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바라타
* 총 18편의 ‘마하바라타’는 바라타 족의 대전쟁에 관한 서사시로, 예부터 전해오던 신화적인 이야기
를 굽타 왕조 때 산스크리트어로 정리한 문학작품입니다.
* 대강의 줄거리
①바라타 족의 왕이 죽자 : 형은 장님이어서 관례에 따라 이복 동생인 판두가 왕위를 물려받았습니
다.
②그런데 판두는 사슴(성자 부부가 변신한 것)을 활로 쏘게 되어 저주를 받게 되어, 형에게 임시로
왕위를 주고 히말라야로 들어가 수행을 합니다.
③왕이 된 형은 아들이 1~100명의 100명이었고, 동생 판두는 주문의 힘으로 저주를 이겨내고 가~마
까지 5명의 아들을 얻습니다.
④판두가 죽은 후 판두의 큰 아들 ‘가’가 다음 왕이 되어야 하는데, 형의 아들들은 이 일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⑤형의 아들들은 첫 번째 아들1의 계획하에 동생 판두의 5 형제를 해치려고 했는데, 죽음을 모면한 5
형제는 그 나라를 떠났습니다
⑥형인 왕이 죽으면서 자기 조카들을 불러 왕국을 분할하여 왕의 아들들과 잘 다스리라고 합니다.
⑦왕이었던 형의 첫 번째 아들은 탐욕스러웠는데, 사촌 동생인 ‘가’를 꾀어 주사위 내기를 하여 속임
수로 이기고는 사촌 동생의 아내를 빼앗고, 다른 내기를 하여 4촌 동생들인 5형제를 12년간 추방했
습니다.
⑧13년째 되던 한 해동안 자신을 숨기는 약속을 다 지키고나서 사촌 형인 1에게 가서 자신들의 왕국
을 돌려달라고 하자 그는 그것을 거절합니다.
⑨그래서 18일 동안 전쟁이 일어났고 여기서 승리하여 5형제의 ‘가’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수
많은 목숨을 빼앗은 것에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⑩왕국을 잘 다스리던 ‘가’는 ‘다(?)’의 손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5형제와 아내가 함께 히말라야
산맥으로 들어갔습니다.
참고 : 마하바라타의 6편에 나오는 아르주나와 크리슈나의 대화 : 바가바드기타
①18일 동안의 싸움에서 승리를 눈 앞에 둔 오형제 중의 ‘다’(셋째 아들?)인 아르주나는
②자신들과 같이 뛰어놀던 사촌들의 죽음을 보며 전의를 상실합니다. 이때 아르주나의 마차를 몰던
‘크리슈나’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③그런데 크리슈나는 ‘비슈누’신의 화신이라고 합니다. 아르주나에게 들려준 크리슈나의 이야기가
바로 ‘바가바드기타'라고 한다고 합니다.
(이상은 EBS 필독 중학 세계사와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용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래는 중학교 교재 : EBS 필독 중학 세계사, P.70에서 인용했습니다.
“오, 크리슈나여, 저들이 진정 우리가 물리쳐야 할 적들입니까? 나에게 그들은 사랑스런 친구, 친척, 존경하는 스승으로 보일 뿐입니다. 왕권을 얻으려고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
아르주나의 탄식을 들은 크리슈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개개인의 현재의 삶은 바로 그들이 과거에 저질렀던 행위의 결과이다. 현재의 삶은 과거의 업(카르마)을 해소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환경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해야만 전생의 업(카르마)을 해소할 수 있다. 크샤트리아의 의무는 전쟁에서 힘을 다해 싸우는 것이다. 의무를 다했다면 신은 반드시 그를 구원할 것이다.”)
(아래는 인터넷에서 검색한 글입니다. http://historia.tistory.com/1564
"이 위급한 때 어디서 그대에게 이런 나약함이 온단 말인가 ?......
슬퍼해서는 안될 자들을 슬퍼하면서도 그대는 지혜로운 말들을 하고 있도다. 산자를 위해서도 죽은 자를 위해서도 지혜로운 사람은 슬퍼하지 않는다......
감각 대상들과의 접촉은 차가움과 뜨거움, 즐거움과 괴로움을 일으킨다. 이들은 왔다가 사라지고 마는 무상한 것들이니 그것들을 참고 견디어라......
알지어다, 온 세상에 존재하는 그것은 파멸되지 않음을. 그 누구도 불멸의 그것을 파멸시킬 수 없도다. ......그(자아)를 살해한다고 생각하거나 살해된다고 생각하는 자는 둘 다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는 살해하지도 살해되지도 않는다.. 자아는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으며 생긴 일도 없은 즉 앞으로 생기는 일도 없을 것이다. 불생, 영구, 항상 존재하는 이 태고적 존재는 비록 육체가 살해된다고 해도 죽지 않는다......
그러니 그대가 할 일은 오직 행위 자체일 뿐 결코 그 결과가 아니다.
행위의 결과를 행위의 동기로 삼지 말며 행위하지 않음에도 집착하지 말라.......
성공과 실패를 평등히 여기며 집착을 버리고 행동하라......
결과를 동기로 삼는 자들은 가련하다......집착으로부터 욕망이 생기고, 욕망으로부터 분노가 생긴다. 분노로부터 미혹함이 일어나고 기억의 착란이 일어나며, 그것으로 인해 지성의 파멸이 온다....
그러나 애욕과 증오를 벗어나 있으면 자신의 통제 하에 감각 기관을 제어하고 청정함에 이르나니......
모든 욕망을 던지고 아무런 갈망 없이 행하는 사람, 내 것과 나라는 생각이 없는 자는 평안에 이르나니.......
죽음의 순간에서도 그런 경지에 확고히 서면 그는 브라흐만 열반에 가노라......
외계와의 접촉을 멀리하고 두 눈썹 사이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코를 통해 드나드는 들숨과 날숨을 평정히 하고 감각 기관과 마음과 지성을 제어하고 해탈을 최고 목표로 삼아, 항상 욕망과 공포와 분노가 사라진 성자야말로 해탈한 자다."
이렇게 아르주나를 가르치던 크리슈나는 나중에는 바로 자신이 창조, 보호, 파괴를 다 주관하는 삼신일체의 주인 비쉬누 신의 화신이란 것을 밝힌다.
"나는 세계를 파멸하는 다 된 시간으로서 여기에 세계들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했다. 그대가 아니더라도 적군들 가운데 정렬되어 있는 전사들은 누구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즉 일어나 영예를 얻어라. 적들을 정복하고 번성하는 왕권을 누려라. 이들은 오래 전에 이미 바로 나에 의해 죽임을 당했은 즉 그대는 단지 수단이 될 지어다.....
죽여라. 주저 말고 싸워라......"
고요2의 생각 : 바가바드기타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까?에 대하여
①인터넷에서 말로만 들었던 바가바드기타에 대해 극히 일부분을 접했습니다.
②그런데 이렇게 인터넷에 있는 내용은 번역과정에서 원전과는 많이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③위의 자료에서 제가 바가바드기타에 대해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바가바드기타에는 초기불교의 내용이 몇 개 들어있는 것 같구나
- 이것은 힌두교의 가르침이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비슷한 점도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겠구나.
- 그러나 이것이 힌두교의 독자적인 가르침과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비슷하다는 것을 결코 뜻하지는
않을 것이리라
- 왜냐하면 힌두교는 브라만교 + 불교 + 민간신앙이 합쳐진 종교이기 때문에, 힌두교 안에는 여러
가르침이 들어있는 것이고,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도 찾을 수 있을테니까.
- 마치 누군가가 유교 + 불교 + 크리스트교를 합쳐서 새로운 종교인 '통합교'를 를 만들어낸다면
거기에는 당연히 불교의 가르침도 들어있는 것처럼.
-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통합교'의 기르침과 불교의 가르침이 같다라고 하면 안 된다.
- 이렇게 힌두교의 가르침 속에는 불교의 가르침이 들어있을 것이다.
- 즉, 힌두교가 불교의 고유한 가르침을 일부 수용했기 때문에
힌두교에서 불교의 고유한 가르침이 발견되는 것일 뿐이다.
④이제는 위의 자료들에서 어떻게 초기불교와 다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여섯 감각기관[여섯 감각장소, 육내입처]등의 용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초기불교의 가르침에 나
옵니다.
마치 왕의 코끼리가 전쟁터에서 깃발이나 북소리에 놀라지 않듯이, 수행자도 색, 성, 향, 미, 촉, 법
에 휘둘리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살생은 악업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병사가 색, 성, 향, 미, 촉, 법에 휘둘리지 않고 전투를
잘 하는 것은 병사의 덕목이지, 선업 자체는 아닙니다.
ⓑ“불생, 영구, 항상 존재하는 이 태고적 존재는 비록 육체가 살해된다고 해도 죽지 않는다......"
라는 등의 말은 초기불교에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해탈, 열반을 묘사하는 부분은 초기불교와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초기불교는 당연히 결과 때문에 행위를 조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결과를 위해 행위하
지 않는다고 하니, 또는 행위 자체를 한다고 하니, 이것은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해탈 열반에 이르게 하는 길에서 차이가 날 것 같습니다.
ⓓ업에 대해 초기불교와 이해가 다릅니다.
전생의 업은 현재의 나에게 하나의 조건에 해당합니다,.
전생의 업이 현재의 나의 행위를 결정짓는다고 하면 그것은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초기불교에서는 현재 내 행위의 원인을 찟따(마음, 心)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탐, 진, 치에 물든 마음인가, 무탐, 무진, 무치의 마음인가가 현재 내 행위의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⑤그래서 저는 이렇게 알고 이렇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바가바드기타는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일부 수용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가바드기타는 초기불교와는 다른 가르침이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