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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미산 원문보기 글쓴이: 정진웅(금구)
소몰이 노인과 무학대사
정 대신들과 천도를 결정하고 무학대사에게 도읍지를 찾아달라고 청했다.
산세와 지세를 살폈으나 아무래도 도읍지로는 적당치 않았다.
발길을 북으로 옮겨 한양에 도착한 스님은 봉은사에서 하룻밤을 쉬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뚝섬 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니 넓은 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들고 돌아보니 길 저쪽으로 소를 몰고 가는 한 노인이 채찍으로 소를 때리며 꾸짖고
있었다.
좋은 곳 다 놔두고 엉뚱한 곳만 찾아다니니 어찌 미련하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소.』
제 소견으로는 이곳이 좋은 도읍지라고 보았는데 노인장께서 일깨워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더 좋은 도읍지가 있으면 이 나라 천년대계를 위하여 일러주시기
바랍니다.』
스님은 가벼운 걸음으로 서북쪽을 향해 10리쯤 걸었다.
그때 스님이 당도한 곳이 바로 지금의 경복궁 근처였다.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하여 도성을 쌓고 궁궐을 짓기로 했다.
삼각산 중바위(인수봉)는 노승이 5백 나한에게 예배하는 형국이므로
성을 바위 밖으로 쌓으면 나라가 평안하고 흥할 것입니다.』
인수봉 안으로 성을 쌓아야 한다고 강경히 주장했다.
태조는 입장이 난처해졌다.
존경하는 스님의 뜻을 따르고 싶었으나 일등 개국공신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불교가 결코 흥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도전 일파 역시 인수봉 안으로 성을 쌓아야 유교가 흥할 수 있다는 지론이었으므로
무학대사 의견에 팽팽히 맞섰던 것이다.
날을 잡아 제사를 지낸 이튿날이었다.
밤새 내린 눈이 봄볕에 다 녹아내리는데 축성의 시비가 일고 있는 인수봉 인근에
마치 선을 그어 놓은 듯 눈이 녹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도성을 인수봉 안으로 쌓아야 한다고 거듭 주청했다.
빙 둘러싼다는 울타리〔圍〕의 「울」자를 써서
「설울」이란 말이 생겼고 점차 발음이 변하여 「서울」로 불리워졌다는 설이
있다.
갈 「왕(往)」자와 십리(十里)를 써서 「왕십리(往十里)」라고 불렀다.
바로 풍수지리에 능했던 도선국사의 후신이라 한다.
도선동은 1959년부터 행정동명으로 불리다가 1963년 법정동명이
됐다.
주위에는 송림이 울창했다고 하나 지금은 주택가로 변해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청련사 밑에는 무학과 발음만 같고 글씨는 다른 무학봉이 있고
이 이름을 딴 무학초등학교가 있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무학봉에서 도선국사가 수도했다는 전설도 있어
왕십리는 도선·무학 두 스님의 인연지인 것 같다.
무악재는 무학 스님의 이름에서 연유한 「무학재」가 변한 것이고,
청량리는 청량국사에서 비롯된 지명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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