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노래한 대중가요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놀랍게도 ‘철 지난 바닷가’ ‘파도에 쓸려간 허무한 사랑’에 대한 노래들이다.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 바닷가에서 추억을 맺은 사람/ 손잡고 해변을 단둘이 거닐며/ 파도 소리 들으며 사랑을 약속했던/ 그러나 부서진 파도처럼/ 쓸쓸한 추억만 남기고/ 바다의 여인아.”(사월과오월의 ‘바다의 여인’, 1972, 백순진 작사·작곡)
이 노래는 73년 버전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처음 발표된 72년 음반을 들어보면 ‘바다의 여인’은 물론 ‘욕심 없는 마음’에까지 이수만의 콧소리 섞인 가늘고 힘 있는 목소리가 아주 매력적으로 담겨있다.
쓸쓸한 사랑 노래가 매력 있는 법이니, 바다에 대한 노래 역시 이런 노래가 적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 사람들이 한여름에 들떠서 바다로 달려가고 싶어하면서도 그 여름 바다의 속성을 매우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사실 피서지 바다의 매력이란 일상의 일탈이 그 핵심이 아닐까. 산에서는 아무리 피서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옷을 입지만, 바다에서는 수영복만 걸친다. 멀쩡한 남자들도 예비군복만 걸치면 껄렁대는 걸 보면 의상의 힘이란 게 분명 있다. 심지어 남녀 할 것 없이 옷을 벗고 속살을 드러내게 되니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음에도 머리와 가슴이 평상심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휴가지에서는 돈 씀씀이도 달라지고 연애에 대한 감각도 달라진다. 평소 자기 취향이 아닌 이성에게 마음이 끌리고, 평소에 못하던 일을 과감하게 저지른다. 일상의 억압적 질서에서 갑자기 해방된 축제의 공간이 바로 여름 바다다. 노래 가사처럼 손만 잡았겠는가. 74년에는 대한가족계획협회가 ‘바캉스베이비를 막자’라는 캠페인을 만리포와 대천해수욕장에서 벌일 정도였으니(이런 캠페인을 대한가족계획협회가 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여름 바다가 주는 일탈의 효과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축제의 본질은 ‘날이면 날마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축제는 일시적이고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1. 딩동댕 지난여름 바닷가서 만났던 여인/ 딩동댕 하고픈 이야기는 많았지만/ 딩동댕 너무나 짧았던 그대와의 밤/ 딩동댕 딩동댕 말이나 해볼 걸 또 만나자고/ 딩동댕 딩동댕 여름은 가버렸네 속절도 없이
2. 딩동댕 지난여름 우연히 잡았던 손목/ 딩동댕 하고픈 이야기는 많았지만/ 딩동댕 너무나 짧았던 그대와의 밤/ 딩동댕 딩동댕 말이나 해볼 걸 또 만나자고/ 딩동댕 딩동댕 여름은 가버렸네 속절도 없이.”(송창식의 ‘딩동댕 지난여름’, 1972, 임진수 작사, 송창식 작곡)
속절없이 여름은 가버렸다. 바닷가에서 손목 잡고 밤을 보냈던 그 여자와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이렇게 여름 바다의 꿈처럼 아름답고 허무한 사랑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이미지가 바로 파도다. 뭔가 이루어질 것처럼 엄청난 기세로 들이닥치지만 해변에 닿으면 아무렇지도 않게 사그라져버린다. ‘닭살스럽게’ 하트에다 이름을 써넣은 백사장 모래조차 ‘원위치’시켜버릴 뿐-.
그래서인지 파도에 대한 노래는 매우 많고 히트곡도 적지 않다. 73년 정미조의 ‘파도’(이희목 작사·작곡)는 아름다운 선율과 짜임새 있는 음악과 정미조의 좋은 소리가 어우러져 크게 히트했다. 군대 갔다 온 후 솔로로 재출발한 이수만도 ‘파도’(1976, 지명길 작사·정민섭 작곡)로 인기가수의 길에 출발점을 찍었다.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하는 노래로 매년 여름마다 젊은이들 마음을 홀랑 뒤집어놓는 키보이스(사진)의 또 하나의 히트곡이 ‘바닷가의 추억’이다. 40년도 넘은 노래를 듣고 있노라니 노래 뒤에 너무나도 고지식하게 파도 소리를 깔아놓은 발상이 귀엽기까지 하다.
“바닷가에 모래알처럼/ 수많은 사람 중에 만난 그 사람/ 파도 위에 물거품처럼/ 왔다가 사라져간 못 잊을 그대여/ 저 하늘 끝까지 저 바다 끝까지/ 단 둘이 가자던 파란 꿈은 사라지고/ 바람이 불면 행여나 그 님인가/ 살며시 돌아서면 쓸쓸한 파도소리.”(키보이스의 ‘바닷가의 추억’, 1970, 김희갑 작사·작곡)
70년대 세대들은 여름 바다의 ‘물거품’ 같은 사랑조차 ‘아름다운 추억’으로 포장하길 마다하지 않았지만 90년대가 되면 달라진다. 본전 생각도 나고 억울해지기도 하는 유치한 마음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지나간 여름 하 그 바닷가에서 만났던 그녀/ 허리까지 내려오는 까만 생머리/ 이것저것 잴 것 없이 난 그냥 푹 빠져 버렸어/ 아예 아예 난 사랑에 푹 빠져버렸어/ 지나간 그 여름 바닷가에서/ 꿈처럼 눈부신 그녈 만났지/ 믿을 수가 없어 아름다운 그녀/ 내겐 너무 행운이었어/ 별이 쏟아지던 하얀 모래 위에/ 우린 너무 행복했었지/ 가을 겨울 가고 널 볼 수가 없어/ 어디 있는 거야 제발 돌아와 줘/ 그녀 없는 여름 다시 찾아오면/ 나는 어떻게 해/ (중략)/ 친구들 날 달래준다고 그 바다로 다시 오게 됐어/ 청천벽력 날벼락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난 거야/ 내가 사준 선그라스 목걸이 그대로인데/ 단지 틀려진 건 내 친구와 함께라는 것/ (하략).”(DJ DOC의 ‘여름 이야기’, 1996, 이승호 작사·신동우 작곡)
이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앞서 들었던 노래의 달착지근한 분위기가 ‘확 깬다’. 음향도 그윽한 파도 소리 대신 오토바이 소리(!)다. 사실 여름 바다는 하도 시끄러워 파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일상으로 돌아와 보니 몸과 돈 모두 타격이 크다. 이게 현실이다. 그래, 90년대 세대들, 니들이 한 수 위다!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
첫댓글 '70년대 세대라기엔..막내뻘? '61년생이라네요.이영미씨..^^
좀ㅋㅋ무대??앗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