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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야구용품싸게사기 원문보기 글쓴이: 오포교
나인빅스 최수정 감독이 회사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최 감독은 IT업계에서 꽤 유능한 컨설턴트로 꼽히는 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기자) |
중역은 대기업에 다니던 30대 중반의 여성이 갑자기 벤처기업에 오겠다는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무슨 영문으로 대기업을 그만뒀는지 속사정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면접은 면접. 개인적 질문을 할 순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력과 경력을 볼 때 앞에 앉아있는 여성은 꼭 뽑아야 하는 인재였다. 중역이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최수정 씨. 혹시 내가 이 일을 하는데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다, 인생에서 이건 절대 놓칠 수 없다, 뭐 이런 게 있으시다면 이야기해보십시오.”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 있던 최수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요? 좋습니다. 그게 뭔지 이야기해보세요.”
중역은 최수정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했다. 최수정은 증언대에 선 증인처럼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요. 주말에 야구하는 건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것만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중역의 두 눈이 레인코트 단추처럼 동그래졌다.
“네? 뭐요? 야구요?”
대단한 답변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답변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터였다.
“사실 전(前) 직장을 퇴사한 것도 주말에 야구하는데 지장이 많기 때문이었어요. 제가 모시던 상사님은 주말에 회사에 나와 회의하시는 걸 좋아하셨어요. 토요일에 자꾸 회의를 잡으시는 바람에 제가 주말마다 뛰는 여자야구팀 ‘나인빅스’의 훈련에 번번이 불참해야 했어요. 가뜩이나 제 위치가 장비 담당이라, 제가 훈련에 불참하면 팀원들이 겪어야 하는 애로 사항이 한둘이 아니에요. ‘이래선 도저히 안 되겠다’싶어 회사를 옮길 결심을 했는데, 여기서도 주말에 일해야 한다면 무척 버거울 것 같습니다.”
중역은 한동안 넋이 나간 표정으로 최수정을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게 야구 때문에 대기업 문을 박차고 나왔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남성이라도 납득이 안됐을 일이지만, 최수정은 여성이었다. 그것도 야구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는 지극히 평범한 여성이었다.
3번의 수술로도 막을 수 없는 야구 사랑 김은영이 남자 사회인 야구선수를 향해 투구하는 장면. 김은영은 최수정과 함께 베이스볼아카데미와 심판아카데미를 수료한 여자야구계의 대표적인 이론가다(사진=스포츠춘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김은영(37)은 과거 육상 단거리 선수였다. 중앙대 재학 시절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참가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그런 연유일까. 30대가 돼서도 운동신경과 몸 관리만은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잠시 잊은 게 있었다. 육상과 야구는 전혀 다른 메커니즘의 스포츠란 점이었다. 김은영은 수술대에 오르고서야 그 차이점을 뼈저리게 느꼈다.
“여자야구팀 ‘나인빅스’에서 주전 포수로 뛰었어요. 그러다 경기 중 무릎 전방십자인대를 다쳐 수술을 받았어요. ‘수술했으니까 이제는 괜찮겠지’하는 마음으로 무릎이 낫자마자 다시 그라운드에서 뛰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무릎 후방십자인대를 다쳤지 뭐에요. 육상이 직선 운동인데 반해 야구는 좌측으로 뛰는 회전운동이란 걸 깜박했던 거예요. 사실 특정 운동을 하던 선수가 다른 종목의 운동을 하면 근육의 움직임이 달라지거든요. 애초부터 야구를 하려고 마음먹었으면 야구에 맞는 근육들을 만들어야 했는데, 그걸 소홀히 한 탓이었어요.” 김은영의 후회다.
하지만, 김은영은 후회를 교훈으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후회를 회한으로 여기고, 또다시 그라운드에 섰다. 결과는 혹독했다.
“다시 수술하고 나서 경기에 나섰어요. 3루를 도는데 스파이크에 뭐가 걸렸는지 이번엔 아킬레스건이 끊어지고 말았어요. 무릎이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뛴 게 문제였던 모양이에요. 지금도 재활을 꾸준히 하고 있지만, 무릎 수술 2번, 아킬레스건 수술 1번을 받으면서 지금은 전력으로 뛰지 못해요. 당연히 경기에 출전도 못 합니다. 요즘은 가끔 ‘내가 왜 야구를 시작했나’ 싶기도 해요.”
김은영의 후회가 진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아니었다. 김은영은 여전히 야구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나인빅스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어디든 달려가고, 주전 포수로 뛸 때보다 더 활발히 팀을 이끌고 있었다. 3번의 수술로 그라운드에 설 수 없는 그가 도대체 어떻게 야구를 하는지 궁금했다.
“꼭 손과 발로만 야구하나요. 입도 있잖아요. '화이팅'하고 외치는 것도 팀플레이 가운데 하나랍니다."
야구를 사랑했던 두 이의 운명적인 만남 여자야구 선수들은 단순히 야구를 즐기는 차원을 넘어 야구를 연구한다. 프로 선수들처럼 훈련할 때는 온힘을 다해 노력한다. 한국 여자야구가 이른 시일 안에 발전한 원동력이다(사진=스포츠춘추)
최수정(36)은 충남여고 1학년 때 야구와 처음 만났다. 야간자율학습 때 우연히 들은 야구중계에 매료됐다.
"야구용어와 규칙이 생소했지만, 라디오 중계를 들으면 들을수록 재밌었어요. 그러다 야구장에 처음 갔는데 파란 하늘과 푸른 잔디가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때부터 열혈 야구팬이 됐어요."
야구의 재미에 푹 빠진 최수정은 가끔 남동생들과 함께 배팅 연습장에 놀러 가 동전을 넣고 직접 타격을 하기도 했다.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한 뒤엔 동기들과 캐치볼을 하며 야구를 즐겼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여성은 '보는 야구'에만 치중해야 했다. '하는 야구'를 직접 경험할 기회와 무대가 전무했던 까닭이다. 직접 그라운드에서 뛰고 싶었던 최수정도 대학 시절 인터넷을 통해 여자야구팀을 찾았지만, 한팀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던 2004년. 최수정은 TV를 통해 여자야구팀 '비밀리에'의 존재를 알았다. 최수정은 곧바로 인터넷으로 비밀리에를 검색했다. 그리고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비밀리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꿈에 그리던 야구를 직접 경험할 기회가 생겼으니 지체할 이유가 없던 셈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30살이었다.
최수정이 ‘비밀리에’에 입단하고 일주일이 지났을 때. 이번엔 김은영이 비밀리에의 문을 두들겼다. 사실 김은영은 야구 문외한이었다. 체육교육과 출신으로 많은 종목을 직접 경험했지만, 야구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러던 2004년 가을. 길을 지나다 TV에서 여자야구팀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보게 됐다.
당시 김은영의 첫 반응은 '어, 여자들도 야구하네'였다. 다음날 인터넷 검색창에 무심코 '여자야구'를 쓴 김은영은 TV에 출연한 여자야구팀이 비밀리에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정작 김은영의 시선을 끈 건 비밀리에의 국제대회 성적이었다.
2004년 7월 일본 도야마현 우오즈시에서 열린 제4회 여자야구 월드시리즈에 한국 대표팀 자격으로 출전한 비밀리에는 8개 출전국 가운데 최하위를 기록했다. 특히나 일본에 0대 53으로 패하며 체면을 구겼다. 비밀리에가 예선 홍콩, 일본, 캐나다전을 단 10명의 선수로만 치르고, 당시 한국 여자야구 수준이 한참 떨어진다는 걸 몰랐던 김은영으로선 충격 그 자체였다.
"당시 한국이 일본에 절대적 열세인 스포츠 종목은 많지 않았어요. 체육인으로서 그걸 자부심 삼아 살아왔죠. 그런 상황에서 한국이 일본에 0대 53으로 졌다는 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어요. 속으로 '야구 참 별 거 아닌 모양이네'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날 바로 비밀리에에 가입했어요. 꼭 한번은 내 손으로 일본을 누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죠."
직접 야구를 하고 싶다는 소박한 희망으로 여자야구단의 문을 두드린 최수정과 일본에 설욕하겠다는 다짐으로 야구에 입문한 김은영은 그렇게 운명처럼 비밀리에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어쩌면 두 이의 만남이 앞으로 펼쳐질 한국 여자야구 역사의 새로운 시작인지 몰랐다.
여기서 잠시 한국 여자야구의 역사를 살펴보자.
한국 여자야구의 역사 한국 여자야구계의 히어로 안향미의 중학생 시절
한국 최초의 여자야구단을 2004년 창단한 비밀리에로 아는 이가 많다. 그러나 아니다. 실은 그보다 79년 전에 여자야구단이 있었다. 바로 마산 의신여학교였다. 실제로 한국 야구사엔 1925년 3월5일 의신여학교 14명의 학생이 경남 진주로 원정을 떠나 시원여학교 학생들과 야구경기를 펼쳐 48대 40으로 이겼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명실 공히 한국 최초의 여자야구 경기가 여학교 사이에서 열린 것이었다.
마산 야구의 산증인인 이호헌 씨는 "의신여학교와 시원여학교의 경기가 우발적인 친선경기처럼 알려졌지만, 의신여학교 학생들은 별도의 야구클럽을 조직해 주기적으로 캐치볼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 씨는 "당시 의신여학교엔 외국인 선교사가 많아 이들로부터 야구 글러브와 공 등을 지원받아 여학생들이 야구를 즐겼다"며 "다른 여학교에 야구클럽이 없어 의신여학교 자체에서만 야구를 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열린 여자야구팀의 첫 공식경기는 무엇이었을까.
1925년 11월 23일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미국여자야구단과 서울군과의 경기였다. 동아일보 주최로 열린 이 경기엔 애초 미국여자야구단 19명과 노장 선수들로 이뤄진 서울군 12명이 출전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일본 원정경기를 마친 미국여자선수가 5명만 서울에 도착하면서 일이 꼬였다. 설상가상으로 5명 가운데 3명은 멀미 등을 호소하며 컨디션 저하로 출전이 취소됐다. 미국 여자선수 2명만 출전이 가능해지자 경기는 무산 위기에 처했다.
결국, 미국여자선수는 2명만 출전하고, 나머지 포지션을 미국인 스태프와 서울 거주 일본인들이 맡는 것으로 결정하며 경기는 우여곡절 끝에 열리게 된다. 상대가 여자임을 고려해 노장 선수 위주로 구성했던 서울군은 즉시 선수를 대폭 교체해 최강의 전력을 갖췄다. 결과는 7대 5 서울군의 승리.
미국여자선수는 단 2명만 참가했지만, 어쨌거나 미국여자야구단의 이름으로 경기를 치른 만큼 이 경기를 한국에서 열린 여자야구팀의 첫 공식경기로 보는 것도 무방할 듯싶다.
1925년 11월 23일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미국 여자야구단과 서울군과의 경기 장면. 미국 여자야구 선수 루스가 타석에 서 있다 |
이게 끝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80년 전 한국 여자야구선수가 국외 무대에서 뛰었다는 사실을 아는 야구인은 드물다. 김윤택이 주인공이다. 이화여전 출신의 김윤택은 중국 북경 연경대학 의학과에 재학 중이던 1931년 학교 야구팀의 일원으로 맹활약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김윤택은 이화여전 당시에도 1루수로 명성이 높았던 조선여자로, 중국에서 스포츠 선수로 더욱이 야구선수로서 국외에서 활약하는 첫 사례'라고 비중 있게 보도했다.
이 기사를 통해 이화여전에도 여자야구부가 있었고, 김윤택이 중국에서도 화제가 될 만큼 야구선수로 명성이 높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 여자야구의 역사는 발전보단 단절로 흘러갔다. 2004년 비밀리에가 창단할 때까지 여자야구팀은 한 팀도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기회가 없진 않았다. 1963년 일본 여자연식야구계의 강호 ‘사론 파스’가 방한 경기를 가졌을 때였다. 당시 사론 파스는 국내 모 신문사의 초청으로 부산과 서울에서 한국 여자야구팀과 친선경기를 가질 계획이었다. 주최 측은 국내 여자야구팀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소프트볼에 능하거나 체육에 소질이 있는 여성들을 모아 팀을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슨 여자가 야구냐’는 야구인들의 비협조와 조소로 결국, 남자중학교 팀들과 맞붙도록 했다.
사론 파스는 여자야구팀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의 준수한 실력으로 한국 중학교 팀들을 차례로 제압했다. 여자야구선수들을 보려고 구장을 찾는 이가 늘고, 언론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면서 사론 파스의 방한 효과는 곧 여자야구붐으로 이어질 듯싶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사론 파스의 입국을 반대했던 대한체육회와 사론 파스의 입국을 허가한 문교부(현 교육과학기술부)가 다툼을 벌이면서 여론의 관심은 두 단체 간의 불협화음으로 모아졌다. 결국, 사론 파스는 조용히 방한경기를 소화하고서 일본으로 돌아갔고, 기대했던 여자야구 붐은 조성되지 않았다.
이후 여자야구는 세간의 화제가 되지 못했다. 여기다 한국 체육이 올림픽, 아시아경기대회 등 국제대회 채택 종목 위주로만 강화되며 소프트볼이 흥하게 되자 여자야구는 태동조차 꿈꾸기 어려워졌다.
한국 여자야구의 부흥 포수 최수정의 포구 장면. 프로선수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자세다(사진=스포츠춘추)
2004년이 되면서 기나긴 여자야구의 동면도 조금씩 끝을 맺어간다. 이때 봄 역할을 한 이가 안향미였다. 대한야구협회에 공식으로 등록된 최초의 여자선수였던 안향미는 서울 영동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해 경원중, 덕수정보고를 거치며 투수로 뛰었다.
덕수정보고 3학년이던 1999년 4월 30일 배명고와의 대통령배 4강전에선 선발투수로 등판, 1회 첫 타자를 상대해 몸에 맞는 볼을 기록하며 한국 야구 사상 최초로 공식경기에서 남자선수와 대결을 펼친 주인공이 됐다.
그러나 고교 졸업 후, 대학과 프로에서 동시에 외면당하며 2002년 일본 도쿄의 여자 사회인 야구팀 ‘드림 윙스’에 입단했다. 대형 마트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야구를 계속 했던 안향미는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가 여자야구팀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안향미에게 큰 힘이 돼준 이가 동갑내기 장현주였다. 평소 야구를 좋아했던 장현주는 중 3때부터 안향미와 편지와 전화로 우정을 쌓았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나고서 두 이는 여자야구팀을 만들기로 의기투합했다. 그래서 탄생한 팀이 바로 ‘비밀리에’였다.
팀 명은 장현주가 지었다. 비밀리에는 ‘Baseball Is My Life(야구는 내 인생)’라는 문장에서 각 단어의 앞글자(BIML)들을 조합해 만든 것이었다. 4명으로 시작한 비밀리에는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회원 수를 늘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비밀리에는 2개 팀으로 분화한다. 두 팀은 서로 다른 팀이면서도 같은 팀 명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해 7월. 안향미가 이끈 비밀리에는 일본에서 열린 제4회 여자 야구 월드 시리즈에 초청받아 한국 대표팀 자격으로 출전한다. 결과는 전패. 특히나 일본전에서 0대 53으로 패하며 세계 여자야구의 높은 벽을 실감한다.
그러나 비밀리에는 좌절하지 않았다. 어느덧 회원 수는 40명을 넘었고, 팀을 도와주겠다는 이들도 늘었다. 회원들의 열의도 대단했다. 주말이면 산골 벽지에서 서울로 상경하는 회원부터 시작해 부산, 전주 등 전국 각지에서 훈련에 참가하기 위해 회원들이 몰려왔다.
비밀리에로 시작된 여자야구에 대한 관심은 지방 여자야구팀의 창단으로 이어졌다. 2004년 4월 부산에선 여자야구단 ‘빈’이 창단했다. 이듬해인 2005년에는 대구에서 ‘로얄패밀리’가, 서울에선 ‘수’가 창단했다. 양적인 발전을 거듭하던 비밀리에 역시 그해 5월 12명이 탈퇴해 나인빅스를 창단하면서 또 한 번의 분화 과정을 겪는다.
나인빅스는 창단식에 기존 여자야구팀을 초청했다. 주변에선 '12명이 탈퇴해 만든 나인빅스의 초청을 비밀리에가 받겠느냐'는 우려를 나타냈다. 하지만, 기우였다. 비밀리에는 나인빅스의 창단식에 참가한 것과 동시에 창단 기념 경기의 상대가 돼줬다. 경기가 끝나고서 전국의 여자야구팀은 족발집에 모여 서로의 우정을 다졌다. 이는 여자야구에서만 볼 수 있는 단결의 힘이었다.
지난 1월 부산 엔젤스가 창단하며 여자야구팀은 현재 25개 팀으로 늘어났다. 한국여자야구연맹에 소속된 선수만도 이제 518명이다. 여자야구가 ‘생경한 스포츠’에서 점점 ‘익숙한 스포츠’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야구는 그들에게 무엇인가 나인빅스 여자야구 선수들은 야구를 통해 인생의 참맛을 느끼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최수정은 순조롭게 벤처회사에 입사했다. 주말마다 걱정 없이 야구를 하고 싶다는 바람을 이뤘다. 김은영은 가족의 걱정에도 여전히 야구장에 나와 팀 동료를 독려한다. 어째서 그들은 미래가 보장된 대기업을 나오면서 그리고 잦은 부상에도 야구에 매달리는 것일까.
최수정과 김은영은 “그저 야구가 좋아서”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 사랑하는 건 자신들의 인생이었다.
두 이는 2004년 11월 잠실구장에서 열린 일본여자야구팀 '애틀랜타 96'과의 친선경기를 잊지 못한다. 당시 두 이는 비밀리에 소속이었다.
“국외 여자야구팀과의 경기는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잠실구장에서 전광판 켜놓고 경기를 벌이니까 무척 흥분되더라고요. 하지만, 정말 흥분한 건 애틀랜타 96팀의 구성원들을 보고서였어요. 투수인 18살 학생부터 1루수인 환갑 넘은 할머니까지 팀 구성원이 다양했어요. 특히나 1루수 할머니가 정말 멋졌어요. ‘나도 저 나이에 좋아하는 야구를 계속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인생이 행복할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랬다. 최수정이 인생에서 중요하게 여긴 건 명함에 새겨진 회사명이 아니었다. 최고의 명문대 졸업장은 더욱 아니었다. 그는 평생 좋은 사람들과 어울려 좋아하는 운동을 계속 하며 사는 것을 인생의 최대 가치로 두고 있었다. 김은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인빅스 창단 시 팀원이 12명이었어요. 누가 한 명이라도 나오지 않으면 팀 운영이 어려울 수 있었어요. 하지만, 정말 주마다 한 명도 빠지지 않고 훈련에 참석했어요. 천안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는 팀원도 매주 서울에 올라와 줬어요. 이렇게 열심인 사람들을 보면서 저도 빠질 수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친자매 같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제가 3번 수술을 하고도 유니폼을 입는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현재 나인빅스의 팀원은 31명이다. 20살부터 44살까지 선수들의 연령층이 천차만별이다. 직업도 IT 컨설턴트, 대학강사, 물리치료사, 오퍼상, 메이크업 아티스트 등 매우 다양하다. 다른 팀엔 어머니와 딸이 함께 선수로 뛰기도 한다.
최수정은 “31명의 팀원 가운데 기혼자가 3명이나 된다”고 귀띔했다. 미혼자라면 모를까 기혼 여성이 주말마다 훈련과 경기에 참여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야구가 남녀노소에 차별을 두지 않듯 유니폼을 입는 덴 미혼과 기혼의 차이는 무의미했다.
나인빅스의 최연장자 박향주(44). 그러나 타석에 선 그는 나이를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생기가 넘친다. 지난해 팀으로부터 실력향상상(賞)을 받을 만큼 야구에 열심이다(사진=스포츠춘추) |
하지만, 박향주는 남편의 든든한 후원을 등에 업고 나인빅스에서도 알아주는 열혈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원래 남편이 어렸을 때 야구선수가 되려고 했대요. 하지만, 집안 반대로 공부에 전념했대요. 제가 처음 야구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남편은 반대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나인빅스가 어떤 팀인지 보러 갈 때 저와 동행해줬어요. 제가 나인빅스에 가입한 이후로는 항상 저와 함께 구장에 나와줬고요. 직접 카메라를 들고 사진도 찍어주고, 친형부처럼 정말 자상하게 팀원들을 도와줬어요.”
많은 기혼 여자야구선수가 남편의 내조를 받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시어머니였다.
“글쎄요. 다른 집은 모르지만, 우리 시어머니께선 처음부터 반대하지 않으셨어요. 남편과 제가 워낙 운동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계셨거든요. 특히나 남편의 도움이 컸어요. 저 혼자 주말마다 구장에 나갔다면 어머니가 싫어하셨을 수도 있겠지만, 항상 남편과 같이 나갔기 때문에 ‘둘이서 재밌게 놀다 오는구나’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셨어요. 요즘은 제가 대회에 나갔다가 우승하면 어머니가 ‘참 잘했다’하시면서 저보다 더 기뻐하세요.”
박향주는 보다 많은 기혼 여성이 야구를 접하길 바란다. 얻는 게 무척 많다고 믿기 때문이다.
“야구를 하면서 계속 실력이 발전한다는 걸 피부로 느껴요. 다른 종목이라면 그걸 저 혼자 만족하겠지만, 야구는 팀 스포츠이니까 실력이 늘 때마다 ‘팀을 위해 내가 뭔가를 기여한다’는 만족감과 자존감을 생겨요. 살면서 그런 감정을 느낄 기회가 참 적잖아요. 40대 중반인 저 같은 아줌마가 20대와 스스럼없이 어울려 영화도 보고, 밥도 함께 먹는다는 것도 기쁨이에요. 제가 언제 딸뻘 되는 애들과 ‘언니, 언니’하며 지낼 수 있겠어요. 뭐랄까. 하루하루 젊게 산다는 기분을 느껴요. 무엇보다 팀이 이길 때 굉장한 기쁨을 맛봅니다. 그럴 때면 사회생활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단번에 풀리는 기분이에요.” 한국 여자야구 대표팀의 일원이자 국제야구연맹 여자야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인 최수정(사진=스타폭스 조현득 기자)
여자야구의 고통과 묘안들
흔히 여자야구를 이야기할 때 열악한 야구 인프라와 주변의 야구 인식 부족을 발전의 저해 요소로 꼽는다. 하지만, 그건 여자야구에만 국한된 레퍼토리가 아니다. 한국 아마추어 야구계 전체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그나마 여자야구는 남자 사회인야구보다 낫단다. 주변의 도움과 협조가 많기 때문이다. 나인빅스를 포함해 4개 팀이 뛰는 부평국화리그엔 구장 사용료가 없다. 부평생활체육연합회 임영렬 회장이 여자야구의 열악한 현실을 절감하고, 구장을 선뜻 내줬기 때문이다. 현재 4개 팀은 공값, 기록비, 심판비만 부담한다. 한 리그에 참여하려면 수백만 원을 내야 하는 남자 사회인 야구팀에 비해 환경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평상시가 문제다. 리그 경기와 대회가 없으면 여자야구팀 역시 가혹한 현실에 내몰린다.
최수정은 연습 구장을 구하는 걸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주말마다 실제로 ‘구장 구하기 전쟁’이 벌어진다. 야구 인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남자 사회인야구팀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데다 리틀야구도 활황이기 때문이다. 자칫 주말에 구장을 구하지 못했다간 떠돌이 신세가 된다.
“대부분 구장을 사회인야구팀이 이미 예약한 상태에요. 여자야구팀들은 주로 초등학교 야구부가 있는 학교를 섭외해요. 초교 감독님이 힘있는 분이면 섭외가 쉽지만, 교장 선생님이나 학교 행정실의 입김이 센 학교는 섭외가 정말 어려워요. 설령 감독님이 ‘OK’ 사인을 내도 막상 운동장에 가면 학교 직원분들이 ‘나가라’고 하기 일쑤에요. 다른 이유가 있으면 모르겠는데, ‘야구는 위험해서 안 된다’고 하시면 정말 속상해요. 어떤 학교는 ‘시끄러워서 안 된다’고도 하시는데요. 그러면서 조기 축구는 허락하시는 걸 보면 좀 서운해요. 축구나 야구나 똑같은 스포츠잖아요.”
문제는 야구 인프라 부족이 여자야구의 규정마저 바꾼다는 것이다. 국제 여자야구대회에선 일반 성인규격의 구장에서 경기를 치르고, 규정 역시 똑같이 적용한다. 하지만, 지난해까지 한국은 달랐다.
여자야구팀들이 주로 초교 구장을 쓰다 보니 대회 역시 장충리틀야구장에서 열리기 일쑤였다. 일반 구장을 사용해도 초등야구 기준에 맞춰 펜스를 앞으로 당기곤 했다. 마운드도 18.44m가 아니라 초등야구와 성인야구의 중간인 17m에 설치되곤 했다.
여자야구연맹에서도 “지금 실력으로 일반구장에서 성인규격의 마운드를 썼다간 자칫 야구를 즐길 수 없을 것”이라며 로컬 룰 적용을 권장했다. 하지만, 이는 국제대회에 나갈 때 번번이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했다.
다행히 지난해 연말부터 마운드는 18.44m 성인규격으로 변경됐다. 이때를 기점으로 한국 여자야구는 한 단계 발전했다는 평이다.
“마운드 거리가 짧으면 투수의 제구는 좋아지지만, 타격할 땐 맞추기에 급급해지는 단점이 있어요. 대신 성인규격의 마운드 거리를 적용하면 제구는 다소 불안해도 타격 실력이 느는 장점이 있고요. 국제대회를 대비하거나 더 실제적인 야구를 즐기려면 국제대회 규격과 규정을 그대로 따르는 게 좋다고 봐요.” 최수정의 생각이다.
거친 바람과 채찍 같은 비가 쏟아져도 여자야구 선수들은 경기를 중단하는 법이 없다. 그들은 승패가 아니라 경기 자체를 즐기기 때문이다(사진=스포츠춘추) |
제한된 경기 시간을 고려할 때 일종의 묘안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여자야구선수 대부분은 이 묘안을 좋아하지 않는다. 성인 남자야구엔 이런 조항이 없는데다 포수의 대주자 교체가 승부에 결정적 변수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국제대회에서도 이런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여자야구선수가 시간 단축보다 야구 본연의 승부를 펼치기 원한다면 한 번쯤 제도를 수정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아직 세계 수준과는 거리가 먼 한국 여자야구 리틀야구, 여자야구 발전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이광환 베이스볼아카데미 원장 겸 서울대 야구부 감독(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이광환 베이스볼아카데미 원장은 여자야구계의 ‘질레트’로 불린다. 1905년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한국에 처음으로 야구의 씨앗을 뿌렸듯 이 원장도 한국 여자야구계 발전에 큰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여자야구연맹도 이 원장이 없으면 출범 자체가 불가능했다.
평소 ‘여성 야구팬 증가가 곧 야구 발전’이란 믿음이 있던 이 원장은 KBO 아마야구 육성위원장에 재직 중이던 2006년 9월 여자야구 단체의 대표들과 간담회를 했다. 이 자리에서 이 원장은 “KBO가 여자야구 발전의 구심점이 돼주겠다”며 “연맹 창립을 통해 여자야구발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간담회에 참석한 여자야구 대표들은 이 원장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프로 감독일 때부터 빈말을 멀리했던 이 원장은 2007년 3월 한국여자야구연맹을 창립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연맹 창립 후엔 KBO 총재배 전국여자야구대회와 회장배 전국여자야구대회를 유치하며 여자야구팀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웅을 겨룰 수 있도록 무대를 제공했다.
정진구 부회장도 여자야구 발전에 1등 공신이었다. 정 회장은 사재를 털어 여자야구계를 지원하고, 자신의 회사 사무실을 연맹 사무실로 쓰게 하는 등 여자야구가 발전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도 연맹 사무실은 정 부회장이 운영하는 신의개발 안에 있다.
연맹 창립 후, 한국 여자야구는 비로소 세계무대에 당당히 출전할 수 있었다. 첫 국제무대는 2008년에 일본에서 열린 제3회 세계여자야구월드컵이었다.
격년제로 열리는 이 대회는 한국 여자야구 대표팀이 구성돼 세계여자야구대회에 참가한 첫 번째 대회라 의미가 깊었다. 비록 강팀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한국 대표팀은 홍콩, 인도를 꺾으며 2승 3패로 8개 참가국 가운데 6위에 오르는 작은 기적을 연출했다.
한국 여자야구 대표팀 투수의 호투 장면(사진=스포츠춘추) |
최수정은 지난해 베네수엘라에서 열린 제4회 대회에 대표팀 선수 겸 국제야구연맹(IBAF) 여자야구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출전했다. 여자야구계의 베테랑 선수였지만, 세계대회 출전은 처음이었다.
“세계대회를 직접 본다는 것만으로 정말 좋았어요. 과연 다른 나라 선수들은 얼마나 잘할까 궁금했거든요. 직접 보니까 잘해도 그렇게 잘할 수가 없었어요. 일본 선수들은 우리보다 체격은 작지만, 기술에서 몇 배나 앞섰어요. 마치 프로야구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니까요.”
11개 참가국 가운데 대회 중 기권한 홍콩을 제외하고 한국은 네덜란드를 꺾으며 9위에 올랐다. 세계여자야구의 높은 벽을 실감했지만, 참가국 관계자들로부터 “타격은 힘이 있다”는 평을 들었다.
그렇다면 한국 여자야구는 상위 클래스로 꼽히는 일본, 호주, 미국, 캐나다와 비교해 어느 정도 실력일까. 주성노 연맹 기술이사는 “투수의 힘과 제구, 수비 기본기, 타격의 파워에서 한국은 아직 상위 클래스 나라와 큰 차이가 난다”고 밝혔다.
주 이사는 “소프트볼 선수가 주축이 된 타이완과 베네수엘라도 우리보다 실력이 뛰어나다”며 “연맹 등록선수가 518명에 불과한 한국 여자야구가 세계야구의 중심이 되려면 아직 갈길이 멀다”고 지적했다.
일본여자프로야구기구(GPBL) 교토 아스토드림스와 효고 스윙 스마일스의 경기. 일본 여자야구는 한국의 중학교 고학년 수준의 실력을 갖췄다. 지난해 세계여자야구월드컵에서 일본은 다른 참가국을 압도하는 우수한 실력을 선보였다
일본 여자야구에 해박한 박철호 연맹 감사도 “한국이 세계여자야구의 최강인 일본을 따라가려면 많은 준비가 선행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일본엔 여자야구 프로팀이 2곳(교토 아스토드림스, 효고 스윙 스마일스)이나 있다. 프로답게 팀으로부터 연봉도 받고, 유료관중 앞에서 경기를 펼친다. 이것이 가능한 건 일본에 여자야구 엘리트 선수들이 뛰는 고교 야구부가 7개나 있기 때문이다. 일본 여중생 가운데 야구가 하고 싶으면 언제든 엘리트 야구부원을 키우는 고교로 전학을 갈 수 있다. 그렇게 육성된 까닭인지 일본 여자야구선수들은 시속 120km 이상의 빠른 공과 커브, 슬라이더, 투심패스트볼, 포크볼, 체인지업 등 다양한 변화구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포수 같은 경우는 남자 선수처럼 노바운드로 2루로 뛰는 주자를 잡아낸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사상 최초의 여자 선수로 화제를 모으며 미국 독립리그까지 진출했던 ‘너클볼 투수’ 요시다 에리도 일본에서 여자야구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요시다는 일본 야구계의 지원을 받으며 여성들이 야구에 관심을 두도록 시대의 아이콘 역할을 담당했다. 안향미를 시종일관 냉대했던 한국 야구계완 달라도 한참 달랐던 것이다.
'보는 야구'에서 이제는 '하는 야구'로
모범적인 여자야구단으로 평가받는 나인빅스(사진=스포츠춘추) |
“비 오는 날, 여자야구 경기와 남자야구 경기를 보시면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남자야구 경기는 비가 오면 흐지부지 끝나는 경우가 많지만, 여자야구 경기는 폭우로 베이스가 떠내려갈 때까지 강행합니다. 훈련도 그래요. 남자야구 선수들은 경기가 없는 날에 2, 3시간 훈련하면 돌아가잖아요. 그러나 여자야구 선수들은 한번 훈련을 시작하면 온종일 합니다.”
나인빅스 역시 최소 훈련시간이 4시간이다. 대부분 온종일 훈련한다. 야구가 끝나고 식사 자리에서도 야구 이야기는 계속 된다.
야구라는 공통 관심사로 뭉친 나인빅스 팀원들은 이제 가족만큼이나 가까운 사이가 됐다. 서로의 희로애락을 나누며 가장 어려울 때 손을 뻗는 친구 이상이 됐다. 하지만, 야구에 푹 빠져 결혼 시기를 놓친 팀원들이 있어 다소 걱정이 된다고.
“많은 여자야구 선수가 미혼자예요. 최 감독도 그렇고. 결혼을 안 했다기보다 주말마다 야구에 빠지다 보면 특별히 사람 만날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팀원 가운데 누가 ‘연애하러 간다.’, ‘선 보러 간다’고 하면 ‘당분간 팀에 나오지 마라’고 해요. 결혼하면 드럼세탁기를 사준다고까지 했다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김은영도 아직 미혼이다. 하지만, 김은영은 야구를 위해서라면 결혼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솔직히 결혼할 생각은 별로 없는데, 애는 빨리 낳고 싶어요. 왜냐고요? 아이가 크면 야구 시키려고요.”
팬과 선수도 그 차이다. 야구를 ‘보는 스포츠’가 아니라 ‘하는 스포츠’로 경험하고 싶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는데···’라고 혼잣말을 하는 대신 인터넷 검색으로 여자야구팀을 찾고, 그 팀에 당장 회원신청서를 내는 것이다. 당신이 손을 뻗는다면 구름 속에 숨어 있지만, 여전히 조수를 주관하는 달처럼 야구의 강한 인력이 당신의 손을 잡아 그라운드로 인도할 것이다. 야구가 나인빅스의 팀원들에게 그랬듯이.
인테넷하다가 본글입니다. 좀길지만 나름 흥미잇게 읽엇습니다.ㅋㅋ 저런열정이 가득한 분들이 마니 나왓음 합니다.
여자야구선수분들께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