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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
南 宋 王 朝 世 家
南宋(남송) AD. 1127∼AD. 1279 漢族(한족) 위치 중국 남부 성 趙(조)
代數 | 在位期間 | 位 | 姓名 | 關係 | 首都 | 現地名 |
제 1대 | AD. 1127∼AD. 1129 | 高宗(고종) | 趙構(조구) | 臨安(임안) | 浙江省 杭州 | |
임시 | AD. 1129 | 조부 | 고종의 태자 | 절강성 항주 | ||
복위 | AD. 1130∼AD. 1162 | 高宗(고종) | 趙構(조구) | |||
제 2대 | AD. 1163∼AD. 1189 | 孝宗(효종) | 趙신 | |||
제 3대 | AD. 1189∼AD. 1194 | 光宗(광종) | 趙惇(조돈) | |||
제 4대 | AD. 1194∼AD. 1224 | 寧宗(영종) | 趙擴(조확) | 광종의 둘째 | ||
제 5대 | AD. 1224∼AD. 1264 | 理宗(이종) | 趙昀(조윤) | |||
제 6대 | AD. 1264∼AD. 1274 | 度宗(도종) | 趙祺(조기) | |||
제 7대 | AD. 1274∼AD.1276 | 恭宗(공종) | 趙顯(조현) | |||
제 8대 | AD. 1276∼AD. 1278 | 端宗(단종) | 趙昰(조하) | 도종의 아들 | ||
제 9대 | AD. 1278∼AD. 1279 | 懷宗(회종) | 趙昺(조병) |
AD. 1127년, 요나라를 멸망시킨 금나라는 송나라로 진격해 수도 카이펑을 점령하고 천자인 흠종과 상 황 휘종을 포함한 황족과 신하들을 포로로 잡아간다. 이로써 북송은 멸망하였으며, 금나라는 송나라의 신하 장병창을 초제로 내세워 괴뢰 국가 대초를 세우고 군사를 철수시켰다. 금군이 물러나자 장방창에 게 제위를 포기하도록 권했고 장방창을 이를 받아들여 휘종의 아들 중 유일하게 포로로 잡혀가지 않는 흠종의 동생 강왕 조구가 AD. 1127년, 應天府(응천부, 금 허난성 상추시)에서 즉위한다.
제 1대 고종(AD. 1107∼AD. 1187)
송 휘종의 9남이자, 송 흠종의 이복동생으로 휘종과 현인황후 韋氏(위씨) 사이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 다. 廣平王(광평왕)에 책봉되었다가 이후 康王(강왕)에 책봉되어 즉위전 까지는 강왕이라고 불렀다.
고종이 강왕이던 시절, 아버지 휘종이 금나라와 강화 협상을 할 때 인질로 그를 보냈다. 그런데 워낙 담 대하고 떳떳해서 금나라가 이 사람을 궁중에서 곱게 자란 왕자라고 믿지 않고 다른 황족을 보내달라고 하는 바람에 돌아올 수 있었다. 금나라에 의해 수도 개봉이 함락되고 송나라 왕족들이 금나라로 끌려간 정강의 변이 일어날 당시, 조구 본인은 수도 개봉이 아니라 濟州(제주)에 있었기 때문에 수도가 함락되 었음에도 금나라로 끌려가는 일은 피했고, 수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곧 바로 장강 남쪽으 로 도망쳤다. 建康(건강, 지금의 난징시)에 도착한 이후 조구는 개봉에서 탈출하여 남쪽으로 내려온 신 하들의 추대로 AD, 1127년 南京 應天府(남경 응천부, 금 하남성 상구시)에서 제위에 올라 建炎(건염)으 로 개원한 고종은 금에게 남쪽으로 쫓겨갔다가, AD 1232년에야 임안 항주에 定都(정도)하였다.. 현비 반씨가 낳은 외아들 원의태자 조부가 있었다. AD, 1130년 어영장인 苗傅(묘부)와 劉正彦(유정언) 등이 고종을 협박하여 강제로 퇴위시키고 어린 조부를 황제로 옹립한 사건이 있었다. 재상 장준이 이들을 제 거하고 고종을 복위시켰다. 조부는 위국공으로 강등되었고, 불과 3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고종은 AD, 1162년에 양위했으며, AD, 1187년에 죽을 때 까지 25년 동안 상황으로 지냈다. 죽은 후에 는 영사릉에 안장되었는데 다른 남송의 황능들처럼 남송이 망하고 AD, 1285년 양련진가가 도굴했다. 당연히 이때 황제와 후비들의 유해는 황야에 버려졌는데 휘종과 위씨가 합장된 영우릉도 예외가 아니었 다. 원나라에서도 문제가 되었고, 양련진가는 결국 처형되었다.
제 2대 효종(AD. 1127∼AD. 1194)
북송의 초대 황제인 송 태조 조광윤의 둘째 아들 조덕방의 6대손 이자 송 고종의 양자이다. 본명은 趙 伯琮(조백종)이었지만 황태자로 책봉된 이후 조신으로 고쳤다. 황태자 된지 2년 후 금나라가 침입했지만 이를 격퇴했다. 금나라 군대가 물러간 후 몇 개월 안가 고종은 양위를 선언하고, 36살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다. 효종은 고종과 달리 북쪽 영토 수복에 비교적 적극적인 입장이었고,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 진 회는 사망한 후였지만 그의 일가가 권력을 휘두르는걸 못마땅하게 여겨 권력 승계를 막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즉위 직후에는 주화파 대신 주전파의 핵심인 張浚(장준)을 재상으로 삼기도 했다. 다만 융흥 원 년에는 북벌을 시행하여 일부 靈壁(영벽)과 宿州(숙주)를 되찾았지만 핵심 장군들이었던 李顯忠(이현충) 과 邵宏淵(소굉연)의 반목과 더불어 금나라의 반격으로 숙주를 다시 빼앗기고 부리집에서 참패했다. 이 는 남송의 군사력에 큰 타격을 주었고, 결국 효종은 주화파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금나라와 화의를 맺는다. 이후에도 북벌의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구휼 제도를 개선하는 등 민심을 안정시키 고 내정에 주력하였다. 염상들에게 국가가 진 빚을 모두 갚고 소금 전매제를 실시하는 한편 각종 부가 세를 줄이는 등 세수를 확대하면서도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는 것에 부단히 노력했다. 또한 매관매직을 금하고 가문이 좋으면 관리가 되던 관행도 고쳤다. 즉 능력있는 인재 선발을 위해 노력한 것, 이러한 노 력으로 남송은 재기를 할 수 있었고, 이 효종의 재위기를 이른바 “乾淳之治(건순지치)” 라고 부르기도 했다. 효종은 금나라의 침략 위험과 직전 진회의 공포 정치로 인해 경직되었던 남송의 기반을 다진 왕 조의 몇 되지않는 명군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남송 입장에선 불행하게도 동시대 금나라엔 작은 요순 이라 불릴 정도의 명군이었던 금 세종이 있었고, 송 효종은 번번히 금 세조에게 발목을 잡히며 그토록 바라던 북벌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군신 관계였던 송과 금의 관계를 숙질관계로 완화시키고, 세폐를 줄이려고 노력해서 고종 때 금에게 지불하던 세폐의 반만을 지불하는 가시적인 성과도 거두긴 했다.
효종은 3명의 황후가 있었는데, 첫 번째 황후인 성목황후 곽씨는 효종이 즉위하기 전인 AD. 1156년에 세상을 떠나 황후로 추존되었다. 2번째 황후인 성공황후 하씨는 효종이 즉위하고 5년 뒤인 AD. 1167년 에 세상을 떠났다. 3번째 황후인 성숙황후 사씨는 효종이 광종에게 제위를 물려준 후 이후 태상황후가 되었고, AD. 1146년 효종이 세상을 떠난 이후엔 황태후가 되었으며, 광종이 퇴위하고 광종의 아들인 영 종이 즉위했을 때 태황태후가 되어 AD. 1203년에 세상을 떠났다. 효종에게는 4남 2녀가 있었는데, 장 남 장문태자 조기가 어이없는 일로 요절해서 차남 魏王(위왕) 조개를 태자로 삼으려고 했다. 그런데 3남 조돈이 효성이 지극하고 온순해서 마음에 들었는지 덜컥 조돈을 태자로 삼아 버리자 이에 조개는 억울 했는지 홧병에 걸려 생을 마감했으며, 막내 아들 邵王(소왕) 조각과 두 공주도 요절했다. 이 때문인지 효종은 AD. 1189년 태자 조돈에게 양위 후 중화궁에 기거하였고, 조돈은 광종으로 즉위했으나, 태생이 온순하고 심약하였고 공처가라 부인의 이간질에 효종과 점점 사이가 벌어지고 광종 본인도 스트레스로 정신병까지 얻게 되었다. 결국 효종은 말년까지 애먹이던 양아버지 태상황 고종을 모시다 그가 죽고 난 후 얼마 안되어 아들인 광종에게 양위했지만, 광종과도 멀어지면서 결국 AD. 1194년 쓸쓸한 최후를 맞 고 영부릉에 안장되었다. 남송시대의 명장인 악비를 지극히 사랑해서 왕으로 봉하여 명예회복을 시켜주 었고 악비의 무덤을 크게 건축했으며 수감된 악비의 가족들을 석방시켜 주었다. 그러면서 악비를 모함 한 진회를 극도로 증호했으며 자신의 치세동안 진씨들의 관직길을 죄다 막아버렸고 진회의 죄를 진회의 일족에게 물어 진씨 일족을 멸문시켜 버렸다.
제 3대 광종(AD. 1147∼AD. 1200)
효종의 3남이자 성목황후 곽씨의 소생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효종의 총애를 받다 장남 장문태자가 요절 하자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태상황인 양할아버지 고종과 효종이 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 안 태자로 있었다. 이런 까닭에 황태자 시절 자신이 40살이 넘어감에도 아버지가 양위할 의사가 없어보 이자 자신의 하얗게 된 수염을 보이면서 주변에 이를 한탄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AD. 1187년에 태상황 고종이 세상을 떠나고 3년상을 치른 효종이 AD. 1189년 퇴위하여 상황이 되자 양위를 받아 43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기본적으로 효성이 지극하고 온순하며 신중한 성격이지만, 명군인 아버지 효종과 달리 심약하고 의심이 많았으며, 끔찍한 공처가라서 아내 자의황후 이씨(이봉량)의 말밖에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李鳳娘(이봉랑)의 질투가 심하고 성격이 영 좋지 않아서 이봉량을 간택한 시할 아버지 고종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고, 시아버지 효종도 이봉량을 싫어해서 시행하지만 않았을 뿐 폐 후로 만들려고 했을 정도로 영 사이가 나빴다. 이에 이봉량도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가 자신을 미워한 다며 광종과 효종 사이를 이간질 하여 부자 사이를 시간이 지날수록 갈라 놓았다.
즉위 후, 자의황후의 친정 아버지 李道(이도)를 왕에 봉하고, 이씨 일족들을 대거 등용하면서 자의황후 와 이씨일족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거기다 투기와 질투가 심한 자의황후는 광종의 일거수 일투족 을 감시했는데, 한 번은 광종이 자신의 발을 씻어주는 궁녀의 손이 뾰얗고 아름답다며 웃으며 쓰다듬 자, 그 날 밤 광종의 처소로 그 궁녀의 잘린 두 손을 찬합에 넣어 배달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판국이니 광종의 후궁들 역시 마수에 자유롭지 못했다. 예를 들어 귀비 황씨는 광종이 공왕 시절 맞아들인 후궁으로 사려 깊은 성격이라 광종이 총애 했는데 자의황후는 질투심 때문에 광종이 없는 사 이 사람을 보내 귀비 황씨를 때려죽이고는 횡사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다른 후궁인 귀비 장씨와 첩여 부씨는 궁궐 밖으로 내쫓았는데 그녀들은 다른 사람에게 재가했다.
이렇듯 심약한 성격에 연달아 아내 자의황후에게 시달리던 광종은, 고작 즉위한지 2년만에 정신병자가 되었다. 이때 자의황후는 남편을 대신해서 국정을 주관했는데 자신의 친척 100명에게 관직을 하사하는 등 권력을 남용했다. 이런 와중에 태자 책봉 문제로 효종과 광종의 사이는 점점 멀어졌다. 이에 재상 趙汝愚(조여우), 韓侂冑(한타주) 등은 헌성자열황후 오씨와 의논하여 민심과 조정의 신망을 잃고 정상 적인 황제 엄무가 불가능해진 광종을 강제 퇴위시켰고, 차남 조획(장남 조정은 요절)을 즉위시켰다. 이 후 광종은 명목상 상황이 되었지만, 그 후에도 계속 발작 증세를 보이다가 경원 6년(AD. 1200년) 향년 54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영숭릉에 안장되었다. 한편 자의황후 이봉랑 역시 남편이 퇴위 당한 이후 AD 1200년에,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제 4대 영종(AD. 1168∼AD. 1224)
송 광종과 자의황후 이봉낭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본래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고, 망를 더듬 고 말솜씨도 뛰어나지 않는데다 여색에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 더해서 아버지 광종처럼 어리숙했다. 하 지만 아버지와 달리 본래부터 스스로를 잘 알고 명철하게 자신을 판단했고, 늘 검소한 생활을 하였기에 신하들이 감탄했다.
정신병을 앓고 있던 광종이 할아버지 효종과 사이가 틀어지고 문안 인사를 드리지 않자 이를 반대하여 건의 했으며, 광종의 승하 소식에도 평소처럼 효종을 의심하고 후궁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이자 광종 앞에서 울면서 조부 효종의 승하 소식을 알리고 효종의 장례를 치려야 함을 호소했 다. 하지만 광종은 아들의 간곡한 호소에도 이마저도 믿지 않으면서 후궁으로 향했고 오히려 의심하였 다. 결국 재상 조여우, 한탁주 등에 의해 광종은 퇴위당하고 태상황이 되자 조확이 그 뒤를 이어 즉위했 다. 영종은 즉위 전부터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많고 이들을 위한 정책 등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조부 효종 때 증조부 고종의 운구를 호송할 당시 길을 가다가 밭에서 힘들게 파종을 하던 농민들의 삶을 두 눈으로 본 뒤 “평상시에 구중 궁궐 안에 있었으니 어떻게 노동의 힘듦을 알 수가 있었겠소” 라고 말했 고 즉위 후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안정시키고자 황실종친이자 재상인 조여우의 도움을 받아 매년 조세 를 낮추고 벌금과 노역을 면제하는 명을 반포하고 스스로도 즉위 전처럼 소박한 복장으로 살면서 사치 품을 가지고 다니거나 사용하지 않았다.
조여우의 추천으로 시독으로 주희를 임명해 주희에게 학문을 배웠고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광 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영종을 즉위시킨 일”을 큰 공로라고 생각하던 한탁주는 조여우와 달리 이 공적 으로 권력의 자리에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한탁주의 인격을 좋아하지 않는 조여우 등은 한탁주를 멀리했고 이것에 원한을 품은 한탁주는 조여우 등을 몰아내기 위한 운동을 시작 해 AD. 1195년 대간을 이용하여 재상 조여우를 몰아내고 조여우 편에 섰던 朱熹(주희), 朱必大(주필 대), 留正(유정), 왕란, 彭龜年(팽귀연) 등 59명을 금고형에 처하게 했다. 거기다 한탁주와 그를 따르던 당파들은 주자학을 거짓 하금이라고 탄압했는데 이 사건들을 경원의 당금이라고 부른다.
영종 재위 연간 중 북쪽에서는 칭키즈 칸이 몽골을 통일하고 금나라를 침공했으며 금나라가 점차 망국 의 길로 빠지던 상황이었고, 남송에선 AD 1204년, 과거 고종 때 있던 일을 재평가 하여 악비를 卾王 (악왕)으로 추봉하고, 진회의 봉작을 삭탈하였다. 경원의 당금을 일으켜 조여우 등 자신의 반대 당파를 몰아내고 재상이 된 한탁주는 태황태후(이모)와 황후(조카)가 죽은 뒤 자신의 입지가 점점 줄자 AD 1206년, 금나라에 대한 북벌을 강행했다. 바로 開禧北伐(개희북벌)이라고 부르는 남송과 금나라간의 전 쟁인데 애당초 남송 조정내 북벌론자들 조차 반대했고, 개전 4개월 뒤 금나라가 본격적으로 반격하면 서 대패했다. 이후 남송은 금나라와 嘉定和義(가정화의)라고 불리는 강화협정을 맺었는데, 이때 대노한 금나라 장종은 AD 1207년, 열린 남송과의 강화협정중에 남송이 금나라와 화의하기 위해서 내건 5가지 필수 조건 중 하나로 이 사태를 주도한 재상 한탁주의 머리를 요구했다.
조정 내부에서도 한탁주에 대한 여론이 급격하게 악화되어 결국 한탁주는 AD 1207년, 사미원의 주도 로 계획된 정변으로 죽임을 당하고 참수되어 그 머리가 소금에 저여진 뒤 금나라로 보내졌다. 한편 남 송에서는 사미원이 전권대신이 되어 금나라와 가정화의를 맺은 리후 26년 동안 재상의 지위를 차지해 남송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렇게 영종 연간 동안 남송의 조정에서는 당파싸움이 벌어졌고 한탁주, 사미 원, 등 권신들이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또한 국제정세 역시 변하기 시작했는데 금나라는 점차 기울 어가기 시작한 반면, 몽골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나날이 강성해지고 있었다. AD 1207년, 몽골은 서하와 전쟁을 시작해 AD 1210년, 서하를 복종시켰으며 AD, 1211년부터는 금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영종 재위기 후반에는 남송의 옛 수도였던 개봉으로 천도한 금나라가 남송의 영역으로 침공하여 개희 북벌 이후 남송이 다시 전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영종은 공숙황후 한씨, 공성인열황후 양씨 외에도 3명의 후궁을 두었고 아들이 9명이나 있었지만 모두 두살도 못 돼서 요절해버렸다. 더구나 당시에는 할아버지 효종과 아버지 광종의 자손이 자신 외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태조의 아들 조덕소의 10세손 조순을 뽑아 양자로 삼아 황태자로 정 했으나, 조순마저 요절하는 바람에 태조의 아들 조덕방의 9세손인 조횡을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조횡 은 원래 양모였던 공성인열황후 양씨와 사미원을 늘 비방했고, 이 사실을 알던 재상 사미원도 이런 조 횡의 행동을 싫어하였기에 서로 불화하여 사이가 좋지 못했다. 이후 사미원을 필두로 한 조정은 노쇠 해진 영종에게 조횡을 폐할 것을 건의했지만 영종이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아 실패했다. 그리고 얼마 후 영종이 병석에 있을 때 사미원과 그를 따르던 대신들이 공성인열황후 양씨를 설득해 기왕 조병의 양자 이자 태조의 11세손 조귀성(조여거)을 다시 양자로 뽑아 이름을 조윤으로 고치고 태자로 삼게 했다. 조 윤은 영종이 승하하자 곧 즉위했는데 바로 이종이다. 한편 조횡은 이종 즉위 직후 제왕에 진봉되었다 가 사미원에 의해 자진을 강요당한다. 영종은 AD, 1224년에 죽은 뒤 영무릉에 안장되었다.
제 5대 이종(AD. 1205∼AD. 1264)
이종의 원래 이름은 趙與莒(조여거)였고 태조 조광윤의 아들인 연의왕 趙德昭(조덕소)의 10대손이다.
본래 영종의 먼 사촌조카뻘인 방계 종실 출신이고 기왕의 양자로 입적됐지만 이종은 유년기와 청소년기 까지 일반 평민으로 살았고 사미원 덕분에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폐태자 조횡처럼 권력을 쥔 사미원을 견제하거나 적대시 하지 않았다. 따라서 재위 초기에는 재상인 사미원이 여전히 조정의 권력을 쥐고 있 었고 간섭이 심했다. 그러다가 AD. 1233년에 사미원이 죽자 이종은 비로써 친정을 시작했다. 이때 이 종은 조정에서 사당을 내쫓고, 친히 대간을 뽑았으며 재정 제도 등을 개혁하여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아울러 이종은 사촌아우 기왕의 양자였을 때부터 정청지 등에게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첫 닭이 울 때 일어나 잠들 때 까지 제왕학 수업과 예절 수업, 그리고 유학에 관한 공부를 했다. 그래서인지 황제가 된 후 이종은 주자학에 심취하여 유학 장려에 힘을 썼다. 진덕수 등 주자학자를 등용하여 개혁을 도모 했지만, 이상에 치우친 개혁정책이 몽골의 침공에 대한 원만한 대응의 한계로 실패로 끝나게 되었으며, 일련의 실패로 인해 이종은 정치에 대한 관심을 잃고 방탕해져 사치향락에 빠지고 정치적 부패와 중신 들의 의한 파벌 대립이 발생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종은 집정 후기에 친애하는 황비의 동생 賈似道(가 사도)에게 모든 정사를 위임했으며, 간신들에게 농락되어 나라의 정세가 급격하게 소락하기 시작했다. 또 잔인한 고문을 만들어 뼈가 들어나도록 고통을 주는 폭군이 되었다.
이종 집권초반 당시 남송주변의 상황은 시간이 지날수록 금나라는 쇠퇴하고 몽골이 급속하게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몽골은 금나라의 수도 개봉을 점령했다. 이에 금나라 애종은 채주로 달아났으며 몽골 은 AD 1232년, 양양에 주둔해 있는 남송의 경호제치사 史崇之(사숭지)에게 사신을 보내 금 공격에 대 한 도움을 요청하였다. 금의 채주를 남송과 연합하여 공격하자는 것, 그리고 남송에게 군량을 제공해달 라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갑론 을박 끝에 남송은 AD. 1233년 몽골측에 사자를 보내 그 제의의 수락 을 통보하였다. 금나라의 사자는 남송이 몽골의 제의를 수락한 이후인 AD. 1233년 8월에야 찾아왔다.
따라서 남송은 금의 연대 제의를 일축하고 몽골과 체결한 맹약에 따라 이 해 10월 명장 맹공은 3만 명 을 이끌고 채주에 도착하였다. 결국 금나라 애종은 자살했으며 뒤를 이은 말제마저 포로가 되어 처형 되었고, 이렇게 금나라는 멸망했다. 맹공은 자살한 금 애종의 두 개골을 지니고 개선하였다.
이후 이제 몽골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대한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대략 사숭지 를 중심으로 하는 신중론자들과 재상 정천지를 중심으로 하는 적극논자들이 팽팽이 맛섰다. 신중론자 들은 몽골을 자극하지 말고 국경에 대한 방비에 진력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적극론자들의 주장은 ”몽 골군은 이미 북쪽으로 귀환했고 하남 일대에는 아무런 군대도 배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는 군사 정보 에 의거하고 있었다. 이종은 적극논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는데 이는 자신의 치세동안 옛 북송의 수도권 이었던 하남을 회복한다는 대업을 이루고 싶어했다.
이에 따라 AD 1234년, 하남 일대를 수복하기 위한 군대가 퍄견되었다. 남송의 군대는 무인 지경을 달 려 북송의 옛 수도 개봉과 낙양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북송 시대 화려한 문화를 꽃 피웠던 이들 도시 는 오랜 전란 끝에 거의 폐허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거기다가 남송군의 진주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군 량 부족에 허덕였던 되다가 무단 침공에 분노한 몽골군의 역습을 받아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기껏 손 에 넣은 하남을 도로 내주고 빈 손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종의 출정 명령을 받고 출발한 지 불과 2개월도 지나지 않는 시점이었다.
이종은 40년 동안 통치했으나, 황후 사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기충소왕 趙維(조유)와 귀비 기씨 사이에 서 얻은 주국한국공주 외에는 자녀가 없었고 외아들 조유가 일찍 요절하여 후사가 없었다. 따라서 친 동생인 영왕 조여예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조맹계를 양자로 삼아 일찍부터 후계자로 키웠다. 이 조명계가 이종 사후 즉위한 도종이다. 이동은 AD. 1264년에 죽었으며 영목릉에 안장되었다. 그 후 AD 1285년 원나라 라마승이자 강남 석교 총통 양련진가에 의해 다른 남송 황제, 황후 제왕 등과 더불어 도굴되었으며 이종의 시신은 밖으로 끌려나와 거꾸로 매달리는 수모를 겪었다. 그리고 이종의 머리는 잘려 술잔으로 사용되었다.
제 6대 도종(AD. 1240∼AD. 1274)
아버지는 이종의 동생인 사영왕 조여예, 어머니는 제국부인 황씨다. 후사가 없는 이종이 조커인 그를 양 자로 삼아 조자로 개명시키고 궁으로 데려왔다. 영종 때 엄격한 제왕 교육을 받았던 이종은 본인 역시 유학을 권장한 군주답게 후계자 조자를 엄격하게 교육시켰다. 그러나 조자는 송사에서도 기록되었을 정도로 발육 속도가 남들보다 늦었다. 돋종은 즉위한 이후 대신들의 예상대로 제대로 된 황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젊은 도종은 사치향락에 빠진 채 재상 기사도에게 실권을 맡겼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기사도를 깊이 신임했다. 따사서 기사도는 도종 재위 기간 내내 안정적으로 국정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처럼 암군으로 평가받고 있는 도종은 재위 기간 내내 가사도의 꼭두각시 황제였고, 정치에도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따라서 자타 공인 ”재상 어르신 가사도는 재상부터 태사까지 남송 전권을 장악 하다시피 하면서 독재체제를 완성했고, 자신에게 위협이 될만한 이들을 배제시키거나 견제했다. 또 여 문환 등 커지고 있던 지방 군벌 세력들을 중앙과 격리시켰고 문천상과 같은 인물들을 요직에서 밀어냈 다. 이런 까닭에 가사도는 오늘날 남송을 망친 간신의 전형이라고 평가 받고 있다. 그러나 전횡을 일삼 았던 가사도는 화폐개혁, 공전법과 같은 개혁안을 내고 전시 체제 아래에서 긴축정책을 취하는 등 정 치수완이 좋아 이외로 꽤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도종 재위 기간은 나름 가사도가 안정적으로 국정을 장악한 상황임에도 외부적으로는 크게 위협받고 있었다. 이 무렵, 북쪽에서는 쿠빌라이 칸이 내란을 진압한 후 남송을 침공해 왔기 때문이다. 그는 몽 골군 전력을 분산시키지 않고 화력을 남송의 요충지이자 대몽골 최전선 핵심인 양양에 집중시켰다. 하 지만 양양성은 몽골군의 포위공격을 무려 5년 동안이나 버텄고 가사도가 이끄는 조정에서도 양양을 구 원 하고자 끈질지게 지원군, 물자보급 등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렸다. 하지만 몽골군의 방해와 방어선 때문에 쉽지 쉽지 않았고, 장강 방어선의 보루인 양양은 결국 함락되었다.
양양 함락 이후 쿠빌라이와 몽골의 생각처럼 송나라는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몽골군은 자신 들을 막던 양양성을 넘어 장강 이남으로 진출했으며 남송의 수도 임안은 몽골군의 직접적인 위협에 노 출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AD. 1274년 도종은 방탕한 생활 끝에 34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영소릉에 안장되었다.
제 7대 공종(AD.1271∼AD. 1323)
송 도종의 6남이며, 도종과 황후 전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동복형 趙舒(조서)가 유아기때 사망하였고 도 조의 첫 아들인 광충선왕 趙焯(조작) 역시 2살때 사망해서 사실상 도종의 적장자였다. AD. 1273년 가국 공에 봉해졌으며, 아버지인 도종이 34살의 나이에 사망할 당시 겨우 4살이었지만, 도종의 살아있던 아 들 중 나이가 많았던 이복형 익왕 조시가 서자라서 남은 유일한 적자였던 그가 황제가 되었다.
공제가 즉위했을 당시에도 이종, 도종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가사도가 전횡을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도종 생전에 남송의 노력에도 양양이 몽골군에게 함락되면서 최후의 보루였던 대몽골 방어선은 무너진 상태였다. 따라서 공제 즉위 당시, 원나라는 옛 남송의 투항군을 흡수한 대군을 이끌고 공세에 나서 장 강 상류의 지역은 모두 점령당했다. 이때 가사도는 원나라 대장 바얀에게 화의를 구걸했으나, 거절당하 고 오히려 심한 공세를 당했다. 가사도의 화의가 실패로 끝나게 되자, 과거 가사도의 거짓말을 철썩같이 믿고 있던 송나라 조정은 가사도에게 13만 군대를 이끌고 바얀이 이끄는 20만의 원나라군과 싸우게 했 다. 가사도는 어쩔 수 없이 출전 했으나,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박살남으로써 사실상 정예군을 통한 반 격이 힘들게 된 남송의 멸망은 기정 사실화 되었다.
가사도는 이 일로 탄핵받아 귀양 조치되었고 AD. 1276년 원나라 대군이 수도 임안을 포위했다. 남송의 조정은 어린 황제가 즉위하고 있고 나라가 어지러우니 화의를 받아달라고 바얀에게 요청했으나 원나라 측은 남송의 다급한 요청을 거절했다. 이때 바얀은 ”너희 조상이 어린 황제(後周(후주)의 공제 시종훈)의 자리를 빼앗고 나라를 세웠다. 그러니 그 후손인 어린 황제 때 나라가 망하는 것이 천명이 아니겠는가” 라면서 남송 측에게 힐문했다고 한다. 결국 공제는 할머니 사태후, 어머니 전태후 등과 함께 항전을 포 기하고 스스로 임안의 성문을 열고 투항했다. 하지만 이 시기 張世傑(장세걸), 陸秀夫(육수부), 文天祥 (문천상)등 일부 군인과 관료는 도종의 남는 황자들을 데리고 나와 그 중 공제의 이복형인 익왕 조하를 황제로 옹립하고 남쪽으로 도망쳐서 철저하게 항전했다. 그러나 사실상 남송은 공제의 항복으로 이미 멸망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임안에서 항전 대신 항복을 택하였지만 바얀은 송나라의 사료, 황실의 보물을 싣고, 공제를 포함해서 할 머니 사태후, 공제의 모친 전태후, 남송의 황족들과 임안에 남아있던 대신들을 원나라 수도 대도로 압송 했다. 하지만 이들은 정강의 변 당시 휘종, 흠종, 끌려온 황실 사람들이 겪는 고초와 달리 정중한 대접 을 받았다.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는 공제를 불러들여 절을 받은 다음 잔치를 열고 흥겨워했지만 그의 황후 차븐은 예로부터 천년 넘게 가는 나라는 없으니 언젠가 자신의 후손들에게도 이런 날이 올까봐 불 안해 했다고 한다. 공제는 쿠빌라이에게 첫 인상이 좋게 평가되었고 영국공에 봉해졌다. 그리고 원나라 공주와 결혼했고 첩으로 원나라 황실의 한록로 매래적을 하사 받았다. 그 뒤에는 전직 황제로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와 달리 정상인이었던 그는 성년이 되면서 역량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쿠빌라이와 원 조정에서도 숙청 필료성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이후 AD 1288년, 17세의 나이에 출가하여 라마승이 되었고 이 무렵 어머니인 전태후 역시 비구니가 되 었다. 이후 공제는 티벳어를 열심히 익혀 티벳불교의 불법에 통달했으며 티벳불교 서적 번역, 주해를 해 서 합존법사로 불렀고 현실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다. 그러나 마음이 바꿘건 아니라서 원나라는 남송의 황제였던 그를 감시했으며, 결국 AD 1323년, 52세의 나이에 사사되었다. 원나라 공주와의 사이에서 얻 은 외아들 조완보 역시 머리를 깎게 한 뒤 출가시켜 승려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생몰 연도와 사인 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전설에 따르면 원 말기에 결국 아버지처럼 사사되었다고 한다. 이로써 송의 혈 통은 완전히 끓어졌다.
제 8대 단종(AD. 1269∼AD. 1278)
조하는 임안에서 송 도종 조기의 3남으로 어머니 숙비 양씨에게서 태어났다. 조하는 형들이 일찍 죽어 아버지 송 도종이 죽을 때 사실상 장남이었지만 어머니가 후궁인 숙비 양씨라 황후 전씨의 소생이었던 이복동생 조현에게 계승권이 밀려 황제에 오르지 못한다. 이후 조현이 즉위한 뒤 AD 1224년에, 길왕에 봉해진다. 당시 남송은 말 그대로 멸망 문턱까지 와 있었다. 중앙정부의 갖은 노력에도 5년간 몽골군의 포위망과 끊임없는 방해 탓에 도움을 받지 못하고 버티던 요충지 양양이 결국 원나라에 함락됐다.
이후 남송의 장강 방어선은 양양이 뚫리면서 도미노처럼 무너졌고 장상상류 부근이 원나라 수중에 들어 가면서 수도 임안부는 언제라도 내줄 판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버지 도종이 34세이 나이에 갑자기 죽어 어린 동생이 황제로 즉위한 것도 악재중에 악재였다.
남송은 13만의 정예군을 편성해 방어전을 시도한다. 문제는 거짓 승전보고로 명성을 얻는 우승상 가사 도에게 13만의 병력를 맡겼고, 그 결과 남송의 마지막 13만 정예병군은 가사도의 지휘로 힘도 못 써보 고 바얀이 이끄는 20만 대군에게 망가졌다. AD, 1276년 바얀이 이끄는 원나라 군대는 임안을 포위했 고, 급해진 남송은 최후의 화의를 시도했지만 이마저도 실패로 끝이 났다. 따라서 황제 조현과 수렴청정 을 하던 사태후, 공제의 모친 전태후, 남송 조정, 황실 사람들은 스스로 수도 임안 문을 열고 항복했고 대도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남송의 부흥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문천상, 장세걸, 육수부, 진의종 등 일부 군인과 관료는 임안 이 함락되자 황족 가운데 익왕 조하와 조하의 어머니인 숙비 양씨, 도종의 7남인 위왕 조병 등을 데리 고 나와 그 중 나이가 많은 조하를 황제로 옹립했고 이렇게 조하는 7살 나이에 송나라의 황제가 된다.
이후 남송 부흥군은 남쪽으로 도망치면서 처절한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원의 군대 역시 복주를 항 복시키고 천주의 실력자인 성박사 포수경을 포섭하는 등 점차 강남을 확고하게 지배하면서 남송 부흥 세력을 압박해 갔다. 이에 부흥군은 단종을 모시고 남쪽으로 향했고 최후의 수도인 애산에서 결전을 결 의하였다. 하지만 단종과 망명 정부는 해운을 장악한 포수경 없이 배를 제대로 구하지 못한 탓에 애산 까지 가는 파천길 중 바다에서 표류하게 되었다. 표류 과정에서 익사할뻔 한 어린 단종은 충격을 받아 2년 만인 AD 1278년, 지금의 홍콩 근처인 복주 인근에서 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단종의 유해는 영복릉에 안장 되었으며, 뒤는 도종의 아들이자 당시 7살에 불과한 단종의 이복 동생 조병이 물려받았 다.
제 9대 회종(AD. 1272∼. 1279)
송 도종이 7남이자 수용 유씨 소생으로 태어났다. AD, 1274년 아버지 도종이 죽고 이복형인 고제가 즉 위한 이후 신왕에 봉해졌다가 위왕에 진봉되었다. 그러다가 AD 1276년, 임안에 있던 공제가 사태후, 전 태후, 종실, 대신들과 함께 항전 대신 성문을 열고 원나라에게 항복할 당시, 이복형인 단종과 함께 문천 상, 장세걸, 육수부, 진의종 등 일부 무관들과 문관들에 의해 남쪽에서 항거했다.
그러다가 AD 1278년, 단종이 갑작스레 병을 얻어 요절하자 육수부에 의해 옹립되었다. 당시 원나라는 蒲壽庚(포수경)으로부터 선박 및 숙련된 선원들을 제공 받게 되어 약했던 해군이 보강되어 전투에 매우 유리했다. 남송 함대는 1,000척의 대형 선박을 한데 묶어서 화재방지용으로 선체 외장에 진흙을 칠하고 적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긴 목재를 묶어서 붙여놓아 방어망을 만들어 기름을 이용해 화공을 가하려는 원나라군을 물리쳤다. 소제는 배안에서 신하들과 동고동락했으며 육수부는 몸소 황제에게 경서 강독을 했다. 그러나 AD 1279년, 기나긴 소모전에 피로가 쌓인 남송군은 패주하기 시작했다. 결국 3월에 애산 (현 마카오 서쪽)전투에서 패배하자 절망한 신하들은 차례로 물속에 투신했다.
육수부는 덕우황제의 치욕을 보일 수 없다면서 어린 황제를 업고 물 속에 뛰어내려 스스로 죽음을 택한 다. 이 때 ”소제는 내 다시는 제왕의 핏줄로 태어나지 않겠다”라는 말을 남기며 죽었다고 한다. 뒤이어 태후, 황족들도 물 속에 뛰어내렸다. 이미 임안 함락으로 사실상 멸망했던 남송은 이 전투의 패배와 소 제의 죽음으로 완전히 멸망했다. 소제와 육수부 등의 시신은 파도를 따라 해변으로 밀려왔고 이를 안타 깝게 여긴 송의 옛 백성들이 죽은 소제를 매장했다. 선전에 있는데 소제릉이라고 불리고 있다
사료 출처
曾先之(증선지)의 十八史略(십팔사략)과 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