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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빌립보서 마지막 설교를 하게 됩니다. 바울은 마지막 편지을 맺으면서 그동안 빌립보교회로 통해 받은 것에 다시 한번 감사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첫 번째 설교 할 때 말씀 드렸지만 로마감옥에 있는 바울과 빌립보교회와의 거리가 1800KM 정도라고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신앙의 스승인 바울을 뵙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형편상 성도들이 가지 못하고 후원헌금을 모은 것을 목회자인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냈습니다.
지금 같으면 바로 온라인으로 송금하면 그 즉시 통장으로 입금하면 되지요 그러나 빌립보교회를 대표해서 목회자인 에바브로디도 목사님께서 1800km되는 먼 거리를 고생고생하여 로마감옥에 있는 곳에 온 것입니다. 바울선생님! 얼마나 고생하고 계실까? 그래서 눈물어린 사랑의 헌금을 가지고 바울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을 만나 뵙고 여기 천국복음을 위해 헌금 가져 왔습니다.!!
이런 위로의 말을 듣는 바울이 어찌 빌립보성도를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울에게 전해 준 헌금이 적고 많음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서 죽을 날 만 기다리고 있지만 마음 만큼은 그져 풍성하기만 합니다. 그런 말이 있지요 밥을 먹지 않아도 넘 좋아 그냥 배부른 것 같다고 말하기 않습니까? 그만큼 바울은 마음에 부요함으로 가득 찬 풍성함이 넘치고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결론 분문말씀을 묵상하다보면 “풍성” 이란 단어가 4번이나 나옵니다. 17절 하반절에 풍성한 열매라고 했고 18절에도 풍부한지라..... 내가 풍족하니..... 19절에도 그 풍성한 대로 바울의 마음은 빌립보교회 때문에 참으로 풍성했습니다.
지금은 풍성한 계절 가을입니다. 지난 월요일 장성 노란꽃 축제가 있다고 해서 어머님 구경도 시켜드릴 겸 다녀왔는데 장성은 황룡강이 장성읍 중앙으로 흐르는 강줄기가 광주로 흘러내립니다. 그런데 황룡강 뚝 13.5KM를 노란 꽃길로 조성되었는데 그 풍성함이 장관입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차창 밖으로 보면 고개 숙인 벼의 황금 들녘, 풍성히 달려있는 감나무를 지나가는데 그져 풍성하기만 했습니다. 가을은 이처럼 풍성한 열매를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오늘 말씀을 보면 가을에 수확하는 풍성한 열매 같은 물질이 먼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물질이상의 풍성히 채워지는 영적 열매가 더 귀한 것입니다. 이것을 소유할줄 알아야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풍성함을 얻고 빌립보교회를 향하여 마지막 감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빌립보서 15번째 대미를 장식하면서 영적으로 채워지는 풍성함이 우리 주향성도 여러분께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1.바울에게 풍성히 채워진 열매란 빌립보교회가 괴로움을 참여하는데 있었습니다.
14절을 보세요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주향성도 여러분!! 이 세가지 유형중에 나는 어디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갈6: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2. 바울에게 풍성히 채워진 열매란 서로 나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5-16절......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그렇습니다. 풍성함으로 채어진 것은 서로를 나누므로 서로가 채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채워지고...... 빌립보교회가 채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 주고 받는 일에 참여하였다고 했습니다. 주고 받는 모습은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서로 주고 받으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무너지면 그 사회, 그 가정, 그 나라, 그 교회는 삭막해지고 결국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주기만 하고 살았다 그래서 “나는 받은 것이 없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나는 받기만 한다.” 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람은 주고 받는 일에 균형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 “나는 많은 것을 받았기에 그래서 주기도 해야 한다.” 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주기만 한다.” 거나, “나는 받기만 한다.” 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give and take’ 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인격적 관계가 형성됩니다.
고전 9: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바울은 고린도 교회성도들을 향하여 우리가 신령한 것을 주고 물질적인 것을 받았는다는 뜻입니다. 전도자 사도바울은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에게 영생의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치유해 주었습니다. 교회나 성도들은 말로 할수 없는 은혜를 받았습니까? 바울이 전하는 천국복음으로 삶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통해 받았던 그 은혜를 “그냥 감사합니다.” 말로만 갚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을 떠날 때에 고생할 터인데 조금이라도 물질을 모아서 “우리는 너무나 귀한 것을 받았습니다. 이거 약소합니다만 다음 마을에 전도할 때에 쓰십시오.” 하고 전도비용을 전도자 바울에게 드린 것입니다.
저도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4개 교회를 거쳐 왔지만 처음 기리교회에 있을 때 신학교 전도사시절 어렵게 살았습니다. 성도님들로 아시기에 당시 연로하신 오서분집사님께서 새벽기도하시면 많이도 아닙니다. 상추 조금 시금치 조금 고추조금 조용히 사택 앞에 놓고 가셨던 것이 지금도 선합니다. 주향교회를 개척하고 1년 후 되었을까요? 거제도 윤장로님께서 목사님 혹시 굶지나 않으실까 성미2 푸대를 보내주신 그 푸대가 지금도 제 머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어떤 은혜이겠습니까? 목사님 말씀을 받았기에 영적으로 부요했습니다. 그러나 받은 은혜 조금이라도 보답하겠습니다 그래서 보내주신 소중한 헌물이 아니겠습니까?
인색한 한 부자가 죽어 그래도 천국에 갔습니다. 천사가 세상에서 부자로 살았던 사람을 천국에서 살아갈 예비 된 집으로 안내를 했습니다. 가는 도중에 많은 아름다운 맨션을 통과해서 마침내 그의 집으로 인도되었는데, 그의 집은 천국 외곽의 한적한 곳에 있는 작고 낡은 집이었 답니다. 부자가 안내한 천사한테 항의하기를 “아니! 이럴 수 있어요? 왜 제 집은 이렇게 초라합니까?” 그때 천사가 말했답니다. “ 죄송합니다. 당신이 보낸 물질로는 이만큼 밖에 지을 수 없었네요.” 했답니다. 천국가면 다 상급이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야할지 교훈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풍성한 것으로 채워진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향하여 마지막 칭찬하기를 주고받은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는 없었다고 말합니다. 16절........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그러니까 빌립보교회 외에 다른 교회는 다 받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받았으면 주는 마음도 있어야 하는 데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지금 누구를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빌립보 교회를 칭찬하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는 다 인사가 없었으나, 이 빌립보 교회는 처음부터 받은 바에 대하여 보답을 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머물러 복음을 전할 때에도, 빌립보 교인들이 한두 번 쓸 것을 보내왔다고 합니다....... 빌립보 교회가 외부의 복음 사역을 돕는 일을 그처럼 자발적으로 신속하게 나서서 행하였던 것입니다.
주고 받는 기브앤드 테이크 이런 아름다운 모습이 우리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이런 풍성히 채워지는 부요한 열매 앞에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마지막으로 어떻게 합니까? 마음껏 하나님께서 영광 돌리고 빌립보교회를 위해 축복기도를 합니다.
20절.......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23절.....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바울은 그렇습니다. 전도자로써 빌립보교회를 세워 성도들로써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모든 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했습니다.
바울 자신은 그져 하나님앞에 쓰임 받은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자세입니다. 신실한 성도들이 신앙 간증을 통해 하나같이 하는 고백이 있지요?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Soli Deo Gloria “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의 울림고백이 있지요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이제 빌립보 성도에게 마지막 축복기도를 합니다. 이것은 예배의 대미를 장식하는 축도와도 같습니다.
성도여러분!! 축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창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리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축복의 권한을 주었다면 목사님만이 아니라 오늘 예배자로 여기 앉아 있는 모든 성도들이 축복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창세기 성경공부를 하면서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한 장면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야곱과 바로의 만남은 자주 만나는 사이가 아닙니다. 일생 일대 처음입니다. 그것도 요셉 때문에 야곱이 바로 앞에서 설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쉽게 지금으로 말하면 미국 같은 나라가 야곱당시 애굽 입니다. 그런데 애굽 왕 바로앞에 어떤 행위가 이루어졌습니까?
창47:10....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해주고 나온 것입니다.
이런 야곱의 당당함은 어디에 있었는가? 이삭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바로를 축복한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김승권목사가 미국 트럼프 대통령 앞에서 축복기도를 할 수 있다.......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기만 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이런 축복을 바로 왕에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누구든 축복 할 수 있습니다. 오늘 김승권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 기도를 예배 마지막에 두 손 들어 복을 빌 것입니다.
이런 축복기도가 우리자손들에게 서로를 위해 축복 기도를 하십시오.......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심령 가운데 있을지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