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저는 대구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공장에서 근무할때에
주위에서 좋은 천주교신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이를 중요하게 여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불교신자인 엄마의 반대에 의해서 저는 냉담시기를 거쳤습니다
그리고 결혼하고 아이가 100일도 채안되는때에
저는 혼자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아낸와 갓난아이는 두고선 말입니다
저는 서울에서 여러수도원의 수사님과 젊은이들의 공동체를 만났고
대학로에서는 청년성서모임과 합류할수가 있었지요
저는 사제나 수도자들에 의한 일방적인 전달교육이 아닌 평신도공동체를 원했습니다
특히 같은 생각을 가지는 남자들의 모임을 웧했지요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지요
저희 몇몇 뜻이 있는 남자들은 매주 토요일 저녁미사후에 성당에 남아서 토독을 하기 시작합니다
저녁 9시부터 1시까지 4시간씩 신약성경을 한절씩 돌아가면서 읽었지요
몇달을 지나고보면 신약 전체를 읽을수가 있었지요
이들 영향을 받아서인지 성당모든식구들은 수도원을 빌려서 그곳에서 1박2일로
성경통독피정을 가졌다
그리고 남자구역자들을 산대로 도봉산자락에 있는 수도원에 가서
피정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1박2일간이었지만 우리는 성당에서 몇달간
같이 지내던 그 이상의 친교를 갖게되었지요
그때에는 저는 레지오회합때에 갈등으로 그만두었던 시기였다
저는 세월이 흘어서 안산으로 이사왔다
그런데 남자들만의 공동체가 그리웠지만 주변에 아는 사람들중에는
그런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듯했다 너무 실망이 컸다
그때에 성령기도회에서 헌신적으로 직접 키보드를 치면서 봉사하는 자매님을 만났다
이자매님은 교구에서도 독학으로 익혔다고 한다.
참으로 놀라운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당 다른단체의 사람들로부터
늘 견제를 받았다. 그녀는 결국 어려움을 겪은후에야 본당을 떠나갔다
떠나기전에 그 모임에서 두자매로부터 '성서형제회'를 소개받았다
열성적인 성령기도회자매님은 저를 아주 좋게 보셨는지
저를 봉사자로 키우고싶어하셨고 이를 집중하기 위해서 다른 단체에
가서 활동하는 말라고 정에게 권고하셨다
그때에는 저는 그 이유를 알지못한채 기도회를 그만두었다
왜냐하면 저의 마음속에는 남자들만의 공동체를그리워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당에서 형제들이 복음과 관련된 공동체활동을 한다는
이야기는 듣지못했지만 성서형제회라는 단체에서 수원교구의 다른본당
에가서 견진교육봉사도 하고 교도소등 시설에 가서 봉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저는 주일에 모임을 한다는 어느 코이노니아에 참석했다
말로는 성서형제회라고 하였지만 그 공동체는 온통 여자들 뿐이었다
저는 보통 복음나누기하는 공동체로 여기고 보통때부터 많은 준비를
하고 그곳에서 참석하였다. 그곳에 있는 자매들은 대부분이 오랫동안
이 모임을 해왔으며 여러분이 매주 돌아가면서 진행을 보게되는데
몇달이 지나도록 저에게는 시키지않았다. 나중에야 알았는데 남자와
여자와의 대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아주 달랐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저는 본당에서 자매들과 애기를 나늘때에 구설수가 있을것
인가에 대해서 자주 조심을 하는 편이었다. 그들이 나눗는 애기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저는 여러차례의 구설수로 인하여
그만두고 나왔다. 저는 그곳에서 지속적으로 하고싶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이일을 잊고살아가는데 본당에는 저의 유일한 대학후배가
있었고 그는 제가 안산시청에서 계약직으로 일하기에 정직원인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갖고 도움도 많이 받았다
어느날 성서형제회에서 남성편이 생겼다면 도와달라고 했다
저는 레지오에 다시 들어갈수있도록 도와준다는 조건부로
남성코이노니아팀으로 들어가게된다. 여성팀으로 있을때에
저와 갈등을 겪은 사람들은 이미 다른본당으로 옮겨간 이후였다
제가 여러구설수임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성서형제회에
들어갈려고 했던 것은 다른본당과 사회시설에 열성적으로 봉사하는
모습을 본당에서 보아왔기 떄문이었다
그리고는 호기심으로 월례회의를하러 따라간 당산동성당에 모인
여러봉사자들을 보고 완전히 반했다 그리고 그곳을 통해서
수련회에 초대를 받고 그런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저는 특히 전주공동체의 헌신적인 모습을 보고 저는 조금이라도
공동체에 도움이 될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이를 위해서 저는 어떤 경우에도 불구하고 모임과 피정에
전부 참석했다. 그리고 이런 활동들을 소식지에 올리기 위해서
카메라를 준비하고 글과 사진을 남겼다. 물론 이를 하는데는
전주봉사자들의 격려와 도움이 큰힘을 주었다.
사실 이런일로 제가 안산을 떠나 문경과 대구로 먼거리로 이동하면서
그 먼거리를 불평없이 참석할수가 있었다.
문경으로 이사갔을때에는 살고있는 집은 텃밭이있는 2층집이었고 그 주변에는 마을이 없었고
600미터를 더 들어가야만 마을이 있었고 성당까지는 2km남짓이고 시외버스정류장까지는
1.5km정도이고 이곳을 가기위해서는 걸어다녀야 했다
시골길이고 차가 다니는 도로이지만 농촌인지라 서울로 가기위해서 첫차를 타야 하기에
어두컴컴한 길을 걸어나와야했다. 때로는 아침에 아스팔드에 내린 서리가 반사되어서
그 밝기로 야간언덕길을 넘어갔다
길에서 저멀리는 개천이 지나가고 있었기에 조용한 새벽길에는 그 소리를 듣기가
충분했다. 대구에 와서 느끼는 것인데.. 문경에서 가기가 어려운곳이 호남지역인데
그곳에 수련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하루전에 안산에서 마물다가 서울팀과만나서 가기도 하였다
그런데 대구에서는 전주가기가 훨씬 가깝다는것을 알게되었다.
저는 제가 성서형제회에 들어올려고 했을때에 좋은 모습이
그이후로는 보이지않아서 너무 서글펐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지에 대해서 저는 늘 고심하고 있었다
저는 이런 생각으로 제맘을 제데로 퍌칠수가 없었다..
그이후의 생각은 정리대는 대로 올려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