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사는 평강 공주
박라연
동짓달에도 치자 꽃이 피는 신방에서 신혼 일기를 쓴다.
없는 것이 많아 더욱 따뜻한 아랫목은 평강 공주의 꽃밭
색색의 꽃씨를 모으던 흰 봉투 한 무더기
산동네의 맵찬 바람에 떨며 흩날리지만
봉할 수 없는 내용들이 밤이면 비에 젖어 울지만
이제 나는 산동네의 인정에 곱게 물든 한 그루 대추나무
밤마다 서로의 허물을 해진 사랑을 꿰맨다
…… 가끔 …… 전기가 …… 나가도 …… 좋았다 …… 우리는 ……
새벽녘 우리 낮은 창문가엔 달빛이 언 채로 걸려 있거나
별 두서넛이 다투어 빛나고 있었다.
전등의 촉수를 더 낮추어도 좋았을 우리의 사랑방에서
꽃씨 봉지랑 청색 도포랑 한 땀 한 땀 땀 흘려 깁고 있지만
우리 사랑 살아서 앞마당 대추나무에 뜨겁게 열리지만
장안의 앉은뱅이 저울은 꿈쩍도 않는다.
오직 혼수며 가문이며 비단 금침만 뒤우뚱거릴 뿐
공주의 애틋한 사랑은 서울의 산 일 번지에 떠도는 옛날 이야기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 더더욱
-<서울에 사는 평강 공주>(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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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정리
[이 작품은] 산동네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신혼부부의 삶을 통해 사랑의 가치와 힘을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 특히 시적 화자가 자신을 평강 공주에 비유함으로써 순수한 사랑의 힘을 보다 효과
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낭만적, 애상적, 상징적
*제재 : 산동네에서의 신혼 살림
*주제 : 가난한 산동네에서 만들어 가는 순수한 사랑
*특징
① 산문적 진술을 통해 시적 화자의 마음을 긴 호흡으로 드러냄.
② 말줄임표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시적 긴장감과 함께 여운을 줌.
③ 순수한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 시적 화자가 자신을 평강 공주에 비유함.
*출전 : “서울에 사는 평강 공주”(2000)
시어 풀이
*아랫목 : 온돌방에서 아궁이 가까운 쪽의 방바닥.
*앉은뱅이저울 : 바닥에 놓은 채 받침판 위에 물건을 올려놓고 위쪽에 있는 저울대에서 저울추로
무게를 다는 저울.
*금침 : 이부자리와 베개를 아울러 이르는 말.
작품의 구성
[1연] 가난 속에서도 꽃 피는 평강 공주의 순수한 사랑
[2연] 물질 중심의 세상에서 옛날 이야기가 돼 버린 평강 공주의 사랑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바보 온달과 평강 공주' 설화를 차용하여 순수한 사랑의 힘과 가치를 강조한 작품으로,
역사 속의 평강 공주가 현대의 서울에 산다는 독특한 설정을 통해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1연에서 화자는 자신이 서울의 산동네에서 꽃씨 봉투를 깁는 일을 하는 신혼의 새댁임을
밝히고 있다.
세찬 바람이 불고 비바람이 치는 산동네지만 화자는 없는 것이 더욱 많아 따뜻하다는 역설적 인
식을 통해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산동네의 가난과 삶의 비애로 마음이 아파 울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한 그루 대추나무가 되어 성숙한 사랑의 마음으로 상대방의 허물을 감싸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화자는 멈칫거리며 띄엄띄엄 말한다. 가끔 전기가 나가도 좋았다고, 머뭇거리며 말하는 모
습에서 새댁의 부끄러움과 진실됨이 느껴진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다. 장안의 앉
은뱅이 저울은 이러한 사랑만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장안은 혼수나가문, 비단금침 같은 세속적 가치가 중요한 세상이다. 화자가 꿈꾸는 평강 공주의 애
틋한 사랑은 흘러간 옛날 이야기일 뿐이다. 특히 '그대 사랑할 온달이 없으므로'라는 구절은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평강공주의 순수한 사랑은 온달이 있어야만 완성되는데, 지금의 세상엔 그런 사람
이 없다는 뜻이다. 물질적 가치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현대인들의 세속적인 사랑에 대한 시인의 비판
적 태도가 느껴진다.
ⓒ (주)천재교육 | BY-NC-ND
작품 연구실시의 구조
이 시에서 '신방'과 '장안'은 서로 대립적인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신방'은 가난한 신혼부부가
사는 공간으로 비록 정전과 매서운 바람으로 인해 힘들지만, 이들의 따뜻한 사랑으로 고난을 극복
해 가는 곳이다.
이에 비해 '장안'은 결혼의 조건으로 사랑이 아닌 혼수나 가문 등을 중시하는 등 물질적 가치에만
움직이는 부정적 공간이다. 가난한 신혼부부가 사랑만으로 결혼한 것과 대조적이다. 화자는 지금
신방에 살고 있으며 따뜻한 사랑의 힘으로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나가고 있다.
하지만 신방 역시 서울(장안) 안에 존재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물질적인 가치로부터 영원히 자유
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온달의 부재를 강조하는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를 추측할 수 있다.
ⓒ (주)천재교육 | BY-NC-ND
평강공주 설화의 차용
평강 공주는 사랑의 힘으로 온달의 이름을 빛나게 한 의리 있고 어진 여성이다. 이 시에서 화자가
자신을 평강 공주에 비유한 것은 삶의 역경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사랑을 지켜 간 평강 공주
의 모습을 본받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다. 가난이라는 시련이 삶을 힘들게 하지만 이를 순수한 사랑
의 힘으로 극복하려 하는 것이다.
가난한 신혼 새댁과 평강 공주
이 시에서 가난한 신혼 새댁인 화자는 자신을 평강 공주에 비유하며 이를 통해 시상을 전개해 나간
다. 그러나 현대의 서울에 사는 화자와 고구려에 사는 평강 공주는 서로 차이점을 갖는다. 화자는 꽃
씨 봉지 붙이는 일을 하고 있으며, 평강 공주는 도포 깁는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일에는 공통점이 있다. 한 땀 한 땀 땀 흘려 꽃씨 봉지와 청색도포를 깁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꽃씨 봉지와 청색 도포는 사랑을 의미한다. 1연의 해진 사랑을 꿰맨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이들의 일은 사랑을 만들어 가는 일이다. 화자가 봉하는 꽃씨는 아름다운 꽃(사랑)을 피우기 위한
희망이며, 평강 공주의 바느질은 조각난 사랑을 촘촘히 엮어 가는 포용인 것이다.
ⓒ (주)천재교육 | BY-NC-ND
시인이 시적 발상을 얻은 계기
이 시는 박라연 시인이 결혼 후 10년 쯤 지나 쓴 신혼일기다. 스물 일곱에 결혼할 때 남편은 가난했지
만 그녀는 쌀이랑 연탄만 안 떨어지면 족하다 생각했다. 그러다 늦깎이로 온달 설화를 소재로 시 쓰기
에 매달리던 즈음, 한 친구가 어느 시인의 집을 보러 가자고 했다.
찾아간 자그마한 시인의 집은 감동적이었다. 넝쿨장미가 활짝 핀 담장 너머 대추나무가 있는 산동네
소박한 시인의 집은 그림처럼 밝았다. 박라연 시인이 매달려 있던 시의 부족한 2%를 채워줄 무언가
가 벼락처럼 찾아들었다.
사랑만 있으면 두려운 것이 없던 자신의 신혼살림과 온달 설화와 가난한 산동네를 환하게하던 시인의
집이 주는 따뜻한 영감이 한 편의 시 속에 어우러졌다. 박라연 시인은 이 시로 그 해 신춘문예에 당선
되어 시인이 되었다. 정릉에 있던 그 '시인의 집'이 신경림 시인의 집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한다.
작가 소개 - 박라연(朴蓏娟, 1951~ )
시인. 전남 보성 출생.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에 사는 평강 공주’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존재론적 슬픔과 타자를 향한 연민, 헌신의 시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시집으로 “너에게 세 들어 사는
동안”(1996), “서울에 사는 평강 공주”(2000), “빛의 사서함”(200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