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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2 - 셀주크 투르크, 중앙아시아와 이란 및 이라크에 제국을 세우다!
돌궐의 후예라고 생각되는 튀르크족의 셀주크 투르크는 10세기에 중앙아시아의 트란스옥시아나 에
진출해 1040년 부터 중앙아시아, 이란, 이라크, 시리아를 지배하며 수니파 이슬람 세계를 통일
했으니 1092년을 최전성기로 얼마 못가 1157년에 멸망한 제국인데, 지배 계급은 튀르크계 부족들
이었지만 정치 체제는 페르시아식을 지향했으며 궁정과 관료들의 언어로 페르시아어를 사용했습니다.
"셀주크 제국" 의 등장으로 인해 중동 이슬람 세계는 오랜만에 다시 통일되었으나 그 기간이
그리 길지는 못했는데, 다만 터키 지방인 아나톨리아에 세력을 굳힌 셀주크의 방계 가문
이나 휘하의 공국들은 몽골 침공기 까지 서로 제국의 후계 자리를 두고서 투쟁을 벌였습니다.
셀주크란 명칭은 중앙 아시아의 튀르크계 부족인 오우즈족에 속한 족장의 이름 셀주크
에서 유래하였으니....... 과거에는 "셀주크 투르크" 라는 명칭으로 불렀습니다.
요즘에는 셀주크 왕조나 셀주크 제국이라고 부르며 후대의 여러 방계 셀주크 국가들 특히
룸 셀주크와 구분하기 위해 통일 제국 시기를 "대 셀주크" (Great Seljuks) 라고 합니다.
1. 초기 역사
알 아시르에 의하면 셀주크 베이(수장, 부족장)의 부친 두카크는 오우즈국의 장군이었다고
하며 아랍 문헌들은 그가 셀주크조가 이슬람화 되는 최초의 인물이라 묘사했으니
두카크가 죽은 뒤 아들 셀주크가 등장하여 오구즈족 사이에서 이름을 떨쳤으니 오구즈는
튀르크 계열의 유목민족으로, 역사적으로 '투르크멘' 혹은 '투르코만'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766년 카를룩이 돌기시 카간국을 무너뜨리고는 중앙아시아에 패권을 잡을 때,
아랄해 이서(以西) 지역에서는 이에 벗어나서 오구즈족의 느슨한 연맹인
오구즈 야브구국이 세워지는데 이들은 텡그리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10세기 말 하자르 제국이 붕괴하자 그 휘하에 있었던 셀주크는 카자흐스탄에 있는 잔드로
이동했다고 하며 또는 오구즈족의 야브구(왕)와 싸우고는 자신의 무리들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 남하했다고도 하는데 이 지역에서 셀주크와 그 추종자들은 이슬람을 처음
접하고,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던 사만 왕조의 용병으로 활동하며 점차 세력을 확장합니다
2. 하자르 카간국
하자르 카간국은 7세기 동로마 황제 이라클리오스가 이란에 대한 전쟁을 수행할 당시 동맹국으로
서튀르크 제국을 끌어들였는데 그 주력이 하자르 부락의 군대였으니 서돌궐 제국이 와해되자
아사나의 일파가 흑해와 캅카스 북쪽에 독립된 카간국을 세웠으니 이 나라가 하자르 카간국입니다.
8세기 중반 하자르 제국의 하자르 황족들은 "유대교" 를 받아들였으니 하자르 제국은 7세기
이후 카프카스 북쪽에서 이슬람의 종교 전파를 막았지만 하자르 귀족 이하 부터는
유대교에서 이슬람으로 옹호적이게 되었고.... 흑해 북안에서는 동로마 제국과 경쟁했습니다.
642년 나하반드 전투에서 사산(이란) 제국군을 격파한 아랍군은 북쪽과 동쪽으로
나아갔는데 북쪽으로의 진군은 캅카스 남부에서 하자르인에 의해 막혔으니
전쟁은 이후 1세기 가량 이어졌는데 당시 아랍 제국은 동로마 비잔티움 제국
과도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동아시아 대륙과 유럽 사이의 교역은 축소되었습니다.
하자르 제국과 아랍 제국이 화해한 것은 하룬 알라시드의 시대였으니 하룬은 위구르 제국의
수도에 사신을 파견하는등 유라시아 대륙 교역로를 부흥시키려 노력했으니 카스피해
남쪽 후라산을 거쳐 소아시아의 비잔티움으로 이어지는 교역로는 아랍과 비잔티움의 전쟁
으로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카스피 해와 흑해 북쪽을 지나가는 하자르의 길이 부흥하게 됩니다.
830년대 들어 마자르 집단이 폰토스 초원으로 이주하여 하자르 카간국의 서쪽 영토
를 약탈하기 시작했고 비잔티움 제국 역시 하자르 제국을 공격했으며 하자르
제국의 중심지 에 기근이 있었으니 이를 막아낸 인물이 유대계 튀르크인
군 사령관 불란이었으니 그는 약해진 카간을 대신해 하자르 제국의 권력을 장악합니다.
권좌에 오른 불란은 하자르 카간국의 유대교화 정책을 추진했으니 861년 경에는 하자르의
카간도 유대교를 받아들였고 그와 동시에 불란은 군 사령관에서 왕이 되니 하자르 제국
2중 왕 체제의 시작으로 보이는데 10세기가 될 무렵 하자르 국가 지배층이 유대교화됩니다.
10세기 들어 하자르 카간국이 아랍 제국의 이슬람 전파로 인해 이슬람 종교화가 되자
비잔티움 제국은 상업적으로 고립되게 되니 비잔티움 제국은 하자르 카간국의 지배
하에 있던 루스 카간국과 협력하는데 루스 카간국은 키예프에서 하자르, 아랍으로
이어지는 교역망의 일원이었으니 결국 루스 카간국은 하자르 제국의 수도 사르켈을
점령하니 3세기 동안 흑해 북쪽 교역망을 장악했던 하자르 제국의 패권은 무너졌습니다.
3. 오구즈(오우즈)
오구즈(영어: Oghuz, 튀르키예어: Oğuz 오우즈[*]) 또는 투르크멘 (Turkmen) 족은
중세에 존재하던 튀르크계 유목민족의 한 분파였으니 이들은 8세기에 중앙아시아
투르키스탄 지역에서 연맹을 구성하였고 9세기 부터 서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여러 부족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였고 이후 셀주크 왕조를 성립시키기에 이르는
데 10세기 전후 부터 이미 다른 튀르크 민족들과 다른 정체성을 가지던 것
으로 추정되며, 셀주크 튀르크와 오스만 튀르크의 주요한 조상 민족이 되게 됩니다.
오구즈 카간은 터키의 전설적이고 반 신화적인 칸이니 일부 투르크계 문화는 투르크멘,
오스만 및 다른 오구즈 투르크인 들이 사용하는 정치적 계급의 출신과 종족적 기원을
설명하기 위하여 전설을 사용하니 다양한 서술은 아래에 나열된 여러 언어로 출판되었
는데 이야기의 제목은 흔히 오구즈나마(Oghuznama) 또는 오구즈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오구즈 칸의 전설은 중앙 아시아의 튀르크족 사이에 유포된 것으로 13세기에 처음으로 기록
되었으며 파리에 보존되어 있는 14세기의 작자 미상의 위구르 (Uyghur) 수직 대본
문헌은 이미 몽골 정복 이야기에 맞게 수정된 원고지만 나중에 오구즈 칸의 투르크
이슬람화에 기여한 중요성이나 오구크 칸의 조상이 몽골인과의 유사성은 서술하지 않습니다.
아불 가지의 17세기 버전은 이슬람화되고 몽골화된 라시드웃딘의 14세기 버전을 답습하고 있으니
노아는 대홍수 이후 인구를 늘리기 위해 세 아들을 떠나 보내니 함은 힌두스탄으로 셈은 이란
으로 보내고 야벳은 이틸과 야이크 강기슭으로 가서 여덟 아들을 보았는데, 이름이 각각, 투르크,
카자르, 사클랍, 루스, 밍, 친, 케메리 그리고 타리크로 죽을 때 그는 투르크를 후계자로 지명합니다.
투르크는 이식쿨 호수가에 정착하는데 장남 투테크(Tutek)가 계승하고 4세대가 지나서 타타르
와 모굴 두 아들이 태어나 그의 왕국을 둘로 나누니 모굴 칸은 오구즈 칸을 낳은 카라 칸을
났았으니 삼일동안 엄마의 꿈에 나타나서 무슬림이 되겠다고 말하며 젖을 빨지 않겠다고
말하니 어머니는 개종을 했다는데 아불가지에 의하면 카라 칸의 시대부터 야벳의 투르크
후예들은 무슬림이 되었으니 이후 신앙을 잃었다가 오구즈 칸에 와서 이슬람 신앙을 회복합니다.
터키의 전설에는 오구즈는 터키 국민의 지도자인 카라 칸의 아들로 중앙아시아에서 태어났으니
태어나자마자 말하기 시작했다는데 그는 모유 수유를 거절하고 키르미즈(말 우유를 발효시켜
만든 알콜 음료)와 고기를 요구했고 초자연적으로 성장해 40일 만에 젊은 청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투르크인들은 키얀트(Kiyant) 라는 용에게 먹이를 빼앗기고 있었으니 오구즈는 갓 죽인 신선한 사슴을
나무에 매달아 드래곤의 덫을 놓은 다음 청동 랜스로 용을 죽이고 강철검으로 머리를 잘랐습니다.
키얀트를 죽인후 오구즈는 영웅이 되었으니 그는 40개의 투르크 족장들의 아들 40명을 모아서 특별한
전사 집단을 만들고 각 씨족들을 하나로 통합했는데 중국계 계모와 왕위 계승권을 가진 이복형제가
카라 칸에게 오구즈가 반역을 꾸민다고 음해를 하니 카라 칸은 사냥 파티에서 오구즈를 암살하기로
하자 오구즈는 음모를 알아차리고 아버지를 죽이고 칸이 되니 계모와 이복형제는 중국으로 도망칩니다.
오구즈가 칸이 된 후에 그는 탱그리(Tengri)를 찬양하고 기도하기 위해 혼자 초원에 가서
기도하는 동안 아름다운 소녀가 빛 가운데 서 있는 하늘에서 오는 둥근 빛을 보고
오구즈는 소녀와 사랑에 빠졌고 결혼해 귀네쉬(태양), 아이(달) 및 일디즈(별) 를 낳습니다.
저 세명의 아들을 낳은 후에 사냥을 나가 나무 안에 있는 또다른 착한 소녀를 보았으니 또한
그녀와 결혼했으며 괵(하늘), 닥(산) 및 데니즈(바다) 라는 세 명의 아들을 더 낳습니다.
그의 아들이 태어난 후, 오구즈 칸은 위대한 선물을 주었고 그의
영주를 모두 초대했으니 잔치 중에 그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나는 너희들의 칸이다.
모두 칼과 방패를 들어라.
쿳(신성한 힘)이 우리의 표상이다.
회색 늑대의 함성을 질러라.
우리의 철창은 숲이 되리라.
쿨란은 사냥터를 걸을 것이다.
더 많은 바다와 더 많은 강을
태양은 우리의 깃발이고 하늘은 우리의 텐트이다."
그런 다음 그는 네 방향의 왕에게 편지를 보냈으니 "나는 투르크의 왕이다. 지구의 네 구석의 왕이
될 것이다. 나에게 복종하라. " 지구 오른 쪽에 있는 알툰 칸은 복종을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지구 왼쪽의 우룸칸은 답이 없었으니 오구즈는 전쟁을 선포하고 군대를 서쪽으로 진격시키자
밤에 회색 모피를 입은 커다란 남성(하느님의 화신)이 찬란한 빛의 아우라를 업고 그의 텐트에 옵니다.
말하기를 "오구즈여, 우룸에게 진격하고 있구나. 내가 먼저 가겠노라" 그래서 회색 하늘
늑대가 투르크 군대에 앞장 서서 인도했고 두 군대는 이틸강(볼가강) 근처에서 싸워
오구즈 칸이 승리했으니 그런다음 오구즈와 그의 여섯 아들은 회색 늑대의 이끌림을 받아
투르키스탄, 인도, 이란, 이집트, 시리아에서 전쟁을 해서 지구의 네 구석의 칸이 되었습니다.
늙은 오구즈는 꿈을 꾸니 여섯아들을 불러 동쪽과 서쪽으로 보냈는데 큰 아들은 동쪽에서 황금 활을
발견했고 작은 아들들은 서쪽에서 세개의 은 화살을 발견했으니 오구즈 칸은 황금 활을 세 조각
으로 나누어 세 큰 아들 귄과 아이 그리고 일디즈에게 주며 말했다. "형들은 활을 가지고 하늘을 향해
각자 자기의 화살을 쏘아라." 그는 세개 은 화살을 어린 아들 괵과 닥 그리고 대니즈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동생들은 은 화살을 가져라. 활을 쏘면 너희는 화살처럼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라를 아들들
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그래서 보족(회색 화살-형들)과 위촉(세 화살-동생들)이 두 계보가
되었는데 아불가지는 계보 상징, 가문 문장과 길을 안내하는 온곤정신, 뿐만아니라 정치 계층
구조를 지정하고 세 아들과 그들의 24명의 손자들이 연회 좌석에 않는 순서까지 정했다고 합니다.
"아들들아, 나는 많이 걸어왔다.
많은 전투를 했다.
수많은 화살과 창을 던졌다.
많은 말을 탔다.
적들을 울부짓게 했다.
친구들을 웃게 했다.
하느님(탱그리)에게 빚을 갚았다.
이제 내 땅을 주노라."
과학 문헌에는 보통 투르크인의 서사적 조상인 묵돌선우가 오구즈 칸과 관련 있다고 보니 그
이유는 돌궐-페르시아 문헌(라쉬 알딘, 혼데미르, 아불 가지)의 오구즈 칸의 일대기가
중국 기록(아버지와 아들의 불화, 아들의 살부, 정복의 방향과 순서)의 묵돌선우 일대기
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기 때문으로 이는 니키타 야코블레비치 비추린이 처음 주목합니다.
오구즈 칸은 때때로 모든 투르크계 민족의 신화적 창시자이자 오구즈 계보의 조상
으로 여겨지니 오늘날에도 오구즈의 계보는 전설적인 6명의 아들과 오구크 칸의
24명의 손자의 순으로 분류되는데 역사상 투르크 계열 왕조는 이 종족 분류를
기반으로 기존 왕조보다 계급이 높다며 주권을 주장하거나 반란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4. 족장 셀주크의 투르크
수장(족장)셀주크는 10세기에 하자르제국이 루스 카간국에 의해 무느진후 오구즈족의
야브구(왕)와 싸우고는 자신의 무리들을 이끌고 고향을 떠나 남하해 카자흐스탄
남부인 크즐오르다(붉은 + 천막)에 정착하는데 여기는 풀도 부족해서 양치기도
별로 없으며 이소연이 우주로 나갈 때 이용한 러시아의 바이코누르 우주기지가 있습니다.
오구즈어는 터키어와 아제르바이잔어, 투르크멘어의 조상어이고 960년 셀주크가 무리를 이끌고
이란으로 내려와 이슬람을 받아들인지라 셀주크제국은 튀르크계의 오구즈족이 세운 나라
지만 궁정 공식어는 페르시아어였으며 오구즈어는 주로 민간이나 군대에서 통용되었다고 합니다.
이즈음 중앙아시아 서쪽의 아무다리야 강(Amu Dar'ya) 강과 시르다리야 강(Syr Dar'ya) 사이에
있는 땅으로 우즈베키스탄인 트란스옥시아나는 사만 왕조와 카라한 왕조가 패권을 다투고
있었고, 본래의 고향에서는 오우즈 족속들이 킵차크인들과 전쟁 중이었으니 셀주크인들은
새로 정착한 땅 이란에서 강대 세력들 사이에 실익을 추구하여 동맹 세력을 자주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사만 왕조의 편을 들어 카라한 왕조를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에서
몰아내고, 그 보답으로 사만 왕조에게 그 땅에 정착할 권리를 보장 받아 수니파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11세기 무렵 페르시아로 이주하여 셀주크 제국을
세우는데 하지만 수장 셀주크는 본래의 정착지인 크즐오르다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셀주크 제국이 팽창하면서 오구즈족들은 페르시아를 가로질러 남아제르바이잔과
캅카스에 이주하여 토착민인 페르시아인들을 튀르크화 시키기 시작했는데
셀주크 제국이 만치케르트 전투에서 동로마 비잔틴제국에 대승한 이후에는
아나톨리아에도 오구즈족이 유입되면서 토착 그리스인의 튀르크화가 진행됩니다.
5. 셀주크 사후 아들들의 셀주크 투르크
셀주크가 죽은 뒤에 그 세력은 중앙 아시아적인 관습에 따라 그의 아들들에게
분할되었으니 이 아들들의 이름이 미카일, 이스라일, 무사, 유누스인데....
참고로 말하자면 이 이름들은 성경에 나오는 미카엘, 이스라엘, 모세, 요나
에서 유래한 이름들이니 이슬람이 유대교와 기독교에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이들 중에 역사에 이름을 크게 남긴 것은 미카일과 이스라일이니 미카일의 아들이
투으룰 베이와 차그리 베이로, 후일 대 셀주크라고 불릴 셀주크 제국을 건국하게
되며 이스라일은 그 본인이 아르슬란 야브구(사자왕)라는 호칭으로 이름을 떨쳤고,
그 후손들은 룸 술탄국이라 불리우는 국가를 소아시아(아나톨리라, 터키)에 만듭니다.
셀주크의 아들들은 서로 다른 진영에 가담해 싸웠던 것 같은데 사만 왕조는 카라한 왕조에 의해
호라산에서 쫓겨났으니 이때 사만 왕조는 가즈나 왕조을 호라산으로 불러들였고, 이후 호라산
에는 가즈나 세력과 카라한 세력의 전쟁을 치렀는데 이 틈을 타 셀주크인들은 호라산에 침입해
승기를 잡고있던 가즈나 세력을 단다나칸 전투에서 격파하고 가즈나 술탄국을 가즈나로 밀어냅니다.
미카일의 아들인 투으룰은 이란 서부와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했고, 동생 차그리는 호라산을, 친척들도
영지를 얻었으니 그들은 각각 완전히 독립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면서도 가문의 수장인 투으룰베이
(1대 술탄: 1038년 - 1063년) 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금요 예배의 설교에서 자신들의 이름 보다
투으룰의 이름을 먼저 언급했으니 부이 왕조나 후대의 몽골 제국과 유사한 가족 경영을 보여줍니다.
6. 이라크 정복
이란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투으룰은 압바스 칼리파 알 카임과 와지르(재상) 이븐 알 무슬리마의 초청
으로 바드다드 진군을 결심하니 1055년, 성지 순례를 행한후 시아파 파티마 왕조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후제스탄을 거쳐 이라크에 진입해 수니파 주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바그다드에 무혈
입성하자 부이조의 장군 알 바사시리는 라흐바로 도주해 파티마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에 복속합니다.
파티마 조의 지원과 이라크의 베두인 족장 두바이스 및 일단의 튀르크 부대와 연대한 알 바사시리
는 1057년 초엽 이라크로 진군해, 신자르에서 쿠탈미쉬 휘하 셀주크 군을 격파한 후 모술에
입성하였지만 며칠 후 반격에 나선 셀주크의 투으룰은 그들을 격퇴하고 신자르를 초토화시킵니다.
하지만 라흐바로 돌아온 알 바사시리는 1058년 초엽에 찬탈을 노리던 투으룰의 동생 이브라힘 이날과
동맹해 이브라힘으로부터 모술을 넘겨받는데(다만 시타델은 4개월 간의 포위 끝에야 항복함) 다만
이번에도 투으룰은 누사이빈으로 향하며 모술을 되찾았고, 알 바사시리는 다마스쿠스까지 물러납니다.
한편 동생 이브라힘 이날은 서부 이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투으룰은 이라크의 병력 대부분과
진압에 나섰으니 기회를 포착한 알 바사시리는 1058년 말엽 시리아 사막을 횡단해 빠르게
히트와 안바르를 점령하곤 12월 27일 6백의 맘루크-튀르크 기병대와 함께 바그다드에 입성합니다.
그 다음 금요일인 1059년 1월 1일, 서부 바그다드에선 쉬아 아잔이 울려퍼졌고 일주일
후인 1월 8일, 티그리스 강을 건넌 알 바사시리는 동부 바그다드까지 장악하였고
대사원에서는 시아파 파티마 칼리파의 이름으로 쿠트바가 진행되었는데 이후
시가전을 거쳐 1월 19일 하사니 궁전이 점령되었고, 칼리파 알 카임은 연금되었습니다.
10일 후 이슬람 명절인 이드 알 아드하(희생제) 때 알 바사시리는 파티마 조의 깃발을
휘날리며 대사원 밖에서 축하연을 열었고, 2월 16일에는 와지르 이븐 알 무슬리마
를 조리돌림한 후 처형하고 와시트, 바스라까지 점령해 이라크 남부를 장악하였습니다.
이후 알 바사시리는 후제스탄을 공격하니 후제스탄 총독 하자라스프 이븐 반키르는 두바이스를
통해 연공 납부를 대가로 휴전을 청하였으나 알 바사시리가 쿠트바와 화폐 주조에 있어
파티마 칼리파를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반발하는데, 7월에 이브라힘 이날을 격파한
투으룰이 후제스탄에 지원을 시작했다는 소식에 알 바사시리는 휴전하고 와시트로 회군합니다.
한편 이란을 평정한 투으룰은 알 바사시리에게 알 카임을 복귀시키고 그의 이름으로 쿠트바와 화폐 주조
를 진행한다면 바그다드 지배권을 인정하겠다고 제안하니 동맹 쿠라이쉬의 설득에도 알 바사시리는
거부하였고, 이에 투으룰이 진군하자 1059년 12월 14일 바드다드를 버리고 도주하니 이듬해 1월 4일
알 카임은 바그다드로 돌아왔고 이로써 파티마 조의 이라크 지배는 40번의 금요 예배 후 종식되었습니다.
쿠파로 향한 알 바사시리는 셀주크 기병대의 추격을 받자 동맹 두바이스의 이탈에도 불구하고 근교
사키 알 푸라트에서 정면 대결에 나섰다가 1060년 1월 15일 패하고 전사하는데 그의 말이 화살
에 맞아 쓰러지자 셀주크 와지르 알 쿤두리의 수하가 낙마한 알 바사시리를 죽였다고 하며 그의
수급은 바그다드에 전시되었고 이로써 5년간의 혼란 끝에 셀주크 제국의 이라크 지배가 확립됩니다.
7. 셀주크 제국 전성기
족장 셀주크의 손자이자 초대 술탄 투으룰은 후손을 남기지 못했으니 동생 차그리 베이의 아들
인 쉴레이만을 후계자로 지목했는데 그러나 그의 형제인 알프 아르슬란(용감한 사자) 과
아르슬란 야브구(이스라일)의 아들이었던 쿠탈므시는 이에 불복하였으니 알프 아르슬란
(2대 술탄: 1063년 - 1072년)이 협상에 의해 술탄직을 승계하고, 1064년에는 쿠탈므시
를 격파 하였으니 이를 통해 알프 아르슬란은 삼촌인 투으룰을 능가할 권력을 얻게 됩니다.
2대 술탄 알프 아르슬란은 휘하의 튀르크멘 지도자들이 이란의 영지를 파괴하는 것을
막기위해 외국 특히 동로마 제국의 세력권으로 침입하는 것을 장려했으며 또한
그는 파티마 왕조에 대한 전쟁을 개시했으니 이에 위협을 받은 동로마
(비잔틴)의 황제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는 군대를 이끌고 만지케르트로 향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알프 아르슬란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군은 궤멸시켰으며 황제
는 생포되었는데 알프 아르슬란은 포로가 된 황제와 조약을 맺고 그를 풀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황제는 제국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며, 알프 아르슬란은 트란스옥시아나의
카라한 왕조에 대한 원정을 나섰으나 어느 포로에 의해 죽음을 맞으니 그는 죽기
직전에 재상 니잠 알 물크를 불러 후계자로 3대 술탄이 되는' 말리크 샤' 를 지목합니다.
알프 아르슬란이 죽자 형제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말리크 샤는 이란으로 가서 그들을
토벌하고는 다시 트란스옥시아나로 돌아와 카라한 왕조의 지방 수령들을 제압합니다.
말리크 샤는 그후 동생 투투쉬 1세를 시리아로, 또 다른 동생 무슬림을 이라크로 보내
지방의 튀르크멘 지도자들을 장악하자 말리크 샤에게 패배한 쿠탈미쉬의 아들인
쉴레이만이 아나톨리아의 니케아에서 룸 술탄국을 세우면서 말리크 샤와 적대 합니다.
8. 셀주크 투르크의 분열
3대 술탄 말리크샤(1072년 - 1092년)의 치세는 셀주크 제국에 있어 황금기인 동시에 몰락의 씨앗이
심어진 시기였으니 칼리파였던 압바스 왕조와 셀주크 왕가의 사이가 멀어졌고, 치세 말에는 후계
문제로 튀르크인들과 페르시아 관료 사이가 멀어졌는데 절정은 1092년에 술탄이 칼리프를 폐위
시킨 것이니 술탄과 재상은 바그다드로 향했는데 재상은 도중에 암살당했고 말리크 샤도 죽었습니다.
말리크 샤가 죽었을 때 그의 아들들 중에 성인은 없었으니 그의 장자인 베르키야루크는 겨우
12살이었는데 이때 그의 아내인 테르켄 하툰이 자신의 아들인 마흐무드 1세(당시 4살)
를 4대 술탄(1092년 - 1094년)으로 즉위시키자 페르시아 관료층은 이에 반발해 말리크 샤
의 장자 베르키야루크를 술탄으로 선언했고 말리크 샤의 형제인 투투시는 반란을 일으킵니다.
격렬한 내전 끝에 1097년에 베르키야루크는 5대 단독 술탄(1094년 - 1105년 제1차 십자군
원정 시대)이 되었지만 그 권력이 완전하지는 않아서 각지에 친척들이 지방 정권을
세우는 것을 용인했으니 이에 그의 동생 무함마드 타파르가 반란을 일으키자 여기에
각지의 총독들이 호응했던 데다가 본래의 지지기반이던 관료계층도 그에게서 돌아섭니다.
베르키야루크은 이런 상황에서 투쟁을 벌여 많은 성과를 보았으나, 결국 병마로 인해
1104년에 동생 무함마드와 제국을 나누기로 합의했으며 이듬해에 결핵으로
인해 죽었고, 그의 술탄위는 아들인 6대 술탄 말리크 샤 2세(1105년)에
넘어갔으나 곧 7대 술탄 무함마드 타파르(1105년 - 1118년) 가 술탄위를 탈취합니다.
9. 셀주크 제국의 부활
7대 술탄 무함마드 타파르는 우선 총독들의 물갈이를 단행하고 카프카스의 조지아(그루지야)
를 토벌하고는 이후 시리아로 들어가 1098년에 유럽에서 원정온 십자군을 토벌하려
하였으나 시리아 지방 영주들의 불협조로 인해 패퇴했으며.... 이에 큰 충격을 받은
무함마드는 "내가 다시 오면 사람이 아니다" 고 다짐했고 후손들까지 평생 맹세를 지킵니다.
1차 십자군에서 관심을 끈후 1117년에 무함마드 타파르는 이란 각지에서 준동하는
하산 사바흐 무리를 소탕하였으며 다음해 1118년에 병사하였고, 8대 술탄위는
그의 아들 마흐무드 2세(당시 13살 1118년)에게 넘어갔으나 그의 동생 아흐마드
산자르가 반란을 일으켜서 1119년에 9대 술탄(1119년 - 1157년) 위를 차지합니다.
9대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는 "마지막 셀주크" 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데, 그에 걸맞는 능력을
38년간의 치세 내내 보여주었으니 우선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제국의 국경을 침범하는
가즈나 왕조와 카라한 왕조를 재복속시켰으며 그리고는 바그다드에서 고개를 치켜드는
칼리프 들도 주저앉히니 역사가들은 산자르가 그의 아버지의 제국을 복구했다고 믿었습니다.
10. 셀주크 제국의 몰락
산자르의 치세들어 중국 화베이(華北) 지방에서 새로운 패자 금나라에 의해 쫓겨난 요나라 유민들
이 중앙 아시아에 대규모로 정착했으니 카라 키타이인데 이들은 산자르의 하수인이자 조카인
서카라한 왕조 술탄이었던 마흐무드 2세를 공격해 호라산으로 쫓아내자 산자르는 서카라한
왕조와 연합해 군대를 이끌고 트란스옥시아나로 향했으나 카트완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이 퍼지자 호라즘 총독(후일 호라즘 샤) 아트시즈가 반란을 일으켜서는 후라산을 약탈
했으나 그후 9대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가 돌아 온다는 소문을 듣고는 바로 도망쳤으니
이후 12년간 산자르는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최선을 다했고 대부분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152년에 산자르의 중앙 집권화 정책에 반발한 오구즈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대수롭잖게
생각한 산자르는 총독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려 했지만 실패하자 술탄이 직접 나섰으니
모두 산자르의 승리를 확신했고 오구즈인들도 그랬으니 오구즈인들은 술탄에 사신을 보내
복종의 뜻을 표했지만.... 조건이 마음에 안 든 산자르는 거절했으나 결국 두 군대는 격돌합니다.
여기서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으니 산자르의 군지휘관들이 그를 배신한 것인데 버림받은 산자르
는 오구즈인들에게 붙잡혔으니 오우즈인들은 당황했지만, 곧 호라산으로 침입했으니 그들은
동부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땅을 유린했지만 산자르는 이 광경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3년 후인 1156년에 산자르는 탈출해 수도인 마르브로 돌아왔으니 그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세력을 일으켜 보려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1157년에 그곳에서 죽었는데 야사에 따르면
오우즈인들에 의해 무참히 유린당한 마르브를 본 뒤 충격받아 병을 얻었기 때문이라고합니다.
산자르가 죽은 뒤에도 이라크와 아제르바이잔 지역의 셀주크에 의한 통치는 계속되었지만
그들은 이름만 지배자이고, 실제로는 아타베그들이 정치를 주도했으니 그들은 결국
1194년에 결국 셀주크 지방 총독들에 의해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으니 혼란스러웠습니다.
이 혼란을 끝낸건 호라즘 왕조였으나 결국 이 국가도 무리수를 남발하다가 몽골 제국에 의해
붕괴하는데..... 방계 왕조로는 하마단 셀주크, 케르만 셀주크 및 시리아 셀주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