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의원 도문스님은 백용성스님의 ‘아난’으로 알려져 있다. 스님은 젊은 시절 목숨을 건 정진으로 오도의 경지에 이른 선사였다. 50대 이후 할아버지 뻘 되는 용성스님의 유훈을 실현하는데 지금껏 신명을 바치고 있다. 은사인 동헌스님은 입적하면서 제자에게 백용성스님의 유훈을 받들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스님은 그 유훈을 초과달성했다. 그리고 얼마 전 조계종 원로의원에 선출됐다. 백용성 스님의 유훈을 실현하는 제자가 아닌 ‘원로의원 도문스님’을 만나고 싶었다.
“용성스님 유훈 실천만이 민족화합의 길”
용성스님 불교성지 가꾸고 불경 유포 등 ‘14가지 유훈’ 남겨
은사 뜻 받들어 20여년째 자신 드러내지 않고 온몸으로 실천
대진 고속도로를 타고 장수 인터체인지를 빠져나가면 왼쪽이 남원 방향이다. 30여분 가량 달리면 세 개의 산이 만나는 곳에 마치 새 보금자리와 같은 아늑한 터가 나온다. 백용성 스님이 태어난 곳이다. 조선 정조 때 전라감사 이서구가 ‘100년 뒤 대도인(大道人)이 이곳에서 태어나 조선왕조가 멸망한 뒤 나라를 구제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길지(吉地)다.
사진설명 : 1961년 동헌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도문스님은 1983년 은사스님이 열반하면서 부촉한 뜻을 이어 지금껏 용성스님의 유훈을 선양하고 실천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다.
이곳에 도문스님이 생가터를 복원하고 사찰을 지었다. 장수 죽림정사다. 일주문을 들어가면 오른쪽에는 용성스님 박물관이, 그 맞은편에는 교육관이 자리하고 있다. 경내 한 가운데 대웅전이, 그 뒤편에 복원한 생가터가 있다. 경내 곳곳에는 용성스님 오도송과 생전 말씀을 적은 현판이 걸려있다.
용성스님은?
▶3.1운동 33인 중 1명…불경 첫 한글번역…대각교 주창한 민족과 불교의 ‘큰스승’
용성스님은 3ㆍ1독립운동을 이끈 33인 중 1명이다. 불교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경전을 한글로 번역한 최초의 역경가이며, 위대한 포교사며, 선농일치의 조사선을 실천한 대선사이며 대각교를 주창한 사상가다. 한국불교 중흥과 새 나라의 지도 이념인 대각교를 창립해 사상혁신을 주창한 민족과 불교의 큰 스승이다. 후세 사람들이 백용성스님의 진가를 파악한 것은 전적으로 도문스님의 헌신적 노력 덕분이다. 그 가르침을 집대성한 곳이 죽림정사다.
1961년 동헌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도문스님은 1983년 은사스님이 열반하면서 부촉한 뜻을 이어 지금껏 용성스님의 유훈을 선양하고 실천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다. 용성스님이 남긴 유훈은 모두 14가지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가야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초전법륜지와 부처님이 태어나고 깨달음을 얻은 인도의 5대 불교성지를 가꾸고, 불경과 어록을 100만권이 넘도록 유포하며, 전 인류와 성불의 인연을 지으라는 과제다. 하나도 실현하기 힘든 과제를 스님은 모두 달성했다.
불경어록 편찬은 약속한 권수를 훨씬 넘겼다. 어딜 가든 누구를 만나든 스님은 ‘백용성 조사 유훈’ ‘만’(only) 강조하고 앞세운다. 자신의 이름 석자는 늘 뒷전이거나 숨긴다. 20여년을 오직 백용성 스님 유훈에만 매달리다 보니 사람들은 도문스님 하면 용성스님을 떠올린다. 덕분에 사람들은 잊혀질 뻔한 민족의 큰 스승을 되찾았다. 하지만 도문스님은 가려졌다. 스님이 의도적으로 감춘 것이다. 원로의원에 선출됐지만 스님은 여전히 용성스님만을 내세웠다.
용성스님과 도문스님의 인연은 출가 전 집안에서부터 맺어졌다. 도문스님의 증조부 사은(士殷) 임동수 거사는 용성스님 후원자이며 도반이었다. 용성스님은 도반에게 손자를 낳으면 ‘용성의 법’을 잇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사은 선생의 손자, 즉 도문스님의 속가 부친인 임철호 거사는 용성스님의 유발상좌다. 죽림정사에서는 용성스님이 윤봉길 의사에게는 목숨을 건 애국의 길을, 임철호 거사에게는 아들을 낳아 부처님 뜻을 잇도록 했다고 전했다. 도문스님의 출가와 그 뒤 유훈 사업은 이같은 인연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지난 21일 죽림정사에서 스님을 만났을 때 용성스님 이야기가 아닌, 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간청했지만 스님은 끝내 사양했다. 백용성 조사를 알리고 선양하는 유훈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스님에 관한 ‘스토리’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하나 둘 ‘수집’ 해야 했다.
12세때 화두결택 ‘인가’…젊은 시절 거침없는 정진으로 悟道 경지
스님은 한번 참선 정진에 들면 쥐가 다리를 파먹어도 모를 정도로 삼매에 든다. 스님의 공식이력에는 1946년 8월 만암 대종사로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화두를 결택 받고 인가 받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스님 나이 12세 때다. 스님은 당시 백양사에서 일주일을 꼼짝 않고 앉아 정진했다. 만암스님은 그 장엄한 광경에 탄복해 무조건 인가를 내렸다고 한다.
출가 전부터 〈사서삼경〉 〈주역〉 등 한학을 통달한데다 독실한 불제자의 집안에서 자란 스님의 정진력은 거침이 없었다. 만암스님에 이어 1949년 오대산에서 한암스님을 친견했다.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 화두를 결택 받았다. 한암스님은 소년에게 1년 뒤에 찾아오라고 했다. 하지만 소년의 눈에는 불타는 산야가 들어왔다. 그 말을 들은 한암스님은 ‘식(識)이 맑으면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갔지만 막상 이듬해 6.25로 전화(戰火)가 오대산에도 미치자 한암스님은 제자인 탄허스님에게 대신 인증하라는 말씀을 남긴다. 그 인연으로 도문스님은 6년 동안 오대산 월정사와 인연을 맺었다. 평창 극락사 등 말사 주지를 맡을 당시 전쟁으로 불탄 대적광전을 짓는데 큰 기여를 했다. 뒤이어 스님은 동산스님으로부터 ‘조주무자’(趙州無字) 화두를, 학선대선사로부터는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받았다.
1961년 은사인 동헌스님으로부터 시심마(是甚) 화두를 받고 그해 4월 창원 봉림사지에서 용맹정진 끝에 오도(悟道)에 이르렀다고 한다. 스님은 당시 이야기를 상세하게 전해달라는 간청에 “미묘한 법이라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도문이 오도했다’는 이야기가 여러 선사들에게 전해졌다. 전강 고암 등 당대 선사들이 모였다. 그 자리서 전강스님으로부터 판치생모(版齒生毛) 화두를 결택 받았다.
여러 선사들과의 인연 뿐만 아니라 학선 성호 운성 탄허 운허 등 여러 대강백으로부터 경전을 연찬하기도 했다. 선교를 두루 겸수한 것이다. 스님은 그러나 자신의 회상을 꾸리는 일보다 은사스님의 유훈을 받드는데 남은 여생을 다했다. 기자는 스님을 친견한 자리에서 “이제 유훈을 달성했으니 납자들을 지도하는데 전념하셔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다. 스님은 그러나 “용성 조사의 유훈을 실천하는 것 만이 사분오열된 이 민족을 하나로 모으고 민족의 평화와 동양 3국이 화합하는 길”이라는 말로 대신했다. 끝내 스승을 넘어서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처럼 스승의 유훈을 중히 여긴다면 스님도 제자들에게 남길 유훈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질문을 던졌다.
“스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유훈을 남기실 예정입니까”
“나는 안 해”
너무 힘들어서 당신 제자에게는 그 짐을 지울 생각이 없다고 한다.
장수=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chisan@ibulgyo.com
# 스님이 말하지 않은 ‘도문스님’
커피 파는 남루한 여인에
1970년대 500만원 ‘보시’
청소년-軍 포교도 지원
인터뷰 자리에 마침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주는 보조금을 전달하기 위해 면장과 실무 공무원이 스님을 만나고 있었다. 속가 부친 임철호 거사는 독립지사였다. 늘 일경의 감시 속에 살아야했다. 스님은 어릴적 부터 어른들이 회합하면 밖에서 망을 봐야했고 먼저 태어난 누이는 경찰의 갑작스런 단속에 놀라 세상을 떠나는 비운을 겪었다. 뱃속에서부터 골수에 맺힌 애국심과 민족정신은 스님을 지탱하는 또 다른 기둥이다.
백용성 조사 유훈 실천을 중시하는 도문스님.
스님의 자비심은 경계가 없다. 불쌍한 사람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사람 대접에도 극진하다. 1970년대 어느날 유훈실현사업회 사무실로 사용할 아파트 구입 대금을 갖고 계약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말죽거리 주변을 지나는데 아기를 업고 커피를 파는 남루한 여인을 만났다. 스님은 동행한 여동생을 먼저 보내고는 계약금을 전부 그 여인에게 주었다. 500만원이었다.
스님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청소년 학생 군포교에 많은 지원을 해왔다. 그 중에는 스님의 감화를 받아 사문의 길을 걸은 제자들도 많다. 동국대 총장 후보에 올랐던 보광스님은 고등학교 때부터 인연을 맺었다. 1980년대 불교의 사회참여를 불교사상적으로 뒷받침한 최초의 책 ‘앎의 해방, 삶의 해방’을 펴내 대학생과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학담스님은 도문스님이 서울대 불교학생회 지도법사로 있을 때 만났다. 공무원 불자연합회 창립을 이끈 핵심인물 감사원의 안홍부씨 역시 고등학교 때 도문스님을 만나 공무원 불자회 창립 도움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