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기
유병덕
2015harrison@naver.com
개구리처럼 벽에 붙어있다. 박쥐처럼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이도 보인다. 여기저기서 올라가느라고 안간힘을 쓴다. 같은 색깔의 홀드를 찾느라 눈동자가 바삐 움직인다. 한 젊은 처자가 발아래 홀드를 보더니 발끝을 세우고 한 발짝 옮긴다. 머리를 들어 위쪽 홀드를 노려보다가 원숭이처럼 웅크린 몸을 펴며 팔을 쭉 뻗는다. 손으로 홀드를 잡고 발을 옮기려다가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쿵 떨어지고 만다.
얼마나 아플까. 내심 걱정했다. 암벽에서 떨어진 그녀의 모습을 지켜본다. 그녀는 몸이 바닥에 닿자마자 떼구루루 구른다. 마치 가을바람에 굴러가는 마른 잎처럼 가볍게 구른다. 잠시 몸을 멈추더니 고슴도치처럼 움츠리고 있다. 호흡을 몇 번 고르더니 툭툭 털고 일어난다. 그 모습이 대견하여 박수를 보냈다.
어디로 운동하러 갈까 망설이고 있던 참이었다. 비가 며칠 내려서인지 땅이 질척거려 야외활동을 할 수가 없었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 젊은이가 우산을 받쳐 들고 다가오더니 운동하러 가자고 한다. 가끔 스크린 골프를 함께하던 친구다. 오늘도 스크린 골프하러 가겠거니 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차에 올랐다. 그런데 아니다. 대학교 입구에 있는‘실내 암벽등반 체험장’이다.
생경한 일이다. 길게 줄지어 있는 틈에서 기다려야 했다. 젊은 남녀들은 비를 맞으며 즐거운 표정이다. 앞줄에 서 있는 젊은이의 말을 귀동냥하노라니 초보자 같다. 오늘은 떨어지는 연습만 제대로 해보겠다는 다짐이다. 지난번에 검은색 홀드를 정복하려다가 떨어져서 허리를 다쳤었다고 한다. 나는 떨어져서 다쳤다는 말에 두려움이 앞섰다.
갑년이 지나 객기를 부리는 일이 아닐까. 그렇다고, 못하겠다고 돌아설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호기심이 가득했던 젊은 날의 일들이 영화필름처럼 되살아난다. 오서산에서 서해를 바라보며 뛰어내렸던 패러글라이딩, 남이섬에서 시퍼런 강물을 향해 몸을 던졌던 번지점프 등 많은 일이 뇌리를 스친다. 한동안 심한 고소공포증에 시달렸다. 사고도 있었다. 춘천 구곡폭포로 빙벽등반 갔다가 사고를 당했다. 전문 산악인들이 가는 모임에 따라나섰다가 죽을 뻔했다. 짧은 코스에 난도가 낮아서 초보자에게 적합하다고 권하여 오르다가 중간지점에서 발을 헛디뎌 미끄러졌다. 산악 전문가에게는 쉬운 코스였지만, 내게는 무리였다. 매사 내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나섰다가 변을 당하곤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마음이 변하는 것 같다. 한때 ‘구곡’ 소리만 나와도 트라우마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경춘가도를 달리다가 구곡폭포 앞길을 지나면서 구곡폭포 쪽을 쳐다보기도 싫었다. 이제는 한편의 추억이 되었다. 일전에 증조부 유고 시집을 국역하다가 ‘문양 구곡’이 나와서 반가웠다. 중국 고전을 뒤지며 구곡의 의미를 새겨보았다. 구곡폭포는 꿈, 끼, 꾀, 깡, 꾼, 끈, 꼴, 깔, 끝이라는 구곡혼(九曲魂)이 담겨있는 곳이다. 지난여름에 가보니 아홉 골짜기를 휘돌아 흘러내리는 폭포수가 선녀의 날개옷처럼 하늘거리며 아름답고 단아해 보였다.
오늘 당장은 암벽등반이 어렵더라도 훗날에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리라. 설사, 등반하다가 떨어져 다치더라도 좋은 경험이 되겠다고 생각하며 용기를 냈다. 하긴 조금 전 암벽등반을 하다가 떨어진 그녀의 표정이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이윽고 내 차례가 왔다. 강사가 나오라 하더니 꼭 끼는 암벽등반화를 신게 하고 복장을 검사한다. 군에서 훈련하는 조교처럼 시선이 날카롭다. 암벽등반은 위험하니 자신의 지시에 잘 따르라는 당부다. 그는 지휘봉을 들고 올라갈 홀드의 색깔을 가리키며 자세히 일러준다. 자칫 몸의 균형을 잃으면 떨어진다며 손으로 잡을 홀드와 발을 올려놓을 홀드의 순서를 여러 번 설명한다. 암벽에서 떨어지는 요령을 몸으로 보여주더니 바로 따라 해보란다. 일 미터, 이 미터, 삼 미터. 단계별로 떨어지는 훈련이다. 지난 구곡폭포에서 떨어져 본 경험이 큰 힘이 되었다. 무게중심이 발에 있기에 서두르지 않고 조심조심 발을 옮겼다. 한나절 떨어지는 연습을 하고 나니 잘했다고 칭찬하며 자유롭게 즐기라고 한다.
강사의 말 한마디가 가슴에 와 꽂혔다. ‘암벽등반은 올라가는 것보다 떨어지는 연습이 먼저입니다.’라는 말이 크게 다가왔다. 이는 암벽등반뿐만 아니라 세상사 모두가 그러한 것 같다. 지난날 남보다 뒤떨어지면 영원히 낙오되는 줄 알았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을 패배자의 변으로 치부해 버렸다. 그래서 친구나 동료들보다 앞서가거나 먼저 올라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내 모습이 부끄럽다. 친구들과 산에 오르면 산악 훈련이 맞다. 오순도순 이야기 나누며 풍광을 보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산 정상에 누가 먼저 도착하나 시합하듯 올랐다. 그러고는 몸살이 나서 며칠 고생했다. 또 직장에서도 그러했다. 동료들보다 하루라도 먼저 승진하려고 무던히 애썼다. 위 사람이 시키면 물불 가리지 않고 해결하느라 밤새워 일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가족이나 친척, 그리고 친구들과 정서적으로 남남이 되어 버렸다. 먼저 오르려다 얻은 거 보다 잃은 게 더 많은 것 같다. 지나고 나니 일등도 승진도 부질없는 일이다.
내 마음을 대변하는 어느 시인의 시구가 떠오른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꽃 내려올 때 보았네,’ 젊은 날 보지 못했던 즐거움과 행복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곳저곳에서 고개를 내민다. 화려한 봄꽃보다 차분한 가을꽃이 아름답다. 이제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빙그레 미소 짓는 국화가 보인다.
다음 주말에 암벽등반을 다시 도전해 보고 싶다.
첫댓글 올려 주신 수필 잘 읽었습니다.
좋은 수필 읽게 해주시어 감사합니다.
졸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더운 날씨 어렵습니다. 하느님 보일러 꺼주세요
교수님 그리고 사모님 늘 건강시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유병덕 수필가님
삶이 곧 문학이군요,
유병덕 수필이 빛납니다.
잘 읽었습니다.
졸필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