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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내려앉는 것은 아름답다]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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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앉는 것은 아름답다]
윤태운 시집 / 서진출판사(2012.08.10) /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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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앉는 것은 아름답다
윤태운
저물 무렵 천수만에 가면
책갈피를 넘기는 듯
새떼가 선회하는 것을 본다
수만 마리가 새까맣게 내려앉는 장관은
차라리 쏟아지는 것이다
하늘 가운데 달빛도 갉아 먹고
새들이 갯논 바닥을 후벼댈 때는
천수만 한쪽이 무너진 허물을 남긴다
부리 끝에 날바닥이 드러난 논
잿불처럼 불티나고 뭉클한 일몰은
다음을 기약하는 먼 솟구침의 끝머리이다
내려앉은 것은 새들만이 아니다
생生의 끝 저 낭자한 일몰도
억척같은 저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랑이고
하늘이 내려앉는 것일 게다.
그리운 연꽃
윤태운
궁남지
그곳에 가면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멀고 먼
세월을 돌아온
그들만의 체취와
못 다한 그리움도 있다
이마에 땀방울 맺히는
오뉴월의
사무치는 처연한 이야기와
때로는
하늘을 향해 소리치고 싶은
강인하고 소름 돋는 아우성도 있다
꺾여도
진흙 속에
해마다 뿌리에 내려
사라舍利처럼 빛나는
소부리 사람들의 자존심이 있다
꽃비(2)
윤태운
신금성神衿城 가다가
비바람에 쏟아지는
복사꽃 편지를 보았네
몸살이 난 듯
흐드러진 꽃잎
도랑 밑으로 넘실거릴 때
옷깃을 여미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직도 엽서만큼 남아 있는
젊은 날을 생각하였네.
*신금성神衿城 : 충남 홍성군 결성면 송곡리에 있는 고성古城
백월산 계곡을 가자
윤태운
몇 날 며칠 밤을
쉬지 않ㄱㅎ
비가 오더니
산 하나를
말끔히 씻어
햇빛 아래 세우고
계곡의 푸른 물
홍성천에
모두 쏟아 버리고 있네.
속동 갯마을
윤태운
바다가 길을 열 때는
그녀가 달거리를 하는 날이다
이지러지는 듯
몸 한구석이 무너지는 날이다
소름 돋는 몸살
우울해서 슬픈 날
멀리 하안에 도둑 게[蟹]들이 모여들고
비운 가슴에
물길이 가득 채워지는 보름달은
그녀가 달거리를 끝내는 날인 것이다
조개를 줍는 동네 사람들이
비릿한 해풍을 즐겨 맞는 날이다
*속동 : 충남 홍성군 서부면 상황리에 있는 갯마을
고향
윤태운
이 세상
어딘가에 살면서
고향 생각 한 번 안 해 본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이 세상
어디인가에 있으면서
그곳에 가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또 있을까
할머니 주름살 같은
담장 위의 인동넝굴이
언제나 반겨주는
비에 젖어도
서릿발 눈비가 오는 날도
마음은 항상 달려가고 싶은 곳
잊어버린 사랑
개발 때문에 없어진 동네
그리운 곳이 어디 그곳뿐이랴.
내 마음
윤태운
바람처럼
기척도 없이
찾아와
어떻게 지냈느냐
묻지도 않고
지난 가을
조각난 사랑만
찻잔에 내려놓고
앉아 있네
그날도
오늘처럼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었지
폭설을 바라보면서
윤태운
너를 만나 반가운 것은
지난날 사막을 함께 가면서
짜디짠 눈물로 옷소매를 적신
기억 때문이 아닐 게다
언 가슴으로
어둑하니 성벽을 넘어오는
그대의 모습은
내 애인처럼 눈빛도 숙연하고
새들이 숨어들고
하얗게 고개 숙인 나무는
천년에 한 번 뿐인 경건함도 있다
헤아릴 수도 없는 먼 생각
우린 무엇으로 만난 적이 있을까
모든 것을 다 소진할 때까지
그렇게 잊고 있던 인연이 무엇인지
오늘은 밤을 새워 너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막사발
윤태운
가슴에 주어진 만큼만
소문을 담아
죽이든 밥이든
있는 그대로
입맛을 삭히고
참으로
쉽게 깨지는
세상 대신
온전하게
하나로 채워주는
도가니 같은 것.
나사못
윤태운
어긋나는 곳에는
물밀 듯이 깃들어야 한다
제자리를 찾지 못해
웅크리고 눅눅해진 고백들이
길 위에서 방황하고 있다면
발밑이 꽉 찰 때까지
스며야 한다
식지 않는 열기
황홀한 침식은 슬픔과 권태를 낳고
다듬을수록 어긋날 때가 있어
깊어가는 어둠
매듭의 시간으로 가면서
나선형의 끝에 심장을 묻으려고
기억에 남을 밤이 내려앉고 있다.
숲속에서
윤태운
툭툭 목어木魚 우는 소리가
숲속을 깨워 온통 수군대고 있었다.
하얀 향기를 쏟아내는 쥐똥나무 숲에서
나는 귀청을 때는 아우성을 듣고 있다.
처음에는
살아있는 것들의 수다라고 생각하였지만
움직임을 보아 치열한 싸움이었다.
개미 군단의 발굽소리도
나무들의 물대포 소리도
벌레들의 나무 잎 갉아먹는 소리도
산울림처럼 살아 있어서 더욱 그렇다.
숨을 쉬는 것도 그들에게는 경쟁이었다.
숲은 늘 조용한 것이 아니었다.
고목나무에게
윤태운
너를 보고 있으면
먼 옛날 가슴이 젖어
바람처럼 가버린 세월이 생각난다
사람들은
한 때 다정했던 그들이
어디서 왔다가 무엇 때문에 갔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지만
언제부터인가 소원해진 분위기
새로운 소통을 위하여
지금은
찌든 생각과 무관심을 한데 묶어
쥐어짜고 싶은 때가 아닌지
외진 초가을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네가 거는 말이나 웃음으로
섶 다리를 놓아
한데 엉키는 숲을 만들고 싶다.
그림이 있는 항아리
윤태운
흐르르 참새 떼가 쓸어간 자리에는
대나무 잎 부딪치는 소리의 허전함도 있다
촉촉이 내리는 비가
메마른 가지에 생기를 돋게 하여주고
마구 털어내는 매화나무 향기는
차가운 달빛처럼 층층이 쌓이는데
나는 지천에 깔린 꽃잎과
바위 틈새로 흘러나오는 난향
그리고 벌 나비가 나르는 국화꽃을 모아
미련 없이 항아리에 담고 있었다.
꿈이런가
바람은 여운을 그리며 하늘을 날라 간다
그렇게 백면, 그렇게 한 평생
그를 사랑하면서 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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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 싶은 말
나는 지금도 누가 나에게 시인이라고 하면 좀 머쓱한 기분이다.
처음 시집을 내었을 때 문예지에 내 글이 실렸을 때도 그걸 다시 읽어보면 부끄럽고 읽는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가끔 하였다. 그것은 자기 글에 대한 자부심이 없고 독자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을 잘 만나 유년시절부터 남들이 못 보던 만화책을 읽으며 자랐고 중학교 다닐 때는 한용운, 모현숙의 시집과 인현왕후전, 한중록, 단테의 신곡, 소크리테스의 변명과 크리톤, 그리고 에이츠(Yeats, William Butler) 등을 읽고 아는 체도 많이 하고 다녔는데 지금도 그때처럼 시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쓰고 있어 이 나이 먹도록 남에게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글을 한 번 도 써본 경험이 없다.
이제 또 한 권의 시집을 내면서 세련되지 못하고 모방과 습작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졸작이지만 나름대로 심혈을 이우려 쓴 나의 글을 읽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글쓴이 윤 태 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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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운 詩集 [내려앉는 것은 아름답다]
[ 작품평설 ] -
공간의 음향이 들려주는 시의 의미
신 익 선
1. 시의 공간
부분적이고 사건이고 파편적인 동시 전체적이고 전면적이며 온 우주와 세계의 총체인 문학, 그 중에서도 시는 시간의 침전물이면서 시간 속에서 오직 시로서 만의 독특한 공간 구조를 갖는다. 여기서 공간이란 우주의 공간을 총칭한다. 시의 공간은 맨 먼저 곧장 시간과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의 발은 대지를 그 근간으로 한다. 대지는 땅이다. 즉 인간은 땅을 근간으로 공간이 혹은 공간을 근간으로 땅이 형성되어 있지만 시는 보다 광범위하다. 시는 우주 공간을 포괄한다. 여기서 물론 공간이라 함은 텅 비어 있는 형상을 이름 한다. 시에 있어 시에의 공간, 땅 위의 공간에의 텅 빔을 충일케 하는 유일한 매체는 의미다. 사람들 누구나 희구하는 쌀과 돈, 옷과 밥이 아닌 오직 ‘의미’만이 시의 텅 빈 공간을 채운다는 언표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미란, 시에 있어서 의미란 무엇을 지칭할까.
소수문학이론을 주창하면서 이성적 이미지, 변증법적 모델과는 다른 표면효과의 개념을 도입한 이는 들뢰즈다. 그 들뢰즈는 이른바 시뮬라크르simulacre를 선창한다. ‘순간적이기 때문에 경험에 의해 바깥에서 다시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건의 차원’이 바로 그것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시뮬라크르는 하나의 ‘형이상학적 평면’을 형성하는 ‘사건의 차원’이다. 여기서 ‘사건’은 ‘명제 속에 내속insister하거나 존속subsister하는 순수한 사건’을 이름 한다. 즉 말과 사물의 표면에 모순된 역설적인 시뮬라크르를 통해 형성된 개별적이고 특이한 선험적 장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말은 의미를 표현하지만 표현된 것은 사물의 속성인 사건이다.
텍스트는 어떻게 무슨 말로 구성되었느냐를 보는 말의 구성체가 아니라 구축되는 하나의 사건이다. 중요한 것은 시어가 지칭하는 사건이다. 시에서 사건은 반드시 의미를 지닌다. 즉 시뮬라트르서의 의미, 사건은 동일한 빗물체적, 형이상학적 표면을 형성하는데 들뢰즈는 다시 이를 변용상태의 개별자인 엑세이테haecceitas라고 부른다. 이들을 종합하면 뿌리줄기를 뜻하는 리좀rhizome적 사유양식이다. 결국 시의 공간이란 의미를 담는 공간에 다름 아니다. 시의 공간에서 들려오는 의미는 그러니까 교시가 아니다. 시의 공간은 독특하게 생성되어져 항상 진행 중인 의미의 연속성의 집합체다. 이러한 시의 공간, 리좀적 사유의 공간을 거점으로 윤태운 시인의 두 번째 시집『내려앉는 것은 아름답다』시편들이 길게, 혹은 짧게 윤태운 만의 독특하고 새로운 의미의 방출을 시도하고 있다.
2. 땅의 경계에서 생성되는 의미
윤태운 시인의 시에서 맨 먼저 찾아볼 수 있는 시적 퍼스나는 경계다. 윤태운 시인이 살고 있는 내포內浦란 , 글자 그대로 냇가 근처에 있는 포구를 뜻한다. 즉, 바다가 육지 깊숙이 들어와 있어 내륙에서 배를 댈 수 있는 고장을 뜻한다. 이 내포 고을은 윤태운 시인 자신이 평생 살아 온 땅이기도 하다. 윤태운은 이들을 유효 적절히 활용한다. 그리고는 내포지역 곳곳을 두루 살피며 다시 이를 시편으로 형상화하여 각기 다른 의미의 시적 변용을 꾀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바다가 길을 열 때는
그녀가 달거리를 하는 날이다
이지러지는 듯
몸 한구석이 무너지는 날이다
소름 돋는 몸살
우울해서 슬픈 날
멀리 하안河岸에 도둑 게들이 모여들고
비운 가슴에
물길이 가득 채워지는 보름날은
그녀가 달거리를 끝내는 날인 것이다
조개를 줍는 동네 사람들이
비릿한 해풍을 즐겨 맞는 날이다
- <속동 갯마을> 전문
충남 홍성 서부에 있는 갯마을을 형상화한「속동 갯마을」시편은 윤태운 시인의 이번 시집에서 가장 빼어난 작품이다. 통상 마을은 길에 연계되어 있다. 문학에서는 이 ‘길’이란 삶과 인생의 ‘길’로서 비유되곤 한다. 길은 사람의 실존에서 절체절명의 주요 모티브다. 도덕적으로도 그렇고 물리적으로도 그러하다. 흔히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마라’라는 경구 속의 길은 사람이 지켜야할 도리를 말한다. 이를 도덕적 성질의 상부구조superstrucure라 한다. 사람이 걷는 일상적인 길은 대표적인 하부구조infrastucture다. 상부구조의 길이 불완정한 여정이며 이중적이고 모호한 갈등이 상충하는 고난도의 복합지대인 반면 하부구조의 길은 걷거나 방황하는 행위가 내포된 통행하는 길로 파악된다. 또 길은 ‘다닌다’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행行’의 의미가 있으며, 행은 곧 실천을 의미하기도 한다.
위 시편에서 명명된 ‘바다길’은 하부구조의 길이다. 그러나 여기서 바다길, 즉 밀물과 썰물의 달음박질은 단순히 조수작용만이 아니다. 경도徑道, 여인의 달거리도 조수의 밀려옴과 밀려감 같은 물길이다. 인간의 사랑과 죽음 역시 달음박질 속에 생성, 소멸 되는 삶이 물길이다. 이 시편은 바다 길에 견주어 생명운동의 원형질인 여인의 달거리를 표현하는 동시 사람이 생존해 가는데 가장 긴요하게 여겨지는 노동현장, 즉 서부 속동에 사는 어부들의 삶을 통하여 인생을 조망한다. 물길, ‘바다길’을 통한 신비로운 삶의 이야기가 이 한 편의 시편에서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 시편에서의 ‘바다길’이란 무엇인가.
‘바다길’이란 바다에 난 길이다. 위 시편에서 기술한대로 원래 바다도 길을 내고 길을 연다. 억 겁을 두고 예외 없이 교차하는 밀물과 썰물은 바다만이 내는 길이다. 육지에서의 길이 사람이 만드는 것에 비하여, 이 ‘바다길’은 신이 만든다. 그러면서 밀물과 썰물이 내는 ‘바다길’은 일정한 주기를 갖는다.
한 달에 두 번, 그믐달과 보름달일 때 밀물과 썰물의 변화가 가장 크다. 이때를 ‘사리’ 또는 ‘대조’라 부른다. 태양과 지구와 달은 일직선에 놓이므로 지구와 달의 중력이 합쳐져서 바닷가의 수위를 높인다. 또 한 달에 두 번, 상현달과 하현달일 때 태양과 지구와 달이 서로 끌어당기는 밀물과 썰물의 변화가 가장 작게 나타나는 순간이다. 이때를 ‘조금’ 또는 ‘소조’라 부른다.
이렇게 밀물과 썰물에 따라 나타났다 잠기고 잠겼다 다시 나타나는 것을 반복하는 공간을 조간대라 부른다. 조간대는 변증법으로 보면 경계의 미학을 보여주는 곳이다. 경계이기 때문에 가능한 자연섭리의 순환운동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다와 땅의 경계, 그러면서도 들숨과 날숨의 변화에 적응하여 독립된 세계를 꾸리는 곳이 조간대이다. 조간대의 동식물에게 조석의 변화는 생명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번식하는데 필수불가결의 주요 사안이다. 물이 빠지는 썰물 때는 유기 동물들이 퇴적물 속에 숨어 있는 먹이를 찾는다. 수많은 두루미, 백로, 해오라기 같은 조류가 갯지렁이나 고동을 먹기 위해 날아온다. 하루 동안 비슷한 크기로 두 번의 밀물과 두 번의 썰물 현상이 나타나는 반나절 주기가 있는 반면, 어떤 곳에서는 하루에 한 번 이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또 잇따라 나타나는 밀물과 썰물의 물높이가 많이 다르게 나타나면 이를 ‘혼합조’라 한다.
위의 시「속동 갯마을」은 충남 홍성의 서부지역에 위치해 있어 인근 서산과 닿아있다. ‘바다가 길을 열 때는/ 그녀가 달거리를 하는 날이다’에서 ‘길을 열 때’는 곧 썰물을 말한다. 충남 홍성의 서해안 맞닿은 갯마을인 상황리 ‘속동’의 썰물과 밀물의 주기는 반나절 주기 권역이다.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속도가 빠르다. 그 바다가 ‘길을 열 때’ 는 온갖 육지의 날짐승들이 개펄에 몰려든다. 생명체의 대이동은 비단 자연현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시편이 단순히 그에의 표현에만 머무르고 말았다면 시의 건조한 표피에 지나지 않는다. 썰물 때에 맞추어 바닷가 여인네들을 지칭하는 화자인 ‘그녀’가 ‘이지러지는 듯/몸 한구석이 무너지는 날’을 맞는다는 여인네의 달거리와의 상관관계의 설정이야말로 핵이다. 더러 ‘꽃자리’로 표현되기도 하는 여인들의 달거리, 이를 바닷물이 빠지는 썰물 때에 그녀가 ‘달거리’를 시작한다는 이 은유야 말로 생명에 대한 윤태운 시인의 외경심의 발로가 분명하다.
실상 ‘달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일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신비롭고 가장 오묘하며 가장 경이로운 일이 ‘달거리’다. 피를 순환시켜 생명을 품는 ‘달거리’야 말로 인간이면서 동시에 창조의 영역에 임재 하는 신성한 신의 영역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소름 돋는 몸살/ 우울해서 슬픈 날/ 멀리 하안河岸에 도둑 게들이 모여들고’라는 표현처럼 삶의 고단함을 통한 생명발현의 표식이다. 생명을 가꾸고 존속시켜 가는 일이란 모두에게 어렵고 힘든 기간과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여인의 달거리가 그렇고, 삶이 그렇고, 사랑이 그렇다. 밀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 또한 그렇다. 밀물과 썰물을 빗대어 형상화 한 ‘비운 가슴에/ 물길이 가득 채워지는 보름날은/ 그녀가 달거리를 끝내는 날인 것이다’ 라는 구절들은 하나같이 생명탄생, 생명사랑, 생명외경,생명존중에의 비경을 말한다. ‘달거리를 끝내는’ 것은 인력引力 곧, 만유인력에 의하여서이다. 달의 음성을 듣는 바다의 신비한 율동이 밀물과 썰물이듯이 여인의 달거리 역시 우주의 음성을 듣는 생명창조자로서의 신비스러운 생태와 서로 연계된다. 그 뿐이랴 ‘조개를 줍는 동네 사람들이/ 비릿한 해풍을 즐겨 맞는 날이다’에서처럼 ‘달거리’에서 윤태운 시인은 갯마을 어부들이 먹고 사는, 생명 보존의 원동력인 노동현장까지 짚어낸다.
통상 갯마을에서 어부들은 달의 월령(달나이)에 맞춰 고기잡이에 나선다.
밀물의 만수위는 조개류의 이동을 가져오고, 곧 썰물이 되면 조개잡이에 나설 것이기에 ‘비릿한 해풍을 즐겨’ 맞게 되는 것이다. 어떤가.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여인의 달거리와 달의 부름을 받아 밀려오고 밀려가는 썰물과 밀물의 때, 달 나이를 따져 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리는 어부들의 합일을 표현한 이 시편이야말로 문학성이 담보된 예술성 높은 흥취가 있지 아니한가. 이 밖에도 ‘몇날 며칠 밤을/ 쉬지 않고/ 비가 오더니/ 산 하나를 / 말끔히 씻어/ 햇빛 아래 세우고…(「백월산 계곡을 가다」일부)에서처럼 홍성의 주산인 백월산을 그린 시편 역시 삶의 근원적인 속성에 기대어 시의 공간이 나와 가장 밀접해 있는 땅의 경계 혹은 지경에서 생성되는 생의 의미를 방출하고 있다 하겠다.
3. 시간의 공간이 울려주는 의미
사전적 의미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끊임없이 이어져 흐르는 공간을 말한다. 베르그송은 이 시간을 과학이 수량화한 객관적 실제이면서 동시에 심리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는 인격체라 명명한다. 이른 바 두 개의 시간이다. 모든 사람들이 바삐 살아가며 맞이하고 보내는 시간의 면면에도 시간은 하나의 개체로 생동하며 살아있어 약동하는 인격체의 그것이라는 것이다. 무수한 삶의 층계를 지나 의미 깊은 연륜의 틀을 짜고 있어서일까. 윤태운 시인은 안광 깊숙이 시간의 공간에서 다양한 의미의 층계를 읽어내고 있다.
① 흙먼지가 있는 긴 의자에
노인 몇몇이
입맛을 잃은 지 오래
퀭한 눈으로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듯
철길이 길게 엎드려
먼 산을 바라보고 있네
-<주포역 엘레지> 전문
② (…전략)
극락 가는 길도
세상사는 것만큼이나 힘에 겨워
천년 넘게 부어있는 중생의 눈이
염불처럼 문지방에 즐비한데
(…중략)
미륵님은 여전한지
샤갈의 여인처럼 손잡고 누워있네
-<운주사> 일부
③ (…전략)
어떤 바람 어떤 어둠이라도
침묵하듯 깜박등이 빛나는 것은
알라딘이 꿈의 문을 열고
불꽃놀이 봇물 터지는 춤판을
벌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는
월로우글로브의 밤하늘이
그렇게 조용조용하게 말을 합니다
-<월로우글로브의 반딧불> 일부
시간은 인간과 외부세계 사이의 관계를 심화시켜 인간의 의식에 각개의 층위를 형성한다. 우주만물은 이 시간이라는 미래영겁未來永劫의 환영 앞에서 속절없이 삼켜지고 만다. 그에 비하여 위 시의 공간에서 획득한 시뮬라크르는 굳이 말하자면 슬픔이다. 슬픔의 환타지나 엘레지 등을 도출해 내는 것이다.
먼저 ①의 시에서 윤태운은 ‘엘레지’를 직감한다. 삶의 환희라는 광장을 빠져나왔을 ‘노인’ 들이 ‘흙먼지가 있는 긴 의자에’ 서 ‘퀭한 눈으로’ 앉아있는 모습에서, 존재해 왔었으나 그 존재를 자각치 못한 새로운 존재의 발견이 바로「주포역 엘레지」이다. ‘흙먼지가 있는 긴 의자’는 ‘노인’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이미 사라져 버린, 열차가 정차하지 않는 폐역인 보령의 주포역 역시 노인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통상 늙은이에게 찾아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입맛을 잃은 지 오래’ 되었기에 입맛을 잃은 몸 역시 야위었을 것이다. 원래대로 무화無化할 날이 가까이 왔다는 이야기다. 그리하여 ‘퀭한 눈으로/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듯 철길이 길게 엎드려/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정황 역시 노인의 다른 표상일 것이다. 노인이라는 이름은 즉, 시간성의 소멸, 혹은 시간성의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의식의 발현이다. 이는 레비나스의 지적대로 시간은 홀로 존재하는 주체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를 맺으며 타자의 얼굴과 마주한 상황에서 현재와 미래의 현존이 실현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철길이 길게 엎드려’ 바라보고 있는 ‘먼 산’이란, 지나간 과거에 다름 아니다. 동시에 궁극의 귀향지인 동시 타자이다. 이 둘의 상관관계의 공간이「주포역 엘레지」로 울음살을 퍼트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②의 시「운주사」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운주사에는 와불臥佛이 계신다. 누워 있는 부처라서, 불전이 코앞이다. 윤태운 시인은 바로 이 누워있는 와불에서 시간을 베고 누워서 타자에 대한 욕망, 혹은 시간의 욕망을 통해 신자들을 껴안아주는 시간의 안부를 묻는다. 이 시에 표시된 중생이란 불가에서 범부를 뜻한다. 깨치지 못한 인간군상을 총칭하는 이름이다. 하루하루 먹고사는데 급급해하면서도 진리를 찾고 구하는 세간인. 그냥 생활인을 총칭하는 말이다. ‘극락 가는 길도/ 세상사는 것만큼이나 힘에 겨워/ 천년 넘게 부어있는 중생의 눈’이란 말은 즉물적인 눈이면서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들려오는 절절한 삶의 기원을 들어주는 부처의 눈[目]이기도 하다. 죽지 않고 변용하고 생동하는 인격체로서의 시간의 눈이면서, 원과 한으로 부어오른 삶의 눈이기도 하다. 혼탁한 삶의 사막을 고달프게 살아가면서 퉁퉁 부어 있지 않은 ‘눈’이 어디 있으랴.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하여 ‘허전’하지 않은 삶이 어디 있으랴. ‘미륵님은 허전’ 하실 것이다. 그래서 윤태운은 마침내 ‘샤갈’을 차입한다. 샤갈은 그의 아내인 벨라 로젠펠트를 즐겨 그렸다. ‘생일’ ‘술잔을 들고 있는 이중 초상’은 아내의 생전에 아내를 모델로 그렸고, 거의 삼십 여년을 함께 살던 아내의 사별 이후에는 ‘그녀’, ‘화촉’, ‘야상곡’ 등의 그림에서 사별한 아내를 그렸다. 20세기 불란서 파리의 최대 거장으로 군림한 ‘샤갈의 연인’이 바로 운주사 와불이고, 더군다나 ‘손잡고’ 있다는 표현은 포근한 이웃 애와 더불어 유년시절 뛰어 놀던 고샅 본능을 일깨우는 자연회귀에의 시선이기 족하다.
그런가하면 윤태운 시인이 매년 왕래하면서 인상 깊게 본 미국의 풍물을 그린 시편인 ③「윌로우글로브의 반딧불」역시 시간 속에 존재하는 특성인 시간성temporality 혹은 시간적 의식의 모습으로 흘러간 자아의 대체물로서 반딧불을 노래하고 있다. ‘어떤 바람 어떤 어둠이라도/ 침묵하듯 깜박등이 빛나는’ 반딧불을 일러 ‘불꽃놀이 봇물 터지는 춤판’이라 본 것이다. 이국의 땅, 미국에서도 시인은 반딧불을 노래하고, 이를 다시 ‘춤판’이라 명명한 것은 윤태운 시인의 시에 대한 독자적이 눈이 형성되었기 때문으로 보아진다. 이렇게 본다면 윤태운 시인은 시를 시간 속에 공영하는 주체의 일환으로서 어떤 시적 공간을 끊임없이 유도해 내는데 능숙하다. 그리하여 그것을 일별하여 시로 형상화 내지는 내면화 하여 현실의 쓸쓸함과 허무맹랑함에 대한 응시를 통한 시간의 공간이 울려주는 의미에 주목하게 한다 하겠다.
4. 사랑의 공간에서 찾아내는 의미
시가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순수 성정을 구현하여 순수서정의 공간에 방점을 찍는다면 윤태운의 시의 서정적 공간에는 사랑이 존재한다. 젊은 날의 고뇌와 욕정과 아픔과 상처를 감싸며 삶의 이곳저곳을 회상하는 바로 그 자리에 육자배기 울림의, 시인의 사랑시편이 자리한다.
(……전략……)
사랑이 끝나면
이 세상도 마지막 같고
모든 것은
그 빛을 잃어버리고 말아
-<사랑한다는 것은> 일부
이 시편은 흡사, 프란시스 W.버딜론의「밤은 천개의 눈을」과 유사하다. ‘밤은 천개의 눈을 가졌지만/ 낮은 단 하나 뿐/ 그러나 밝은 세상의 빛은 사라진다/ 저무는 태양과 함께// 마음은 천 개의 눈을 가졌지만/ 가슴은 단 하나뿐/ 그러나 한 평생의 빛은 사라진다/ 사랑이 다할 순간이면’이라고 버딜론은 사랑을 노래했다. 사랑은 도저到底한 과거의 상처를 치유시키고 현재의 상태를 고양高揚시켜 간다는 측면에서 일체에 대한 가치론적 우위를 점한다.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추앙받는 ‘베르길리우스’는 이 사랑에 대하여 말하길 ‘지상의 모든 생물-인간, 야수, 고기, 가축, 조류鳥類 - 모두에게 사랑의 불길이 쇄도한다. 사랑은 모든 것의 왕이다.’ 라고 했다. 즉, 사랑이란 불길인 것이다. 불은 열과 빛을 동반한다. 모든 것을 태우고, 모든 것을 생성시키며, 모든 것에 에너지를 제공한다. 생명이란 바로 이 사랑에 다름 아닌 것이다. ‘사랑이 끝나면/ 이 세상도 마지막 같고/ 모든 것은/ 그 빛을 잃어버리고 말아’ 라는 말은 절규다.
삶의 다양한 층위를 부딪쳐온 윤태운 시인이 직접 보고 겪은 사랑의 그림자The shadow를 제3자의 객관적 시각으로 노래한 이 순수한 시적 자아는 사랑을 노래하는 동시 사랑을 상실했을 때의 불안을 음각시킨다. 그러나 육체와 땅과 시간의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사랑의 공간이 던지는 의미는 윤태운에게 있어 ‘쓸쓸함’으로 귀결된다. 욕망으로 불타오르던 사랑의 저변을 멀찍이 바라보며 서서 내뱉는 이 ‘쓸쓸함’이야말로 사랑의 본 얼굴이자 사랑의 맨 살이다.
사랑은 오직 강렬히 타오르는 내면과 외면의 뜨거운 불길일 뿐이지 세속의 물질이 아니다. 사랑은 순수한 영혼과 영혼이 내는 화음이지 허위와 가식, 거래나 타협에의 흥정이 아니다. 사랑은 주어도주어도 더욱 주고 싶은 소박한 마음의 축제이자 가난한 마음의 황홀경이지 언어의 성찬이 아니다. 사랑이란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청아한 목소리이자 심혼을 때리는 유일한 환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의 사랑이란 작금에 이르러 어떠한가. 대놓고 ‘거래’라 말하길 주저치 않는다. 사랑의 부패 정도에서 그칠 일이 아니다. 경악할만한 일이다. 그에 견준다면 찬란해야할 사랑이 어찌 ‘쓸쓸함’이 없겠는가. 이때의 ‘쓸쓸함’이란 더러운 쓸쓸함이다. 그러므로 현대인에게 있어서 대부분의 사랑이란 ‘칼 끝에 제 몸을 맡기는 도마’가 되려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욕망과 스스로의 이기와 스스로의 애증에 갇혀 저 차디찬 북극의 빙하에 스스로를 유폐시키길 마다치 않는다.
뜨거운 불길과 불길로 합일하는 영혼의 막닥Em림 없이 찰나적이고 소모적이며 순간적인 쾌락의 이름 언저리에 상품처럼 사랑을 걸어 놓는다. 모두를 포용하고, 모두를 용인하며, 모두를 녹여 내는 존엄한 위치로 환원되는 사랑, 제 몸을 도려내어 주는 ‘칼도마’가 되는 사랑이 없는 것이다. 윤태운 시인에 있어 사랑은 이쯤에 이르러 ‘칼도마’가 제 몸을 내어주는 지경에 이른다. 알몸에 가슴을 저미어도 좋은 순수 무후한 사랑, 사랑에의 기도로 변용되는 것이다.
(……전략……)
어쩌다 한 번 만나면
칼 끝에
자기를 맡기는 도마처럼
제 몸을 저미면서
남길 것 하나 없이
다 주는 그런 사랑하고 싶어
- <외로운 사랑> 일부
기도는 절대자와 연계되는 호흡이다. 기도에는 영성, 혹은 신성이 내재되어 있는 용어로 절대 신뢰, 절대순수, 절대복종의 다양한 카테고리를 함유한다. 기도에는 신神과 소원과 정성이 들어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 진정한, 진실한, 순수한 사랑이 기도로 화하는 일이 가능한 것은 사랑이 원래 종교의 본질인 까닭이다. 물론 이 때의 사랑이란 순전히 이타적인 매체다. 그러기에 윤태운 시인은 ‘칼 끝에/ 자기를 맡기는 도마’를 표출해 내기에 이른다. 날카로운 칼에 몸을 내 준 도마는 ‘칼 끝에’ 제 몸의 구석구석이 도랑처럼 파여져 간다. 절대자인 신을 섬기는 일이나 사랑하는 이를 순전하게 사랑해 가는 일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제 몸을 저미면서/ 남긴 것 하나 없이/ 다 주는 그런 사랑’ 이란 바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생의 본질을 말하고자 함이다. 동시에 이 구절은 사랑의 찬미이자 참된 사랑을 강조하는 신앙이며, 사랑에의 숭고미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기실 현대인은 스스로의 부박한 삶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상실하고 사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오직 사랑만이 인간적 완성에 가장 가까이 근접하는 삶의 원형질이다. 이 시편은 윤태운에게 있어 실낙원의 회복이며 한 인간군이 도달해야 할 궁극의 낙원이라는 자각이 내재된 시편이라 보아진다. 사랑의 힘, 순수의 힘, 내어줌의 힘, 진실의 힘, 생명의 힘이 바로 사랑에서 발현되지만, 알고 보면 사랑은 외로움 그 자체이다. 이 표현은 일련의 흡입력 강한 패러독스다.
사랑에 있어 역설적인 이 말의 의미는 시의 공간에 그로테스크한 음영을 던진다.
찬란해야 할, 지고지순의 가치여야 할, 그리운 사랑이란 이미 탁류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사랑의 부패시대 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의 태생이 현실의 부패에서 나왔다는 N. 프라이의 말은 공명을 준다. 현실의 부패란 도덕적 규범과 공동체적 윤리성이 없는 타락과 고립의 실재를 이름 한다. 이는 오늘 날에 이르러 사랑이 ‘종교’가 되는 일의 실종과 무관치 않다. 그 대신에 묵시적으로 통용되는 부도덕과 불의가 세상에 만연한 연유이다. 그 중에서도 학교와 교회와 가정의 부패는 그 도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러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문인은, 특히 시인은 이 더러운 부패의 사슬에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켜줄 의무와 사명이 있다. 이것이 시인의 존재이유이며, 이것이 윤태운 시인이 집요하게 사랑을 노래하는 근원적 이유 중 하나인 것이다.
이 밖에도 ‘사랑에 눈이 멀면/ 어리석게 몸을 연다는 것을/ 그들은 다 알고 있다’(「여자가 몸을 열 때」)라든가, ‘사랑하는 사람도 없는 곳에/ 하늘나라에 가면 무엇 하는가’(「사람은 땅을 밟고 살아야한다」)와, ‘사랑으로/ 겹겹이 입술을 비벼대며/ 긴 시간/ 세상의 받침이 되려고 애씁니다’(「봄에 피는 꽃」) 등에서와 같이 윤태운 시인은 여일하게 사랑을 탐구하고 사랑을 조망해 낸다. 이는 시간 속에 존재하는 현존재의 구성체 중에서 오직 사랑만이 황폐하고 폐허화한 인간의 심성과 인간의 내적, 외적영토를 비옥한 옥토로 변환시키며 간다는 표식이다. 더하여 시의 공간이자 사랑의 공간으로서 윤태운 시의 음향이 던지는 골 깊은 메아리라 하겠다.
5. 결어
윤태운 시인은 그의 장엄한 울음이자 포효이기도 한 시인만의 시의 공간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바다를 막아 광대한 농경지를 만든 충남 서산에 위치한 광활한 천수만의 배경음을 기저로 하여, 천지를 붉게 물들이며 사라져 가는 황혼과 황혼을 물고 내려 앉는 무수한 생명체들의 저 편에서 ‘내려앉는 것은 아름답다’고 단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즉, 이 한편의 시가 윤태운 시인의 시세계를 극명하게 나타내 보인다.
저물 무렵 천수만에 가면
책갈피를 넘기는 듯
새 떼가 선회하는 것을 본다
수만 마리가 새까맣게 내려앉는 장관은
차라리 쏟아지는 것이다
하늘 가운데 달빛도 갉아 먹고
새들이 갯논 바닥을 후벼댈 때는
한쪽이 무너진 허물을 남긴다
부리 끝에 날바닥이 드러난 논
잿불처럼 불티나고 뭉클한 일몰은
다음을 기약하는 먼 솟구침의 끝머리이다
내려앉는 것은 새들만이 아니다
생生의 끝 저 낭자한 일몰도
억척같은 저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랑이고
하늘이 내려앉는 것 일게다
- <내려앉는 것은 아름답다> 전문
이 시편은 윤태운 시인이 직접 본 사실을 기저로 쓴 시편이다.
직접 목도하여 확인하였고, 인식한 물상의 내용들이다. 여기에는 윤태운 시인의 직관과 감각 등이 총체적으로 내재되어 있다. 그들은 서로 끊임없이 내부를 흔드록 변환하며 각성시키는 작용을 한다. 새떼가 내려앉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천수만 한쪽이 그 새떼로 허물어진다. 새떼로 인하여 농토가 잠시 새까맣게 변하는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그 뿐인가. 삶도 자주 생활에 찌들어 스스로의 청정한 가슴을 지워버리는 때가 좀 많은가. ‘잿불처럼 불티나고 뭉클한 일몰’ 역시 사람의 노후를 말함이 아닌가.
이는 새떼들이나 사람들이나 동일한 점은 낮은 자리에의 중요성의 인식이다. 낮은 자리의 중요성은 그 강도를 아무리 강조하여도 부족하지 않다. 시의 풍경 밖 세상은 낮은 자리가 아닌 높은 자리를 향한 이전투구와 골육상잔의 냉혹한 밀림지대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하여 ‘빈 들에 내리는 새떼’에서 윤태운 시인은 비로소 궁극적인 삶의 고향인 사랑에 기저한 낮은 자리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새들은 ‘내려앉음’으로서만 생명을 유지한다. ‘내려앉는’ 것은 그러므로 생명운동의 원동력이자, 사랑의 궁극이다. 이리하여 윤태운 시인은 바로 그 ‘내려앉는 것’을 다시 욕망하고 꿈꾸며 최종 갈무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태운 시인은 이렇게 땅과 시간과 사랑이라는 모티브를 중심으로 각기 공간의 음향에서 독특한 시의 의미를 찾아낸다. 과거적 공간, 과거적 시간의 음향을 변주하여 현재적 삶의 변화와 미래에의 삶의 시원을 꿈꾼다. 이를 통하여 인간의 본원적 가치와 사랑의 회복을 통한 삶의 원형질 복원과 삶의 아름다움을 고양시켜가고자 함이 시편 전편에 깔려 있다. 시를 통하여 이미 존재해 왔거나, 장차 존재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가치, 새로운 시의 가치를 완성코자 하는 것이다. 동시에 윤태운 시인의 시적 성향은 전통 서정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서정시는 대체로 정제된 문장을 통한 이미지의 명확성과 형식적 간결성을 추구한다. 특히 오늘 날의 현대시는 고도의 세분화된 의미와 형식을 꾸준히 파괴하면서 새롭게 변모하여 나가고 있다. 이 말은 시를 쓰는 일이란 단순히 표현의 관점에만 머무는 게 아니란 사실이다. 모쪼록 부단히 시어를 갈고 닦아 시인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펼쳐가야 한다는 점과 무엇보다 시어의 함축과 농축된 간결미에의 미적 변용을 도모해 갈 것을 주문하면서 논지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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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저물 무렵 천수만에 가면
책갈피를 넘기는 듯
새떼가 선회하는 것을 본다
수만 마리가 새까맣게 내려앉는 장관은
차라리 쏟아지는 것이다
하늘 가운데 달빛도 갉아 먹고
새들이 갯논 바닥을 후벼댈 때는
천수만 한쪽이 무너진 허물을 남긴다
부리 끝에 날바닥이 드러난 논
잿불처럼 불티나고 뭉클한 일몰은
다음을 기약하는 먼 솟구침의 끝머리이다
내려앉은 것은 새들만이 아니다
생生의 끝 저 낭자한 일몰도
억척같은 저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랑이고
하늘이 내려앉는 것일 게다.
<내려앉는 것은 아름답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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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운尹泰云 시인∥
∙ 충남 예산 출생, 홍성에 거주
∙ 계간 문예운동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충남지부 시분과 이사
∙ 내포문학 회원 및 내포문학 카페 운영자
∙ 충남문학 대상 신인상 수상
∙ 시집 : [달맞이꽃] [내려앉는 것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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