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7일, 지금의 우리말 있게 한 이 사람
한글 문법을 최초로 정리한 ‘독립지사’ 주시경
국가보훈처 누리집 독립유공자 공훈록을 살펴보면 최고 등급 건국훈장인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은 지사는 모두 30분이다. 다음 등급인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은 지사는 92분. 그리고 건국훈장 ‘독립장’ 822분, 건국훈장 ‘애국장’ 4347분, 건국훈장 ‘애족장’ 5777분, 건국포장 1331분, 대통령표창 3532분이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30분을 타계 연도순으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01. 민영환(閔泳煥, 1861~1905) 계몽운동
02. 조병세(趙秉世, 1827~1905) 계몽운동
03. 최익현(崔益鉉, 1833~1907) 의병
04. 이 준(李 儁, 1859~1907) 계몽운동
05. 허 위(許 蔿, 1854~1908) 의병
06. 이강년(李康秊, 1858~1908) 의병
07.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열투쟁
08. 강우규(姜宇奎, 1855~1920) 의열투쟁
09. 손병희(孫秉熙, 1861~1922) 3․1운동
10. 김좌진(金佐鎭, 1889~1930) 만주방면
11. 이승훈(李昇薰, 1864~1930) 3․1운동
12.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의열투쟁
13. 안창호(安昌浩, 1878~1938) 임시정부
14. 오동진(吳東振, 1889~1944) 만주방면
15. 한용운(韓龍雲, 1879~1944) 3․1운동
16. 김 구(金 九, 1876~1949) 임시정부
17. 김규식(金奎植, 1881~1950) 임시정부
18. 조만식(曺晩植, 1883~1950) 문화운동
19. 서재필(徐載弼, 1864~1951) 계몽운동
20. 이시영(李始榮, 1869~1953) 임시정부
21. 신익희(申翼熙, 1894~1956) 임시정부
22. 조소앙(趙素昻, 1887~1958) 임시정부
23. 김창숙(金昌淑, 1879~1962) 임시정부
24. 이승만(李承晩, 1875~1965) 임시정부
25. 임병직(林炳稷, 1893~1976) 미주방면
서른 분이라고 했는데 지금까지 스물다섯 분만 소개했다. 나머지 다섯 분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 중국인들이다. 그래서 운동 계열도 ‘의열 투쟁, 임시정부, 미주 방면, 계몽운동, 문화운동, 의병, 3 ․ 1운동’ 식이 아니라 ‘독립운동 지원’으로 분류되고 있다.
진기미(陳其美, 1876~1916) 독립운동 지원
손 문(孫 文, 1866~1925) 독립운동 지원
진과부(陳果夫, 1892~1951) 독립운동 지원
장개석(蔣介石, 1887~1975) 독립운동 지원
송미령(宋美齡, 1897~2003) 독립운동 지원
망국 이후 독립장 서훈자, 대한광복회와 의열단 많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 받은 분들은 권영만 ․ 김경태 ․ 김한종 ․ 김진만 ․ 우재룡 ․ 장두환 ․ 채기중 ․ 한훈 등 광복회光復會 단원들, 김상옥 ․ 김익상 ․ 김지섭 ․ 나석주 ․ 신채호 ․ 장건상 ․ 고인덕 ․ 곽재기 ․ 권준 ․ 김대지 ․ 김병태 ․ 박재혁 ․ 이종암 ․ 최수봉 ․ 한봉근 ․ 황상규 등 의열단義烈團 단원들. 그리고 김동삼 ․ 남자현 ․ 박열 ․ 박은식 ․ 신돌석 ․ 양기탁 ․ 여운형 ․ 이동녕 ․ 이동휘 ․ 이범석 ․ 이봉창 ․ 이상재 ․ 이재명 ․ 장인환 ․ 전명운 ․ 지청천 ․ 홍범도 등 맹렬한 지사들이다.
의열단 단원 중 김시현 지사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이 특이하다. 김시현 지사는 1923년 3월 의열단의 제2차 암살 파괴 거사 때 체포돼 1929년 1월 29일까지 5년 10개월 동안 대구형무소에서 수형 생활을 했다.
그는 풀려난 뒤 만주로 가서 다시 의열단 활동을 하던 중 변절자 한삭평을 처단했다. 그 일로 일본 나가사키 형무소에 4년 7개월 동안 수감됐다. 1939년 9월 출감한 그는 중국과 서울을 오가며 군자금을 모으고 동지를 규합하다가 1944년 4월 북경에서 일본 헌병대에 붙잡혀 경성 헌병대에 감금됐다. 그를 감옥에서 꺼내준 것은 19 45년 8월 15일 조국의 해방이었다.
김시현은 여운형 암살, 김원봉 월북, 김구 암살 등을 겪은 후 직접 정치에 뛰어들었다. 1950년 5월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고향 안동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러나 10만 명의 청년들을 굶어 죽게 만든 국민방위군 사건, 인원이 확인되지 않는 국민들을 무단 처형한 보도연맹 사건 등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패는 점점 더 기승을 부렸다. 김시현은 이승만을 제거해야 나라가 바로설 수 있다고 판단했다.
대통령 이승만 암살을 시도한 김시현
1952년 5월 민주국민당을 탈당한 그는 6월 25일 부산 충무동 광장에서 열린 전쟁 2주년 기념식에서 대통령 이승만을 저격하려다가 체포됐다. 이 사건으로 그는 사형을 언도받았는데,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있던 중 4월혁명으로 석방됐다.
김시현은 1960년 민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다시 당선했다. 하지만 국회의원 생활은 몇 달에서 멈췄다. 19 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이후 그는 대통령 암살 미수범이라는 이유로 지금까지도 독립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나라의 바탕을 보존하기에 가장 중요한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이 지경을 만들고 도외시한다면, 나라의 바탕은 날로 쇠퇴할 것이요 나라의 바탕이 날로 쇠퇴하면, 그 미치는 바 영향은 측량할 수 없이 되어 나라 형세를 회복할 가망이 없을 것이다. 이에 우리나라의 말과 글을 강구하여 이것을 고치고 바로잡아, 장려하는 것이 오늘의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 주시경 《국어문전음학》(1908) 중에서
오늘은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은 주시경周時經 선생의 생애를 돌아볼까 한다. 11월 7일이 그 분의 출생일이기 때문이다.
주시경은 1876년 11월 7일 황해도 봉산군 쌍산면 천산리 무릉골에서 부친 학원鶴苑, 모친 연안 이씨의 4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주소가 서울 중구 창동으로 기록돼 있다. 1914년 타계한 그는 1999년 7월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한글 풀어쓰기 등 혁신적 논리를 펼친 국어학의 선봉
주시경이 국어 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서당을 다니면서부터였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는데 선생이 꼭 한문을 소리대로 먼저 읽은 후 우리말로 뜻을 새겨주는 것이 기이했다. 우리글이 있는데 왜 어려운 한문을 이토록 힘들여 배워야 하는지 의아했고, 그 의구심은 주시경을 한글 연구의 길로 나아가게 만든 동기가 됐다. 그후 주시경은 배재학당에 진학했는데 세계 문명국들이 모두 자기 나라 문자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한글 연구의 중요성을 거듭 깨달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주시경은 《독립신문》 창간을 준비하고 있던 서재필과 만났다. 그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운명이었다. 서재필은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신문을 창간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주시경은 나라 안 단 한 사람의 한글전용론자였다.
주시경은 서재필이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하자 회계 사무 겸 국문 담당 조필助筆을 맡아 근대 인권과 민권 사상, 남녀평등 사상 등이 일반 민중에게 널리 전파되는 데 이바지했다.
주시경은 신문 발간에 필요한 맞춤법을 통일하려는 목적에서 ‘국문 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했다. 신문사 내에 만들어진 이 단체는 한글 연구와 보급의 단초를 열었다. 국문동식회는 1907년 1월 설립된 지석영 중심의 국문연구회, 같은 해 7월 학부 부설로 설치된 국문연구소 그리고 1908년 8월 주시경 본인이 국어강습회 졸업생들과 함께 조직한 국문연구회로 이어졌다. 뒷날 그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어연구회, 1931년 1월 확대 개편된 조선어학회, 해방 이후 한글학회로 계승되어 한글 연구와 보급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 후 주시경은 서재필이 주도하는 협성회協成會에 가입해 국민계몽운동에 앞장섰다. 또 그 무렵 규모가 가장 컸던 민족운동단체 독립협회 활동에도 뜨거운 열성을 보였다. 마침내 주시경은 한 해 뒤인 1896년 12월 21세 약관에 독립협회 지도부의 일원이 됐다.
그러나 1898년 5월 서재필이 수구파 정권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고, 11월 이상재, 정교, 남궁억 등 독립협회 간부 17명이 체포됐다. 이에 민중과 독립협회 회원들이 중심이 돼 종로 네거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중집회로 평가되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 반정부 ․ 반외세 투쟁을 펼쳤다. 이때 주시경은 양기탁, 이동녕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 운동을 이끌었다. 하지만 12월 들어 수구 정권의 기습 무력 탄압으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운동은 강제 해산되었고,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다.
주시경,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지도자의 한 사람
주시경은 몸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면서도 계속 한글을 연구했다. 그 결과 《국어문법》을 완성했고, 서울로 돌아온 후 을사늑약 체결 때까지 5년여 동안에도 한글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데 전력을 다해 학생용 교재 《대한국어문법》, 국어 문법 연구서 《국어문전음학》, 초등 국어교과서 《국문초학》 등을 펴냈다. 내각에 ‘국문 연구 의정안國文硏究議定案’을 제출하기도 했다.
주시경은 이때 종교도 기독교에서 대종교로 개종했다. 그러나 주시경 등 수많은 지사들의 계몽운동과 헤아릴 수 없는 의병들의 목숨을 던진 투쟁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라는 1910년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망국 이후에도 주시경은 ‘국어 사전’ 편찬 사업을 시작하고 《말의 소리》를 간행하는 등 한글 연구와 교육을 통해 독립 쟁취의 기초를 닦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하지만 한글 연구와 교육에 대한 쉼없는 몰두로 상해버린 몸과 망국으로 인해 내려앉은 정신으로 말미암아 주시경은 1914년 7월 27일 서울 수창동 자택에서 돌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불과 38세의 젊은 나이였다.
《두산 백과》의 ‘주시경’ 중 결론 부분을 인용함으로써 그의 출생일을 기려 실행한 짧은 공부를 마칠까 한다.
“주시경은 우리말의 문법을 최초로 정립하였다. 그의 저술인 《국문문법》 《대한국어문법》 《국어문전음학》 《말》 《국문연구》 《고등국어문전》 《국어문법》 《소리갈》 《말의 소리》 등은 우리말과 한글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했고, 국어에서의 독특한 음운학적 본질을 찾아내는 업적을 남겼다. 국어의 체계화, 표의주의 철자법, 한자어의 순화, 한글 풀어쓰기 등 혁신적 주장을 한 국어학의 선봉자였다.
그는 학교 및 강습소에서 많은 제자를 길렀는데, 특히 한글학의 후진으로 최현배崔鉉培, 김두봉金枓奉, 장지영張志暎 등 수많은 학자가 있다. 그의 개척자적 노력으로 오늘날의 국어학이 넓게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