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면과 꽃다발
초등학교 졸업식 날이었다. 엄마는 아침에 시장에 가서 장사 준비를 해놓고 졸업식이 끝나기 전에 오겠다고 다짐을 했다. 오전 반 오후 반이 있던 시절, 35년 전 그 졸업식엔 축가를 불러주러 온 5학년 후배들까지 모여 학교가 떠내려갈 듯 복잡하고 정신이 없었다. 그 수 많은 졸업생 사이에서 나는 거기에 없다고 해도 전혀 티가 나지 않을 만큼 그저 그런 평범하다 못해, 보통 이하의 아이였다.
가을 운동회에 겨우 한 번, 한 해에 한 번 학교에 오는 일도 버거워하는, 내 엄마는 장사에 바쁘고 사는 일에 정신이 없는 사람이었다. 딸만 셋을 낳고 끝내 아들을 낳지 못해 가슴에 한이 되었고, 무릇 딸이란 밥 굶기지 않고 학교 다니게 해주면 그것으로 부모의 역할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했다. 대체로 자식 일에 무관심했다.
아버지가 딸아이의 졸업식에 참석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이 내 졸업식인 것도 당연히 모르고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알아야 할 이유도 당연히 없었다.
엄마가 졸업식에 오지 않을까 두려웠다. 언니는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동생은 이제 3학년 꼬꼬마였다. 엄마마저 오지 않는다면 내 졸업식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쓸쓸한 날이 될 것이다.
2월이었지만, 아직 겨울이었고, 매우 추웠다. 엄마의 이종사촌이라는 이모의 열다섯 살 된 딸인 언니가 입다가 물려준 돕바는 유난히 덩치가 작은 내겐 너무 컸고, 언니가 오래 입어서 매우 낡았다. 그래서인지 따뜻하지도 않았다. 누가 내 낡아 빠진 돕바를 눈여겨볼까 두려워 나는 안 그래도 작은 몸뚱이를 더욱 웅크리고, 전교 회장이 교육부장관상을 받을 때까지 아직 나타나지 않는 엄마를 찾느라 허둥지둥했다.
아직 인산인해라는 단어를 알지 못했지만, 그 비슷한 느낌, 사람들이 운동장을 꽉 채우고 있는 가운데 나는 식이 다 끝날 때까지 엄마가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함에 안절부절못했다.
아버지와 싸우고 열 번도 더 집을 나간 엄마는, 길어도 일주일이 넘기 전에 다시 돌아오곤 했지만, 늘 엄마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에 밤잠을 설치거나 이불에 오줌을 싸서 언니한테 욕을 먹기 일쑤였다. 엄마는 내게 희뿌연 안개 같은 존재였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마저 끝이 났다.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가족들 곁으로 갔다. 가족들 품에 안기고 꽃다발에 둘러싸여 사진을 찍는 친구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 눈길은 학교 정문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오늘만은 엄마가 올 것이라는 믿음 같은 게 있었다. 생애 첫 졸업식이니까, 축하라는 걸 받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꽃다발 같은 아름다운 물건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텔레비전이나 동화책에서 보던 예쁜 꽃묶음을 나도 태어나 처음으로 받아볼 자격이 있는 게 아닐까.
과연, 저기 멀리 엄마가 보이긴 했다. 아주 잠깐 기뻤지만. 나는 슬펐다. 엄마는 시장에서 장사하던 차림 그대로, 앞치마만 벗어놓고 학교로 온 것이다. 앞이 막힌 플라스틱 슬리퍼를 신고, 일바지 차림에 머리카락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친구들의 엄마는 모두 예쁘게 화장하고, 가진 옷 중 제일 좋은 것을 입고, 한 손에는 꽃을 들고 다른 손엔 선물 가방 같은 걸 들고 왔는데,
엄마는 선물은커녕 시장에서 입던 낡은 스웨터에 손을 넣고, 우시장에 끌려오는 소의 표정으로 내게 걸어왔다. 나는....... 나는........ 너무 슬펐다. 참아보려고 노력을 잠깐 했던 것도 같은데, 그것은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운동장 한가운데 서서 나는 울었다. 엄마는 내게 다가와 울지 말라고 했다. 집에 가자고 했다. 엄마가 달랠수록 더욱 서럽고 더 슬퍼졌다. 처음엔 그냥 울다가 울다 보니 엉엉 울게 되었고, 엄마 손에 이끌려 학교 담벼락 모퉁이까지 와서 주저앉아 울었다. 왜 꽃다발 안 사 왔냐고 물으니 돈이 없어서 그랬다고 했다. 울음을 그치라고 종용하던 엄마는 내가 목젖이 다 보이도록 크게 울자 먼저 집으로 가버렸다.
그 사이 학교 마당은 조용해졌다. 사진을 찍고 축하를 받던 친구들은 모두 가족들과 맛난 점심을 먹으러 떠나고 없었다. 아들을 낳았어야 했는데 너 같은 가시나를 나아서 내 신세가 고달프다는 말을 하루에도 열두 번씩 하던 엄마가 너무 미웠고, 부잣집에 태어나지 못한 자신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따뜻해진 운동장 마당은 참새 몇 마리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때 가출이라는 걸 알았으면 감행했을지도 모르겠으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을 텅 빈 집으로 돌아가는 것밖에 없었다.
세상 가장 무겁고 슬픈 걸음의 귀갓길. 얼마나 세게, 길게 울었는지. 울음이 딱 떨어지지 않고 어깨가 자꾸만 들썩거렸다. 저기 멀리 집이 보이고 동생이 나를 반겼다. 엄마는 집에 잠시 들렀다 시장에 갔다고 했다. 세상 가장 슬펐던 내 초등학교 졸업식은 그렇게 지나갔다.
저녁에 엄마는 나를 때렸다. 학교에서 울어서 엄마를 망신 줬다는 것이 플라스틱 바가지가 부서지도록 때린 이유였다.
훗날 알게 되었다. 그날 엄마에겐 짜장면 두 그릇값을 치를 만큼의 돈밖에 없었단다. 시장 내 더 좋은 점포를 옮기려다 사기를 당해 그야말로 알거지가 되었던 거다. 먹지도 못할 꽃다발을 사느니 짜장면 한 그릇 사 먹이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울고 남들이 쳐다보는 게 너무 속이 상해 먼저 집으로 와버렸다는 것이다.
그때의 엄마보다 더 많은 나이를 먹어버린 나는, 그날의 엄마를 미워하지는 않는다. 예쁜 꽃다발을 보게 된다거나, 졸업 시즌이라는 뉴스를 보게 되면 어김없이 내가 그날의 엄마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뿐.
그저 꽃다발 하나를 받아보고 싶었을 겨우 열두 살 아이의 머리를 그렇게 사정없이 때리고 저주를 퍼붓던 엄마는, 그날 밤,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잠든 자식을 보며 마음 아파하고 미안해하긴 했을까. 꽃으로도 자식을 때리지 않는 부모를 두어보는 일, 혹여 다음 생엔 가능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