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실은 아주 조그만 불행도, 그 뒤에 아주 큰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984. 4. 권정생 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나쁜 일보다 좋은 일들이 더 많을 것이라 믿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지도 모른다. 불청객이 찾아왔을 때 우리의 대응방식이 늘 서툴다는 것은 그것을 반증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누군가의 부고를 듣거나, 심지어 아끼던 애완동물이 없어졌을 때에도 너무 경황이 없어 한동안 지체된 삶을 살거나 왜 하필 나인지에 대해 따지려 들기도 한다. 즉, 우리는 인생의 굴곡에 팔자('몽실'이 말하는 원인)가 작용한다 생각하지 않으며, 그래서 나의 삶에 관여하는 것은 모두 적이고 나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소설가들은 조금 더 논리적이다. 그들은 이러한 불행의 원인을 파헤치고 개인이 불행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주제로 삼아 소설을 전개한다. 작가는 우리 세대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표상하는 작중 인물 '몽실'의 삶에서 많은 불행을 설정한다. 연이은 역경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슬픔도 담담하게 마주하는 개인의 태도는 당시의 배경이 되는 사회상 속에서 삶의 본질을 실재감 있게 전달한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몽실 언니'를 동화라 규정짓지 않는다. '소년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설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6. 25 전쟁과 이후 분단시대의 아동문학은 동화가 아니라 소설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나 작가는 그의 고향인 안동 조탑 마을에서 이 소설을 집필하였다. 6.25 전쟁의 최대 접전지중 한 곳이었던 안동에서는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과 동족상잔의 비극이 되풀이 되었을 것이다. 작가는 이 모든 것을 보고 들은 자로서 전쟁의 최대피해자였던 '몽실 언니'라는 인물을 대변해 개인의 비극적인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당시 모든 불행의 원인을 제공 했던 전쟁이라는 배경은 작가에 의해 '몽실'과 그의 주변에서 다시 한 번 재현되고 있다.
"누가 그걸 곧이듣니? 할아버지가 잘못한 거지. 아무리 자식이지만 빨갱이한테 떡을 해주고 닭을 잡아 주다니, 그건 백 번 천 번 잘못한 거야."
"…… 그렇지 않아요. 빨갱이라도 아버지와 아들은 원수가 될 수 없어요. 나도 우리 아버지가 빨갱이가 되어 집을 나갔다면 역시 떡 해드리고 닭을 잡아 드릴 거여요." '아버지'와 '몽실'의 대화 中
아이들은 자신의 주위를 선 아니면 악으로 구분 짓는다. 그들은 그것에 매우 민감하고 거침이 없다. 만화 영화를 볼 때도 악당으로 그려지는 인물의 편을 드는 아이는 없을 것이며 악당에 대한 동정심은 필요선이다. 설사 그 악당이 동생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주인공과 대립한다거나 과거에는 착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여기서, 과연 '몽실'이 아동 문학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는가 하는 투정 어린 의문이 생겨난다. '몽실'은 여느 아이들과는 다르게 착한 인민군이라는 개념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은 아이들을 성숙하게 만들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들의 죽음과 같이 전쟁의 비극은 아이들에게도 공평하게 적용됐으며, 그 속에서 겨우 살아남은 아이들은 판단의 근거를 잃었다. 하루가 다르게 판세가 바뀌는 전쟁 상황이라 어제는 인민군의 노래를 불렀다가도 오늘은 국군의 국기를 다는 자신들의 아버지를 보았다. 모두들 어쩔 수 없는 일을 했을 뿐인데, 무엇 하나 잘못한 것은 없는데 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는가? 이렇게 '몽실'은 자신에게 묻는다.
'몽실 언니'는 인물간의 대립과 갈등을 설정하기 보다는 당시의 이데올로기 대립과 같은 사회적 상황을 조망함으로서 외면하려 했던 현세계의 진실을 전쟁의 산증인 '몽실'의 성숙한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원치 않는 허위를 작품 속에서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엄중한 시대의 요청으로 '몽실'과 인민군 청년의 우정을 그리는 대목 등은 삭제 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 소년 소설 자체도 역사의 산증인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들이 지금 공부를 하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인생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가, 그 길의 내용을 정확히 알고 가자는 데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남북이 갈라져서 서로 다투고 있는 것도 과연 남의 꼭두각시놀음이 아닌, 제 스스로의 생각을 주장하고 있는지 알아봐야 할 것입니다." 6. 인생이라는 것 中 최 선생의 말.
'몽실'은 새어머니 북촌댁과 함께 야학에 간다. 그리고 그녀는 그 곳에서 만난 최 선생님으로부터 위와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이 대목에서 작가는 너무나도 명확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이 소설은 '몽실'을 앞세워 전체적으로 그녀의 생각과 시선처리에 대한 서술이 이뤄지고 있다.(유일하게 마지막 결말 부분에서만 '난남'이의 시선으로 '몽실'의 뒷모습이 그려진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몽실' 외의 다른 인물들의 생각에는 별 관심 없는 듯 보인다. 그런데 유독 '최 선생의 생각'에 대한 서술이 길어 진 것은 무슨 이유일까? 작가는 잠시나마 '최 선생'의 입을 빌어 무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다. 역사적으로 야학은 언제나 앞선 정신의 상징이었다. 시대 속에 묵언해야 했던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내게 된 것이리라 하고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그리하여 최 선생이 피난을 갔다는 '몽실'의 무심한 한 줄짜리 대사로 그를 작품 속에서 사라지게 한 것은 아닐까. 현실과의 괴리를 느끼며 야학에 관한 서술은 마무리된 듯하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몽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착한 것과 나쁜 것을 좀 다르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를 버리고 딴 데 시집을 간 어머니도 나쁘다 않고 용서합니다. 검둥이 아기를 버린 어머니를, 사람들이 욕을 할 때도 몽실은 그 욕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나무랍니다. 1984. 4. 권정생 씀.
누군가가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어디서 귀인 하는가? 모든 인간이 주변과 관계를 맺고 그로부터 의지해야만 살아갈 수 있듯이 '몽실'도 그랬다. 그녀는 '꽃 파는 소녀'를 보며 주위 사람들에게 삶의 대부분을 의지해왔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했지만 실로 그녀는 자기 아픔뿐 아니라 많은 이들의 아픔을 헤아리기까지 하는 더 큰 이해심과 포용력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녀는 스스로 무너지지 않게 가혹한 운명에 대처하는 올바른 사고방식도 가졌다.(여기서 올바른 사고방식은 그 시대를 살아가기에 어쩔 수 없이 취해야 했던 태도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자는 "엄마 잘못이 아니야." "다리 다친 건 내 팔자야." 라고 말하는 그녀를 보며 안타까운 나머지 좀 더 적극적인 태도를 가질 순 없는가 하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작중 인물의 태도는 자칫 '몽실'을 수동적인, 운명론적 여성의 이미지로 형상화하기 쉽지만, 순박한 심성으로 거친 파고와 같은 자신의 역경을 잔잔하게 헤쳐 나가는데 큰 원인을 제공했다는 데 의의 또한 존재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은 '몽실'을 보며 고향에 대한 향수와 가족애, 삶에 대한 애착 등을 함께 공감하고, 그로부터 위안을 얻는다. 또한 작품 속에서 그녀가 느끼는 외로움 등을 보며 우리는 어린 시절의 우리들을 회상하고 감정을 정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몽실'은 자신에게 주어진 가혹한 운명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며 주저앉지 않고 힘껏 살아갔다. 그녀의 대견한 의지와 따뜻한 인간애는 험난한 시대 속에 우뚝 선 개인의 모습으로 형상화 되어 우리에게 많은 감동과 시사점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