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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서품 (經序品)
④ 과문해석(科文解釋)
글의 내용을 세 부분으로 나누면 첫째는 서분(序分)이고, 둘째는 제2품부터 이어지는 여섯 품까지의 글들이 정설분(正說分)이고, 셋째는 입총지품(入摠持品)으로서, ‘그 때 여래께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이하로 두 장 남짓 되는 글이 유통분이다. 또한 서분에도 두 가지 서문[序]이 있으니 통서(通序:모든 경의 서문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사항)와 별서(別序:해당 경의 서문에만 있는 사항)이다.
[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47)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 기사굴산에서 큰 비구승 만 명과 함께 계셨다. 그들은 모두 아라한도를 얻었는데, 그 이름은 사리불·대목건련·수보리이니 이들은 아라한이었다. 또 보살마하살 2천 명과 함께 계셨는데, 그 이름은 해탈보살·심왕보살·무주보살 등이었다. 또 장자(長者) 8만 명과 함께 있었는데, 그 이름은 범행(梵行)장자·대범행(大梵行)장자·수제(樹提)장자 등이요, 또 하늘·용·야차·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인비인 등 육십만억과 함께 있었다.
47) 이 부분은 동국대 영인본과 대정신수대장경에는 원문이 없으나 조선불교회(1919년) 간본에 그 원문이 있다.
[論] 통서에는 여섯 가지 일이 들어 있다. 앞의 셋은 직접 들어서 전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요, 뒤의 셋은 부처님의 말씀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앞의 셋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이와 같이[如是]이고, 둘은 내가 들었다[我聞]이며, 셋은 어느 때[一時]이다. 뒤의 셋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교주(敎主)요, 둘은 머문 곳이요, 셋은 대중들이다.
그 대중들 속에도 네 가지 부류가 있으니 하나는 성문 대중이요, 둘은 보살 대중이요, 셋은 장자 대중이요, 넷은 잡다한 무리이다. 그들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통설과 같다.
[經] 그 때 존자[尊者:어떤 본에는 世尊으로 되어 있다. 고려대장경에는 없으나 한국 불교 전서에 있는 원본주이므로 표시해 둔다. 이하 모두 같다]께서 대중에게 둘러싸여 모든 대중을 위하여 대승경을 말씀하셨는데, 그 경의 이름은 일미진실무상무생결정실제본각리행(一味眞實無相無生決定實際本覺利行)이었다. 만약 이 경을 듣고서 네 구절로 된 게송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은 부처님 지혜의 경지에 들어가서 방편을 써서 중생을 교화할 수 있게 되며, 또한 모든 중생을 위하여 큰 선지식이 될 수 있다.
【論】이 아래는 두 번째 별서(別序)인데,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위의분(威儀分)이고, 둘째는 설경분(說經分)이고, 셋째는 입정분(入定分)이며, 넷째는 중송분(重頌分)이다. 위의분이란, 경에 ‘그 때 존자께서 대중에게 둘러싸여’ 라고 한
부분이고, 설경분이란, 경에 ‘대중을 위하여 대승경을 말씀하셨다’라고 한 부분이다. 이 경의 문세(文勢)는 “그 때 세존께서 사부대중에게 둘러싸여 대승경을 설하
셨는데, 그 경의 이름은 무량의(無量義)였다”라고 한 『법화경(法華經)』의 서론과 비슷하다. 그 경[법화경]을 해석한 논에서는 이 경의 이름을 두고 『법화경』의 다른 제목이라고 판단하였다. 그의 의도는 그 제목이 본격적인 설법에 앞서 나오기 때문에 그것으로써 서분을 삼은 것이다. 이제 이 경[金剛三昧經]의 글의 형태를 보면 모두
경전을 서술하는 자의 일반적인 서문과 같다. 이에 준하여 볼 때 다른 경을 앞에서
자세히 설하고, 다음에 정(定)에 들고, 정에서 깨어나 다시 『금강삼매경』을 설했을 것이다. 경의 주된 요지를 설한 연후에 경의 이름을 설하였으니, ‘일미진실(一味眞實)…’이라는 이 경의 앞에 자세히 말씀하신 경의 제목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두 경전의 대의가 비록 같다고 하지만 글 모양[文相]은 다르다. 앞에서 설명한 것은 법문을 자세히 설하여 당시에 이익을 주기 위한 것이고, 뒤에서 설한 것은 법문을
요약하여 말세(末世)에 이익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앞에서 설한 자세한
경이 간략한 경의 바탕이 된다.
이 설경분(說經分)의 글 형태에 두 가지가 있다. 먼저는 경의 이름에 대한 서언이고 뒤에는 경의 덕에 대한 찬탄이니, ‘만약 이 경을 듣고[若聞]’ 이하가 뒷 부분에
해당한다.
[經]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신 다음 가부좌하여 앉으시고 곧 금강삼매에 드시어 몸과 마음에 흔들림이 없으셨다.
[論] 이는 세 번째, 입정분(入定分)이다. 경을 설하시기 전에 먼저 선정[定]에 드신
까닭은, 오직 적정(寂靜)한 자만이 법을 깨달을 수 있고 또 설할 수 있음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다. 또한 성현께서 때에 맞게 침묵과 설법을 사용하여 그 두 가지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다.
[經] 그 때 대중 가운데 아가타(阿伽陀)라고 하는 비구가 있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합장하여 이 뜻을 밝히기 위하여 게송을 설하였다.
[論] 이것은 넷째 중송분(重頌分)이다. 앞에서 설한 일미의 경[一味之經]과 뒤에서
설할 경의 대의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간략한 게송으로써 앞의 자세한 경을 송(頌)
하여 뒤에 간략히 경을 일으킨 것이다. 문장의 내용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앞은 서언(序言)이고 뒤는 게송이니, 이는 경전을 기술하는 사람의 일반적인 서문
으로써 뒤의 게송을 일으킨 것이다.
아가타(阿伽陀)란 여기 말로는 무거(無去), 혹은 멸거(滅去)라는 뜻이다. 이는 약(藥)의 이름으로서 모든 병을 남김없이 없앨 수 있기 때문에 ‘무거’라고 한다. 이 보살도 이와 같아서 중생의 모든 번뇌 병을 고칠 수 있기 때문에 약 이름을 가지고 자기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여덟 수의 게송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의 일곱 게송은 경을 설하심을 송한 것이고, 마지막 한 게송은 정에 드심을 송한 것이다. 앞의 일곱 수 게송에도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세 게송은 전체를 밝힌 것이고, 네 게송은 따로 드러낸 것이다.
[經] 큰 자비로 가득하신 세존이시여. 지혜 통달하여 걸림이 없으시도다.
널리 중생을 제도하시려 한 가지 진실한 이치를 설하셨는데 모두 일미의 도(道)로써 하고 끝내 소승으로써 하지 않으셨네.
설하신 뜻[義]과 맛[味]과 곳[處]은 모두 다 부실(不實)함을 떠나서 모든 부처님의 지혜로운 경지에 들어가 결정코 참 실제(實際)에 들어갔네.
듣는 자가 모두 세간을 벗어나 해탈치 못함이 없으리.
[論] 총괄적으로 위의 세 게송을 밝혀보면 네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첫째 두 구절은 말씀하신 이의 덕을 찬탄한 것이고, 둘째 한 게송은 가르침의 도구가 되는 교설[能詮敎]을 찬탄한 것이며, 셋째 한 게송은 가르침의 내용[所詮義]을 찬탄한 것이고, 넷째 두 구절은 가르침의 훌륭한 이익을 찬탄한 것이다.
두 번째 송 중에 ‘한 가지 진실한 이치[一諦]’라고 한 것은 한마음[一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일심법에 의하여 두 가지 문이 있는데, 이 두 가지 문이 오직 하나의 진실[一實]에 의지하기 때문에 이를 한 가지 진실한 이치[一諦]라고 하였다.
‘일미의 도[一味道]’란 유일한 승[一乘]을 말한다. 나머지 글은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經]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살들께서 모두 다 중생을 제도하려고 못 사람들을 위해 넓고 깊게 물어서 법의 적멸한 특성을 알게 하여 결정적인 곳에 들어가게 하셨나이다.
[論] 이 아래로 네 게송은 문답을 따로 찬탄한 것이다. 위의 다섯 구절은 물음이 넓고 깊어서 적멸을 알아 실제(實際)에 들어가게 함을 찬탄한 것이다.
[經] 여래의 지혜 방편으로 실제에 들도록 설하시니 모두 다 일승만을 따르기에 다른 잡다한 맛이 없다네.
마치 한 차례 비가 적셔주어 온갖 풀이 다 무성해지듯이 각기 다른 성질에 따라서 한 맛[一味]의 법으로 적셔주어
두루 모든 것에 충만케 하니 저 한 차례 비가 적셔주듯이 보리(菩提)의 싹 모두 자라게 하네.”
[論] 이 둘째 부분은 부처님의 답에 훌륭한 이익이 있음을 찬탄한 것이다. 그 중에
법(法)·유(喩)·합(合)의 셋이 있으니 차례대로 보면 네 구절·두 구절 ·다섯 구절이 그에 해당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經] 금강의 맛[味:다른 본에는 昧로 되어 있다]에 들어갔으니 법과 진실한 선정을 증득한 것이라 결정코 의심과 뉘우침을 끊으니 한 법에서 도장 찍혀 나온 듯하네.
[論] 이는 둘째로 입정하심을 노래한 것이다.48) 위의 반은 앞에서 입정한 것을 노래
하고, 뒤의 반은 뒤의 설법 일으킴을 노래한 것이다.
48) 여덟 수의 게송을 두 부분으로 나눈 가운데, 이제까지의 일곱 게송은 경을 설하심을 송한 것이고, 이 한 게송은 정에 드심을 송한 것이다.
뒤에 설하신 교리에 두 가지 훌륭한 힘[勝能]이 있다. 하나는 마치 금강이 모든 것을 파괴하듯이, 결단코 의혹과 뉘우침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둘째는 마치 금강이 파괴
되지 않듯이, 일승(一乘)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아래 반의 두 구절은 이 두 가지 뜻을 나타냈다. 이상 서분의 글이 끝났다.
정설분(正說分)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앞 6품은 관행을 각각 나타낸 것[別顯
觀行]이요, 끝의 총지 일품은 의심을 통틀어 없애는 것[總遣疑情]이다.
이 별현은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무상법품(無相法品)으로서 무상관(無相觀)을 밝힌 것이요, 둘째는 무생행품(無生行品)으로서 무생행을 나타낸 것이며, 셋째는 본각리품(本覺利品)으로서 본각에 의하여 중생을 이롭게 함을 나타낸 것이다. 넷째는 입실제품(入寶際品)으로서 허(虛)에서 실(實)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요, 다섯째는 진성공품(眞性空品)으로서 모든 행이 참된 성품인 공(空)에서 나왔음을 밝힌 것이며, 여섯째는 여래장품(如來藏品)으로서 무량한 문[無量門]으로 여래장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낼 것이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문(門)으로 관(觀)과 행(行)이 두루 다 포괄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모든 망상이 무한한 과거로부터 유전(流轉)하게 된 것은 단지 형상에 집착하여 분별하는 병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흐름을 거슬러 근원에 돌아가고자
하면 먼저 모든 형상이 실체가 아님을 알게 하여 이를 없애야 한다. 그러므로 첫 번째로 무상법(無相法)을 관해야 함을 밝힌 것이다.
비록 모든 형상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 할지라도 관하는 마음을 남겨 두면 관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생겨서 본각(本覺)에 계합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없앨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둘째로 무생행(無生行)을 밝혔다.
이미 무생을 행하면 바야흐로 본각에 계합하게 되니, 이에 의지하여 중생을 교화하여 본각의 이로움을 얻게 하기 때문에 셋째로 본각리(本覺利)의 문(門)을 밝혔다.
본각에 의지해서 중생을 이롭게 하면 중생은 허망함으로부터 실제에 곧바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넷째로 실제에 들어감[入實際]을 밝혔다.
안으로의 행은 형상도 없고 일어남도 없으며, 밖으로의 교화는 본각의 이로움을 써서 실제에 들어가게 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이로움으로 온갖 행이 다 갖추어지게 되는데, 이는 참된 성품에서 나와 모두 진정한 공에 순응하나니 다섯째로 참된 성품인 공[眞性空]을 밝혔다.
이 참된 성품에 의해서 온갖 행이 구비되어 여래장 일미의 근원[如來藏一味之源]에 들어가기 때문에 여섯째로 여래장(如來藏)49)을 밝혔다.
49) 미계 (迷界)에 있는 진여(眞如) 즉 미계의 중생과 사물이 모두 진여와 여래의 덕성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여래장이라 함.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고 나면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이 없다. 지어서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하지 못할 바도 없다. 그러므로 여섯 가지 길을 설하여 대승을 다 거두는 것이다.
한편 이 여섯 품에는 또 다른 뜻이 있다. 이른바
첫째 무상법품(無相法品)은 관의 대상이 되는 법[所觀法]을 보인 것인데, 그 법이란 이른바 일심 (一心)인 여래장의 체(體)이다.
둘째 무생행품(無生行品)은 관하는 자의 행[能觀行]을 밝힌 것인데, 이른바 6행(行)이라고 하는 무분별관(無分別觀)이다.
셋째 본각리품(本覺利品)은 일심(一心) 가운데 생멸문(生滅門)을 나타낸 것이다.
넷째로 입실제품(入實際品)은 일심 가운데 진여문(眞如門)을 나타낸 것이다.
다섯째 진성공품(眞性空品)은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한꺼번에 떠나되 그 두 가지를 파괴하지 않는 것이다.
여섯째 여래장품(如來藏品)은 여러 가지 문을 거두어 들여 모두 일미임을 보인 것이다.
이처럼 이중(二重)의 6문(門)으로서 대승의 뜻을 남김없이 두루 포섭하였다.
그런데 이 6품(品)은 세 문으로 간추려질 수 있다. 즉 앞의 두 품[無相法品·無生行品]은 관(觀)과 행(行)의 시작과 끝을 포섭한 것이고, 다음의 두 품[本覺利品·入實際品]은 교화의 근본과 지말(枝末)을 밝힌 것이며, 마지막 두 품[眞性空品·如來藏品]은 원인을 포섭해서 결과를 이룬 것을 보인 것이다. 또는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앞의 두 품은 형상을 버리고 근본에 돌아가는 것이고, 중간의 두 품은 근본으로부터 참된 행(行)을 일으키는 것이며, 마지막 두 품은 근본에 돌아가는 것과 근본으로부터 행을 일으키는 두 가지를 함께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이 둘씩 합쳐놓은 세 가지로써 대승(大乘)의 뜻을 모두 포섭한다.
이 6품은 또 두 가지 문(門)으로 요약된다. 형상과 생함이 모두 없어지는 것은 본각
(本覺)의 이로움이요, 실제와 참된 공은 여래장이다.50) 또는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앞의 문(세 가지 품)은 허망한 것을 버려서 바른 인(因)을 나타낸 것이고, 뒤의 문은 참된 것을 드러내어 과(果)를 이루는 것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
두 문으로 역시 대승을 두루 포섭한다.
50) 무상법품과 무생행품은 본각리품에 들어가고, 입실제품과 진성공품은 여래장품에 들어간다는 말이다.
이 6품을 또 오로지 일미(一味)로 볼 수도 있다. 어째서 그런가? 형상과 일어남은
본래 자성(自性)이 없고, 본각이라고 하지만 근본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고, 실제라고 하는 것도 그 테두리를 한정할 수 없으며, 참된 성품이라고 하여도 그 역시 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여래장의 성품인들 따로 있다고 할 것인가?
그러기에 「여래장품」에서 “이 식[是識]은 항상 적멸하고, 적멸하다는 생각마저도
적멸한 것이다”라고 했다. 「총지품(總持品)」에서도 “제7식과 전5식이 발생하지
않고[七五不生], 제8식과 제6식이 적멸하며, 제9식의 상[九相]도 공해서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얻을 수 없는 이 일미(一味)가 이 경의 근본(宗)이며 요지가 된다. 다만 얻어 가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얻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무슨 문이든지 열지 못할 것이 없으므로 무량한 뜻을 지닌 근본이 된다. 사실 일미(一味)이기는 하지만, 여섯 가지 문[六門]을 열어 놓는 까닭에 이 여섯에 의하여 과문(科文)을 나누어 해석하였다.
먼저 품명에 대하여 해석하겠다. ‘무상’이라고 한 것은 무상관(無相觀)으로, 모든 관념[諸相]을 깨뜨린다는 뜻이다. 다음에 ‘법(法)’이라고 한 것은 관찰할 법[所觀法]으로서, 일심법을 의미한다. ‘무상관’이란 것은 먼저 품(品)전체를 여섯 부분으로 나눈 가운데 첫 분[第一分]의 뜻이며, ‘소관법’이란 뒤에 6문(門) 가운데 첫 문(第一門)의 법이다. 여기 첫 품에서는 이 두 가지 뜻을 나타내므로 ‘무상법품’이라고 부른다.
[출처 : 동국역경원/ 이인혜 번역] : 해인의뜨락에서 가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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