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8년 현종이 74세의 원로 대신 이경석(李景奭·1595~1671)에게 궤장(�Q杖), 즉 지팡이와 의자를 하사하며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당시 잔치 장면을 그린 세 폭 그림이 보물 930호로 지정되어 남아 있다.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이 잔치에 초대받았지만 건강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이경석은 글이라도 보내 기록으로 남겨달라고 부탁했다.
우암은 이경석이 궤장을 하사받게 된 경과를 담담히 적고, 국가에서 원로를 예우하는 미풍을 칭송했다.
이경석은 1650년 효종의 북벌 계획이 밀고로 청에 알려졌을 때,
목숨을 걸고 책임을 자청하여 청에 의해 백마산성에 위리안치된 일이 있었다.
우암은 이 일을 적고 나서, "이로부터 임금께서 공을 더욱 융숭히 알아주었고, 선비들의 마음도 더욱 그를 붙좇게 되었다.
하늘의 보우하심을 받아 장수하고 건강하여(壽而康), 마침내 우리 성상께 은혜로운 예를 받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라고 덕담하였다.
그런데 글 가운데 '장수하고 건강하여(壽而康)'란 표현이 문제가 되었다.
예전 송나라 흠종(欽宗)이 금나라 진영에 구금되었을 때, 손적(孫�h)이 오랑캐인 금을 칭송하는 글을 바쳐 풀려난 일이 있었다.
이 일을 두고 당시 사람들이 "당신이 오랑캐 진영에서 천리에 순종하여 자기를 몹시 위하였으니 장수하고 건강한 것이 당연하다"고
기롱했다.
주자도 손적의 일을 기록하면서 인용했던 구절이다.
이경석은 병자호란 당시 청 태종의 공덕을 칭송한 치욕적인 삼전도 비문을 지은 장본인이었다.
우암은 이 축하의 글에 손적과 관련된 '수이강'의 세 글자를 의도적으로 집어넣어,
자신의 이경석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내색했던 것이다.
웃음 속에 칼을 감춘 모질고도 무서운 글이다.
나라의 존망이 달린 위급한 때에 그인들 그 글을 쓰고 싶어 썼겠는가?
송시열이 조정에 나간 것은 애초에 이경석의 천거에 의해서였다.
원효 스님의 법어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참기 어려운 것을 능히 참는 것이 보살의 행함이요, 말할 수 있는데도 말하지 않는 것이 대인의 마음이다
(難忍能忍菩薩行, 可言不言大人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