반 같은 반 동창생들이였다. 그들 셋은 마차를 타고 함께 백양정에 왔는데 하나같이 시를 잘 썼다. 그리하여 “삼총사”라고 불리며 당시의 시가창작에 커다란 촉진 작용을 놀았다. 내가 제일 처음 알게 된 사람은 다다이다. 북경에 있을 때 그의 집과 우리 집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첫 번째 만남은 백양정 송해천이 있는 곳에서였다. 다다 외에도 도낙송(陶雒誦), 조경흥(趙京興) 등이 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조경흥이 방금 북경에 있는 교도소에서 풀려나와 한자리에 모였던 것이었다. 당시의 정황을 송해천은 《백양정수기》에서 상세하게 묘사하였다. 그날 우리는 서방의 철학에서부터 맑스주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교도소에서의 시창작 등에 대하여 밤늦게까지 담론하였다. 그 시기 다다는 이미 현대주의를 지향하기 시작하였다. 내의 기억에 의거하면 그의 초기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는 변소에 움츠리고 앉았고/ 공사 확성기나팔은 밥사발처럼 생겼네”, “아침이다/ 태양이 솟아오른다/ 진리라는 붉은 엉뎅이를 내리 비춘다” 그 후 다년간의 추구를 거쳐 다다의 시는 형식과 방법상에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나는 《빛살이 세월을 통과하다》라는 문장에서 “근자(根子)의 작품은 3수의 장시와 몇 편의 분산된 문장들뿐이다. 허나 그는 당시 북경의 지하시단에서 ‘시의 패왕’이라고 불렸다. 그의 시 ‘3월의 말일’을 읽고 많은 시인들이 감탄했었다. 70년대 초봄, 나 역시 근자와 같은 시적정취에 빠져 있었고 근자의 이 시를 읽고 나서 석연해졌다. 내가 쓴 몇 편의 봄에 관한 시들은 작품도 아니었던 것이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그 당시 나의 창작실력은 근자를 따를 길이 없었다. 후에 근자는 남성중음으로 중앙악단에 들어갔다. 현재는 해외에서 사업하는데 생활의 변화 혹은 일종 염오감인지는 몰라도 더 이상 창작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시는 영원히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다.” ⑭ 나는 이 문장을 쓰면서 그의 “백양정”이라는 시와 곽노생의 《해양3부곡》을 대량으로 비교하였다. 작품의 내용은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두 시 모두 희망파멸자의 정서를 표현하고 있었다. 식지와 근자는 4살 차이가 나는데 그들의 창작연령도 4년 차이가 난다. 그러나 식지의 시에 표현되었던 희망과 갈망을 근자의 시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식지는 낭만주의 경향을 갖고 있었고 근자는 현대주의 창작방법을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 중국 근대시가의 역사를 놓고 말하면 1973년은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바로 그해, 한 무리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이 현대주의기치를 내흔들었고 근자는 그 맨 앞장에 서있었다. 백양정시기 나는 인연이 없어서인지 망극(芒克)과 만나지 못했다. 70년대 말, 《오늘(今天)》잡지의 어느 모임에서 얼굴을 익혔다. 하지만 나는 그의 시는 오래전부터 읽어왔고 백양정시기의 수첩에도 그의 시를 적어놓았다. 이 몇 년간 우리는 부단히 내왕했다. 망극의 시는 백양정시기의 창작에서부터 80년대 말 《시간이 없는 시간》 에 이르기까지 우리 일대 청년들의 심령을 한 폭의 그림으로 스케치했다. 그의 시는 지금도 비평가들의 탐색과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망극은 세르게이 예세닌(Sergei Esenin, 1895∼1925)과 같은 부류의 천재 시인이며 그의 시에는 영혼의 목소리가 담겨져 있다. 백양정시군체에서 양화(楊樺)와 조철(趙哲) 또한 빠질 수 없다. 양화의 본명은 윤평(尹平)이다. 문혁 중 사상이 활약적인 이유로 투쟁을 받았고 학교에서 8개월 동안 노동개조를 하였다.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그는 이름을 바꾸고 백양정 집체호에 하향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부대의 간부였다. 당시 유행되던 일부 “황피서”들은 바로 그의 집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의 시에서는 고귀한 기상이 흘렀는데 그러나 그는 시에 비하여 철학을 더 좋아하였으므로 시창작은 얼마 하지 않아 그가 남긴 작품은 몇 편 안 된다. 조철(赵哲)은 집안의 무남독녀다. 그는 문혁 중에 박해를 받고 있는 부모와 할아버지한테 피해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동학들과 함께 스스로 백양정 집체호에 하향하였다. 그의 시 는 주로 자연주의를 표현하였다. 이밖에 여러 시인들이 더 있는데 다 논의하지 못한다. 망각과 한마을에 있던 백청(白靑), 조장자마을의 주수(周陲) 등 시인들이다. 그들에게는 남아있는 작품이 몇 편 안되기에 더 이상 전개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에 대하여서는 이미 여러 문장에서 몇 번 쓴 적이 있기에 여기서 더 적지 않겠다. 백양정시군체의 가치와 총체적인식 1) 백양정시군체는 북경을 바탕으로 하고 백양정을 기점으로 이루어진 한 무리 젊은 시인들의 집합이다. 이는 단순한 지역적 개념이 아니라 70년대 초에 나타난 일종 특수한 문화현상이다. 2) 백양정시군체는 하나의 시유파가 아니라 현대주의 문화를 지향하는 청년 작가들의 모임이다. 그들은 자유창작을 하였고 흩어져 있으면서도 상호 연결되는 문화청년들이다. 3) 백양정시군체의 작가들은 문혁 때 하양운동에 참가했던 지식청년들로서 전통교육의 표면화를 거부하고 허구성을 타파하고 회의와 반성가운데서 생명의 진실한 체험을 했다. 4) 독서활동과 “백피서” “황피서”의 계발과 영항으로 백양정시군체는 문단의 오랜 봉폐체제를 파괴하였으며 이로써 5.4운동 이후 서방문화의 충돌과 교류를 형성하고 자각적으로 현대주의 시가창작방식을 추구하였다. 5) 당대문학사상 장랑랑의 “태양종대”를 첫 시작으로 곽노생에 이르기까지 시의 현대주의 길에서 백양정시군체는 가장 큰 폭으로 그 영역을 넓혔고 한 시대의 완성에 마침표를 찍었다. 6) 백양정시군체는 “몽롱시” 산생의 원천이다. 이들 10 여년의 노력이 80년대 전국을 휩쓴 “몽롱시”의 발생에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는 시예술의 탐색을 위한 충분한 준비과정이었다. 끝으로 백양정시군체의 연구에 관하여 몇 가지 희망사항을 제기한다. 백양정시군체는 중국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문화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대한 발굴과 연구는 전형적인 가치를 갖고 있으며 이는 또한 중국 당대시사(當代詩史)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구성부분이 된다. 본고에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여러 독자들의 비평을 주기 바란다. 주해: ①, ③, ⑧ 송해천 《백양정수기》, 《시탐색 》, 1994년 제 4기. ②, ⑫ 양화 《백양정회억록》, 미 발표작. ④, ⑩ 반청 《신노역정― 문혁(文革) 중에 보낸 4통의 편지》, 《중국작가》1994년 제 6기. ⑤ 다다 《매장된 중국시인》 (1972-1978) , 《개척》 1989년 제 1기. , ⑥ 주탁 《당년의 좋은 친구》신강소년출판사 1999년 4월호 《침몰된 성전-중국 20세기 70년대 지하시단의 재조명》 ⑦, ⑬ 《마가탐방록》 신강소년출판사 1994년 4월호 《침몰된 성전-중국 20세기 70년대 지하시단의 재조명》 ⑨ 송영의 《문화대혁명중의 황서와 백서》, 《21세기 쌍간호》 1997년 8월호. ⑪ 서호연 《나의 반성》, 《세계일보》1997년 3월 30일. ⑭ 림망 《빛살이 세월을 통과하다》, 《신창작》 2000년 제 4기에 발표. 林莽 / 북경 《시간(詩刊)》사 편집부 주임, 시인. 全銀珠 / 연변대학교 석사 연구생, 시인. (한국어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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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깊이 있는 글을 올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잘 봤습니다. 반갑습니다. 석화 시인님.
회장님, 금낭님, 중국 임망시인의 글을 살펴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내일 대전에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