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안씨(구)의 거짓된 족보를 만들어 우리 광주안씨의 시조와 정체성을 모독하는 실태를 확인하면서
광주안씨 시조의 연원을 확실하게 알고 죽산안씨의 거짓된 추악성을 확인하는 것이 기본이므로
광주안씨 시조는 어떤 사람인가를 설명한다.
1. 廣州安氏 始祖 安邦傑공이 처음 출신한(出自)는 일관되고 분명하다.
가. 광주안씨 족보에 기록한 시조 記事
戊午譜(서기1738년) 최초에 발간한 족보.-廣州人高麗太祖初邑人殺其州牧以叛倡義討平之以軍功 拜大將軍.
광주인 고려태조초 읍인살기주목이반 창의토평지 이군공 배대장군
庚戌譜(1790)- 仕高麗太祖官大將軍麗朝時廣州人弑主公倡義討平之拜大將軍 或云以州吏出顯.
사 고려태조 관대장군 려조시 광주인시주 공창의토평지 배대장군 혹운 이주리출현
丙寅譜(1866)- 仕高麗太祖官大將軍麗朝時廣州人弑主公倡義討平之拜大將軍 或云以州吏出顯.(위 경술보 1790과 같음)
壬戌譜(1922)- 仕高麗太祖爲大將軍麗朝時廣州人弑主公倡義討平之以公拜大將軍或云以州吏出顯
或云嶺譜云奏捷平壤授元帥封廣陵君.
사 고려태조 위대장군 려조시 광주인시주 공창의토평지 이공배대장군 혹운 이주리현
혹운 령보운 주첩평양 수원수 봉광릉군
丙子金海譜(1936)- 庚戌譜 記錄과 同一.(위 경술보 1790과 동일)
丁酉譜(1957)- 仕高麗太祖爲大將軍麗朝時廣州人弑主公倡義討平之以公拜大將軍
사 고려태조 위대장군 려조시 광주인시주 공창의토평지 이공배 대장군
癸亥大同譜(1983)-大將軍封廣州君 대장군 봉광주군
※. 광주군(廣州君)이라는 군호(君號)는 고려 태조때에는 일반사람에게 君으로 封한 史實이 없으므로
후대에 본관(本貫)이 廣州임을 고려하고 후손이 높에 부르는 뜻에서 붙인 것으로 추정한다.
광주안씨 대종회는 2007년. 9월. 6일. 대종회 심의로 지금의 성손(姓孫)이 한글세대이므로
한글표현으로 시조연원을 아래와 같이 정립하였다.
["廣州安氏 시조의 諱는 邦(자) 傑(자)이며 高麗 太祖 때 廣州地方의 관리로 뛰어났던 분이다.
광주의 어떤 사람이 지방수령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였으므로 그 공적으로 대장군에 오르고 廣州君에 봉해져 廣州를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성씨를 갖게 된 유래는 신라시대부터 고려 초 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씨가 없었고 고려 태조가 후삼국 통일 후에 지방 유력자들에게 성씨를 갖게 하는 정책을 시행하였으므로 이에 따라 安氏 姓을 가지게 된 것으로 추정한다".]
나. 처음 족보 이전에 시조를 명시한 기록문헌을 살핀 기록.
1540년 後孫 潤孫 神道碑銘-廣州人 前朝大將軍諱邦傑之後.
후손 윤손 신도비명-광주인 전조 대장군 휘 방걸지후
1579년 後孫 珣(山+旬) 墓表文-高麗大將軍諱邦傑之後.
후손 순 묘표문-고려 대장군 휘 방걸지후
1709년 後孫 敏學 碑文- 廣州人鼻祖高麗大將軍廣州君邦傑.
후손 민학 비문-광주인 비조 고려 대장군 광주군 방걸
1589년 刊行 大東韻府群玉- 廣州安氏大將軍安邦傑之後邦傑以州吏顯.
대동운부군옥-광주안씨 대장군 안방걸지후 방걸이 주리현
※. 대동운부군옥이라는 서적은 조선조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백과사전이다.
1680년 筆寫編 氏族源流(趙從耘)- 廣州安氏始祖安邦傑大將軍.
필사편 씨족원류(조종운)-광주안씨 시조 안방걸 대장군
※.씨족원류라는 종합계보서는 한국의 성씨종합보서로 가장 정확하고 분명한 계보서로 성씨의 연원(淵源)을 소개한다.
1908년 刊行 增補文獻備考-廣州安氏始祖綏.廣州君邦傑以縣吏起家爲大將軍14世孫綏.
증보문헌비고-광주안씨 시조유.광주군방걸 이현리 기가 위대장군14세손 유
1924년 刊行 朝鮮氏族統譜(尹昌鉉)- 廣州安氏始祖邦傑大將軍廣州君.
조선씨족통보(윤창현)-광주안씨 시조 방걸 대장군 광주군
다. 광주(廣州)지방을 설명하는 인문지리역사서.
서울 江東區歷史(서울 강동구는 광주군에 포함된 지역인데 후에 서울에포함된 지역이다).
: "後三國을 統一한 고려태조왕건은 23년(940)에 지방행정 안정체제로 토성분정(土姓分定)을 시행한다.
土姓은 호족(豪族)내지 호족의 후예로서 자신이 지배하는 지역을 본관(本貫)으로 하는 성씨집단이다.
고려시대를 반영한 조선초기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廣州牧의 토성이 李. 安. 金이다.
1871년 편찬한 광주읍지(廣州邑誌)에 고려 때 인물로 安邦傑 등이 있다."
경기 河南市歷史:"河南市가 되기 전에까지 廣州郡이었다. 河南의 관적성씨(官籍姓氏)는 광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가장 오래된 자료로 [세종실록지리지]의 성씨조. [여지승람] 성씨조에 광주의 토성은 李.安.金.
이다. 廣州安氏始祖는 安邦傑인데 고려초기 광주의 향리(鄕吏)로 광주에서 일어난 반란(反亂)을 平
定하여 태조로부터 대장군에 오르고 광릉군에 봉해졌다".
위와 같이 廣州安氏 始祖는 族譜. 墓碑文(金石文). 모든 문헌(文獻). 廣州地方의 지역역사서에
일관되고 통일하여 생존과 立身出世 및 活動歷史를 밝히고 있다.
본관지 광주(廣州)는 고려 태조23년(940)부터 주지명(州地名)이니 시조의
생존시기(生存時期) 및 득관사실(得貫事實. 본관을 정한 사실))과 합치한다.
씨족근원(氏族根源)은 後三國 後 高麗初의 사회상(社會相)과 부합(符合)하여 姓氏와
始祖의 출자 (出自.처음 출발한 근거)가 확연(確然)하다
2. 후손 안정복이 족보(1790년 경술보)에 기록하여 후손에게 깨우쳐 준 기록.
1790년에 後孫 안정복 (安鼎福.1712-1791. 조선조 영, 정조 때 역사실학자.)은 최초족보인
기미보(1739)간행에 참여하였고 두번째 족보인 경술보(1790)를 직접 편찬하면서
그 보발문(譜跋文)에.
번역문“우리 안씨가 광주를 본관으로 성을 받은 것은 고려 초부터 인 것이 이미 확실하나
大譜가 없어서 옛일을 살피는 데는 징험할 길이 없다“ 하였고.
[原文:吾安受姓廣州自麗初己然而無大譜在古尙矣無徵]
또, [辨誣]-(거짓으로 속이는 것을 밝히는.)로써 [농서이씨동래설(隴西李氏東來說)]의
거짓(虛僞)를 설파하는 글을 경술보 책머리에 기록하였으니.
번역문: “지금 세상에 풍문으로 전하기를. 안씨3파가 중국에서 온 이씨성에 유래한다고 한다.
신라 경문왕 때에 지춘, 엽춘. 화춘. 이라는 형제 3인이 왜란을 평정케한 공으로
안씨를 사성받고, 방준. 방걸.방협. 이라 개명하여 죽산과 광주로 분봉하였다.
광주는 10여세를 지나 다시 순흥과 나누어지니 지금 간행하는 별록의 국신(國信)이하
12대가 그것이다.
이는 심히 맹랑하여 근거가 없다. 또 관직명이 高麗史와 年代가 맞지 아니하니
그것이 위서(僞書)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사간공 서문의 첫머리에 중국 안씨의 유래 본말과 동방 안씨의 관향이 다른 자
운운을 기록하고 있으므로 어찌 李씨가 사성 받았을 리가(理乎) 있겠는가?
저번에(向來) 押海 丁氏와 宜寧 南氏가 모두 거짓족보(僞譜)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그런 류(類)이다.
후인들에게 전해져 믿게 될 가 걱정되어 이 조항을 뽑아(拔此條) 거짓을 밝히는 글(辨誣)을
지어 바로잡는다.""
原文: 今世傳 安氏三派謂自中國來姓李 當新羅景文王時 有兄弟三人曰 枝春
葉春 花春 平倭亂有安國之功故賜姓安氏 三人改名 邦俊 邦傑 邦俠 分封 竹
山 廣州 廣州傳十餘世又分順興今刊譜首板別錄國信以下十二代卽是也
此甚孟浪無據 且其官名與麗誌年代不合其僞書無疑矣 且思簡公序文有首記
中國安氏之所由本末記東方安氏之異其貫者云則豈有姓李賜姓之理乎
向來押海丁氏宜寧南氏皆爲僞譜此亦類是 恐有後人傳以爲信故拔此條作辨誣
以正之.]
이와 같이 일찌기 순암공 안정복은 농서이씨동래설이 거짓임을 밝혀 놓았다.
3. 종합 설명:
우리 始祖는 後三國 쟁패시기(爭覇時期)인 900年代에 漢山州(지금의 廣州. 河南市. 서울 江東區)에서
출생하여 지방관(鄕吏.州吏.縣吏)으로 생활하며 고려태조 통일완성기에 廣州지방 일부세력의 저항을
진압하는 공적으로 군직을 갖는데 대장군으로 후손이 높여 부른 듯 하다.
광주군(廣州君 君號)은 후손이 존칭(尊稱) 한 것으로 본다.
당시 지방 유력자에게 姓氏를 갖게 하는 토성분정(土姓分定)에 따라 安姓을 가졌다.
族譜에서 다르게 말함(或云)은 大東韻府群玉. 增補文獻備考 등의 記錄에서 보는 바와 같이
州吏.縣吏로 들어난(顯) 인물임을 증명한다.
또 영남의 족보에 이르기를(嶺譜云)하여 전공을 보고하니 원수직을 받다(奏捷授元帥)운운은
영남지방 후손의 파보기록으로 근거가 박약한 과장으로 본다.
한국의 성씨근원이 고려 초에 출발하는 씨족의 대부분이 이와 유사(類似)하고,
상대(上代)를 잃어버려(失傳)하여 희미한 기록으로 외줄기(單系)로 이어오는 실정이다.
高麗中期까지도 族譜를 간행하거나 가승(家乘)을 기록하는 관습이 없고,
사는 형편이 기복(起伏)이 있으면 系代를 잃어버리는 實相은 韓國 姓氏 一般的인 現狀이다.
우리도 1700년대에 잃어버린(失傳) 始祖 아래 上代世系기록을 宗人(原州宗人. 處大공) 이
베껴온(筆寫謄出) 것을 조심스럽게 族譜에 별록(別錄)으로 유지하여 온 것이다.
高麗末 朝鮮初 後孫 사간공(思簡公.휘 省. 1344-1421.)이 편찬한 族譜가 있었으나
멸실(滅失)되고 序文이 傳해 오는데 그 서문에 中國의 安씨 來歷과.
우리나라(東國)의 安氏別 本貫을
區分한 기록을 하였음을 밝히므로 우리 성씨의 분명한 연원을 증거한다.
첫댓글 종원님의 좋은말씀 감명받고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