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여기저기 가을 나들이가 잦다. 잘 갔다 오란 말만 하고 참았다. 젊은 문인들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서이다. 가 보면 남자가 적다. 몇 해 사이 여류가 늘어났는가 보다. 거의 가 본 곳이다. 계절만 다르고 엇비슷한 지역이다. 그런데 요즘은 젊어져서 좀 낯설다. 자주 만나던 사람은 세상을 떠났거나 몸이 아프고 구차해서 그만 들앉아 있어서인가.
문인 카톡에 불이 난다. 전화도 바리바리 와선 꼭 오란다. 그러려니 귓등으로 듣고 지나는데 친구가 가자 해서 마지못해 나섰다. 무슨 7시에 떠난다나. 버스도 없는 깜깜한 새벽길을 나섰다. 동래 지하철역에 내리니 와글와글 야단이다. 서둘다 보니 한 시간 전에 닿은 이른 아침이다. 다들 어디로 가는가 도떼기시장이다.
바깥에도 버스를 찾아 야단법석이다. 이런 광경은 처음이다. 아직 어두워 누가 누군지 알 수도 없다. 등산복에 배낭을 짊어지고 지팡이를 든 게 단풍 구경을 가는 것 같다. 즐비하게 늘어선 관광버스를 두리번거려 한참이나 찾아 타니 제일 먼저다. 김밥으로 아침을 때우고 떠나는 데 가을날이 좋다 좋아. 드높은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나를 뭉게뭉게 들뜨게 한다.
산 고개에서 기슭으로 갈잎이 울긋불긋 내려오고, 눈부신 누리끼리 나락 논이 반듯반듯 쫙쫙 펼쳐졌다. 찬찬히 뜯어보니 지난날 만났던 문인이다. 그사이 자글자글 늙어서 얼른 못 알아봤다. 흰머리를 모자로 눌러썼는데도 이름을 대며 알아보는 여류가 고마워라. 45인승 빡빡한 버스를 타고 저 멀리 충북 영동 황간으로 달려간다.
‘노근리’ 어디서 들었던 이름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곳인가. 부산, 마산, 양산이 산 많은가 했는데 여기도 산 높은 깊은 산골이다. 가로수가 주렁주렁 감나무이고 비 가림 포도밭이 곳곳에 보인다. 맑은 시냇물이 굽이굽이 감돌아 내리는 고즈넉한 곳이다. 황금빛으로 곱게 물든 은행나무가 돋보이는 평화공원으로 들어섰다.
한국전쟁 때 이곳에서 미군과 인민군이 맞닥뜨려 싸웠던 곳이다. 피난민 수백 명이 이고 지고 살던 마을을 떠나 남쪽으로 동동걸음쳤다. 그 속에 인민군도 숨었는가. 기총소사와 폭격이 이뤄졌다. 경부선 철도 다리 아래로 살려고 숨어들었다. 총알이 소낙비 퍼붓듯 쏟아졌다. 수백 명이 그 자리에서 어이없게도 꼬꾸라져 숨졌다.
굴은 두 갈래로 차도와 도랑으로 되었다. 양쪽 입구는 온통 총탄 자국으로 얼룩졌다. 흰 페인트를 칠해 동그라미와 삼각, 사각형으로 그려졌다. 삼각은 실탄이 박혀 있는 곳이다. 얼마나 갈겼는지 빤한 틈이 없다. 다급한 때라 시신을 옆 산으로 옮겨 묻었다. 흩어져 난리를 피했으면 좋았을 텐데 뭉쳐 다니다가 일을 당했다.
빨리 위험 지역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이리 가자. 저리 가야 한다. 말썽 속에 갈팡질팡했다. 죽을라치면 수렁으로 들어간단다. 또 흰옷을 즐겨 입어 표적이 쉽다. 정찰기가 돌다가는 이내 폭격기가 들이닥쳤다. 정조준 겨냥으로 맥없이 쓰러져야만 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꾸불꾸불 산길보다 바른 철길을 따라가다가 그만 전투기를 만났다.
딘 소장은 해방 직후 신탁통치 군정관으로 있을 때 제주 4.3사건과 여순 사건에 간여했다. 일본 남쪽 구주 사단장으로 있다가 6.25사변 발발로 유엔군 중 가장 먼저 부산을 거쳐 대전에 들어와 공산군을 막았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약할 줄 알았던 인민군 여러 사단이 기세등등 대전으로 밀고 들어왔다.
막강한 포병과 연대가 쉽게 물리칠 줄 알았는데 남쪽으로 밀리면서 그만 지휘 체계가 무너져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의기양양하던 미군은 낯선 지형에 어둡고 말이 통하지 않아 며칠 사이에 사달이 났다. 이때 영동 황간 지역을 지나던 미군에 의해 빚어진 일이다. 전쟁 시작 꼭 한 달 뒤 무더운 여름에 일어난 노근리(老斤里) 사건이다.
딘 소장은 24 사단기도 버려둔 채 뒤늦게 황급히 빠져나와 부랴부랴 남쪽으로 달렸다. 어두운 밤 옥천에서 부상병 물을 먹이기 위해 숲에 들어갔다가 낭떠러지에 굴러 길을 잃고 말았다. 혼자 몇 며칠 험한 산속을 헤맸다. 초목의 열매와 연한 잎을 먹고 밭의 무도 뽑아먹었다. 진안에서 붙들려 북한 임시수도 강계(江界)로 끌려갔다. 3년간 갇혔다가 포로교환 때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되레 느닷없이 살아 나타났다.
다급할 때 빚어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4만 평 노근리평화공원에 여러 개의 동상이 세워졌다. 전쟁 지역에서는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철길 쌍굴다리 아래 숨어지냈다. 그런 가운데서 아기를 낳아 ‘앙앙’ 울자 들통날까. 두려움에 떠는 피란민 성화에 잠시 물속에 담갔다. 숨이 끊어지자 아버지가 미쳐 소리치고 날뛰었다. 이내 사격이 시작되고 물속 아기 곁으로 가라앉았다.
또 발걸음을 멎게 하는 동상이 있었다. 아기 젖을 먹이는 어머니다. 천연덕스레 젖 먹는 아기를 안고 아래를 보며 고개를 떨구었다. 가슴에 총을 맞고 죽어있었다. 넓은 광장 끄트머리에 위령탑이 섰다. 커다란 벽에 흑백 사진을 새겼다. 당시 찍은 것으로 어쩌면 저리도 선명할까이다. 철길 굴 앞을 지나는 피난민이다. 불안한 얼굴 모습과 걸친 흰 바지와 적삼에다 치마, 저고리 옷이 새삼스럽다.
긴 경사진 길을 따라 지하로 들어갔다. 구석구석 영상이 돌아간다. 영화인 듯 미군이 피난민을 일일이 뒤지고 철길 위로 올라가게 한 뒤 폭격과 기총사격이 이루어졌다. 다급히 피해 굴속으로 뛰어들자 좌우에서도 총격이 이어졌다. 어찌 살거나. 상처 속에 겨우 살아남은 사람의 증언이 고스란히 나왔다.
벽에 수백 명 죽은 사람의 이름이 새겨졌다. 밝혀지지 않은 사람도 백여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누구일까. 이 산골짝에서 오글오글 복작복작 살기등등하다. 이승과 저승이 금방 왔다 갔다 했던가. 평화, 평화, 자유, 자유 말을 뭉뚱그려서 싸움 없는 세상을 가꿔나가자. 정은용의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 소설이 나오고 영화 ‘작은 연못’을 찾아 그때의 기막힌 참상을 밤늦도록 지켜봤다.
첫댓글 그 때 참상의 현장을 다녀 오셨군요
이렇게 상세하고 실감나게 기록, 정말 대단하십니다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비극 언제 평화 통일이 가능할까요
어느 한 체제가 완전 망해야 가능하겠습니까
이스라엘 보니 평화 통일은 ....
수고하셨습니다
후퇴하면서 인민군과 격전 중에 일어난 불행입니다.
아들에게 작은 연못 영화를 보여 달래서 봤습니다.
실화를 보니 기막힙니다.
3차대전이 코앞에 와 있다고...해서 하루하루 불안합니다.
숫하게 죽어나간 어린군인들이나 양민들을 생각하면 절대로 지구상에 전쟁은 없어져야 합니다.
이런 비극이 땅덩이도 좁은 우리나라에서 있었다는게..믿기지 않고 그저 두번다시 있어서는 안될 비극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전쟁통에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단걸 생각하면.ㅠ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고 중국이 대만을 침략하겟다. 말하니
어려움 속으로 들어가는가 걱정입니다.
그 시대의 트라우마를 지닌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는데, 세상 정세가 참담합니다.
전쟁 소식을 들을 때마다 '평화' 란 단어가 낯설어집니다.
언젠가 봤던 영화가 생각납니다. 그 현장이었군요.
심리적으로 힘들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