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950년, 만일염불계 만들어 극락 가기 앞장섰던 서응 스님
『연화(蓮花) 옥천(玉泉)의 향기』 (연화산 옥천사, 1999).
서응 스님은 1876년 2월 13일(음) 경남 고성군 개천면 원동리에서 태어났다. 원동리는 옥천사 인근 마을로 스님이 옥천사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서응 스님의 속성의 채蔡씨고 법명은 성태聖台 또는 동호東濠이고 서응瑞應은 집 이름(堂號)다. 양친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서응 스님이 어느 시기에 출가했는지 정확한 명문은 없다. 단지 1892년 12월 옥천사에서 용명龍溟 스님에게 통사를 수학하고, 1894년 영해影海 스님에게 고문진보를 배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10대 중반에 출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옥천사 영해 스님에게 사집과四集科를 수료한 것이 1895년 12월로 이때 스님의 세수는 19세였다. 이 같은 기록으로 볼 때 20세가 되기 이전에 출가 사문이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외전과 기초 교학을 익힌 스님은 이후 제봉 · 석전 · 금파 · 진응 스님 등 대강백 문하에서 『능엄경』 『화엄경』 『기신론』 『반야경』 등을 두루 익혔다.
이후 스님은 함양 영원사(1902), 순창 구암사(1904), 고성 옥천사(1905), 양산 통도사(1909, 1920), 합천 해인사(1915), 김천 청암사(1916), 동래 범어사(1925), 철원 심원사(1939) 강원 강주를 지냈다.
서응 스님 상좌는 조계종 초대 감찰원장을 지낸 문성汶星 스님이 있다. 또한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경남고 교장으로 정년퇴직한 이해도李海道 선생이 있다. 서응 스님이 남긴 문집 등 유품은 문성 스님 상좌인 수진 스님이 보관하고 있다.
1950년 상좌인 문성 스님이 옥천사 주지로 있었다. 문성 스님은 당시 청련암에 계신 서응 스님을 옥천사 큰절로 모셨다. 노환老患으로 몸이 불편한 은사를 주지실로 모시고, 당신은 옆방에서 지냈다. 효심孝心이 깊었던 문성 스님은 지성으로 간병 했다. 예전에는 대중이 모여 발우공양을 하더라도, 산중 어른 스님을 일일이 찾아뵙고 문안 인사를 올리는 예법이 있었다. 문성 스님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조석으로 문안을 드렸다. 그러던 8월 21일, 이날도 새벽 예불을 모신 후 스승 방을 찾았다. 문밖에서 ”스님, 스님”이라고 불렀지만, 방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몇 번을 불러도 답이 없자,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서응 스님은 가부좌를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원적에 들어 있었다. 좌탈입망坐脫立亡의 진면목을 보여준 것이다. 평생 후학을 지도하며 강 講을 했던 서응 스님은 임종게를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수행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마지막 가는 길에서도 보여주었다. 서응 스님은 1950년 8월 21일(음) 고성 옥천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세수 74세였다.
불경 이외의 속서와 불경에 능통하여 해박한 강백講伯으로 그 명성이 전국에 자자하였다. 불교 전문강원을 개설하여 학인이 전국에서 운집한 것은 옥천사 초대 주지로 그가 남긴 큰 업적이다. 그리고 늘 화제에 오른 것은 옥천사가 본사가 될 수 있었으나 당시 옥천사 총섭이었던 서응 스님이 중앙회의에 참석하여 본사로 배정되는 것을 극구 사양하여 통도사 말사가 된 일이었다. 당시에는 이 일을 지극히 잘한 것이라고 산중 대중이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였다. 서응 스님은 수순한 수행승의 입장에서 우두머리 되기를 사양하였던 것이나 뒷날에 와서는 매우 유감된 일이 되었다고 한다.
서응 스님은 평생토록 강백으로뿐만 아니라 율사로서 계행을 청정하게 지켰으며, 입적하실 때는 좌탈입망坐脫立亡하셨다고 한다. 지금 조사전에 그 진영이 모셔져 있다.
서응瑞應 스님은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에 청련암에 주석하면서 만일계萬日契를 결성하여 신행에 앞장섰던 스님이다. 만일계는 약 30년의 긴 기간인 1만일一萬日 동안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모여 염불하는 신앙 결사인 것이다. 먼저 동참할 사람을 모집하여 계의 기본이 되는 재산을 마련하고 그 수입으로 스님을 초빙하여 법문을 듣고, 하루 4회의 정진을 계속하는 모임이다.
옥천사에서 조직된 여러 계 가운데 가장 최근의 것이 1919년 10월의 청련암 만일계이다. 당시에 화주였던 서응당瑞應堂 채동호蔡東濠 스님이 지은 <고성 옥천사 청련암 만일계원 모집문>이 남아 있다.
▣ 「고성군 옥천사 청련암 만일계(萬日契) 계원 모집문」
대저 만일계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 인생이 이 고苦의 세상을 살다가 필경 이 몸이 죽은 후에 이와 같은 괴로운 세상에 다시 나지 말고 저 즐겁고 좋은 극락세계에 왕생할 뜻으로 30년 동안 장원長遠한 시간에 1만 일을 한정하고 염불하는 법사 스님을 모셔 놓고 날마다 네 번씩 아미타불 명호名號를 부르게 하며, 해마다 춘추로 두 번씩 아미타불님 전에 크게 불공을 올리고 개원되는 사람의 축원을 드리되 생전에는 수壽 · 부富 · 다남자多男子 하고 사후에는 극락세계 상지상품上之上品 연화대(蓮花)에 탄생하기를 발원하며 또한 선망 조상까지 동왕극락同往極樂 하기로 발원하는 것이 목적이다. (… 욱면 염불 이야기 생략 …) 참말로 염불 공덕은 어떻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도 본사 청련암에 만일계를 설시하고 30년 동안 염불을 모시오니 누구든지 극락 발원하시는 제씨께옵서는 이 계 중에 참여하시와 염불 많이 모시고 극락세계 왕생하시기로 천만 발의하나이다.
나무아미타불
을미년(1919) 칠월 십오일
화주化主 서응(蔡瑞應)은 고백하나이다.
아래와 같은 자세한 수행 방침을 정했다.
1. 30년, 곧 10,000일이라는 장구한 날을 정해 놓는다.
2. 염불하는 법사 스님을 모셔 놓고 하루에 네 번씩 아미타불 명호를 독송한다.
3. 1년에 봄,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아미타불께 불공을 올리도록 한다.
이러한 실천 수칙을 정하고 누구라도 신분을 막론하여 극락왕생 발원에 동참하여 염불을 많이 하기를 권하였다. 옥천사 청련암의 만일계는 곧 염불계이다. 염불계는 다른 말로 염불회라고도 하는데 한 사찰을 중심으로 염불 수행하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독송 염불하는 모임이다. 대개 만일을 기약하였으므로 만일회라고 하였는데, 그 모임을 유지하기 위해 약간의 토지와 돈을 거둬 수행에 필요한 경비로 충당하였다.
만일계는 일찍이 신라 때부터 이어왔다. … 한 예를 들어 1811년(11) 경북 오어사 吾魚寺에도 염불계가 만들어졌다. 이때 세운 염불계의 비문에 의하면 절의 승려들과 마을 사람 150명이 금전을 각출하고 계를 만들어 거기서 나온 이자로 토지를 매입, 그 수확으로 염불당을 유지했었다고 한다.
청련암 만일계의 화주 서응당은 이러한 염불의 공덕을 다시 한번 새기면서 무상가 無常歌를 지어 많은 사람이 함께 동참하기를 권하였다.
▣ 무상가(한자는 엮은이가 괄호 안에 넣음, 맞춤법 고치지 않고 띄어쓰기 함)
여보시오 동포同胞들아, 이 내 말슴 들어 보소. 인생人生이 초로草露 같고 만사萬事가 몽환夢幻이라. 하루라도 어서 밧비 무상無常을 깨치시고 염불念佛 속速히 하여 사바娑婆 고세상苦世上을 혼신 같이 보옵시고 구품연대九品蓮臺 저 극락極樂을 어서 빨리 가옵시다.
우주宇宙를 살펴보니 모두 다만 허환虛幻일새, 풀 끝에 이슬 보오. 해 돋으면 없어지고 춘삼월春三月 호시절好時節에 찬란燦爛한 저 꽃 보소. 불과不過 십일十日 못 다가서 낙화 되어 떨어지오. 천삼라만상天森羅萬象을 낱낱이 들고 보면 견고堅固한 물物 어데 있소. 천지天地도 마멸磨滅되고 해도 말라지오. 하물며 얼마나 견고堅固하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백년百年 살기 어렵도다. 설사設使 백년百年 산다 한들 백년百年이 잠간暫間이라. 해가 지고 달이 오며 달이 가고 날이 온다. 하루도 열두 시에 시각時刻도 머무잔코 생각생각生覺生覺 넘어가서 무상無常이 닥쳐온다.
이 말하는 이 사람도 어제같이 청년靑年으로 오늘 벌써 백발白髮이네. 아침 나잘 무병無病타가 저녁 나잘 못 다가서 손발 젓고 죽는 인생 목적目前에 번다頻多하다. 북망산천北邙山川 돌아 보면 노인老人 무덤뿐이신가. 소년少年 무덤 반半 치시오. 한무제漢武帝 옥당玉堂 보고 석숭石崇이 금곡金谷 보소. 어데 하나 남아 있소. 존비귀천尊卑貴賤 물론勿論하고 죽어 가는 저 날에는 금은옥백金銀玉帛 저 부귀富貴와 문장명필文章名筆 높은 명리名利 하나도 쓸데없고 고혼孤魂 독좌獨坐 돌아가오. 처자권속妻子眷屬 많지마는 어데 하나 따라가오.
세상만사世上萬事 이러하다. 염불공덕念佛功德 제일第一이네. 생전生前 적악積惡 짓는 인생 염부閻府에 잡혀가면 염라대왕閻羅大王 저 호령號令과 지옥地獄 아귀餓鬼 저 고생苦生을 염불력念佛力이 아니오면 뉘라서 적敵하리.
권勸하고 권勸하노니 어서 바삐 염불念佛하와 극락세계極樂世界 왕생往生하여 무상쾌락無上快樂 받읍시다.
나모아미따불(南無阿彌陀佛)
비구比丘 서응瑞應 동호東濠 계수발언稽首發願
卍 보정의 꼬리말
옥천사는 경남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연화산(055-672-0100)에 있는 절이다. 연화산蓮華山이 연꽃 산이니, 이미 아미따불과 인연이 있는 산이요, 서봉 스님이 지내시던 청련암도 연꽃과 인연이 있어 서봉 스님 같은 극락 간 이야기가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그리고 서봉 스님이 극락 간 청련암에는 ‘정토만일회’가 아직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 가운데 서응 스님은 극락에 갔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모셨다. 아쉽게 스님 행장이 없으나 『연화 옥천의 향기』에 단편적으로 실린 글에서 간단히 행장을 구성해 보고 스님이 남긴 글을 간추려 보니, 스님의 염불 수행과 극락발원이 충분히 배어 있었다.
계원 모집문과 무상가를 보면 스님은 극락에 대한 확실한 믿음(信)을 가지고 염불계 참가를 권하고 있다. 또 무상가에 보면 “이 말하는 이 사람도 어제같이 청년靑年으로 오늘 벌써 백발白髮이네.”라고 하여 스스로 말년에 극락을 가겠다는 발원(願)을 곧게 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입적할 때는 좌탈입망 했다고만 기록되어 있지만 그처럼 염불 수행한 스님이 앉아서 어떻게 했는지는 기록이 없어도 쉽게 알 수 있다. 서쪽을 향해 합장하고 염불했지 그냥 앉아 있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919년이면 바로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암울한 시절이었다. 이런 세상에 많은 사람에게 염불을 권하여 희망을 주고 자신도 절의 일은 열심히 하지만 명리를 버리고 정토 수행을 해 극락에 간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원아임욕명종시 진제일체제장애 면견피불아미타 즉득왕생안락찰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극락도사 아미타여래불 🙏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무량공덕 되소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