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 순교자들 (19) 정인혁, 정복혜, 윤운혜
사학의 매파라 불린 연락책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1801년 3월 12일(음) 주문모 신부의 자수로 새로운 국면으로 가열되어 전개되기 시작했다. 주신부의 국문효수형은 4월 19일 새남터에서 집행되었는데, 주신부가 아직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고 있던 때인 4월 2일에 정철상, 최필제, 정인혁, 정복혜, 윤운혜, 이합규 등 6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이들 가운데서 정철상과 최필제의 순교는 이미 살펴본 바가 있다. 이제 주신부의 순교를 살펴보기 전에 정인혁, 정복례, 윤운혜의 순교를 살펴보자.
정인혁(鄭仁赫, ?~1801년) 다두는 어디에서 출생하여 어떻게 성장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다만 그에 대한 문초기록을 통해 그가 얼마나 열심한 신자였는지를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그는 1794년(정조 18년)에 백상옥이라는 교우로부터 천주교에 관해 전해듣고 곧 입교하여 교리에 따라 실천하는 열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당시 유명한 교우였던 최필제 베드로와 연락하면서 교회를 위해 일하였으며, 최창현 요한에게서 한글로 번역된 천주교 서적 5권을 빌려보기도 했다. 정인혁의 열심한 신앙생활은 모범이 되어서 그의 부친 정도홍과 형 정사혁도 그와 함께 최필공 토마스와 친교를 맺고 밤낮으로 상통하였다. 날이 갈수록 그의 신앙생활은 더욱 굳건해지더니 매월 7일에는 손경윤, 현계흠 등과 함께 김이우 바르나바의 집에 모여 천주교 교리를 강론하며 연구에 더욱 몰두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그들은 첨례에 참례하게 되었다. 이때 정인혁은 주변에 모여드는 여러 남녀 교우들과 교제하면서 교리에 대해 깊이 있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열성적인 신앙생활을 하던 그는 그가 경영하던 약국에 신자들을 은밀히 모아 교리를 강론할 정도로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3월 22일 다른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으로 압송되었다. 포청에서는 주문모 신부의 숨은 곳을 말하고 다른 교우들을 고발하며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정인혁은 평소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던 그 모습대로 더욱 영웅적인 신앙고백으로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그는 형조로 이송되었고, 형조에서는 그에게 사학을 신봉하면서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세상을 미혹하게 했다는 죄목을 씌워 사형을 선고했다. 그래서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정법에 의한 참수를 당하니 그때가 1801년 4월 2일(음)이었다.
정복혜(鄭福蕙, ?~1801년) 간디다도 이때 함께 순교했는데 그녀는 평민집안 출신으로 이합규에게서 교리를 배웠다. 신심이나 교리 이해의 정도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일반평민의 노인으로서 남의 이목을 끌지 않는다는 점을 활용하여 교회 안의 남녀교우들과 지도자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중개하고 연락하는 역할을 담당하여 교회활동을 크게 도운 여인이다. 그녀는 평범하고 작고 보잘 것 없었기에 무서운 박해 속에서도 감시를 피해 교우와 교우, 교회지도자와 교우 사이의 상호연락을 할 수 있었다. 작고 무시당해 이목을 끌지 못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었던 이 위대함을 보며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문초록'에 의하면 '그녀는 여러 천주교인과 연결되어 천주학에 깊이 빠져서 부녀들을 유혹하여 자신을 따르게 했다'고 한다. 또 그녀는 세례를 받은 다음 친지인 조예산의 집에 자주 왕래하면서 그의 부인과 여러 과부들과 함께 교회를 위해 많은 심부름을 했다. 그녀는 특히 이합규, 조예산, 정광수, 강완숙, 한신애 등 당시 교회의 지도자급 남녀교우들의 매파로서 모든 연락을 담당했으며, 그 가운데 특히 강완숙과 한신애를 도와서 많은 일들을 하였다. 그녀는 박해가 일어나고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자 교회서적과 물건들을 거두어 한신애에게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그녀는 박해 속에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염하고 묻어주는 등 교회 안에서 험하고 어려운 일들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이리하여 그녀는 '관변록'에서 소위 '사학의 매파'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정복혜 간디다는 박해 중에 체포되었지만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심문을 받고 원하던 대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윤운혜(尹雲惠, ?~1801년) 루시아 역시 이들과 함께 순교했는데 순교자인 정광수의 부인이다. 윤루시아는 순교자 윤유일의 사촌동생이고, 동정순교자 윤점혜의 친동생으로 경기도 양근에서 출생하였다. 그녀는 어려서 모친의 가르침으로 입교하고 결혼한 후 1799년에 서울로 올라와 살면서 교회 일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열성적인 여교우들과 왕래하며 천주교 서적과 성화를 제작하여 판매하는 일을 도왔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한때지만 주문모 신부를 집에 모시고 미사를 봉헌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등 신심을 더욱 깊고 확고하게 했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이들 부부는 체포되었고 포청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인 정광수는 조정의 결정에 따라 고향인 여주로 이송되어 12월에 처형되었고, 오히려 부인인 윤운혜가 먼저 서소문 밖에서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순교의 피를 흘리며 승리의 장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가톨릭신문, 2001년 7월 22일, 김길수(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