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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습작
금동이 /신영애
사과꽃 향기
"사과나무에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있었는데 그것이 얼마나 탐스럽게 익었는지 그 발간 사과를 하나 따서 입에 넣어 와삭 깨물었더니 새콤하면서도 달콤한 사과 맛에 에미가 기절했다는 거여. 막 깨어나는 순간이었나벼. 숨을 헉헉거리면서 발버둥을 치는데 가위에 눌린 니 에미 깨우느라 새벽부터 찬물 끼얹고 난리였어. 무슨 꿈을 그리 요란하게 꾸노, 옆에 자는 사람 놀래자빠지게 말이여 라고 니 에미에게 타박을 했는기라. 알고 보니 그게 얼라 배는 꿈인 기라. 그런데 기가 찰 노릇은 또 가스나가 뱃속에 생긴 거 아니겠냐."
내가 7살이었던 어느 봄날 저녁, 7명의 식구가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으면서 아버지께서는 반주로 한 잔 마신 막걸 리가 얼큰하게 취해오시는지 아들인 내가 태어나게 된 배경을 기분 좋다는 뜻으로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태몽으로 미루어 모두들 딸이라고 짐작했다고 하셨다. 그리고 달이 다 차고, 기울어서 내가 태어났는데 부모님께서 그렇게나 기다렸던 고추를 달고 있었다. 나는 딸만 내리 넷을 낳고 집안어른들로부터 갖은 구박과 냉대를 받으며 살아온, 그러다 원하고 또 원해서 얻은 그야말로 금쪽 같은 내 어머니의 귀한 아들이었다.
우리 집은 그리 넉넉하지 않은 시골의 그저 그런 집이었다.
위의 누나들은, 첫째인 맏딸은 살림밑천이라는 말로 그나마 대접을 받고 자랐을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은 일순누나, 얌체인 둘째 누나 이순, 너무 예쁜 셋째 삼순누나, 그리고 이제 제발 딸은 그만 낳고 싶다는 어머니의 염원처럼 끝순이가 된 내 바로 위의 말순누나가 있다.
그저 그런 시골의 딸 부잣집 큰딸은 그리 예쁘지도 않았고 영특하지도 않았고 줄줄이 이어지는 동생들을 업어 키우느라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았다.
아주 작은, 그리 예쁘지 않은 큰누나의 등에 나는 제일 많이 업혔다. 넘어져 옷에 흙을 묻히거나 코피가 난다거나 하면 모든 책임이 큰누나에게로 돌아갔으니 큰누나의 관심은 오로지 나에게로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집안의 보물처럼 여겨진 나를 보호하기 위해선 업는 것이 큰누나에겐 제일 안전한 방법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침밥만 드시면 곧 바로 논으로 밭으로 일하러 가셨다. 강 건너에 있는 사과밭에는 그분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과나무가 올망졸망 모여 먹을것 만을 찾아대는 우리들처럼 그분들을 기다렸다. 사과나무 꽃이 피기 시작하면 솎음 작업에 일손이 필요했다.
딸 다섯과 아들 하나를 거느리고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동그란 구멍이 쑹쑹 뚫린, 나무기둥 위에 걸쳐진 다리를 건너는 한 가족의 모습이 지나가는 낯선이에겐 어쩌면 그림 같은 풍경으로 다가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나들은 작은 키의 높이에 닿는 만큼의 사과 꽃을 맡았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높은 곳의 사과 꽃을 솎아냈다. 나는 어머니의 그림자 보다 삼순누나의 그림자위에 더 많이 서 있었다.
나를 더 많이 업어준 큰누나의 그림자보다 가끔 나에게 코 묻은 돈을 털어 사다주는 눈깔사탕의 달콤함에 눈이 멀어 버렸는지, 나는 예쁜 삼순누나의 그림자 위를 지키는 지킴이 마냥 누나 뒤를 따라다녔다.
어린 꼬마인 내 눈에 비친 사과밭 800평은 너무나 거대한 곳이었다. 사과 꽃이 하얗게 바다를 이루고 있는 우리 밭으로 다다를 때면 상큼하고도 아련한 향기가 희미하게 코끝을 간질이고 나는 그것이 삼순누나의 향기인양 맡고 또 맡았다.
꽃봉우리가 엄마의 젖꼭지 같은 붉은 색깔을 띠고, 이것이 점점 커가며 벌어지면서 삼순누나의 발그레한 뺨처럼 분홍색을 띠다가 새초롬해진 누나의 얼굴빛처럼 하얀색을 띠는 사과 꽃이 내는 향기는 꼭 삼순이 누나의 냄새 같았기 때문이었다.
누렁이
해거름이면 마을에선 집집마다 굴뚝에서 연기가 솟아올랐다. 여인들은 조금 일찍 돌아와 식구들의 저녁준비로 부엌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가마솥에선 보리밥 익어 가는 냄새가 담을 넘어갔다.
우리 골목에는 나를 포함하여 세 명의 악동들이 있었다. 집 울타리 안에 한 쪽을 차지한 창고에 쌓이는 곡식들의 양이 고만고만한 집의 아이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싸움꾼의 기질이 다분했던 철수는 나보다 덩치가 머리하나 정도는 더 컸다. 철수는 아들만 셋 있는 집의 막둥이였다. 나는 딸 부자 집의 막내아들이었고, 그래서 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누나들의 영향을 많이 받아 여성적인 성향이 짙은, 겉으로는 얌전해 보이며 속으로는 앙큼스레 실속을 챙기는 내숭기가 많은 얄미운 악동 축에 속했다. 그리고 생긴 것은 어리석은 듯한 곰보인 병수가 있다.
셋이 조를 이루어 하루 종일 온 들을 뛰어다니다 개선장군이 귀환을 하는 폼으로 어깨를 쭉 펴고 팔자걸음을 걸으며 좁은 흙담 길을 꽉 메우듯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돌아오면 우리들을 맞이하는 굴뚝의 연기와 입안에서 침이 나게 하는 구수한 밥 냄새가 그리 좋을 수가 없었다.
작년 겨울에 장만해 놓았던 탱자나무 가시들, 사과밭에서 전지를 끝낸 후 쓸모없는 잔가지들이 거의 대부분을 이루는 땔감이 뒤란을 가득 메우고 커다란 가마솥 앞에는 쭈그리고 앉아 밥을 짓는 검게 그을린 어머니 얼굴이 불빛을 받아 검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해가 질 때쯤 돌아오는 나를 보자말자 삼순누나는 나의 손을 잡고 우물가로 향했다. 일곱 살이나 된 사내아이의 옷을 홀라당 벗겨 씻기는 삼순누나의 힘에 나는 굴복 할 수밖에 없었고, 제발 철수는 이 장면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조막막한 손으로 조막막한 손보다 더 작은 고추를 가리기 바빴다.
누렁이도 보는데, 창피하다며 팬티를 입혀달라는 나의 거센 항의는 늘 무산되었다. 삼순이 누나가 입혀주는 옷을 입어야 했고, 나는 누나의 취향대로 모습이 꾸며지는 게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나는 삼순이 누나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말끔한 모습으로 옷을 갈아입을 때쯤에 아버지는 돌아오시고 소여물을 퍼담아 누렁이의 밥그릇에 담아주셨다. 누렁이는 커다란 두 눈을 끔뻑끔뻑 거리며 아버지가 돌아오시기만 기다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렁이는 우리 집에서 삼 년을 같이 살았다. 아버지께서는 아주 작은 새끼를 황소로 키우셨다. 밥상머리에서 아버지는 누렁이를 장에 내다 팔고 송아지를 사와야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중학교에 다니는 일순누나와 곧 중학교로 들어가게 될 이순 누나의 학비 마련을 위해 그렇게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못 살아도, 아무리 형편이 어렵더라도 아무리 딸자식이라도, 중학교는 나와야 한다는 아버지의 지론이셨다. 물론 아버지는 소학교 문 앞에도 못 가보신 문맹이셨다.
내일은 우리 읍에서 열리는 5일장이다. 5일장이 서는 날이면 어머니는 푸성귀를 마련하고 보따리를 만들어 머리에 이고 장에 가기도 했다. 그러나 내일은 아버지 혼자만 가실 것 같았다. 집에서 읍까지 큰 도로가 아닌 지름길인 논길을 따라 걸어가면 어른들의 걸음걸이로도 족히 40~50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내일이면 누렁이와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했다. 얼마 전 우리집에서 키우던 털이 까만 개 한 마리, 깜상이 사라진 이후에 나는 한참동안을 그 깜상이 불쌍하고 보고 싶기도 해서 울며 지냈기에 더했다. 이제 누렁이마저 없게 되다니…….
갑작스럽게 무언가가 내게로 몰려오거나, 반대로 사라진다는 것은 7살인 내가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웠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내가 아끼는 것은, 내게 소중한 것은,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은 내 옆에 영원히 있으리라는 것이 당연한 논리로 받아들이고 사는 내겐 그랬다.
저녁밥을 먹기 위해 밥상 앞에 앉았지만,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벌써 달아나고 없었다. 누렁이를 팔아야 한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나는 누렁이의 커다란 두 눈동자 밖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잠을 자기 위해 이불 속에 들어갔지만, 누우면 바로 잠이 드는 나였지만, 그 날 만은 쉬이 잠을 잘 수 없었다. 누렁이 머리를 세 번 정도 쓰다듬어 주고, 눈을 맞추었다. 나와 누렁이의 이별식을 치뤘다.
우시장은 하늘에 별이 사라지지 않은 아주 이른 새벽에 열렸고, 그 시간을 맞추자면 아버지는 더 일찍 일어나 나서야 했다. 이 밤에 하지 않으면 나는 누렁이를 영영 볼 수 없기에, 그렇기에 내겐 누렁이와 마지막을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몇 시간 남지 않았기에, 들락날락 하는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무언가를 떠나 보낸다는 것은, 어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슬픈 일 이었나보다. 깜상이 사라졌을 때 내가 아주 많이 슬펐듯이, 누렁이를 팔았을 때는 아버지가 제일 많이 슬퍼하시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누렁이를 팔고, 송아지를 한 마리 사 놓지도 않고, 시장바닥의 막걸리 집에서 빈속에 막걸리만 마셔대셨으니까.
누렁이 판돈을 보자기로 꽁꽁 싸고 배 위를 덮는 띠를 둘러 가슴 안에 돈을 감춘 후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마셔댔다.
아버지의 형제 분 중, 작은고모는 읍에 살고 계셨다. 시장을 보러 나온 고모의 눈에 막걸리 사발을 채우고 마시고 또 채우고 마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고모는 혼자 힘으로는 아버지를 부축할 수 없어, 고모부를 모시고 오셨다. 고모내외분의 부축으로 고모네에 도착한 아버지는 배를 툭툭 치며 누렁이 판돈이 요기 있다며, 고모에게 가지고 있어라 하시곤 방바닥에 스르르 허물어지셨다. 저녁밥을 드시라는 고모의 이야기도 듣지 못한 아버지는 쓰러진 채 코를 골며 잠에 빠졌다.
고모는 '전대'를 고모 방 장롱 속에다 넣어 놓고 그날 밤은 오빠가 여기서 자게 해야겠다는 소식을 엄마에게 전화로 알렸다. 그 당시 우리 마을에는 단 한 대의 구식 전화가 마을 회관에 있었고, 전화가 오면 마을 스피커를 통해 누구누구 집에 전화 왔다며 방송을 했었다.
아침에 우시장에서 황소 한 마리를 팔고 소 판돈으로 술을 마셔대는 어리벙벙하게 보이는 한 남자를 하루 종일 지켜보는 눈동자가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눈치 못 차렸다. 더 큰 슬픔은 그렇게 은밀히 시작되고 있었다.
아버지는 고모네의 방 세 칸 중 한 칸을 차지하고 잠이 들었고, 사촌 형제 둘은 또 다른 방에서, 고모내외분은 안방에서 잠이라는 괴물에 육신을 맡겼다. 정말로 그렇게 영원한 잠을 주무실 것처럼 잠에 취하셨다. 고모네를 지켜보던 눈동자들의 움직임은 집안의 불이 모두 꺼지고 난 후에도 두 시간 이상을 더 기다렸다. 완전히 잠에 빠질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리고 서서히 움직였다.
아이들의 키 높이만한 작은 돌담을 사뿐히 뛰어넘어 마당을 지나고 아버지가 잠든 방문을 살그머니 열고 안으로 발을 넣었다. 아버지의 몸을 아무리 뒤져봐도, 아버지의 방을 샅샅이 뒤져도, 전대는 보이지 않았고 아버지의 몸을 그렇게나 훑어 내리듯 만져도 아버지는 깨어나지 못하셨다. 순간 검은 눈동자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모의 방으로 향했다.
고모는 잠귀가 밝았다. 건넌방의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아마도 잠을 자다 소변이 마려워 깨어난 오빠의 움직임이려니 여겼다. 그런데 마당을 가로지르는 작은 발자국 소리는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느끼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순간 이불 속의 고모는 벌벌 떨기 시작했다. 고모부를 깨워야겠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누우면 바로 코를 골며 잠을 자는 고모부를 채 끼우기도 전에 벌써 발자국은 대청에 올라섰다. 한 손으로 고모부의 허리를 꼬집었다. 또 다른 한 손으로는 고모부의 입을 막은 채.
"도............둑................."
"도......................둑................................."
"도...도...........도...........둑.....................!!"
떠나는 자는 그리움을 남겨놓는다.
겁에 질린 고모의 숨죽인 절규는 고모부를 벌떡 일어나게 만들었고 팬티 차림으로 허둥지둥 방안의 무기 될 만한 것을 찾는 고모부가 파리채 하나도 못 발견 한 그 짧은 순간에 도둑은 방으로 들어왔고 이미 방안의 사람들이 깨어나 있는 것을 보고는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들고 곧바로 돌진하여 찔렀다. 도둑이 강도로 돌변하는 것은 찰나였다. 무방비 상태의 부부는 온 방안에 유혈이 낭자한 채로 처참히 찔려 죽어갔고, 술 취한 아버지는 그것도 모른 채 아침이 올 때까지 잠을 잤고, 단순한 도둑은 흉악한 살인 강도범이 되어 벽장 속의 감춰진 돈을 찾아 유유히 사라졌다.
나와 가까운 사람이 이 세상을 영영 떠난다는 어떤 사실, 그 죽음을 이해하기엔 7살은 너무 어렸다. 누군가를 영영 볼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이 비록 우리 집의 식구 누군가는 아닐지라도 조금은 슬프고, 두려운 일이었다.
여전히 살아있는 모습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말을 잃어버린 듯 했다. 동생 내외를 죽음으로 내 몬 장본인이었으니 입이 열 개라 하더라도 할말이 없어야 했다.
그리고 늘어만 가는 아버지의 술, 일도 하지 않고 동네 회관의 평상에 퍼질고 앉아 술을 마셔대기 시작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었다. 늘어나는 것은 술 취한 아버지와 맨 정신의 푸념만 늘어난 어머니와의 말다툼이었다.
그 즈음의 나는 철수와 노는 것도, 병수와 노는 것도 차츰 싫증이 났다. 주전자를 들고 외상 막걸리를 받아 와야 하는 심부름도 싫증이 났다. 7살에 세상을 다 살아버린 듯한 멍한 시선으로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는 나를 쳐다보는 삼순이 누나의 눈동자는 늘 젖어있었다. 12살인 누나가 7살인 동생의 허무함을 이해한다는 듯.
여섯 식구가 나란히 다리를 건너 밭으로 일 나가는 그림 같은 풍경은 더 이상 없을 것처럼 보였다. 7살의 여름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마저 슬퍼 보였다. 그 막막한 슬픔은 자꾸만 커져 나갔다. 큰누나는 학교를 그만 두어야 했다. 원래 공부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던 것도 한 몫을 했을 테지만, 맏이로써의 어떤 사명감이, 책임감이 더 많이 작용했던 거 같았다. 큰누나는 교복을 벗고, 파란 죄수복 같이 생긴 일복을 입는 작은 방직공장으로 떠났다. 떠나는 날 큰누나는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한 참을….
"우리 막둥이 아푸지 말거래이……."
그 당시 우리 마을에는, 여자가 중학교에 다니는 사람은 큰누나 혼자였다. 누나의 친구들은 벌써 공장으로, 버스 차장으로 떠나고 없었다. 어쩌면 큰누나는 그리 슬퍼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다들 그렇게 했으므로, 다들 그렇게 집안을 위해 돈벌러 나갔으므로……. 그런데, 다들 그렇게 하더라도, 다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더라도 나의 누나들은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기특한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았다. 생각만 있다고, 바라기만 한다고, 다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까지는 몰랐고 서서히 알게 되는 과정은 감당해내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7살 사내아이의 한계는 너무 많았다.
마을 앞으로 강이 흐르고, 한 사람이 겨우 걸어 갈 수 있을 정도의 다리가 놓여 있었다. 다리 아래에는 오리가 아침 끼니꺼리를 자맥질로 줍고 있었다. 오십여 채 남짓한 집들 뒤편에는 유월의 푸르름이 한창 물올라 있고, 논에서는 벼가 푸르다 못해 검은 빛으로 잘 자라고 있었다. 논두렁에는 논둑을 따라 콩을 심어 놓았고, 옥수수도 간혹 쭉쭉 뻗어가며 자라고 있었다.
닭 우는 소리와 오리의 꽥꽥거리는 소리는 아침을 열었지만 닫혀버린 아버지의 마음을 열지 못했고, 떠난 큰누나의 허전함을 채워주지 못했으며 어머니의 한숨을 거두어 내지 못했다. 우울한 7살의 회색 빛 하늘도.
순례
내 기억으론 그 해 장마가 유난히도 길었고, 지루했으며, 길었던 만큼 하늘에선 계속 눈물이 흘렀고, 지루했던 만큼 눈물은 흔했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 비가 잦았다. 하늘이 뻥 뚫려버렸는지, 그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비가 많이 올 리가 없었다. 아마도 하늘 또한 슬픈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나는 하늘이 슬퍼 눈물을 많이 흘리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늘아 이제 그만 슬퍼해, 네가 눈물 흘리면 나 또한 슬퍼져. 그러니 이젠 울지 마."
처마 밑에 웅크리고 앉아 낙숫물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어린 나는 그렇게 빌었다. 아버지는 동네회관에서 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계실 것이고, 어머니는 큰방에서 구멍난 양말을 깁고 계시고, 누나들은 학교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비가 내려 밖으로 놀러나가지도 못한 나는 처마 밑을 지키고 앉아 비를 쳐다보는 것만이 그 지루했던 장마기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이들이 슬픔에 잠겨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고모내외분이 돌아가신 것으로 인해 잠시 나는 죽음과 삶이란 거대한 명제에 대해 고민에 빠졌고, 아이들 특유의 기질로 슬픔에서 금방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기 위해 눈을 굴리고 다녔다.
훠이 훠이… 허수아비 춤을 추는 듯, 하얀 치마는 더 이상의 더러움이란 없다는 듯 꼬질 한 모양새, 땟국에 절어 하얀 치마인지 검정 치마인지 모를 정도의 치마에 머리는 산발하고 된장 항아리보다 더 부른 배를 한 여자 하나가 우리 마을로 슬그머니 들어온 사건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 여자를 미친년이라 불렀다. 그 여자가 가끔은 정신이 들어 이야기 할 때 자신은 19살이라 하였다. 부모님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했다. 19살에 임신한 몸으로 미친년이 되었어야 했던 기막힌 사연을 알 수 없었던 동네사람들은 순례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순례는 장마철 햇살 비추듯 정신이 들었고 그 햇살은 아주 잠시 그녀를 비추고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장마철에 햇살 구경하기가 힘들 듯, 순례의 맑은 정신을 보는 것 역시 보기 드물었다. 어디서 흘러 들어왔는지, 왜 배가 된장 항아리보다 더 큰 상태가 되었는지, 그리고 왜 미쳤는지 아무 것도 모른 체, 마을에선 순례의 거취로 의견이 분분했다. 미친년은 마을에 둘 수 없다는 의견과, 그래도 배부른 사람인데, 언제 애를 낳을지 모르는 사람인데 어떻게 내칠 수 있냐는 수 십 가지의 의견들로 마을은 순식간에 들쑤셔졌다.
순례가 누구의 동의도 없이 거취 하는 곳은 마을에서 외진 곳, 사과밭의 원두막이었다. 그 원두막은 우리 밭 바로 옆이었다. 아마도 순례는 우리 원두막과 우리 옆집의 원두막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지냈을 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원두막은 낮에만 주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미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그 당시의 나는 정확히 이해를 할 수 없었다. 7살의 사내아이가 미친다는 것을, 제 정신이 아닌 한 여인을 어떻게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짚단 더미 속에서 자다 나온 것 같은 온몸에 지푸라기를 묻히고, 하얀 월남치마는 검정빛이 되었고, 어디서 얻어 입었는지 모를 빨간 색의 남자 남방은 단추 다섯 개 중에서 두 개만 겨우 남아 있었다. 군데군데 보이는 구멍으로 속 살점이 들여다보이는 차림으로, 마을 앞 강가에 나와 배를 채우고 돌아가는 오리처럼, 오리 걸음걸이의 순례는 아침에 한번, 저녁에 한번 마을의 집집을 돌아다녔다.
'순례는 입이 두 개여'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굳이 없더라도 순례의 뱃속에 아기가 자라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동네사람들이 '순례'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아마도 매일 아침저녁으로 동네를 순례하는 것을 두고 그렇게 이름 불렀던 것 같다. 순례는 매일 하루 두 번씩 동네에 나타나선 대문 밖에 가만히 지키고 서 있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그 집의 안주인이 누구라도 나와서 밥을 챙겨주기를 기다렸다. 아무 말 없이 사람이 나올 때까지 그렇게 순례는 기다렸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동냥 밥을 먹었다. 헤벌쭉 웃는 모습으로, 좁은 골목길을 바라보며 웬 미친년 하나가 서 있었다. 순례였다.
철수와 병수, 그리고 나는 순례의 뒤꽁무니 따라다니기를 좋아했다. 보리밥에다 김치 몇 조각, 그리고 푸성귀 나물을 얹어 주는 박으로 만든 바가지 속의 밥을 아귀처럼 먹어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뱃속에 거지 귀신이 들린 모습이었다.
자꾸만 우리를 뒤따라 오라 손짓하는 것 같았다. 귀가 솔깃한 명령처럼 야릇한 느낌이었다. 우리는 어떠한 주저함도 없이 순례의 뒤를 따라다녔다. 인적 없는 곳에서 우리를 잡아먹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순간순간 머리를 스쳐지나가기도 했지만 그제도,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순례의 뒤를 따라다녔다.
마치 할 일이라곤 순례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뿐인 양.
배시시 웃는 순례의 얼굴은 언젠가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갔을 때 보았던 부처님의 얼굴에서 본 미소를 연상케 하기도 하였고, 나풀나풀 춤을 추는 모습은 우리 골목에서 유일한 계집아이인 영숙이의 고무줄 놀이할 때의 밝은 표정 같기도 하였는데 훌쩍거리며 들녘을 뛰어다닐 때의 모습은 허수아비가 바람에 휘날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영 종잡을 수 없었다.
춤을 추며 달리는 것인지, 달리며 춤을 추는 것인지, 무거운 몸이지만 순례는 신기하게도 빨리 달렸다. 순례가 재빨리 멀어지면 우리들 역시 숨을 헉헉거릴 정도로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아니 걸어서는 안되었다. 그래서 뛰었다. 순례를 쫓아 우리도 뛰었다. 하지만 결코 따라잡을 수 없었던 순례는 우리를 놀리기라도 하듯 무심하게 휙 돌아보고선 원두막으로 향했다.
순례의 미친 짓을 따라다니며 보고 그대로 따라 행동하는 우리들 역시 미친 아이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염려되는 어른들의 걱정스런 눈으로 지켜보다 순례를 그만 따라다니라는, 금족령이 떨어지는 경고를 받기도 했다. 갑갑하게 집안에만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것은 7살 사내아이들에겐 더할 수 없는 고문이었다.
"어무이요, 여자들은 얼라 낳을 때 죽을 만치 아푸나?"
"그려, 죽을 만치 아프지."
"그란데 어무이는 다섯을 낳고도 안 주겄네?"
"예끼 요녀석 봐라, 그러면 에미가 죽기라도 했어야 하나?"
어머니께선 내가 아주 어릴 적에 입었던 옷을 손질하고 계셨다. 정확히 말하면 순례의 아기에게 줄 옷을 줄여서 꿰매고 계셨다. 장롱 깊숙이 넣어 두었던 내가 입었던 배내옷을 꺼내 양잿물에 푹 삶아 다시 뽀얗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쓰던 무명 기저귀를 삶아 빨아 넣어 말리고 깨끗하게 접어 두셨다. 오늘은 배내옷 보다 조금 더 큰 내가 입었던 누렇게 바랜 옷을 꿰매고 계셨다. 어른들이 보기엔 순례의 해산 날짜가 그리 멀지 않은 것으로 보였던 것 같았다. 순례 본인은 정작 모르고 있을 테지만.
나는 풍선처럼 부풀어오른 순례의 배가 자꾸만 생각났다. 탱자가시로 순례의 배를 콕 찌르면 풍선에서 바람이 훅 하고 순식간에 빠지듯 순례의 배도 잠시만 아프고 죽지 않은 채로 아기를 낳기를 기도했었다. 순례 뒤를 따라다니지 않은 지도 벌써 사흘이 지났다. 궁금해서 안되겠다. 내일은 철수와 병수랑 같이 순례를 보러 살짝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삶과 죽음
다음 날 나는 친구들과 함께 순례를 보러 가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지독한 열 감기가 든 것이라 했다. 한 여름에 감기라며, 덜 여문 과실 표시 낸다며 어머니는 나를 꼼짝도 못하게 방안에만 가두었다. 몸이 불덩이 인 것은 참을 만 했지만, 순례가 어찌 되었을까 그 궁금증을 참는 것은 힘들었다.
아기를 낳았을까?
아기는 아주 조그만 하겠지?
여자아기일까?
남자아기일까?
아기는 세상에 태어나자 말자 울어댄다는데 순례의 아기는 어떤 울음소리를 냈을까?
방안에 아기 옷들은 보이지 않는데 어머니는 순례의 아기에게 옷을 전해줬을까?
철수와 병수는 순례에게 가 봤을까?
오늘 순례는 어느 집에서 밥을 얻어먹었을까?
순례가 아기를 낳으면 그 아기를 제대로 키울 수 있을까?
그 아기는 어떻게 하지…?
방안에 갇혀 꼼짝 못하고 있는 내 몸은 상상과 생각의 바다에 빠져 약에 취한 혼미한 정신으로 허우적거렸다. 그렇게 또 며칠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나는 겨우 몸을 추스를 수 있었고, 마루에 앉아 삽사리와 장난을 치고 있었다. 삽사리는 내가 내 고무신 한 짝을 저 멀리 던지면, 냉큼 달려가서 입으로 물고 달려와 내 발 앞에 떨어트리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쓰다듬어 주기를 기다렸다. 나는 그것이 대견해서 등을 쓰윽 쓰다듬어 주고 다시 고무신을 집어 던졌다. 그러면 삽사리는 다시 뛰어가서 냄새나는 고무신을 물고 오고. 그 장난이 싫증날 때쯤 철수가 헐레벌떡 대문을 열며 들어왔다.
"금동아, 금동아 쩌기 다리 밑에 얼라가 죽어 있데이…, 퍼뜩 가보자."
"뭐라꼬? 얼라가 죽어 있다꼬? 어데?"
사내아이 둘이서 신기한 구경거리를 보기 위해 달려가는 모습, 그것이 슬픔의 변주곡인지, 환희의 예찬인지 구분하지도 않은 채, 단순한 호기심으로 달려가는 그 모습은 아이들의 천진 난만함 그 자체였다. 병수는 그 날 따라 어디에 갔는지 찾을 수 없었고, 나와 철수는 동네 뒤편에 놓여있는 다리를 향해 내처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도록 달렸다.
죽은 사람, 시체를 보는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갓난아기의 시체를 보는 것은 약간의 두려움도 앞섰지만 궁금함이 더 많았기에 있는 힘을 다해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다리아래 그늘 진 곳, 잡풀들이 듬성듬성 나있기도 하고, 썩은 풀 냄새가 약간은 나기도 한 그곳에 배꼽에 긴 줄을 매단 채로 갓난아기의 시체는 버려져 있었다. 그 조그만 아기의 몸에 푸릇푸릇 멍이 든 것 같았고, 물에 퉁퉁 불어 있는 모습으로 아기는 물을 넣은 풍선처럼 부풀어올라 있었다. 그 후 그 다리를 지나야 할 일이 생길 때면 우리들은 그 다리 위를 지날 때마다 숨을 쉬지 않고 눈을 꼭 감고 냅다 달려야 했다. 눈을 뜨면 다리 아래에서 아기가 방실방실 웃으며 손짓 할 것만 같았고, 숨을 쉬면 아기의 새근새근 잠자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으며, 귀를 막지 않으면 우리를 부르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아기가 순례의 아기였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 아기가 누구의 아기였는지, 왜 그곳에 버려져야만 했었는지, 그리고 그 날 이후 우리 동네 어디에서도 순례를 볼 수 없었다는 것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의문에 싸여 다리 위를 흘러 다니고 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다리를 둘러싼 아기의 혼령은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지배하고 있었다.
소원하는 그대로 모두 이루어지리라 믿었던 어리기만 했던 나는 세상사는 이치가 모두 제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고, 이해하려고도 애쓰지 않았을 뿐 더러 관심조차 없었다. 아니 관심이 아니라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그런 상태였다.
어린 내가 그렇게나 빌었던 순례의 아기는 낳자마자 죽었고, (우린 그렇게 여겼다.) 순례는 겁에 질려 어디론가 달아났으며, 큰누나는 돈을 벌러 떠났고, 아버지는 여전히 술이 친구였고, 어머니의 한숨은 늘어가기만 했던 것 등이 슬픈 현실이었다.
삶과 죽음 두 단어의 의미를 파악해 가는 7살의 여름, 나는 차이점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죽음을 느껴보기 위해 나는 한참 동안 숨을 참기도 해봤다. 얼굴이 시뻘개지도록 참아내는 것은 기껏해야 몇 분이었다. 나는 죽음을 느껴보지 못했다. 숨을 못 쉰다는 것은 죽는 다는 것인데, 심장에 무거운 돌덩이를 얹어 놓은 것처럼 먹먹해져왔다. 죽음이란 눈뜨지 않고 계속 잔다는 것은 아닐까? 그래, 눈을 감고 계속 잠을 자보자. 영원한 잠에 빠져보자. 나는 반나절 동안을 두 눈 꼭 감은 채로 누워 있어봤다. 죽기는 고사하고, 등이 딱딱해지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 누워있을 수 없었다.
고모도, 고모부도, 순례의 아기임이 분명한 다리 아래 죽은 아기시체도 숨을 쉬지 않고, 심장이 멎어 버린 영원한 잠에 빠졌다. 나는 그때까지도 죽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죽는 다는 것은 다시는 반갑게 인사 할 수 없다는 것이고, 밥을 먹지도 못하며, 밤에 잠을 자다 이불에다 지도를 그리지도 않는다는 것이며, 똥을 싸지도 못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혼자만의 정의를 내리는 데 성공했다.
죽음은 이별을 의미하고, 이별에는 슬픔이 뒤따르고, 슬픔에는 바늘로 콕콕 쑤시는 가슴아픈 통증이 유발되었으며, 가슴의 통증은 해가 우리 집 서쪽 담벼락을 타고 내려가는 어둠이 밀려오는 저녁 무렵이면 어김없이 가슴을 헤집었다.
발갛게 물든 노을이 아름다운 만큼 내 가슴은 시리고 아팠다. 저녁은 어둠을 데려오고 어둠과 함께 이유 모를 그리움을 몰고 왔다. 잔잔한 호수의 물결과도 같은 어둠이 마당에 내리고 있고, 조용한 우리 집 마루에 앉아있는 나는 외딴섬처럼 가라앉았다. 컹컹 심심하면 한번 씩 짖어대는 삽사리만 아니었다면 영영 그렇게 가라앉아 버릴 것만 같은 침몰하는 저녁을 맞이하게 되었을 지도 몰랐다.
저녁만 되면 도지는 지병처럼 황혼은 나를 힘들게 했었다. 이런 느낌은 삼순이 누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졌다. 늘 밝게 웃으며 싹싹한 말로 어린 나에게 손을 내미는 삼순이 누나에겐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감성이라 여겼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주 먼 훗날이긴 했지만 그 당시에 나로서는 나의 감성이 못내 못마땅했었다.
남자는 씩씩하고 활달해야하며 의리가 있어야 한다, 남자는 한 번 아니면 죽어도 아닌 것이어야 한다. 맺고 끊는 것을 확실히 해야한다.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 누나들을 잘 보호해줘야 한다. 이 집안의 장남은 그렇게 할 일이 많았다. 아직 남자라는 의미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아버지는 술 한 잔 드시고선 옆에 붙들어 앉혀 놓고 긴 연설을 아주 긴 시간 동안 아주 재미없게 하고 또 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쪼그리고 앉은 나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하셨냐고,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못하셨고 그렇기에 술을 친구 삼아 매일 술독에 빠져 살지 않으시냐고. 하지만 차마 나는 아버지에게 대들며 말하지 못했다. 정말 그렇게 못했다. 아버지의 슬픔을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었기에, 어린 아들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다면 아버지는 너무 슬퍼하실 것이라고. 장남이란 무게에 내 어깨는 짓눌려버렸고 그래서 그 중압감에 해질녘이면 나는 우울해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금동아, 니는 장차 뭐가 되고 싶노?"
"아부지예, 나는 말입니더, 철수가 되고 싶어하는 엿장수도 아니고예, 병수가 되고 싶어하는 우체부 아저씨도 아니고예, 삼순이 누나 지키는 기사가 될 낍니더."
"기사가 뭐꼬? 택시기사 말이가? 버스기사 말이가?"
"아부지는 그것도 모립니꺼? 남자가 약한 여자를 지켜주는 경찰 같은 거 아입니꺼."
"그라마 삼순이 누부야는 시집도 못 가겠네?"
"그기 그래 됩니꺼? 하여간에 내는 말입니더 우리 삼순이 누나가 젤로 좋다 아입니꺼. 삼순이 누나를 보호하는 기사가 될끼라예."
아버지의 말상대로 앉은 나는 아버지의 질문에 싹수 노란 대답을 날름날름 해대었고, 술에 취한 아버지는 허허 웃으시며 나와 술친구 하셨다. 물론 나는 아버지 앞에서는 한 잔도 마시지 않았지만 그전에 벌써 막걸리 심부름을 다녀오면서 주전자 주둥이를 입에 대고 벌컥 벌컥 마셔대었다. 그러니 한 되 주전자의 막걸리는 늘 비어있기 일쑤였다.
오줌싸개
야금야금 훔치듯 마신 술이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지만, 내 얼굴 어디에도 술을 마셨다는 표시하나 없었다. 아버지의 유전인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나는 술에 대해 천성적으로 강한 내성을 지녔던 것 같았다. 나는 그야말로 새끼고래였다. '기사'가 되려는 야무진 희망하나 담고 새끼고래는 어서 빨리 어른고래가 되고파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려니 다리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잠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나는 자꾸만 감기려는 눈을 뜨기 위해 눈에다 힘을 주어야 했다.
"아부지, 잠 옴니더. 자러가도 되까예?"라고 말할 수 없었다. 자러가고 싶다고 말을 했다간 두시간을 더 술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할 것을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른이 말을 할 때 예의바른 아이는 귀담아 들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혼자서 머리를 굴렸다. '내가 예의 바른 아이일까?' 예의 바른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는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지만 난 예의바른 축에 들지 못하는 그저 말수가 적은 아이였다. 물론 대꾸도 하면 안되었다. 앉아있는 자세가 흐트러져서도 안 되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대로 행동하고 말 할 수 있다는 뜻일 거라 여겼다.
'빨리 어른이 되어 야지.'
아침이면 동네 골목마다, 집 마당 가득하게 안개가 짙게 드리워졌고 햇살이 일어나 걸음을 옮기면서부터 안개는 쓰러져갔고 어제는 보이지 않던 담벼락아래 채송화 꽃 한 송이가 피어나 있었다. 꽃송이가 피어날 때쯤 나도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그리곤 축축하면서도 서늘한 느낌이 도는 이부자리를 쓱 훔쳐보고선 절망감으로 노랗게 얼굴 색이 변해갔다.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거르지 않고 이불에다 천연색 세계지도를 그렸다. 아! 나는 왜 이럴까!
안개 짙은 시골마을의 아침 풍경화 속에는 하루걸러 한번씩 키를 둘러쓴 오줌싸개 아이 하나 골목길을 비적비적 걸어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바로 나였다. "금동이는 오줌싸개래요~."라는 별명을 키와 함께 머리에 이고 살았던 나는 오줌주머니의 열고 닫기가 아마도 고장이 났던 것 같았다.
밤이 되면 물을 전혀 마시지 않기 위해 갈증도 참아야 했다. 참다참다 못 참고서 딱 한 모금 마신 냉수를 다음날 아침이면 고스란히 이불 위에 쏟아내고서 확인을 시켰다. 나 어젯밤 또 물 마셨나봐. 정말이지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네댓 살 정도에서 졸업하는 이불 위의 지도 그리기를 나는 일곱 살이 넘어서도록 까지 여전히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그 시절 나는 주로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곤 했는데, 떨어지는 순간 그 아찔한 느낌을 그대로 배뇨로 표현한 것 같았다. 주로 떨어지는 곳이 된 곳은 별로 높지 않은 야트막한 뒷산 꼭대기에 커다란 바위에 올라 낙하산 놀이를 했던 그 곳이었다. 낮이면 나는 철수와 병수랑 같이 나뭇가지 분질러 칼을 만들고, 꺼먼 고무줄을 사용해 만든 새총을 들고 전쟁놀이를 했고, 둑길 위에 퍼질고 앉아 개미를 잡아 앞길 막는 놀이를 하기도 하였고, 뱀을 좇아 온 산을 휘젓고 다녔었다.
뱀에 관해서 말한다면 나는 무척이나 뱀이 두려웠다. 기어갈 때 나는 스르륵 스르륵 소리는 피부의 세포 하나 하나가 쭈뼛쭈뼛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지만 철수로부터 겁쟁이란 소리 듣는 것이 더 싫었기에 마지못해 뱀 잡기에 나서서 뒤꽁무니를 따라다녔다. 겁쟁이란 소리는 오줌싸개라는 소리 듣는 것보다 더 싫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뱀을 만나면 우선 오줌부터 마려웠다. 일단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어디 오줌부터 눌 곳 없나 둘러보는 것이 내가 뱀을 보는 순간에 하는 생각이었다. 물론 이런 생각을 결코 철수나 병수에게 말할 수 없었다. 약간은 어리석기도 한 병수마저 뱀 잡기 놀이에 빠져 있는데 병수보다 좀더 똑똑하다 여긴 나는 똑똑한 만큼 처신에 위상을 세워야 했었다. 그런 것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어느 운수 나쁜 방울 뱀 하나 철수 눈에 띄는 날이면 그 날 밤 나는 자면서 뱀 꿈을 꾸었고, 자연스레 오줌을 누었다. 이불 위에다 시원하게 오줌을 쌌다. 오줌을 누는 것이 어찌나 시원하던지, 한 낮의 땡볕에서 뛰어 놀다 집으로 돌아와 먹는 우물에 드리워진 두레박 속에 담긴 수박을 먹는 느낌이었다.
또한 아버지의 막걸리를 훔치듯 마신 날이면 어김없이 이불 위에는 지도가 펼쳐졌다. 황혼의 우수를 일찌감치 터득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밤이면 시작되는 다음날 아침의 공포로 인해서였을 것이다. 오줌싸개의 밤은 별빛에 빛을 내며 익어 가는 머루 알보다도 더 까맣게 타들어 갔다.
내가 이렇게 이불에다 지도 그리는 것을 어머니는 그리 야단하지 않으셨다. 물론 아버지께서도. 다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삼순이 누나만은 예외였다. 어머니께선 내가 얻어 오는 소금으로 해서 소금 살 필요가 없어진 것이 이유였을 것이다. 이다음에 커서 소금 공장 사장이 되어 어머니 원하시는 소금 원 없이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기까지 했으니 내가 오줌을 싼 것은 어머니에게 있어선 수지 맞는 일에 해당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애들은 밤에 자면서 이불 위에 오줌 쌀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기죽을 필요 없다며 나에게 키를 씌워 소금동냥에 나서게 하셨다. 키를 뒤집어 쓴 채 집 대문을 나서기 전에 오늘은 어느 집에 가서 소금 얻어와라 하시는 어머님의 말씀은 동네 한바퀴를 돌아야 하는 부끄러움은 어린 나이에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삼순이 누나가 싫어하는 내색쯤이야 누나를 지키는 기사가 되려는 나에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약한 여자를 지키는 것은 남자의 몫이다. 그러나 우리 집에는 남자는 둘 뿐인데 반해, 여자는 다섯 명이나 되었다. 너무 많았다. 그래서 어린 나는 그 중에서도 특히 삼순이 누나를 지키는 기사가 되고 싶은 거였다. 예쁜 여자를 보호하는 것은 기사 된 자의 당연한 도리였다. 그런데 공주인 누나 앞에서, 늠름한 기사가 되려는 나는 늘 체면에 먹칠하는 오줌이나 질질 싸곤 하였다.
하지만 나는 삼순이 누나를 지키는 기사가 될 수도 없었고, 더더구나 빨리 어른이 되지도 못했다. 7살의 여름과 가을과 겨울은 너무나 더디게만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더딘 시간 속에 더디게 흘러가는 나의 어린 시절이었다.
풋사랑
큰누나도 돈벌러 멀리 나가고 없는 집에서 누구보다도 나를 챙겨주는 것은 삼순이 누나였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머니께서 눈치채지 못하시도록 뒷수습을 하는 것은 삼순이 누나였고, 그 일이 힘들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비록 그저 그런 집의 딸 넷 이후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기에, 누나 역시 귀한 만큼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가지는 동생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금동아~ 일나라~~니, 또 오줌쌌다 아이가!!"
귀에다 대고 살짝 이야기를 해도 오줌이라는 말이 나오면 나는 번개같이 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삼순이 누나가 나의 오줌싼 일을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었다는 것이 누나와 나의 한계였다. 어머니는 귀신 같이 눈치를 채셨고, 어김없이 내 머리에는 키가 둘러 씌워졌고, 손에는 바가지 하나 들게 되었으니 말이다.
내 머리 위에 얹혀진 낡은 키는 일순 누나로부터 시작해서, 이순 누나 그리고 삼순누나, 그리고 말순누나 모두가 썼던 키였다. 세월이 흐른 만큼 키는 낡았고, 그 세월만큼의 역사를 고스란히 갖고 있었다.
아침이슬을 샘물처럼 마신 텃밭의 채소들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고, 금방 가마솥에서 퍼낸 따끈따끈한 보리밥처럼 햇볕이 따사로워지게 되면, 대문 한 기둥과 처마 밑을 이은 마당을 가로지른 우리 집의 빨랫줄에는 지린 오줌냄새가 만취한 사람의 입에서 나는 입 냄새보다 더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하늘을 만났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 골목 제일 끝 집에 새로 이사를 온 사람들이 있었다. 이북출신의 한 가족이었다. 육이오 때 피난 내려온 북한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라 했다. 어찌하여 우리 동네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지 그것까지는 어린 내가 알 수 없었지만 이북이라는 단어는 빨간 색을 의미했고 이북사람, 즉 '빨갱이'라는 단어는 꿈속에서조차 무서웠던 나였다.
이북사람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간을 빼먹는다는 전설 아닌 전설을 곧이 믿었던 나였기에 이북 출신, 즉 이북사람이 우리 마을로 이사를 왔던 것은 두렵고도 두려운, 이북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오줌을 싸게 만드는 일이었다. 7살의 나는 이북사람과 눈만 마주쳐도 나의 간이 이북사람에게 칼로 난도질당해 쏙 빼내어질 것이라 여겼으니 오죽이나 두려워했을까.
그랬던 나였는데, 어느 날 어머니는 키를 뒤집어 쓴 나에게 골목 안 제일 끝인 이북아저씨 집에 가서 소금을 얻어 오라 말씀하셨다.
먼발치에서조차 그 집을 보지 않고 애써 지나치고 다녔는데, 너무 무서워서 골목 제일 안쪽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조차 까먹었는데, 어쩌자고 어머니는 나를 그 집으로 보내는 것일까.
"어무이요, 내는 그 집에는 안 갈라요. 저기 웃마실에 가서…."
"냉큼 몬 가따오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머니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쭈뼛쭈뼛 심통이 가득한 얼굴을 한 채 나는 마당 한 가운데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인 내가 오줌싸개라서 싫어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사람간을 빼먹는다는 이북사람 집에 가서 소금을 얻어오라는 것인가. 나는 내 설움에 겨워 마당 한 가운데 키를 쓰고 바가지를 든 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정말이지 너무나 서러웠다. 오줌싸개 금동이는 이제 죽는구나. 순례의 아기처럼 나도 죽는 구나. 고모처럼 나도 죽게 되는 구나. 이게 죽는 다는 것이구나. 곧 죽게 된다는 생각은 나의 눈물샘을 자극했고 방문을 열고 내다보고 있는 삼순이 누나와 말순누나의 '샘통'이라는 얼굴표정은 나를 더욱더 서럽게 만들었다.
'삼순이 누나 마저 날 싫어하는 구나' 나는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울었지만 어머니의 서슬 퍼런 부지깽이 앞에선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부지깽이는 아궁이에 불을 때느라 벌겋게 열올라 있었으니, 불에 데여 죽느냐, 간이 빼 먹혀 죽느냐 두 개의 갈림길에 선 나는 일단은 매 앞에서 도망쳐야 했었다.
하지만 대문 앞을 나선 나의 발걸음은 처지고 있었다. 담벼락에 기대서서 한숨 한번 쉬고 한 발자국,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서러워 하늘 보며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고 또 한 발자국, 울엄니 진짜 엄니 맞나? 아닌 것이 분명해. 나는 다리 밑에서 주어온 자식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폭포 같은 눈물 쏟아내며 한 발자국.
결코 가까이 가고 싶었던 맘이 없었는데 어느 새 나는 그 집 앞에 와 있었다. 이북사람도 우리처럼 숨을 쉬고, 가끔 가다 오줌도 싸는 걸까? 내가 들어가면 바로 간이 빼 먹히는 걸까? 북의 아저씨는 악당 임꺽정보다 더 무섭고 힘이 쎄겠지? 북에서 온 아줌마의 입술은 쥐잡아 먹은 입술처럼 피로 벌겋게 칠해져 있을 테지? 아, 나는 너무 무서워. 이북사람 집에 있다는 나랑 같은 나이의 계집애도 무섭게 생겼을까? 그 계집애도 식칼을 손에 들고 사람이 찾아오면 간을 빼먹기 위해 칼을 휘둘러 대겠지? 엉엉엉 나 또 오줌 싸버릴 것 같아. 엉엉엉 나 너무 무서워. 오줌 좀 싼 것 가지고 죽어야 한다면 너무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이 이북사람의 집 대문 앞에서 몇 시간을 서성이게 만들었다.
배고픈 보릿고개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이북이었다. 또한 이북사람들이 뿌리는 삐라는 보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는 것인 줄 알았다. 들판을 걷다 어쩌다 발견한 작은 삐라 한 장을 보게되면, 이것을 주워 신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냥 못 본 척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맑은 하늘에 쪼매하게 보이는 비행기 하나 윙하며 지나가고 난 후에는 삐라 같은 것이 뿌려지고 삐라를 본 며칠 동안은 전쟁이 일어나 우리 모두 죽게 되는 것은 아닌가 여간 걱정이 되지 않았었다.
누나들은 겁도 없이 삐라를 줍고, 그걸 들고서 학교로 가지고 갔다. 연필과 바꿔오기도 했지만 나는 그것들을 주워 누나들에게 주고 싶은 맘이 생기지 않았다.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논과 밭, 들에서 가끔 보이는 그 삐라들을 골목 안 이북 아저씨가 뿌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으니 그 집에 소금 얻으러 가는 것이 어찌 두렵지 않을 것인가. 회피할 수 없는 일을 회피한다는 것은 야무진 꿈일 수밖에 없었고, 꿈이란 말 그대로 꿈인 것이다. 간밤에 나는 오줌을 쌌고, 그리고 이 아침 소금을 얻으러 가야하는 일이 당면한 현실이었다. 나는 무작정 그 집 앞에 서 있을 수 없었고, 한 걸음 한 걸음 대문 안으로 발을 디밀고 들어갔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물감을 통째로 쏟아 부은 듯 시리도록 파랬고, 시원한 바람이 설렁설렁 불어대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 동네 대부분의 집들은 양철 대문이었는데 반해, 그 집만은 나무 판자를 못 박아서 만든 대문이었다. 거기에다 니스를 칠해서 파리가 심심해서 날아 올랐다가 주르륵 미끄러질 정도로 반들반들 윤기가 났다. 판자 사이로 고개를 갖다 대면 집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는데 북에서 온 사람들이 이사를 온 이후에는 나는 한번 도 들여다 본적이 없었다. 나지막한 담벼락에는 제 설움에 못 이겨 온몸을 던지듯 능소화가 붉은 핏물을 뚝뚝 떨구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이름도 모를 꽃들이 소담스럽게 피어있었다. 마당을 가로 질러 사람들이 딛고 다닐 수 있도록 커다란 돌들이 듬성듬성 놓여져 있었는데, 그것 마저 처음으로 보는 것이었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농촌에선 그렇게 마당까지 치장을 하고 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돌 디딤판을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는 잔디가 심어져 있었는데 잔디에는 계집아이가 가지고 놀았던 보지도 못한 장난감들이 심심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돌 디딤판을 하나 하나 세듯이 부엌이 있을 법한 곳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만약에라도 이상한 느낌이 들면 곧바로 뒤를 돌아 도망쳐야지 하는 생각을 가진 채로.
마당 중간까지 갔는데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나는 그쯤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무안하실 때 하는 헛기침을 따라서 흠흠 큰기침을 했다. 부엌에선 이북아줌마가 행주치마에다 물기 묻은 손을 닦으며 나오셨고, 이북 아저씨는 뒤란 어디쯤에서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일하시는 듯 했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무슨 일인가 의아한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자그마한 머리 하나가 밖으로 쏙 나왔다. 그 집의 하나밖에 없다는 계집아이였다.
그 아이는 얼굴이 너무 뽀얗게 생겼다. 언젠가 삼순이 누나가 이야기 해준 동화 속 주인공인 백설공주의 모습 같았다. 긴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돌돌 말아 올렸고, 우리 누나들은 한번 도 입은 적이 없는 분홍 원피스 치마를 입고 있었다. 동그란 두 눈에 진 쌍꺼풀과 고무신 코보다도 더 쭉 빠진 콧날은 백설공주의 모습 그 자체였다. 한번도 본 적 없지만 백설공주의 모습은 바로 그 아이 같은 모습이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예쁜 아이가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여겼던 삼순이 누나보다 더 예뻤다. 나는 소금을 얻어 가야 하는데, 그 애를 보는 순간 내 입은 얼어붙어 버렸다. 가슴도 먹먹해졌다.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그 애만이 보였다. 우습게도 머리에 키를 둘러쓰고 손에는 바가지를 든 채 말이다.
은구슬
그저 그런 시골 마을의 아침은 암탉이 울어대는 소리가 담을 넘고, 그 소리에 놀란 멍멍이들이 왕왕 짖어대는 것으로 열렸다. 멍멍이 소리에 놀란 외양간에 메여있는 송아지는 눈을 끔뻑거리며 우우웅 울어대고 감나무 꼭대기에 올라앉은 까치 한 마리 덩달아 까악 울어대는 아침 풍경 속에서 이부자리 한 번 쓱 훔치며 절망의 울음 터트리는 풋사랑에 빠진 금동이까지 시골의 아침은 울음으로 시작되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야릇한 흥분을 불러 일으켰다. 야릇한 흥분 속에서 깨어나는 자각은 더 이상은 오줌을 싸지 않아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반드시 오줌을 누었고, 혹시나 하는 불안감으로 새벽이 오기 전에 나를 깨워 오줌을 누게 해달라고 어머니께 신신당부를 했었다.
차츰 나는 이불 위에 지도 그리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았지만 아주 가끔은 실수로 하기도 했었다. 오줌싸개 금동이는 더 이상 오줌싸개가 아니었고, 내가 좋아하는 그 누군가에게 더 멋있는 남자로 보이도록 노력하게 되었다.
사랑이란 돌봄이다. 화단에 핀 장미꽃을 돌보는 어머니의 손길 같은 것이다. 매일 들여다보며 눈을 맞춰주고, 목마르지 않도록 물을 주고, 때론 거름을 뿌려주어 쑥쑥 자랄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이 사랑이다. 어머니의 사랑이 우리 오 남매를 키우셨듯이, 내 사랑은 이제 그 아이에게로 향하고 보살펴 줘야 한다는 어떤 사명감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 까지만 하더라도 빨갱이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을 까 겁을 내던 나였는데, 삼순이 누나를 지키는 기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그랬었는데, 내 풋사랑은 낡은 키와 바가지로 시작되었다. 낡은 키 속에 푹 파묻힌 내 작은 키, 작은 손에 들려진 커다란 바가지 속에다 소금을 채우는 일로 시작되었으니.
그 집에서 소금을 어떻게 얻어 돌아왔는지 기억에 없다. 그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버린 듯 열에 들떴고, 가슴은 바람든 풍선이 하늘로 올라가듯 붕붕 떠다니게 되었다. 이북아주머니가 그 애를 부르는 소리만 앵앵앵 귓전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네 이름이 뭐니?"
"금동입니더. 소금 얻으러 왔심더."
"하하 너 밤에 이불에다 오줌 쌌구나? 구슬아, 금동이에게 소금 줄까?"
분명히 이북아주머니는 나를 놀렸다. 소금 얻으러 가서 놀림을 당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이때만큼 부끄러운 적은 없었다. 구슬이라 불리는 그 애는 나를 한번 쳐다보고선 자기 엄마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이북아주머니는 부엌에 들어가서 소금 한 바가지를 내 바가지에다 퍼담아 주셨다. 그리고 키와 함께 고개를 푹 수그리며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내 머리 위에 바가지로 쿵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아주머니 힘이 어찌나 좋은지, 보기엔 전혀 안 그렇게 보였는데 머리 위에 얹혀진 키에 닿는 그 둔탁한 느낌은 장사보다 더 기운 센 것처럼 보였다. 다음부터는 오줌 싸지 말며 소금 얻으러 오지도 말라는 소리와 함께.
"어무이요, 이북사람을 와 빨갱이라 부름니꺼?"
"그건 말이다 이북은 공산당이라 그런기다."
"공산당이 멉니꺼? 공산당인데 와 빨갱이라 캅니꺼?"
"공산당이 팔에 두르고 다니는 헝겊 쪼가리가 빨강색인기라, 그래가꼬 그래 칸다 아이가."
"그라마 헝겊 안 찬 이북사람도 빨갱이라 캅니꺼?"
"금동아 니 머가 그리 궁금하노?"
"어무이요 빨갱이는 사람 잡아 먹는다 카던데 골목 안집 사람들도 그라까예?"
"누가 그카더노? 금동아 골목안집에 사는 사람들은 절대로 나쁘지도, 무서분 사람도 아이다. 걱정 말그라. 그 사람들은 빨갱이도 아이고 간을 빼내 먹지도 않는다"
"삼순이 누나보다, 백설공주보다 더 이뿌더라."
"누가 그리 이뿌더노?"
"응 여자 애"
"니 누부야 삼순이가 들으면 삐지겠는걸?"
"디기 이뿌더라."
부엌 아궁이 앞에 앉은 어머니 옆에 매미처럼 붙어 앉아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던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어머니의 결론은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하나로 6.25 전쟁이 일어났고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인해 죽어갔으며 북에 살던 사람 중에서도 공산당이 싫은 사람들은 남쪽으로 피난 내려온 것이라 했다.
사상이 무언지, 공산당이 무언지 확실하게 알지 못했지만 어머니의 말씀을 토대로 내가 내린 결론은 골목 안집 사람들은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골목 안집에 사는 이북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왜 진작 물어보지 않았을까 후회가 되었다. 진작에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더라면 어쩌면 좀더 일찍 그 아이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새로 이사온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해서라도 그 집 앞을 두리번거렸을 터였다.
7살에도 첫눈에 반해버리는 사랑 따위가 있을까, 그게 사랑이었을까,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나는 장담할 수 없지만 좋아지게 되었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사랑을 알지 못했고 더더구나 첫사랑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단지 골목 안집에 사는 이북아이가 예뻤고, 그 아이를 생각하면 다이빙을 하기 위해 물로 뛰어내렸을 때 가슴에 와 닿는 그 느낌처럼 내 가슴이 먹먹해졌다. 동성이나 가족이 아닌 여자아이를 좋아하면 내 속에 그 여자아이가 들어와 있는 것처럼, 그 여자아이의 마음속에 내가 들어가게 되길 원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에는 짜릿하면서도 야릇한 즐거움이 있기도 하지만 알싸한 고통도 뒤따랐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었다. 주변머리 없는 나는 절대로 혼자서는 그 집에 놀러갈 용기가 없었다. 친구들과 함께 그 집으로 놀러가기 위해 그 애에 관한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해야했고, 그 예쁜 여자아이를 내 친구들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철수와 병수는 당장이라도 놀러가자며 내 팔을 끌어당겼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친구들의 뒤를 따랐다.
우리 셋은 그 집 앞까지 씩씩하게 걸어갔다. 나는 비록 세수는 했지만 검게 그은 피부가 아궁이 속 숯검정 같은 얼굴로 검정 고무신을 신고, 검은 반바지에 누렇게 바랜 런닝셔츠 같은 것을 입고 있었으며, 철수는 나보다 더 시꺼먼 얼굴에 위의 두 형이 입다 물려준 낡을 대로 낡은 옷을 입고 있었고, 진한 황토색의 슬리퍼를 질질 끌고 있었으며, 병수 역시 우리와 별반 차이 없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 되더라도, 예쁜 여자아이를 보러 가는 모습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꾸민다고 꾸며도 더 이상 나아 보일 턱없는 우리들은 꽃을 찾아든 나비 마냥 들뜨기만 했었다. 그리고 그 집 대문 앞에 몰려 선 채로 입을 모아 외쳤다.
"노올자~"
이북아주머니는 자기 딸아이를 구슬이라 불렀다. 이름 또한 생긴 것만큼이나 예뻤다. 구슬치기는 내 특기인데, 철수보다도 내가 더 잘하는데, 그래서 우리 집에는 내가 따온 구슬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데, '구슬'이를 구슬처럼 굴려볼까?
7살 어린아이들에겐 놀이가 전부다. 오늘은 어떤 놀이를 할까? 어떤 놀이를 어디서 할까? 어떤 놀이를 어디에서 누구랑 할까? 등등 7살 무렵의 아이들은 노는 것에 몽땅 정신을 파는 것이 정상이다.
물론 나는 정상이었다. 오줌싸개의 탈을 거의 벗어나고 있는 사내로 커 가는 나에게 좀더 사내다운 놀이를 개발하는 것은 그 날 그 날의 숙제였다. 나는 친구들을 데리고 구슬이네 집으로 놀이터를 바꾸기로 작정을 했고, 친구들 또한 구슬이가 얼마나 예쁜지 그것을 보기 위해 나를 따랐다.
"노올자~"
우리들의 합창에 이북아주머니는 방문을 열고 구슬이를 마당으로 데리고 나왔다. 첫 만남의 순간에는 어색하지만 통성명이 이루어져야 했다. 그리고 그 막중한 임무는 대장인 내가 해야했다. 우리 삼총사의 대장은 물론 철수였지만 구슬이에 한해서는 내가 대장이었다.
"아주무이요, 구슬이랑 놀아도 되는교?"
"오줌싸개 금동이 놀러왔니? 그렇지 않아도 우리 구슬이는 친구가 필요했어."
사근사근 표준 말하는 아주머니의 말씀은 촌놈들에겐 이북출신의 무서운 사람이라는 편견을 쫓아내기에 충분했다.
"내는 조기 동네 앞집에 사는 딸 부잣집 외아들, 이름은 윤정홉니더. 그렇지만 집에선 금동이라 부름니더. 요기 키 큰 못생긴 친구는 철수라 카고요, 멀뚱멀뚱 서있는 저 친구는 병수라 캅니더. 구슬이랑 놀라꼬 왔심더."
"안녕하심니꺼 철숩니더."
"안녕하심니꺼 병숩니더."
우리가 차례로 인사를 하자 아주머니는 구슬이를 보며 갑자기 이상한 손짓을 해댔다. 우리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기 뭐 하는 기고?'라는 눈빛을 주고받으며 쭈뼛쭈뼛 서있었다. 아주머니의 몸짓을 가만히 지켜보던 구슬이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붉어져갔다. 수줍음이 가득한 그 얼굴은 여태 친구라곤 하나 없었던 아이의 외로움이 담겨 있었고, 또한 설렘과 기쁨으로 충만한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아주머니와 구슬이와의 몸짓, 그것이 말 못하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의사소통의 수단이 되는 것인지 우리는 알지 못했었다.
그랬다. 구슬이는 귀머거리에다 벙어리였었다.
그 날부터 구슬이를 포함시켜 동네에선 우리를 개구쟁이 네 명으로 불렀다. 남자아이 셋과 말 못하는 벙어리 여자 아이 하나는 그저 그런 시골마을을 휘젓고 다녔다.
말을 못 한다는 것, 그리고 들을 수 없다는 것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기엔 7살은 너무 어렸다.
말하고 듣는 것에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던 개구쟁이 삼총사에게 구슬이라는 예쁜 얼굴을 가진 아이의 특별함은 너무나 생소하게 다가왔었다. 그 생소함은 특별하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구슬이는 예뻤기 때문이었다. 예쁜 얼굴을 가진 아이와 논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우리들은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구슬이를 위해 무엇을 할까?
어떻게 하면 구슬이를 미소짓게 할 수 있을까?
비록 말을 할 수 없더라도 구슬이의 표정을 보면 좋은지 나쁜지 알 수 있었다. 짓궂은 놀이는 늘 우리들이 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보는 구슬이, 그렇게 우리들은 빛과 그림자가 되어갔다.
구슬이는 우리들의 그림자였다. 그리고 짓궂은 철수는 가끔 그림자위에 흙탕물을 끼얹기도 하고 뱀을 올려놓기도 했으며 물에 빠트리기까지 했었다. 그럴 때마다 그림자는 기겁을 하며 뒤로 도망을 쳤고 도망치기 무섭게 철수는 또 그림자를 위협했으며 비겁한 나는 그것을 보며 히히덕 거렸다. 나는 비겁했다. 구슬이가 놀림을 당하는 것을 말리지도 못했고 더더구나 방관자로 서있다시피 했으며 더 심했던 것은 재미있다며 깔깔거리기까지 했었다.
그렇게 구슬이를 놀리고 난 다음날 아침에도 어김없이 우리들은 또다시 구슬이를 찾아갔었고, 친구라곤 전혀 없었던 외로움에 지쳐버린 한 계집아이는 매번 놀림을 당할 것이란 것을 알면서도 우리들의 뒤를 따라 다녔다.
우리들이 벙어리를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당숙의 집에 사는 '어버버'를 통해서 벙어리도 있다는 것을 알았었지만 '어버버'는 그야말로 어른이었고 당숙네의 권위 앞에서 '어버버'의 존재도 그리 무시 할 수 없었기에 우리의 관심대상에서 제외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그런 별 볼일 없을 것 같은 시골마을에도 한 집 정도는 떵떵거리는 세도를 가진 집이 있기 마련이다. 아버지의 사촌, 나에게는 오촌, 당숙어른 집이 바로 그런 집에 해당되었다. 당숙어른의 집은 우리 마을 초입에 있었다. 마을로 들어서기 전에 들녘을 통과하면서부터 당숙어른의 땅을 밟지 않고서는 마을로 들어올 수 없었고 동네에 들어오자마자 어리어리한 기와집에 시선을 빼앗기게 되었다. 바로 당숙어른의 집이었다.
마을의 토지 8할 이상을 가진 그 집에는 식구들 외에 일 부리는 식구들이 좀 되었다. 부엌일을 도맡아 하는 칠보댁과 마름 격인 칠보, 잔심부름만 하던 '어버버', 기운만 세고 머리는 텅 빈 돌쇠가 있었다. 동네의 대소사는 물론 동네 이장도 당숙의 한마디에 앉혔다 내렸다 이루어졌던 마을의 실질적인 세력가가 당숙어른이셨다. 그 당숙어른이 다섯 대의 버스로 운영하던 회사로 아침 저녁나절 출퇴근을 할 때면 백 구두를 신고, 중절모를 눌러 쓴 채 으스대며 길을 나설 참에 집안의 모든 식솔들과 함께 어버버는 예의 바른 인사를 하기 위해 대문까지 따라나와 인사를 하곤 했었다.
"나으리 댕겨 오이소"
"어~~어~~어~~"
등을 말하며 고개를 숙이는 식솔들을 향해 당숙어른은 '어험' 큰기침 한번으로 길을 나섰다. 그렇게 '어버버'는 하루 한번 내지 두 번 정도 당숙어른의 출타 시간 전후로 얼굴을 볼 수 있었으나 구슬이는 우리와 종일토록 붙어 다니며 놀 수 있었다.
놀림을 당하거나 짓궂은 장난에 예쁜 옷들이 엉망이 되어 소리 없는 울음을 우는 구슬이를 볼 때면 나는 내가 미워졌다. 쌍꺼풀진 커다란 두 눈에 이슬이 가득 맺히고 그것을 툭 떨어뜨리며 다시는 우리와 놀지 않을 것처럼 구슬이는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했고, 그 다음날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노올자" 하며 구슬이를 찾았고, 구슬이 또한 언제 눈물 흘렸냐는 듯 방긋 웃으며 우리와 함께 어울렸다.
그 해 가을이었다. 뒷산, 강, 들에서 노는 것에 시들해져 가고 있을 때쯤이었다. 가을에는 뱀들이 잔뜩 독이 올라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랐고 물렸다 하면 그 독으로 인해 죽기까지 한다는 어른들의 잔소리가 귀에 못이 박혀있었다. 그러니 들로, 산으로, 강으로 맘대로 놀러 다니기가 자연히 무서워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재미있는 놀이를 찾아다녔고 그 놀이가 비록 위험해 보이더라도 호기심을 억제하지는 못했다. 한해의 농사를 마무리하느라 들녘에는 마을사람들의 부지런한 손놀림들이 있었고, 일 손이 딸려 그때까지 집안으로 들이지 못한 상태로 타작을 마친 논들이 군데군데 작은 능선처럼 볏짚을 쌓아놓기도 하였고 더러는 그냥 던져진 채로 있었다. 구슬이의 맑고 깊은 반짝이는 눈동자처럼 우리 넷의 눈이 빛났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그 무엇처럼 의견의 일치를 가져왔다. 짚단 더미를 향해 뛰어들 듯 달려가는 네 명의 개구쟁이들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달려나가는 자신들의 머리 위에서 커다란 검은 구름하나 뱅뱅 돌고 있다는 것을 결코 눈치챌 수 없었다.
짚단을 쌓아 집을 만들고, 담을 엮고, 골목도 만들고 커다란 성도 세우며 놀고 있던 타작이 이루어지는 들녘은 희뿌연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올랐고, 매캐한 공기와 함께 까칠까칠한 가시들이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은 조금은 쌀쌀해진 날씨로 차가워진 강물 속으로 겁도 없이 뛰어들게 하고도 남았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비가 내리면 비가 내리는 대로, 햇볕이 짱짱한 날이면 볕 좋은 그런 날 대로, 어른들은 농사일로 집안 일로 하루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바람을 맞고 비를 맞고 햇볕을 맞으며 쑥쑥 자라고 있었다.
그것이 사랑이란 감정인지 조차 알 수 없었지만 7살의 사랑은 그저 같이 놀 수 있다는 그것이 전부였고 같이 놀면서 때론 울고, 때론 웃으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이었다. 금동이의 7살 사랑은 말이 통하지 않은 채, 눈빛과 몸짓으로 주고받는 대화, 그랬기에 가끔은 의사전달에 있어서 소통불가, 그것은 엄청난 재난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단 한마디만 이해하면 되는 "네가 좋아" 그 말을 7살의 금동이는 들을 수 없었지만 그것이 그리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구슬이의 웃는 모습은 구슬이네 집 담벼락에 서 있는 해바라기 꽃보다도 더 환했고, 나를 보며 찡긋 눈웃음 칠 때면 나는 철수가 더 이상은 구슬이를 놀리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들었다. 저렇게 예쁜 구슬이를 놀리면 안 되는 것이었다. 저렇게나 예쁘지만 말을 못하는 구슬이를 놀리는 것은 나쁜 짓이며 비겁한 짓이었다. 저렇게 예쁜 구슬이를 놀림감이 되도록 내버려두면 사내다운 사내가 아닌 것이었다. 나는 사내다운 사내로 커나가는 기사가 되고자 하는 아이였으니까 나의 비겁했던 행동들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마음 착한 구슬이는 행동에서 나를 용서해줬다. 그리고 나에게 비 온 뒤 뿌리는 햇살보다 더 환한 미소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예쁘다는 것! 아름답다는 것! 예쁘고 아름다운 것은 세상의 관심을 받고 끈다. 적어도 남자아이들에게 있어선 확실한 관심을 받기 마련이다. 예쁜 여자아이는 못생긴 여자아이에게서 경계대상이 되기도 하고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또한 예쁜 여자아이는 다른 예쁜 여자아이에게서 따돌림을 당한다. 대체적으로 그랬다. 즉, 삼순이 누나가 구슬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은 것이 그랬다. 삼순이 누나는 매일 저녁 무렵 우물가에서 나를 발가벗기다 시피하며 씻겼다.
"끔동아 니 오늘도 구슬이랑 놀았나?"
"응. 누야. 와?"
"구슬이캉 와 자꾸 노노?"
"와 놀긴? 내 친구아이가"
"구슬이 말도 못하는 빙신인데 말 안하고 놀아도 재밌나?"
"그라모. 재밌지. 누부야 구슬이는 말이다 웃어도 이뿌고 울어도 이뿌고 화난 표정을 내도 이뿌고 다 이뿌다."
내가 이 정도 말을 하면 삼순이 누나의 손길은 거칠어 졌다. 엉덩이와 등 짝에 찰싹 찰싹 소리가 들릴 정도로 없는 때가 있다며 수세미 같은 걸로 벅벅 문질러 대곤 했었다. 여자들의 질투가 무서운 것이라는 것은 내 등에 와 닿는 삼순이 누나의 손길에서부터 알아챌 수 있었다. 너무 일찍 알아버린 여자들의 속마음, 그것에 대처하는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한 나는 완력 앞에 숨죽이는 새끼 늑대였다.
누구나 속마음은 나와 똑 같을 것이다. 예쁜 여자와 못 생긴 여자 둘 중에서 누구를 더 좋아할 수 있겠냐고 물으면 엉큼한 사람 같으면 상황을 봐가며 무슨 대답을 하면 그 상황에 적절할 까 그것부터 계산하고 자신에게 이로울지 해가 될지를 따져서 거기에 맞는 대답을 할 것이지만 나는 너무나 착했고 착한 만큼 순수했고 순수한 만큼 정직했기에 내가 느끼는 바를 여과장치 없이 그대로 쏟아내었다.
예쁜 여자를 하루종일 쳐다보며 같이 놀 수 있다는 것은 명절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용돈 받으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었다. 예쁜 여자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은 내 눈이 행복해지고, 예쁜 여자와 논다는 것은 내 마음이 즐거워지고, 그 예쁜 여자의 소중한 남자가 된다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의 이유가 되는 것 마냥 들뜨게 만들고도 남았다.
그러나 너무 행복해하면 꼭 무슨 나쁜 일이 생겼고 그 나쁜 일로 해서 더 이상의 행복은 없을 것처럼 불행해졌다. 세상일이란 늘 마음처럼 되도록 내버려두면 왠지 억울해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하느님의 짓인지, 부처님의 짓인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너무 행복해하면 그것이 샘이 나서 꼭 재를 뿌려야만 속이 시원하다는 놀부 심보를 가진 것처럼 느껴졌다.
불행은 행복의 반대말이다.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 써가며 놀던 어느 날 이었다. 그 날도 어김없이 늦여름 한낮의 더위는 숨막힐 듯 했고,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강가로 향한 우리들은 앞을 다투어 풍덩풍덩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철수는 덩치만큼 달리기도 빨랐고, 그래서 제일 먼저 강물로 뛰어들어 머리까지 물 속에 넣었다. 뒤뚱뒤뚱 병수가 그 뒤를 이었고 나는 구슬이와 보조를 맞추느라 조금 뒤쳐졌다.
구슬이가 나도 얼른 물 속으로 들어가라는 듯 손짓을 했다. 눈치를 보니 쉬가 마려운 듯 했다. 눈치가 있는 사내라면 여자가 볼일 보는 중 일 때는 멀찌감치 등돌리고 서서 딴 곳을 보며 여자가 볼일을 마치고 올 때까지 지켜서 있어야 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여겼으며, 구슬이를 등지고 서서 강물 속에서 푸드덕거리며 놀고 있는 친구들을 보고 있었다. 물장난에 신이 난 친구들은 물 만난 고기떼들 같았다.
구슬이는 풀숲으로 걸어 들어간 것 같았고, 그리고 조용했다. 나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오줌을 누더라도 열 번은 더 누고도 남을 시간을 나는 동네입구에 서 있는 장승처럼 서 있었다.
왜이리 더디 걸리지?
여자들은 원래 이렇게 오래 걸릴까?
오줌 누는 기 아이고 똥 누는 기가?
예쁜 여자아이는 똥을 누더라도 냄새가 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애써 뒤를 돌아다보고픈 것을 참으면서 구슬이가 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다 무슨 일이 생겼을까 걱정이 슬며시 되기 시작할 때쯤 나는 대답을 못 들을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큰 소리로 외쳤다.
"구슬아~ 니 다 했나?"
그러나 역시 대답은 없었고 그리고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또 한참을 기다렸다. 여자들이 볼일 보는 중에는 예의 바른 사내라면 돌아보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난 예의 바른 사내였고, 그리고 기다릴 줄 도 아는 7살의 사내아이였다.
완벽한 이별
그 잔인했던 7살의 가을과 겨울 사이를 말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죽어도 하기 싫은 것을 해야만 할 때 느끼는 어떤 억울함 같은 것으로 나는 이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왠지 서글픈 느낌으로 우울하다. 그러나 나는 이 잔인했던 시간들이 찬란함과 잔인함을 동시에 가졌었고 그것이 내 삶의 기억 속에 소중한 일부로 남아 있기에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똥 눈기가? 그래서 닦을 종이가 엄나?'
철수와 병수는 옷을 입은 채로 풍덩풍덩 여전히 물장난에 정신 팔려 있는 것 같았고, 뒤돌아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며 나는 내 뒤가 끈적이는 것 마냥 찝찝하게 삼십여분 이상 멀뚱멀뚱 서있었다.
물장난에 정신 없던 철수가 벌떡 일어나 "구슬이가 와 저카고 있노?" 말하며 내 뒤를 가리켰다. 그때서야 나는 뒤를 돌아봤다.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가을하늘에 솜사탕보다 더 하얀 구름들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구름을 넋을 놓고 쳐다보듯 구슬이는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나는 구슬이를 향해 달려갔다. 멀리서 보기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갑자기 저렇게 누워 있다는 것이 어린 마음에도 뭔가 섬뜩한 두려움이 들었었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에 꽂혀있는 노란 해바라기 리본은 살짝 구슬이의 어깨 위에 걸쳐져 있었고, 리본 색깔과 똑 같은 무늬의 원피스는 짚단 더미에서 놀았던 흔적을 두어 가닥 묻힌 채로 구슬이의 정강이를 살짝 덮고 있었으며 빨간 구두 속에 뽀얀 레이스 달린 양말이 수줍은 듯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오른쪽 양말위로 퍼렇게 멍들어 부풀어오르는 것만 빼고는 구슬이는 그저 심심해서 잠자기 놀이, 시체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구슬아 일나라~! 니 뭐하노? 얼릉 일나가 물에 가자"
흔들어 깨우는 내 손길에 닿은 구슬이는 뻣뻣한 나무 같았다. 구슬이 옆으로 검정과 흰색 바탕에 검정의 둥근 무늬가 등에 그려져 있는 뱀이 스르르 기면서 달아나는 것을 그때 나는 보았다. 꽁무니를 쳐다 본 순간 나는 심장이 멎어버릴 것 같았다. 저것이 바로 말로만 들어왔던 살모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들었던 살모사 이야기가 사실은 아니지만, 살모사는 태어나면서 어미를 잡아먹는다고 하는, 저 뱀에 한번 물리면 바로 죽는다는, 그 무시무시한 살모사가 소나기 속에 천둥번개처럼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좌르르 흘러내렸다. 저 살모사가 금방이라도 방향을 바꿔 나까지 덮칠 것처럼 보였고, 그리고 어서 빨리 구슬이를 데리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있는 힘을 다해서 구슬이를 끄집어 당겼다. 그런데 내 발은 땅에 붙박이 한 것처럼, 아니면 자석이 달라붙은 것처럼 발을 떼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철수야 철수야 얼릉 일루 온나!"
고함을 지르며 구슬이를 끌다시피 하며 당겨냈다. 나 혼자 낑낑거리며 구슬이를 끌어내고 있었고, 물기를 뚝뚝 흘리며 철수와 병수가 무슨 일인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내 곁으로 다가왔다.
"뱀에 물맀다. 우째야 되노?"
"일루 나와바라"
"뱀에 물맀을 때는 말이다, 물린 자국에 입을 대고 독을 빨아내야 한다 카더라. 우리형이 그랬다 아이가. 금동이 니가 해봐라. 빨리 독을 없애야 산다 카더라. "
"병수야 니는 뾰족한 돌멩이 하나 줏어온나. 퍼뜩"
"돌멩이로 물린 데를 긁어서 상처난데 좀 크게 해가꼬 피를 빨아내면 된다카더라."
"구슬이는 벌써 죽은 거 아이가? 죽은기 아이면 와 저래 죽은 거 맹키로 가마이 있노"
고만고만한 7살 어린 녀석들 셋의 머릿속에서 나온 응급처치가 한 여름 내내 잔뜩 독을 품어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독사에게 물린 구슬이를 살리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한 여름밤 모깃불을 피우고 잠을 잤는데 그것이 꺼져 버리고, 모기들이 잔치를 벌여 벌겋게 부풀어오른 것처럼 구슬이의 한 쪽 다리는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입을 가까이 대고 독을 빨아내기 위해 부풀어오른 자국을 찾으니 어디가 물렸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나보다 더 용감하고 뱀에 관한 아는 것이 더 많은 철수가 봐도 마찬가지였다.
"야야, 안되겠다. 빨리 집으로 가자."
겨우 생각해낸 방법이 구슬이를 빨리 어른들께 보여야 한다는 거였다. 나는 구슬이를 업고 달렸다. 철수와 병수는 그 뒤를 따르고 구슬이네 집으로 향했다. 구슬이네 집으로 달려가는 그 길이 내가 살아오면서 걸어 다녔던 길 중에서 제일 길었고 숨이 가빴던 길이었다. 업힌 구슬이의 몸은 점점 굳어져갔다.
'구슬아, 구슬아 죽지 말거래이. 죽으면 안된데이. 죽지 말거래이….'
마법사가 주문을 외우듯이 구슬이를 업고 달리는 나는 주문을 외웠다.
우리의 소망을 구슬이는 들어주지 않았다. 구슬이는 매정스럽지 않은데, 그렇게 매몰차게 외면하다니. 내 얼굴에는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방울이 흘려 내렸고, 우리가 구슬이를 집에까지 데리고 가서 구슬이의 엄마에게 구슬이를 내렸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 이후였다. 하얗게 질린 구슬이의 엄마조차 아무런 손을 쓸 수 없게 되어버렸다. 구슬이는 그렇게 이 세상과의 이별을 하면서 아무런 말도, 누구에게도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혼자서 떠났다. 이 세상에 혼자 온 것처럼, 갈 때도 혼자였다. 죽음이란 태어남과 마찬가지로 예고가 없었다. 선택할 수 있는 권리조차 부여되지 않았다.
나는 구슬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조금 전까지 나랑 같이 놀았었는데, 그리고 물에 들어가 수영하며 놀 작정이었는데, 오줌누면서 생각해낸 시체놀이를 하는 거라 여기고 싶었다. 그래서 구슬이가 재미없어지면 일어날 거라 여기며 구슬이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구슬이가 왜 이런지 물어보는 아주머니에게 이차저차, 이래저래 해서 지금은 아마도 시체놀이 중일 거라고 말했다. 연락을 받고 돌아온 아저씨에게도 나는 똑 같은 말을 했다.
"지금 구슬이는 시체놀이 하는 기라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어머니는 죄인처럼 아주머니를 붙잡고 우셨다. 나는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구슬이는 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분명 시체놀이가 재미없어지면 일어날 거라 여기며 삼순이 누나가 집으로 가자며 팔을 끌어도 다음날 아침까지도 나는 구슬이의 집을 벗어나지 않았고, 구슬이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우겨서 될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다. 떼를 써서 될 일이 있고, 아무리 떼를 써도 안 되는 일이 있다. 그렇지만, 이제까지 나는 우기고 떼를 써서 한번도 이룰 것을 못 이룬 적이 없었기에 무작정 우기고 싶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은(아이는) 묘를 서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구슬이는 화장을 하게 되었다. 화장까지는 지켜볼 수 없었다. 그러나 구슬이의 뼛가루는 우리가 놀았던 강에다 뿌려졌고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구슬이를 가슴에 묻으셨다. 강둑 위에 올라선 우리들의 눈 속으로 하얀 가루가 된 구슬이가 흩날리며 돌아왔다. 우리들은 구슬이를 두 눈 속에다 담았다. 아저씨가 구슬이를 강물 속으로 흘려보낸 이후 한 일은 우리가 놀았던 근처를 불로 태우는 일이었다. 손에는 자루를 달아 길게 만든 낫과 자루 하나를 들고 신발은 긴 장화를 신은 채 몇날 며칠을 돌고 또 돌아가며 근처를 뒤져 뱀을 잡고 그리고 태워 죽였다. 구슬이는 이미 죽었지만 억울하게 죽어갈 지도 모를 또 다른 하나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었다. 그 일이 끝난 후 구슬이네는 이사를 갔다. 떠나시며 아저씨는 내게 말씀하셨다.
"금동아 구슬이가 그렇게 된 것은 네 잘못이 아니란다. 이젠 구슬이를 잊고 씩씩하게 자라거라."
바보란 때를 놓치는 실수를 자주 하는 사람이다. 당연히 알아야 될 것을 결코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바보였다. 똑똑하다 여기며 으스대었던 내 행동들이 바보 같은 행동이었으며 정작 바보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아끼고 보살펴주어야 하는 여자 애를 지켜주지 못한 것이 그 이유였다. 예의 지키다 죽게 내버려 둔 사실, 이건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꼭 이와 같았다. 너무나 상대방을 염려해서 정작 그 상대방이 나를 꼭 필요로 할 시기를 놓치는 것, 그래서 살아가며 두고두고 맘속에 커다란 짐 하나 얹고 사는 것, 그 짐의 무게에 가끔은 질식할 것 같은 것, 세상이 하는 일에 대해 인간이, 그것도 아주 작은 7살 어린아이가 대처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게 되어야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너무 예쁜 구슬이를 말 못하는 벙어리로 만들어놓고서도, 그것도 모자라 제대로 세상을 알지도 못했는데 데려간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건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일인 것처럼 받아들여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구슬이를 죽게 내버려 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권투시합으로 얻어맞아 눈두덩이 퍼렇게 멍든 얼굴처럼, 그것보다 더 큰 멍하나 가슴속에 지니고 살아가는 데….
새로운 시작.
'구슬아 미안하다. 널 죽게 내버려둬서 미안하다. 그리고 보고 싶다.'
한동안 나는 구슬이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며 죄책감을 느꼈다. 사과밭에서 사과가 발갛게 익어 가는 것처럼, 가을이 깊어가듯 아픔도 깊숙하게 어린 내 가슴속으로 깊어져갔다.
어머니는 종일 들에서 사셨다. 벼도 탈곡을 마쳐 광으로 볏섬을 들여놓아야 했고, 사과밭의 사과도 따서 일부는 도매상회에 넘기고 일부는 마을의 창고에 넣어두셔야 했다. 이순누나와 삼순누나는 학교에서 돌아오기 바쁘게 어머니를 거들러 다녀야 했고, 말순누나와 나는 아예 근처에도 못 오게 했다. 거든 다는 것이 오히려 두 번 손이 가야 했으니 차라리 안 보이는 곳에서 잘 노는 것이 어머니를 돕는 거였다.
어머니 혼자서만 발을 동동 구르며 일을 하신 이유가 거의 아버지는 술기운으로 지내셨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아버지께서 술을 드시는 것인지, 술이 아버지를 담는 것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까지 되었다. 낮에 일을 하면서도 술을 마시지 않으시면 일을 못하셨다. 그나마 술을 드시고서 조금 거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어머니는 고마웠을지도 모르셨다.
가을걷이도 끝나고 할 일 없는 노인들은 사랑방에 틀어박혀 담뱃대를 빨고 또 빨아대어 온 방에 담배 냄새가 절여졌고, 수다쟁이 동네 아줌마들은 어느 집 안방에 모여 앉아 수다를 풀어냈고, 조무래기들은 추운 줄도 모르고 놀 거리를 찾아 동네를 헤매 다닐 때쯤, 심심한 강아지가 제철을 만나 날뛰어대던 한밤, 하얀 소복보다 더 새하얀 눈이 내렸던 어느 날이었다.
그 전날 밤,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으셨다. 아마도 동네회관에서 아저씨들의 화투판을 뒷전에서 구경하며 막걸리를 마시다 잠이 들었거니 그렇게 어머니는 여기셨다. 밤새 내린 눈이 온 마당을 하얗게 덮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못 느낀 우리들이 늦게 눈을 떴을 때, 마당에 쌓인 눈 소식보다 더 먼저 우리 집 대문을 열고 들어온 하얀 눈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검은 소식하나 있었다.
"금동이 어무이요~ 큰일 났다 아인교!"
큰 소리로 대문을 밀치며 들어온 이웃 아저씨의 말소리는 차분히 가라앉은 쌓인 눈들이 벌떡 일어날 정도로 엄청 커다랗고 두려운 무시무시한 천둥소리였다.
화투판은 늘 그렇듯이 자욱한 담배연기가 방안을 마치 안개처럼 보이게 만들었고, 술판을 벌이는 사람들의 내뱉는 술 냄새는 음식물쓰레기를 담아두는 뚜껑을 열었을 때 나는 냄새보다 더 지독했으며, 그리고 화투판에 매달린 사람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에 귀도 멍멍해지고 눈도 침침해지고 호흡마저 곤란해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화투는 손에 잡지 않으셨을 테지만 그러나 술과 담배에 절여진 오랜 시간동안 숨이 가빠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있으셨던지 아버지는 비틀비틀 회관을 나섰고, 집과는 전혀 반대방향으로 발길을 돌린 것은 귀신에 홀려서 그러셨을 것이라 여겨졌다.
올 봄 우리 가족 모두는 밭으로 가는 중간, 강을 건너다니기 위해 놓여진 그 다리 위를 새끼줄 엮이듯이 줄지어 건너다녔었는데, 그때는 우리 가족 7명 모두 함께였었는데…. 다리 난간 아래 강물이 얼어붙은 얼음바닥을 요를 삼고,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이불 삼아 아버지는 주무시듯 돌아가셨다.
눈이 엄청 내리던 그 밤에 왜 아버지는 밭으로 가려고 했던 것일까?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조금 편안해 지려 하면 또 다른 고통, 아픔을 주는 삶이란 녀석은 심술꾸러기임에 틀림없다. 나에게 있어서 삶이란 7살 사내아이의 두 어깨 위에 얹혀진 장남이라는 짐이 얼마만한 무게인지 알아 가는 것이었다.
아버지 살아 계신 동안 나에게 보여주었던 것은 막걸리 잔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뿐이었지만, 재산이라고는 코딱지 만한 땅뙈기 몇 평이었지만, 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결코 미워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신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아버지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것일 테지만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내 어깨 위의 짐을 사랑하게 되었다. 앉아 오줌누는 여자들만의 세상에 우뚝 선 고추하나, 서서 오줌누는 장남인 나, 이 얼마나 콧대 세울 수 있는 타이틀이란 말인가! 나에게는 이제부터 집안의 단 하나의 남자로써, 어머니를 지키고 누나들을 지키고 집안을 이끌어나가고 세워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단 7살의 나이에 말이다.
나에게는 아주 무서운 외삼촌 한 분 계셨다. 일제시대 일본 순사를 지내셨던 분으로, 외삼촌댁 안방의 벽에는 활처럼 등이 휜 검 하나 걸려있었다. 그 검은 외삼촌의 인상을 더욱 더 무섭게 보이는 역할을 했으며 나는 외삼촌처럼 무섭게 보이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랬던 외삼촌이 사시는 동네로 우리들은 터전을 옮기게 되었다. 시골 살림을 정리하고 어머니가 포목점을 열어 생계를 꾸려나가게 되었다. 그 일은 외삼촌이 주선해서 하신 일이었고 아버지가 안 계신 시골에 더 이상 살아갈 명분이 없었다. 나에게는 어리석은 시골촌놈에서 도시의 약아빠진 녀석으로의 비상할 수 있는 활주로가 열려진 셈이었다. 포목점이 잘 될 것인지 아닌 것인지 그것은 부닥쳐봐야 아는 일이었다. 무엇이든지 처음부터 다 알 수 없는 법이니까.
비록 7살 어린아이에 불과하지만, 나는 살아있고 그리고 밥을 먹을 것이고 밥을 먹듯이 나이를 먹을 것이고 그리고 어른이 될 것이므로. 어른이 된다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지금보다는 훨씬 지혜로워질 것이 분명해 보였으므로 나는 이사에 대해 약간의 흥분을 느꼈다. 금방이라도 어른이 될 것처럼 느껴졌다.
새로 시작하는 사람은 뒤를 돌아보아선 안 된다. 뒤를 돌아보며 어설픈 감상에 빠져서도 안 된다. 잠시 모든 기억들을 마음 속 창고에 가두어 두어야 한다. 앞을 내딛는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가볍고, 꿋꿋하게 내딛기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 슬픔에 빠져 약한 여자들을 겁에 질리게 놔둬서는 안 되는 것이다.
트럭의 짐칸, 이삿짐들 사이에 누나들과 섞여 앉은 나는 자꾸만 뿌옇게 변하며 멀어지는 우리동네의 모습을 손등으로 눈을 쓱 닦아가며 뚫어지도록 쳐다보며 팔을 우뚝 들어올렸다. 딱 한번, 이번만 제외하고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을 거야. 시골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나는 입을 앙 다물고 속으로 다짐했다. 여자 다섯을 지켜내야 하는 어린 기사는 도시를 향한 어린 날의 깃발 하나를 심장에도, 하늘에도 꽂았다.
2004.9월 토론 참고자료
첫댓글 신영애님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세 번이나. 어린 금동이의 어깨가 무지 무거움을 느낍니다. 아구 제 어깨가 아픈듯 해요
잘 읽었습니다. 장래가 기대됩니다. 느낌을 이 곳에다 말하려다 개인 메일로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