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5경 잉글랜드 서리(?) 오컴~ 1349(?) 뮌헨.
영국의 프란체스코 수도회 철학자·신학자·정치저술가.
유명론의 형식을 창시한 인물로 여겨지는
후기 스콜라 철학 사상가이다.
유명론이란
'아버지' 같은 보편 개념이
그 보편자나 일반명사가 가리키는 개체들과 따로
실재성을 가진다는 점을 부인하는 사상 학파이다.
초기생애
어린시절에 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들어갔을 때에는 아직 어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수도회의 핵심 관심사이자 교회에서 벌인 논쟁의 주제는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수도회 안에서 실천해야 할 엄격한 청빈생활에 관해 세운
생활규칙에 대한 해석문제였다.
오컴이 프란체스코 수도원에서 받은 초기 교육은
주로 논리학에 대해서였다.
오컴은 명사에 관한 학문이 신·세계·교회기관·시민기관 등
사물에 관한 모든 학문을 연구하는 데 기본적이고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생애를 통해 논리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모든 논쟁에서
논리학은 상대에 맞서는 주된 무기로 쓰일 수밖에 없었다.
초기 교육을 마친 뒤
오컴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전통적 과정을 이수했고,
1317~19년에는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센텐티아〉에 관해 강의한 듯하다.
롬바르두스는 12세기 신학자이며
그의 저서는 16세기까지 대학에서 신학의 공식 교과서였다.
또 롬바르두스의 강의는 주석서로 기록되기도 했는데
그중 〈센텐티아〉의 제1권에 대한 주석서(〈오르디나티오 Ordinatio〉라고 알려짐)는
오컴이 직접 썼다.
오컴의 견해는
신학부 성원들의 강력한 반대를 불러일으켰고,
신학부 학위도 받지 못한 채 대학을 떠났다.
그러므로 대학의 용어로 말하자면
그는 학부 재학생으로 남아 있었으며,
이는 옥스퍼드대학교의 용어로는 인케프토르('초보자'라는 뜻), 파리대학교의 용어로는
'바칼라우레우스 포르마투스'였다.
오컴은 영국 수도원에서 학문활동을 계속한 듯하며
동시에 자연철학의 핵심 논리학을 연구하고 신학 논쟁에 참여했다.
1324년 가을 교황의 초청으로 조국을 떠나
프랑스 아비뇽으로 갈 때
그는 대학의 환경을 잘 알고 있었다.
대학 환경은 논쟁뿐만 아니라 권위있는 사람들의 도전 때문에 혼란스러웠다.
특히 교리 문제에서 주교들의 도전과 대학 총장 존 루서럴의 도전이 대표적이었다.
루서럴은 1322년 교수진의 요청에 의해 직위를 박탈당했다.
오컴의 글들은 매우 추상적이고 개인감정을 섞지 않은 문체로 되어 있지만
그의 지적·정신적 태도 중 적어도 2가지 측면을 잘 드러낸다.
즉 그는 신학자 논리학자(theologicus logicus :
이 말은 루터가 사용한 용어임)였다. 한편 그는 논리학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엄격한 합리적 평가,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의 구분, 증거와 개연성 사이의 차이 등을
주장했다.
이는 인간의 자연적 이성과 인간 본성을 크게 신뢰하는 주장이었다.
다른 한편 신학자로서
그는 교의에 나온 그대로의 신이 일차적으로 중요하고
이 전능한 신이 인간을 은혜롭게 구원한다고 말했다.
즉 신의 구원행위는 의무를 부과하지 않고 주기만 하는 데 있고
이미 자연을 창조한 데서 유감없이 증명되었다.
"쓸데없이 복수의 것을 가정해서는 안 된다"라는 중세에 나온 경제원리는
'오컴의 면도날'이라고 알려져왔다.
오컴은 특히 스콜라 철학자들이 실재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많은 것을 제거하기 위해 이 원리를 사용했다.
요한네스 22세에게 바친 소논문
오컴은 아비뇽에서 존 루서럴과 다시 만났다.
루서럴은 교황 요한네스 22세에게 바친 소논문에서
〈센텐티아〉에 관한 오컴의 가르침을 공공연히 비난했고,
56개의 명제를 뽑아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때 루서럴은 6명의 신학자로 구성된 한 위원회의 위원이었다.
이 위원회는 오컴의 해설서에서 뽑아낸 글을 바탕으로
2편의 연속보고서를 작성했는데 그중 2번째는 훨씬 더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오컴은 교황에게 약간 수정한 〈오르디나티오〉의 사본을 바쳤다.
오컴은 그의 가르침 때문에 유죄판결을 받을 듯했으나
유죄판결은 나오지 않았다.
아비뇽에 있을 때 머문 수도원에서
오컴은 베르가모의 보나그라티아와 만났다.
보나그라티아는 민법과 교회법 박사였고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청빈문제에 관해
요한네스 22세에게 반대했다가 박해를 받고 있었다( 빈곤).
1327년 12월 1일
프란체스코 수도회 총회장인 체세나의 미켈레가
아비뇽에 도착하여 같은 수도원에 머물렀다.
그도 청빈에 관한 논쟁 때문에 교황의 부름을 받았다.
두 사람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재산을 소유했는지,
즉 그들이 사적이든 집단적이든 모든 소유권·재산권·재산사용권을 포기했는지에 관해
의견이 달랐다.
미켈레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모든 소유권과 재산권을 포기했으므로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들도 소유권과 재산권을 포기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요한네스와 미켈레의 관계는 점점 더 나빠졌고
급기야 미켈레는 1328년 5월 26일 보나그라티아와 오컴을 데리고 아비뇽을 탈출했다.
오컴은 미켈레가 4월 13일 비밀리에 기초한 호소문의 증인이었으며
9월 피사에서 그 호소문에 공개적으로 서명했다.
피사에서 3명의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가
바이에른 황제 루트비히 4세의 보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루트비히 4세는
1324년 파문당했고 요한네스 22세로부터 제국에 대한 모든 권리를 상실했다는 선고를 받았다.
3명의 수사는 루트비히 4세를 따라 1330년 뮌헨으로 갔고
그때부터 오컴은 교황권에 맞서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엄격한 청빈 개념과
바이에른 제국을 옹호하는 글을 열심히 썼다.
오컴은 1328년 상급 총회장의 지시를 받고 청빈에 관한
로마 교황의 교서 3편을 연구한 결과 이 교서에서
요한네스 22세가 자신의 이교 때문에 성직수여권을 이미 상실한 이단자임을 보여주는
많은 오류를 발견했다.
오컴은 1330~31년에 설교를 통해
요한네스 22세가 사이비 교황임을 증명했다.
이 설교에서
그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영혼이 죽음 직후에 신을 볼 수는 없으며
이 영혼이 최후의 심판에서
육체와 다시 결합한 뒤에야 비로소 신을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견해는 전통과 모순되는 것이었고 결국 거부되었다.
그러나 오컴의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는 여전히 청빈 문제였다.
그에 따르면 이 문제는 종교적 완성을 위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다루는 이론 분야가 필요했다.
성 프란치스코의 복음주의 율법 아래서 살기로 선택한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는 신이며 따라서 우주의 왕이지만
소유권을 포기하고 세속적 권력을 내어놓고 오직 자기에게 부여되는 믿음을 통해서만
이 세상에 군림하려 한 가난한 사람으로 나타났다.
이 군림은 교회라는 형식으로 표현된다.
교회는 교황이든 종교회의든 절대무오류의 권위없이 구성되고
본질적으로 독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는 설사 일시적으로는 몇 사람 또는 한 사람으로 줄어들더라도
수백 년 동안 버텨왔고 틀림없이 앞으로도 계속 버틸 것이다.
지위와 성(性)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교회 안에서 모두에게 공통되는 신앙을 지켜야 한다.
오컴이 보기에
교황의 권력은 복음과 자연법으로 확립된
그리스도교인들의 자유 때문에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교황권에 맞서 제국을 편든 것이나,
오컴이 1339년 교회 재산에 세금을 물릴 수 있는 영국 왕의 권리를 옹호한 것은
정당하고 복음과 일치한다.
1330~38년 오컴은 이 논쟁의 한가운데 서서
15~16편의 다소 정치적인 책을 썼다.
그중 몇 편은 공동집필했지만,
가장 방대한 〈90일간의 일 Opus nonaginta dierum〉은 혼자 썼다.
파문
아비뇽에서 탈출한 뒤 파문당한 오컴은
1334년 요한네스 22세가 죽은 뒤,
베네딕투스 12세의 재위기간(1334~42),
클레멘스 6세의 선출,
1347년 루트비히 4세가 죽은 뒤에도
똑같은 기본견해를 유지했다.
이 마지막 몇 해 동안
그는 논리학에 관한 2편의 소논문을 쓸 시간을 얻었다.
이 논문은 그가 논리학에 일관되게 중요한 역할을 부여했음을 입증한다.
또 교황 클레멘스가 제안한 중재절차에 관해서도 토론했다.
오컴은 1349년경 흑사병으로 추측되는 병으로 뮌헨의 한 수도원에서 죽었다.
오컴의 razor(면도날)
Occam's razor라고도 쓰며, 경제법칙·절약법칙이라고도 함.
스콜라 철학자인 윌리엄 오브 오컴 (1285경~1349?)이 주장한
"실체가 필요 이상으로 늘어나서는 안 된다"
(non sunt multiplicanda entia praeter necessitatem)는 원리.
이 원리는 오컴에 앞서
이미 프랑스 도미니쿠스 수도회 신학자이며 정통파라기에는 의심스러운 철학자
뒤랑 드 생푸르생이 제시했다.
뒤랑은
이 원리를 사용하여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인지적 종(種), 능동적 지성, 성향 등의 실재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은
추상일 뿐이라고 설명하고,
이 모두가 불필요하다고 일축했다.
마찬가지로 과학에서도
14세기 프랑스 물리학자 니콜 오렘이 사고의 경제법칙을 제기하여
나중에 갈릴레오가 했듯이 가장 단순한 천체 가설을 옹호했다.
그뒤에 다른 과학자들도 비슷한 단순화 법칙과 원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오컴은 이 원리를 매우 자주 언급했으며,
'오컴의 면도날'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주 날카롭게 사용했다.
예를 들어 그는 이 원리를 사용하여
사물들에 관계를 제거하고 관계란 사물들에 기초한다고 주장했다.
또 기능적 인과성을 제거하고 이 인과성은 단순히 규칙적인 연속일 뿐이라고 보았으며,
운동을 제거하고, 운동이란 한 사물이 다른 장소에서 다시 나타난다는 의미로 이해했고,
각각의 감각 양식에 특징적인 심리적 힘도 제거했다.
또한 관념들의 현존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창조주의 정신 속에 있는 관념도
그 자체가 피조물일 뿐이라고 보고 제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