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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5일, 해공 신익희 선생 70주기였다. 지난 몇년간 그를 기억하는 글을 써왔는데 그의 일대기를 정리하는 것도 대교인으로 의미있을것 같아 준비했는데 시간이 다소 소요되어 70주기에 맞춰 기록하지 못했다.
상당히 긴 글이 되었다.
1947년 5월에 작성된 한국독립당 당원 명부에는 477명의 이름이 번호 순서대로 적혀 있다.
1번 김구, 2번 조소앙, 3번 이승만, 4번 조완구, 5번 조경한. 그리고 6번 자리에 신익희가 있다.
지금 신익희를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1956년 대통령 선거 유세 도중 기차 안에서 급서한 인물, 그래서 이름보다 죽음의 방식이 더 많이 언급되는 사람. 그런데 그가 이 명부의 6번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정치적 무게를 다르게 읽게 만든다.
김구·조소앙·조완구·조경한 - 이들이 모두 대종교 인사라는 점과 함께 놓고 보면 더욱 그렇다.
신익희는 대종교 신자였다.
이 사실 하나로 그의 생애를 다시 읽어야 한다.
1930년대에 왜 이념을 넘나들었는지, 왜 좌파 단체에도 이름을 올렸으면서 공산주의자로 분류될 수 없는지, 왜 끝내 임시정부로 돌아왔는지. 그 모든 궤적에 단군민족주의라는 나침반이 작동하고 있었다.
신익희는 1894년 7월 11일(음력 6월 9일)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 사마루에서 태어났다. 가문은 경기도 광주에 대대로 세거하던 명문이었고, 어린 그는 인근에 신동으로 소문이 날 만큼 학문에 뛰어났다.
그가 민족 문제를 처음 의식하게 된 건 열 살 무렵이었다. 을사늑약 소식이 고향 서하리에 들어왔다. 그의 자전적 기록에 따르면, 석유등불 밑에 앉은 갓 쓴 어른들이 나라가 망한다고 길게 탄식했다. 민영환이 자결했다는 소식, 한규설이 조약 체결을 반대하다 물러났다는 이야기,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들어섰다는 이야기. 어린 신익희는 그 탄식의 공기 속에서 자랐다.
1910년 한성관립 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졸업할 때 그는 이미 또렷한 시대의식을 품고 있었다.
당시 학교 주변에는 두 갈래의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주시경을 중심으로 한 흐름이었다. 온 세상이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화해도 우리만은 조선말을 갈고 국혼을 고취해 훗날 국권을 되찾자는 것, 주시경 스스로 '극세주의'라 불렀던 노선.
다른 하나는 현실론이었다. 원수를 몰아내고 나라를 찾으려면 감상에만 흘러서는 안 되고 발전한 일본에서 직접 공부해 실력을 쌓아야 한다는 주장. 신익희는 후자를 택했다.
그러나 일본 유학을 택하면서도 주시경에 대한 존경은 내내 깊었다. 그가 남긴 연설문에는 주시경을 향한 헌사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태평양전쟁 중 일제가 창씨개명으로 민족을 말살하려 할 때 한글학자들이 줄줄이 옥에 갇히고 일부가 옥사했다는 사실을 그는 '한글발달사에 불멸의 순국사'라 불렀다. 일본 유학을 택한 현실론자였지만, 언어와 민족 정신의 연결을 끝내 놓지 않았다.
1912년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한 신익희는 유학 기간의 대부분을 민족 문제에 쏟아부었다. 함경도 중심의 철북구락부, 평안도 중심의 구서친목회, 전라도 중심의 호남다화회, 경기도 중심의 삼호구락부를 통합해 1914년 재일조선인유학생학우회를 결성하고 총무·평의회장·회장을 차례로 맡았다.
학우회는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을 발행해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훗날 독립운동의 동지가 된 송진우·문일평·안재홍 등이 이 시절 함께한 인물들이다.
방학 때마다 귀국해서도 가만있지 않았다. 1913년 여름방학에는 광주에서 향리 유지들과 함께 초등교육기관 광동의숙을 세웠다.
일제가 금서로 지정한 현채의 '유년필독'을 교재로 써서 조선의 역사와 지리를 가르쳤다. 1914년 여름에는 훗날 임시정부에서 함께 활동하게 될 인물들과 축구단을 꾸려 전국을 돌며 민족의식 고취에 나섰고, 부여에서 의병을 일으킬 계획까지 구체화하기도 했다. 1915년에는 이광수·김양수·장덕수·최두선 등과 조선학회를 조직해 민족독립투쟁을 이어나갔다.
이 시절 그가 남긴 말이 있다.
"우리 국민들에게 신학문을 교육시키고 국가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면 왜놈들보다 훨씬 빨리 앞설 수 있다."
일본 유학은 처음부터 끝까지 독립을 이루기 위한 방책이었다.
와세다대학 졸업 후 신익희는 귀국해 동명강습소, 중동학교, 보성법률상업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미국 유학을 꿈꿨지만 경제적 사정으로 접어야 했다. 그리고 1918년 6월,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이 세상에 울려 퍼졌다.
신익희는 임규·최린·송진우·최남선·정노식·나경석·윤홍섭 등과 독립선언서 발표와 해외 독립운동단체와의 동시 궐기를 논의했다. 평화적 방법을 택하기로 결론지은 이 모임은 3·1운동의 실질적 준비 과정이었다.
그해 11월, 신익희는 해외 단체와 동포 유지를 연락하는 임무를 맡아 상하이로 갔다. 그 자리에서 이시영·이동녕·신규식을 만났다. 세 사람 모두 독실한 대종교 신자였다. 이 만남이 결정적이었다.
이시영과 이동녕, 신규식은 단순한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다.
이시영은 형제 여섯이 전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인물이었다.
이동녕은 대종교 서도본사 포교책으로서 단군 민족주의를 독립운동의 정신적 뼈대로 삼은 임시정부 실질적 지주였다.
신규식은 을사늑약 소식에 자결을 시도했다가 살아남아 상하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네트워크를 구축한 인물이었다. 나철이 세운 대종교를 그의 신앙이자 민족운동의 언어로 삼은 사람이었다.
신익희는 이 만남 이후, 늦어도 1919년 3월 상하이 망명 직후 어느 시점에 대종교에 귀의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의 정보 기록에는 신익희가 신규식 세력으로 분류되어 있다. 대종교 서이도본사(西二道本司, 상하이를 중심으로 전 중국을 관할하던 대종교 교구)의 구성원 명단에 신규식·박은식·이동녕·신익희·신석우·조완구 등의 이름이 함께 올라 있다.
1919년 3월 4일 신익희는 제2차 시위 행렬을 지휘하다 일제의 추적을 피해 3월 19일 상하이로 망명했다.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제1회 의정원 회의에서 의원으로 피선되었고, 이시영·조소앙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헌장 기초위원으로 활동했다. 임시헌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 이들의 손에서 나왔다.
이후 신익희는 내무부차장(1919), 국무원법제국장, 법무부차장, 외무총장대리차장 등을 거쳐 외무장(1933), 외교연구위원(1942), 정보과과장(1943), 내무부장(1944)에 이르기까지 임시정부에서 여러 직책을 담당했다. 그 궤적이 중간에 끊기기도 하고 이리저리 뒤틀리기도 했지만, 그가 임시정부의 중심부에서 움직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임시정부의 상층부를 들여다보면 압도적으로 대종교 인사들이 포진해 있었다는 점을 짚지 않을 수 없다.
1919년 4월 임시정부 수립 당시 의정원 의원 29명 가운데 21명이 대종교 원로였고, 정부 조직 13명 가운데 11명이 대종교 인사였다. 이 수치는 과장이 아니다. 독립운동사 자료들에 거듭 확인된다.
이동녕이 의장, 신규식·박은식·조성환·조완구·황학수·차리석 등이 요직을 채웠다.
임시정부의 역사 인식 자체가 대종교 사관과 겹쳐 있었다.
'국무원 포고 제1호'는 단군의 건국을 임시정부 존립의 역사적 근거로 삼았다. 독립운동의 출발점을 단군에서 찾은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순수한 종교 운동이었던 것은 아니다.
대종교에서는 나라의 독립과 종교의 존재를 같은 것으로 보았다. 독립운동은 곧 정치 운동이었고, 이상세계인 배달국 건설을 위한 종교 운동이기도 했다.
임시정부 상층부에서 대종교인들과 교류하며 신익희의 민족의식은 점차 이론화되고 체계화되었다.
그는 개천절을 단군사화 속 홍익인간 이념의 실천으로 해석했고, 개천절 기념사에서 단군시대의 정신을 "평등사상의 선구자", "조직과 분업의식의 출발점", 전 인류가 지향할 "홍익인간"이라고 정의했다.
단군의 건국이념 안에는 "조고만치라도 살벌과 침략의 뜻이 없이 평화스럽게 공존동생(共存同生)하여 천지우주의 화육을 협찬하는 뜻이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임시정부 수립에 2년 넘게 전력을 쏟은 신익희는 1922년 말 베이징으로 떠났다.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가족이 베이징에 와 있었던 것이 공식적인 이유였지만, 그 무렵 임시정부는 이승만 대통령을 둘러싼 노선 갈등으로 분열 직전이었다. 베이징은 반임시정부 세력의 거점이었고, 국민대표회의 창조파 인사들이 주로 활동하던 곳이었다.
그는 베이징에서 중국 군벌과의 연대를 통한 독립전쟁을 모색했다. 직예파 군벌 우페이푸와 기독교 장군으로 불리던 펑위샹은 한국 독립운동에 관심이 없거나 위선적이었다. 그래서 시안의 후징이(胡景翼, 1892~1925)를 찾았다. 후징이는 일본 유학 시절 신익희와 교류한 인물로 한국 독립운동에 이해가 깊었다. 그는 신익희를 고문으로 추대하고 육군 중장에 임명했다. 신익희는 이때부터 왕(王) 씨 성을 쓰며 행적을 감췄다.
이 인연을 발판으로 허난성 개봉부(開封府)에서 한중 양국 청년 20여 명을 모아 유격부대 성격의 분용대(奮勇隊)를 조직하고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분용대 연성대장으로는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자 의열단원이었던 성주식을 북만주에서 데려왔다.
1924년 초에는 허베이성 보정(保定) 비행장의 육군공병단 철도대에서 훈련을 마친 나석주·강명규 등이 합류하면서 전력이 불어났다. 그러나 후징이는 1924년 10월 베이징 정변으로 하남의 지배자로 올라서자마자 1925년 5월 갑작스럽게 병으로 세상을 떴다. 한중 연합 독립전쟁의 꿈은 그렇게 꺼졌다.
1922년의 맥락에서 한 가지를 짚어 두어야 한다.
그해 10월 독립전쟁에 대비한 군인 양성과 군비 모집을 위해 한국노병회가 결성되었다. 10년 안에 노병 1만 명을 양성하고 100만 원의 군자금을 모집한다는 목표를 세운 단체였다. 신익희와 김구·박은식이 함께 참여한 이 단체의 구성원 역시 대종교 계열 인사들이었다. 후징이와의 연대를 도모한 것도 이 노병회의 방침에서 나온 것이었다.
1926년 신익희는 다시 베이징에 갔다. 이번에는 안창호와 연결된 흐름 속이었다. 같은 해 8월 안창호가 베이징에서 좌익 세력 대표자 원세훈을 만나 민족협동전선 결성을 촉구했고, 그해 10월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가 꾸려졌다. 1920년대 민족유일당운동의 시초였다.
신익희는 베이징에서 반임시정부 활동을 하던 강구우·김광선·원세훈·장건상·조성환 등과 함께 북경촉성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북경촉성회는 러시아의 혁명자가 공산당 깃발 아래, 중국의 혁명자가 국민당에, 아일랜드의 혁명자가 신페인당에 각각 집결했다며 '이당치국(以黨治國)' 형태의 민족협동전선 결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1926년 10월 장건상이 장쭤린에게 체포되고 1927년에는 원세훈도 체포되어 일본공사관 경찰에 넘겨지면서 촉성회는 타격을 입었다.
이후 한국 독립운동계에는 중국 국민당과 같은 민족대당을 결성해 '당으로써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이당치국 논리가 본격화했다. 1927년 4월 임시정부가 제3차 개헌에서 이 형태를 도입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베이징·상하이·광둥·난징·무한의 각 촉성회가 연합해 1927년 11월 상하이에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가 결성되었지만, 1927년 국공합작 결렬과 1928년 코민테른의 '12월 테제'로 좌우의 세력 균형이 무너지면서 민족유일당 운동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 후 신익희는 국민당 정부가 자리한 난징으로 가서 위유런(于右任)의 도움으로 심계원(오늘날 감사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위유런은 쑨원과 함께 혁명을 일으킨 인물이자 후징이의 막료였는데, 이때 신익희와 인연을 맺었다. 잠시 가족과 평범한 생활을 보내던 그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터지면서였다.
만주사변 직후인 1932년 1월, 신익희는 난징의 중국 정부와 중국군에서 복무하던 김홍일·성주식·최용덕·나월환 등과 좌익 계열의 정태희, 상하이 한국독립당에 불만을 품은 윤기섭·연병호·김사집 등과 함께 한국혁명당을 결성했다.
이사장 윤기섭, 총무·비서장 정태희, 외무 신익희, 재정 김홍일로 구성된 이 단체는 당원 40여 명이 난징과 상하이에 흩어져 있어 당세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신익희로서는 자신이 주도해 결성한 첫 번째 정치 조직이었다.
한국혁명당은 출발부터 욕을 먹었다.
상하이 한국독립당은 이 단체를 가리켜 "백적흑의 혼혈아(白赤黑의 混血兒)"라고 비난했다. 백(白)은 민족주의, 적(赤)은 사회주의, 흑(黑)은 무정부주의를 상징하는 색이었다. 한마디로 사상적으로 잡탕이라는 조롱이었다.
그런데 신익희 입장에서 이것은 욕이 아니었다. 그는 이념을 따지기 전에 일제에 맞서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함께 싸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족주의자뿐 아니라 무정부주의자, 좌익 계열까지 포용해 통합운동의 물꼬를 텄다는 것이 그의 자평이었다. 그게 상하이 한국독립당 입장에서는 이념적 순수성을 훼손하는 잡탕으로 보였다.
한국혁명당은 같은 해 4월 윤봉길 의거가 일어나자 산하에 무장단체 철혈단(鐵血團, 단장 안재환)을 조직하고 기관지 '혁명공론(革命公論)'을 발행했다.
1925년 후징이의 도움으로 조직했던 분용대의 뒤를 잇는 무장 조직이었다. 이 시기 신익희와 가장 가까이 활동한 인물은 윤기섭이었다. 윤기섭은 보성학교에서 성주식과 동기였고, 신흥무관학교 학감을 지낸 대종교 계열 인사였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신익희와 같은 기호파에 속했고, 한중호조사에서도 함께 활동했다. 두 사람은 해방 이후까지 함께 걸었다.
1932년 10월, 난징의 민국로 소동문 동방여사(東方旅舍)에서 간담회가 열렸다.
상하이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의열단·한국광복동지회·한국혁명당의 대표들이 모였다. 신익희와 김원봉이 한자리에 앉았다. 이들은 1932년 11월 23일 다시 모여 각 단체 연합체의 이름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으로 확정했다. 신익희는 최동오·김두봉·김규식·박건웅 등과 함께 상무위원으로 선출됐다.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은 "혁명역량의 집중과 지도의 통일로써 대일전선의 확대 강화"를 도모하고 "민중의 기초 위에서 직접 군사행동"을 투쟁 노선으로 삼았다. 만주와 중국 관내 등지에 흩어진 독립운동 단체의 총집합체를 자처한 것이다.
윤봉길 의거 이후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 등지로 흩어진 임시정부가 독립운동계를 이끌지 못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구심체 역할을 자임한 셈이었다. 그러나 단체 간 연락과 협의 기관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단일한 조직체로서의 한계를 드러냈다.
신익희는 보다 강력한 통일 정당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북만주에서 활동하던 한국독립당이 1933년 말 관내로 들어오자 이들과의 결합을 적극 모색했다. 당시 지청천은 뤄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1934년 2월 협의 끝에 한국독립당과 한국혁명당이 각각 소속당을 해체하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 1934년 3월 1일, 난징에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제2차 대표대회를 열어 신한독립당이 창당됐다. 당수 홍진, 상무위원에 신익희·김상덕·윤기섭이 선임됐다.
사무소는 난징 성대유방(城大油坊) 10호에 마련하고, 총무 윤기섭, 군사 지청천, 교섭 신익희 등이 자리를 잡았다. 신익희가 교섭위원장을 맡은 것은 당시에도 국민당 정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러나 신한독립당 창당은 통합을 이루는 듯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제2차 대표대회에서 "가맹단체는 물론 기타 각 혁명단체를 전부 해소하고 단원들을 통일동맹에 합류시켜 단일대동맹을 조직"하고, "이를 위해 혁명단체 밖에 있는 임시정부를 폐지할 것"을 결정한 것이 걸림돌이 됐다. 상하이 한국독립당은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더 이상의 통합은 중단됐다.
1935년 2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각 혁명단체 제3차 대표대회를 소집했다.
그해 6월, 한국독립당·의열단·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대한독립당에 더해 미주와 하와이의 단체들까지 포함한 9개 단체가 난징에서 대표대회를 열었다. 중국 내에서 제1차 국공내전이 한창이었다. 이합집산을 거듭하던 한국 독립운동 정당들이 마침내 하나로 모여야 한다는 절박함도 작용했다.
참석자는 한국독립당 대표 김두봉·이광제, 의열단 대표 김원봉·윤세주·이춘암, 조선혁명당 대표 최동오·김학규, 신한독립당 대표 윤기섭·지청천·신익희, 재미국민총회 위임대표 김규식 이하 11명이었다.
미주지역 단체가 이탈하면서 5개 단체만 남아 9일간의 예비회담을 진행했다. 창당 과정에서 의열단이 작성해 온 초안에 공산주의 표현이 노골적으로 들어가 있어 다른 단체들이 반발했다. 이때 신익희가 중재자로 나서 의견을 절충했다. 결국 1935년 6월 29일 금릉대학(金陵大學, 현 난징대학) 대례당에서 정식 대표대회가 열렸고, 7월 5일 통일전선 민족혁명당이 창당됐다.
당의는 "혁명적 수단으로써 일제의 침탈 세력을 박멸하여 5천 년 독립 자주해 온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고 정치·경제·교육의 평등에 기초한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여 국민 전체의 생활 평등을 확보하고 나아가 세계 일류의 평등과 행복을 촉진한다"는 내용이었다.
'혁명적 수단'이라는 표현은 신채호가 쓴 조선혁명선언과 연결되고, "정치·경제·교육의 평등"은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반영했다.
민족혁명당은 김원봉의 의열단과 조소앙의 삼균주의, 두 노선이 맞부딪히는 지점에 서 있었다. 그 충돌을 절충하는 역할을 신익희가 담당했다.
중앙집행위원회 아래 서기부(부장 김원봉)·선전부(부장 김두봉)·군사부(부장 지청천)·국민부(부장 김규식)·훈련부(부장 윤기섭)·조사부(부장 이광제) 체계를 갖췄다.
신익희는 성주식과 함께 선전부 부원에 배치됐다. 총서기 김원봉이 당 운영을 실질적으로 관장했는데, 그것은 의열단이 군관 100여 명에 단원 200여 명을 거느리고 월수정액 3천 원의 재정 수입을 올리는 반면, 신한독립당은 군관 50여 명에 당원 600여 명, 월수정액 500원에 그쳤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세는 군사력과 재정이 결정했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은 창당 직후부터 내분에 휩싸였다. 김원봉 중심의 의열단 인사들이 실권을 장악해 가자, 1935년 9월 25일 조소앙·문일민·박창세 등이 항저우에서 한국독립당 재건을 선언하며 탈당했다. 신한독립당의 홍진·조성환·민병길 등도 뒤따라 탈당해 조소앙 진영에 합류했다. 이어 1935년 11월에는 이동녕·이시영·송병조·차리석 등이 김구와 함께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탈당 행렬이 이어지는 가운데 신익희는 민족혁명당에 남았다. 1937년 1월 전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재선됐고, 김원봉 등 6명으로 구성된 당무집행위원이 됐으며 외무위원회 주임을 맡았다.
이 선택은 단순히 편의적이거나 세력 관계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신익희는 민족혁명당이 흔들리는 시기에도 떠나지 않은 데 반해, 화북으로 이동해 중국공산당 권역에서 활동하는 노선은 끝내 택하지 않았다. 그 경계선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나중에 나타난다.
1936년 말 시안사변을 거치면서 중국 내 정세가 급변했다. 1937년 1월 전당대회에서 민족혁명당은 완전히 양분됐다. 김원봉이 민족혁명당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명하자 지청천은 2월에 조선혁명당의 최동오·김학규 등과 함께 탈당해 한국민족혁명당을 결성했다. 신익희와 함께 활동하던 인사들이 떠났다. 그럼에도 신익희는 남았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상황은 다시 바뀌었다. 같은 해 9월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이 연합해 광복진선을 구성했다. 한편 11월 24일, 난징을 떠나 한커우에서 김원봉은 민족혁명당을 모체로 조선민족해방동맹(공산주의 계열)·조선혁명자연맹(무정부주의 계열)과 함께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창립했다.
1938년 5월 신익희는 김원봉 등과 함께 중국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星子分校)를 방문해 훈련 중인 학생들을 위로했다. 이 분교에 입교한 민족혁명당 청년 회원 83명이 있었다.
1938년 6월 10일, 신익희는 결국 민족혁명당을 탈당했다. 최창익·김학무 등과 중국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 졸업생 35명 등 모두 49명이 함께 조선민족혁명당을 나와 후베이성 한커우에서 조선청년전시복무단을 설립했다. 같은 해 9월 조선청년전위동맹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 선택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급진적'으로 보이는 지점이다. 조선청년전위동맹을 주도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신익희와 그의 사위 김재호가 여기 가담했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논란이 됐다.
신익희가 극좌 노선을 따른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당내에서 자신만의 계파를 형성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은 그리 넓지 않았다는 해석도 있다. 공산주의에 전도됐다고 보기는 더욱이 어렵다.
이 시기 그의 행보를 두고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해석이 엇갈렸다. 한쪽에서는 신익희가 공산주의자는 아니지만, 무장투쟁 노선을 견지하다가 임시정부와 소원해졌고 노선을 같이하던 김원봉 세력이 자신의 의도와 달리 움직이자 동북 진출을 주장하던 공산주의자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른 쪽에서는 그가 급진적 무장투쟁 단체에 가담한 것이 평소 무력투쟁을 강조하던 신익희 노선의 실천이고, 이념적 차원보다는 새로운 독립운동을 열어 가는 3·4세대를 지도하는 위치에서 취한 행보라고 본다. 어느 해석이 더 타당한지를 확정할 수 있는 자료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이후 그가 보여준 선택이 하나의 답을 제공한다.
1940년 말,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주력 세력은 화북으로 이동을 결정했다.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인 화북에 투쟁 기반을 구축하고 동북항일연군과 연대해 조선혁명운동을 새롭게 전개하자는 것이었다. 헤베이로 향하는 그들의 결정이 내려졌다.
신익희는 따라가지 않았다.
조선청년전위동맹원들 대부분이 화북으로 북상하기 2개월 전, 그는 김성숙 등과 함께 충칭 임시정부로 복귀했다. 그 과정에서 화북행에 반대하던 그의 사위 김재호가 조선청년전위동맹원들에게 감금되어 린치를 당했고, 딸 신정완도 함께 연금되는 일이 벌어졌다.
신정완의 회고에 따르면, 옌안행이 자신이 자리를 비운 시점에서 결정됐고, 사위가 집단 폭행을 당하고 딸과 함께 연금된 일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극도의 배신감과 분노 속에서 조선청년전위동맹과 결별했다.
화북행을 택하지 않은 것.
이것이 신익희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임을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그는 공산주의 체제가 독재를 합리화하는 데 반대했고, 자신의 사상이 민족주의의 범위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한국독립당 당원 명부의 6번이라는 위치는 그의 인생 전반을 관통한 좌표였다.
1942년, 신익희는 마침내 충칭 임시정부에 공식 합류했다. 같은 대종교인인 조소앙의 역할이 컸다고 전해진다. 조소앙은 1942년 8월 외교연구위원회를 설치하고 위원장을 겸하면서 신익희를 외교연구위원으로 발탁했다. 그가 임시정부에 다시 합류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 민족주의 계열의 핵심이자 삼균주의자인 조소앙이었다는 사실은 신익희의 사상적 귀착지가 어디였는지를 말해준다.
임시정부 복귀 이전, 1939년 8월 27일 쓰촨성 치장에서 '한국혁명운동통일7단체회의'(7당통일회의)가 열렸다.
1939년 3월 충칭에서 개최된 3·1운동 2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한 한인단체대표자 회담과, 5월에 발표된 김구와 김원봉의 합작 선언이 이어지면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 속에 구체화된 회의였다.
참가단체는 한국국민당(조완구·엄항섭), 한국독립당(홍진·조소앙), 조선혁명당(지청천·최동오), 민족혁명당(성주식·윤세주), 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이하유), 조선민족해방동맹(김성숙·박건웅), 조선청년전위동맹(신익희·김해악) 등 7개 단체였다.
신익희는 조소앙·조완구와 함께 주석단에 앉았다. 조선청년전위동맹의 대표로 참석한 그가 광복진선 측 핵심인 조소앙·조완구와 같은 주석단에 오른 것은 그가 좌우 어느 쪽에도 기울어 있지 않았음을, 오히려 양쪽을 연결하는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통일회의는 조직 방식에서 충돌했다.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청년전위동맹이 연맹체 방식을 주장하며 퇴장했다. 신익희도 그 퇴장에 함께했다. 결국 7개 단체가 모두 동의하는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머지 5개 단체는 단일당 방식을 완성한 뒤 소 단체를 포괄하기로 했지만 이마저도 5당 통일당의 당의·정책 문제에서 의견이 갈려 중단됐다. 1939년 9월 22일 전국연합진선협회가 결성됐지만 민족혁명당이 이탈하면서 와해됐다.
신익희는 1930년대 한국 독립운동계가 절실히 원하던 통일전선운동에 세 차례 모두 참여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1932), 민족혁명당(1935), 7당통일회의(1939) - 어느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것도 그가 주도하지는 못했다.
통합전선운동이 당 대 당 결합이었던 만큼, 충분한 인원과 군사와 재정을 갖춘 세력이 헤게모니를 쥐는 구조였다. 의열단의 군관 100여 명과 월수정액 3천 원 앞에 그의 세력은 미치지 못했다.
조소앙은 1934년 대당 조직의 실패 원인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일정 공동한 주의·정책이 없었던 것, 인물적 중심 세력이 없었던 것, 조직 동기와 목적이 불순하였던 것." 신익희의 통합운동이 계속 좌절된 이유를 그보다 정확하게 짚은 분석도 없다.
이 모든 것의 바닥에 단군민족주의가 있었다.
신익희가 광복 이후 개천절 기념사에서 남긴 말을 보면 그의 사상적 좌표가 명확해진다. 그는 단군사화의 홍익인간 이념을 "평등사상의 선구자"이자 "조직과 분업의식의 출발점"으로 읽었다.
단군이 비교적 미개했던 세력과 혼인을 맺은 것은 "조고만치라도 고유한 우월감이 없이 또는 특권의 행사가 없이 만민은 평등히 인류진운에 함께 걸어나갈 것을 시사한다"고 했다.
홍익인간을 민족 우월주의나 배타적 민족주의로 읽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한민족의 통합 원천을 단군에서 찾으면서도, 그 단군의 정신은 침략이 아니라 평화 공존이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이 맥락에서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도 이해된다. 신탁통치는 민족자주를 방해하는 외세의 침략행위였고, 단군민족주의의 언어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중국인 외교관 진립부(陳立夫)가 한중문화협회에서 "한민족은 일본 학정 아래 40년 동안 억압되어 민족정신이 거세됐으므로 독립을 잘 해 나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발언했을 때, 신익희는 즉각 반박했다. "한민족은 4천 년의 역사가 있고 높은 문화와 정부 제도를 가졌던 국민인데 근근 40년 동안 적의 유린으로 독립 능력을 의심한다는 말은 천만부당한 말이요." 40년 동안에도 끊임없이 투쟁한 실례를 들어 통렬하게 논박했다. 이 자신감의 근거는 대종교인으로서 4천 년 역사 인식 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신익희는 임시정부 요인의 귀국 절차를 중국 정부와 주중 미군 당국을 상대로 교섭하는 대표로 나섰다. 1진을 먼저 출발시키고 자신은 1946년 1월 1일 임시정부 내무부장으로 2진 요원들과 함께 귀국했다.
귀국 이후 그가 주도한 일 중에 국민대학 설립이 있다. 그러나 때로 역사는 분노가 설계하기도 한다.
1947년, 서울 내수동 어느 집에서 두 남자가 맞섰다. 한 사람은 임시정부 내무부장 출신으로 막 독립촉성국민회 부총재 자리를 받아들인 신익희였다. 다른 한 사람은 만주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며 평생을 버텨온 대종교 원로 범정 장형이었다. 같은 대학의 설립을 함께 추진하던 동지였고, 같은 민족주의의 언어를 쓰던 사람들이었다.
그 자리에서 장형은 신익희를 마구 때렸다.
장형의 아들 장충식이 훗날 직접 증언한 내용이다. "아버지(범정)가 '해공, 어찌 백범을 배신할 수 있단 말이요!' 하시며 해공 선생을 막 때리셨어요." 신익희를 따라온 사람들이 말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갈라섰다.
이 결별에서 단국대학교가 태어났다. 그리고 그 결별의 중심에 있던 신익희는 훗날 더불어민주당의 공식 창당 기원이 됐다.
1946년 5월, 광복 이후의 서울.
임시정부 요인들은 새 나라에 새 대학이 필요하다고 뜻을 모았다.
국민대학설립기성회가 발족했다. 고문에 김구와 김규식, 명예회장에 조소앙, 회장에 신익희. 이사 40여 명 가운데 범정 장형이 들어갔다. 실무를 이끈 것은 회장 신익희와 이사 장형이었다.
대학 기금 모집은 순탄하지 않았다. 기성회는 5천만 원을 목표로 삼았지만, 미군정의 견제와 감시를 받고 있던 임시정부 계열 사업에 선뜻 돈을 내놓는 인사가 많지 않았다.
자금이 막히자 장형이 직접 나섰다. 그는 독립운동 시절 함께한 동지 박기홍의 미망인 조희재 여사를 찾아갔다. 조희재는 경기도 화성의 자산가로, 남편 박기홍이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던 인연을 이어받아 스스로도 독립자금 후원에 관여해 온 인물이었다. 그는 장형의 뜻에 찬동해 5만 평의 토지를 국민대학 재단에 기증했다. 그 땅이 국민대학 출발의 초석이 됐다.
1947년 7월, 신익희는 이승만을 총재로 하는 독립촉성국민회에 부총재로 들어갔다.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사실상 이탈하고 이승만 진영과 손잡은 것이었다.
장형이 볼 때 이건 엄청난 배신이었다.
단순한 정치 노선 차이가 아니었다. 그 시절 임시정부 계열에서 이승만 쪽으로 간다는 것은 단정(單政) 수립에 동의한다는 의미였고, 남북 분단을 사실상 용인하는 것이었다. 김구는 통일 임시정부를 위해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의 길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 김구와 갈라서면서 신익희가 내민 손이 이승만의 손이었다. 장형의 눈에는 독립운동의 정신을 저버린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장형은 국민대학 이사장직을 내던졌다. 결별을 선언했다. 조희재 여사가 국민대학에 기증하기로 했던 5만 평의 토지는 취소됐다. '국민대학교 60년사'는 이 대목에 대해 "이때의 기록을 찾을 수 없다"고만 적었다. 충격과 감정의 차이가 상당히 컸음을 보여주는 공백이다.
장형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크게 나아갔다. 조희재 여사를 다시 찾아가 뜻을 전했다. 임시정부와 김구의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대학을 직접 세우겠다고 말했다. 조희재 여사는 이번에는 5만 평이 아니었다. 264만㎡, 약 80만 평에 달하는 토지를 내놓았다. 1953년 화폐개혁 기준으로 1억 환에 달하는 재산이었다. 장형도 조부로부터 물려받은 임야를 매각해 보탰다.
1947년 9월 15일 단국대학 설립준비위원회가 꾸려졌다. 11월 1일 정부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11월 3일, 장형은 일부러 이날을 택해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서 개교식을 열었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난 날,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었다. 그날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병환 중이던 조희재 여사가 개교식 당일 세상을 떴다. 자신이 모든 것을 바쳐 세운 대학의 첫날에 그는 없었다. 대학은 11월 29일 그를 위한 대학장으로 애도를 표했다.
김구는 학교 이름을 직접 지었다.
단군(檀君)의 '단'과 나라(國)의 '국'을 합쳐 '단국'.
1948년 김구가 남긴 말이다. "단국대학은 우리나라 국민 전체의 대학이다."
만약 신익희가 이승만 쪽으로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장형이 국민대학을 떠나지 않았다면, 조희재의 5만 평이 국민대학에 그대로 남았다면. 그리고 훗날 그 80만 평이 단국대학이 아니라 국민대학으로 갔다면. 국민대학교는 지금보다 훨씬 큰 부지를 가진 대학이 됐을 것이다.
장형의 조직력과 조희재의 재산이 모두 한 학교로 모였을 테니까. 단국대학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더 큰 반전이 있다.
이승만 진영으로 가면서 장형의 주먹에 맞았던 신익희, 그가 8년 뒤 이승만의 가장 강력한 정적이 됐다.
1954년 이승만과 자유당이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을 없애는 개헌안을 사사오입이라는 계산법으로 강행 통과시켰다. 신익희는 이 폭거에 반기를 든 민주국민당 인사들과 흥사단계, 자유당 탈당파를 규합해 1955년 9월 18일 민주당을 창당했다. 초대 대표최고위원은 신익희였다.
민주당은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신익희를 대통령 후보,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선거를 열흘 앞둔 1956년 5월 5일, 신익희는 전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이후 185만여 표가 추모표로 쏟아졌다. 5월 23일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고 서울 우이동에 안장됐다.
이 민주당이 4·19 혁명 이후 집권해 제2공화국을 이끌었고, 그 후신이 신민당·신한민주당·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으로 이어지며 오늘날 더불어민주당이 됐다.
더불어민주당은 2015년 9월 18일 민주당계 정당의 뿌리를 1955년 창당된 민주당으로 공식 규정하고 창당 60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이후 매년 9월 18일 민주당 창당 기념일에 경기도 광주의 신익희 생가를 찾아 기념식을 열었다. 당사에는 1955년 민주당 초대 대표로 신익희의 사진이 걸려 있다.
2012년 대선 유세 당시 문재인 후보가 국민대학교 캠퍼스를 방문해 신익희 동상에 헌화했다. 국민대는 신익희가 설립한 학교다. 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민주당의 시조가 세운 대학에서 그 시조의 동상에 꽃을 바친 셈이었다.
이 이야기에는 아이러니가 세 겹 쌓여 있다.
첫 번째. 신익희가 이승만 쪽으로 갔기 때문에 장형과 갈라섰다. 그 갈라섬이 단국대학교를 탄생시켰다. 단국대학교는 김구의 뜻으로 지어진 이름을 달고 학생독립운동기념일에 개교했다. 신익희의 선택이 오히려 가장 임시정부 정신에 가까운 대학을 만들어낸 것이다.
두 번째. 신익희는 이승만 진영으로 간 사람인데, 그가 이승만에 맞서 창당한 민주당이 한국 야당의 시조가 됐다. 배신자라고 불렸던 사람이 반독재 민주주의의 상징이 됐다.
세 번째. 더불어민주당은 신익희를 창당 시조로 삼고 그의 생가를 순례한다. 그런데 신익희를 때리며 결별을 선언했던 장형이 만든 학교도 그 사람의 이름이 얽혀 서 있다. 국민대는 신익희가 세웠다. 단국대는 신익희 때문에 세워졌다.
그 모든 이야기의 교차점에 조희재 여사가 있다. 그는 두 번 땅을 냈다. 처음에는 국민대학을 위해 5만 평. 두 번째는 단국대학을 위해 80만 평.
두 번 모두 장형을 믿고 낸 것이었다. 그 재산이 두 대학으로 나뉜 건 두 독립운동가의 정치적 선택 때문이었다. 조희재는 그 결과를 의도하지 않았다. 개교식 날 세상을 뜨는 바람에 단국대학교가 어떤 대학이 되는지도 보지 못했다.
독립자금을 댔던 사람의 유지를 이어받아 교육에 투신한 한 여성의 재산이, 두 독립운동가의 갈등 속에서 두 개의 대학으로 분기됐다. 그리고 그 갈등의 한 축이었던 신익희는 한국 야당 정치의 출발점이 됐다.
결별이 새 학교를 낳았다.
분노가 건학 이념을 낳았다.
이승만 진영으로 갔던 사람이 이승만을 가장 강하게 반대한 야당을 만들었다.
그 야당의 계보를 잇는 정당이 지금 그 사람의 생가를 찾아가 창당 기념식을 연다. 신익희가 이승만 쪽으로 가지 않았다면, 장형은 국민대학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조희재의 80만 평은 단국대학이 아니라 국민대학으로 갔을 것이다. 단국대학교는 없었을 것이다.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그것이 역사가 됐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그 역사를 만든 당사자들은 자신이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몰랐다.
장형은 배신자를 때리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조희재는 올바른 뜻에 재산을 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신익희는 자신의 정치적 판단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각자의 판단이 한꺼번에 작동한 자리에서 두 개의 대학이 태어났고, 한국 야당 정치의 뿌리가 내렸다.
1894년생 신익희.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해 1945년 귀국할 때까지 27년을 중국 관내에서 보냈다.
와세다 유학 시절 형성된 민족의식, 상하이에서 만난 대종교 인맥, 이당치국의 논리 위에서 전개된 1930년대 정당 정치, 좌우를 넘나들면서도 끝내 단군민족주의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은 선택들. 그는 통합운동의 주도자가 되지 못했다.
군사력도, 재정도, 자신만의 탄탄한 조직도 없었다. 그러나 세 차례의 통합운동에 빠지지 않고 참여한 사람, 의열단과 삼균주의 사이를 중재한 사람, 공산주의자들과 가까이 지내면서도 화북행을 거부한 사람. 그의 자리는 어느 진영의 중심부가 아니라 진영들 사이의 통로였다.
해방 이후 신익희는 이승만의 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조국의 국시는 민족주의라고 말했고, 민족의 지상(至上)을 위해 싸우겠다고 했다.
1956년 대통령 선거 유세 중 기차 안에서 급서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한 수십만 명이 백지 투표용지를 던졌다.
1947년 한국독립당 당원 명부의 6번.
그 자리가 말해주는 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독립운동의 본류는 단군의 나라를 되찾으려 한 사람들에게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