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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 한씨, 2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 한씨
명릉(明陵)은 19대 임금 숙종과 1계비 인현왕후, 2계비 인원왕후 세 사람을 모신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릉으로 나란히 조영되고, 인원왕후의 능은 다른편 언덕에 단릉으로 모셔져 있다.
서오릉은 숙종을 위한 능역이다.
숙종과 정비 인경왕후, 1계비 인현왕후, 2계비 인원왕후, 그리고 장희빈이 서오릉에 있다.
조강지처 정비는 익릉에 묻혀 있고, 1계비는 숙종과 나란히, 2계비는 왼쪽 조금 높은 곳에서 숙종과 1계비를 바라보며 명릉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왕후에 까지 올랐다가 내쳐져서 사약을 받고 죽은 장희빈도 사후 270년만인 1970년에 이곳으로 옮겨와 대빈묘에 묻혀 있다. 숙종은 죽어서도 4명의 중전을 가까이에 두는 여복(女福)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동이)도 서오릉에서 멀지 않은 파주 광탄 소령원에 홀로 묻혀 있다.
ㅇ 숙종의 여인사(女人史) : 4명의 왕비와 동이
숙종(1661~1720)은 현종과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외아들 원자로 태어났다.
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지는 삼종(三宗) 혈맥(血脈)이며 숙종이후 다시 서자 임금이 출현한다.
그는 3차례에 걸쳐 왕비를 맞이했는데 원비는 인경왕후(仁敬王后)이고 둘째가 인현왕후, 셋째가 인원왕후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그 유명한 장희빈(張禧嬪)이다.
장희빈은 역관 출신으로 대부호가 된 장경의 딸로 조선왕조 최초의 중인(中人) 출신 왕비로 아들을 낳아 숙종을 사로잡고 왕비까지 되었지만 결국 폐출되어 사약을 받는 비운을 겪는다.
숙종은 11대 중종과 함께 3명의 왕비를 둔 조선왕실의 기록을 갖고 있으나 폐비된 장희빈을 포함하면 4명인셈이다.
그밖에도 영조의 생모 동이(숙빈 최씨)를 빼놓을수 없다.
정비 인경왕후 김씨
숙종의 아버지 현종이 1남 7녀 가운데 독자였고 숙종 또한 1남 3녀에서 독자였다.
일곱 살에 세자가 된 숙종은 열 살때 김만기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다.
숙종과 동갑인 인경왕후 김씨는 승문원 교리 등을 지낸 전형적인 서인 김만기의 딸이다.
김만기의 증조 할아버지는 산림학자의 거두이자 조선 예학(禮學)의 창시자로 불리는 비운의 유학자 송익필의 수제자인 사계 김장생으로 벼슬을 버리고 산중에 머물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들을 키우는 데 전념하여 그 제자들이 서인의 주력을 형성하게 된다. 아들인 김집을 비롯해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최명길 정홍명 등 기호학파의 핵심인물들이다.
김집의 동생인 김반은 익희, 익겸, 익훈, 익경 등 아들을 두었는데 학문과 기개 면에서 큰 족적들을 남겼다. 특히 김익겸에게는 아들 만기와 만중이 있었는데 김만중은 유복자로 훗날 장희빈에 빠져 있는 숙종을 일깨울 목적으로 <사씨남정기>라는 문학작품을 남긴 사람이다. 김만중의 형 만기의 딸이 인경왕후 김씨다.
세자빈 인경왕후는 숙종의 즉위로 왕후에 올라 딸만 둘을 낳았지만 모두 어릴 때 죽었다.
정국은 현종 말기 2차 예송논쟁에서 승리한 남인들이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다 할 권세를 누릴 입장도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경신환국으로 정권이 남인에서 서인으로 넘어가고 6개월 후인 10월 인경왕후 김씨는 천연두에 걸려 발병 8일 만에 2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서오릉 익릉에 모셔졌다.
1계비 인현왕후 민씨
1680년 인경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서인 세상이어서 이듬해 계비(繼妃)선정 문제도 서인 집안에서 골라야 했으며, 혼사문제였기 때문에 숙종의 어머니, 즉 현종의 부인인 명성왕후 김씨의 발언권이 클 수밖에 없었다.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도 서인이었다. 김우명은 같은 서인 계통인 민유중의 딸을 적극 추천했다. 1681년 숙종과 혼인 당시 병조판서 민유중은 노론의 중진으로 자리 잡고 있어 송시열과 함께 노론의 양대산맥이었으니 인현왕후 민씨는 그래서 간택절차도 거치지 않고 왕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17살에 숙종의 계비가 된 인현왕후 민씨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러나 불행(不幸)이었다. 이미 숙종의 마음은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가 내쫓은 궁녀 장옥정에게 가 있었고 더욱이 민씨는 후사(後嗣)를 생산하지 못했다. 딸도 낳지 못했다.
장희빈
장희빈, 아니 장옥정은 1659년 8월 9일생이다. 숙종보다 두 살 위다.
아버지는 중인 신분의 장형(張炯)이고 어머니는 천인(賤人) 신분으로 역관(譯官)이었던 아버지는 일찍 죽고 어머니 윤씨는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사촌동생 조사석 처가의 여종이었는데 남편이 죽자 조사석과 내연의 관계로 발전했다.
조사석은 형조판서 조계원의 일곱 아들 중 넷째로 숙종14년에 좌의정까지 오르게 된다.
어머니를 닮아 미모가 출중했을 장옥정은 당시의 관습에 따라 대략 10살을 전후해서 궁궐에 들어가 처음에는 자의대비(장열왕후) 조씨의 시종으로 일했다. 이때부터 이미 세자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반면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는 아들의 장래를 염려하여 지나치게 미색을 갖춘 장옥정을 극도로 싫어했다.
1680년 (숙종 6) 경신환국이 일어나자 정권은 남인에서 서인으로 넘어오고, 복성군 3형제 사건에 장옥정의 일가들도 연루되었으며, 서인세력이던 명성왕후는 남인의 영향권에 있던 장옥정을 사저로 내쫓아 버렸다. 그러나 3년 후인 1683년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숙종은 3년상이 끝난 1686년초 장옥정을 다시 궁궐로 불러들였고 그해 12월 장옥정에게 파격적으로 숙원(淑媛)이라는 종4품의 첩지까지 하사했다. 이때도 조사석과 자의대비 조씨의 역할이 컸다고 봐야 한다.
당시 세상은 경신환국으로 서인 천하였다. 그런데도 숙종은 남인과 연결된 숙원 장씨에게 흠뻑 빠져들었다. 서인세력의 공포는 더욱 커 갔다. 서인쪽 인현왕후 민씨가 있긴 했지만 아들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1688년 정월 숙원 장씨의 태기 소식이 들려왔다. 이때부터 그해 10월 28일 장씨가 출산을 할 때까지 서인들이 느꼈을 공포감이란...
장씨는 보란 듯이 아들(경종)을 낳았다. 그리고 이듬해(1689년) 1월 숙종은 서인들의 결사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고 숙원 장씨를 정1품 희빈으로 승격시켰다. 이때 숙종은 나이 30을 눈앞에 둔 29세였다.
서인들은 이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원로 송시열이 장문의 상소를 올린다.
그러나 숙종의 분노만 부추겼고 다시 남인들을 불러 정권을 맡기니 바로 기사환국이다.
그 바람에 인현왕후 민씨는 바람 앞의 촛불 신세로 전락한다. 숙종의 계비로 들어와 자식을 낳지 못한 민씨는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민유중을 비롯한 서인들이 모두 몰락하여 바람막이 없이 내몰리다가 숙종에게 장희빈을 투기했다는 응징(?)을 받아 퇴출되기에 이른다. 이틀 후인 4월 23일은 인현왕후 민씨의 생일이었지만 숙종은 하례 금지를 명한다. 그리고 신하들 반대를 무릅쓰고 폐서인시키니 5월 2일 민씨는 흰 가마를 타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이때 서인의 거두 송시열은 제주에 귀양 중이었는데 한양으로 올라 와 국문을 받으라는 명이 내려가 있어서 이미 83세의 송시열은 국문을 받는 도중 사망 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즈음에 송시열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가 올라와 오히려 숙종을 자극했다. 숙종과 남인들은 금부도사를 내려보내 한양으로 오는 송시열을 만나는대로 사사하라 명하니 6월 7일 전라도 정읍에서 금부도사를 만나 사약을 마시고 송시열은 죽었다.
서오릉 희빈묘에 묻혔으니 숙종의 정비(익릉), 1계비와 2계비(명릉)에 이어 장희빈까지 한곳에 모인 셈이다.
숙빈 최씨 (동이)
숙종 15년 기사환국 후에도 숙종과 장희빈 사이의 관계는 계속 좋아서 이듬해 9월 두 번째 왕자를 생산 하지만 열흘 만에 죽었다. 왕자에 대한 갈증이 여전했던 숙종에게 이 일은 작지 않은 충격을 주었을 것이 분명했다.
3년후 숙종19년(1693년) 10월 6일 소의(昭儀) 최씨가 왕자를 낳았다. 숙종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오래 살라고 영수(永壽)라고 이름 지었지만 두 달 만에 조졸(早卒)했다. 다시 한번 아들에 대한 숙종의 갈증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숙종에게 장희빈 아닌 다른 여인, 소의 최씨가 있다는 것이다.
소의 최씨는 무수리 출신으로 인현왕후 민씨의 시녀였다. 당시 이미 세상을 떠나긴 했지만 숙종의 첫 번째 장인이자 서인 중진이었던 김만기와 연결돼 있던 숙종의 유모와도 가까웠다. 서인에게도 실낱같은 회생의 희망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야사에 전하기를 어느 날 밤 숙종이 궁궐을 거닐다가 한 궁녀의 방에 불이 켜진 것을 발견하고 들어가니 최씨가 폐서인된 인현왕후 민씨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축원을 드리고 있는 것을 보고서 최씨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야사라기보다 현실성이 있는 이야기로 최씨는 당시로서는 중죄를 지은 셈인데 순간 숙종은 일개 궁녀만도 못한 자신의 ‘부도덕했던 처사’를 후회했을 것이다. 숙종은 그 궁녀를 갸륵히 여겨 가까이했고 아들까지 낳았지만 첫아들 영수는 일찍 죽었다. 그리고 곧바로 또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바로 연잉군, 즉 훗날의 영조이다.
서울 종로구 궁정동(宮井洞)의 유래는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와 깊이 연결돼 있다.
원래 최씨는 궁정동 인근 효자동에 살던 최씨 집안의 처녀로 궁녀가 되어 가장 낮은 직급에 속하는 수사(水賜), 즉 궁궐에 필요한 물을 길어 나르는 무수리였다. 바로 이 궁정동의 옛 자리에 궁궐에서 주로 사용하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숙빈 최씨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바로 그 자리에 그를 기리는 사당이 세워졌다. 이 사당은 지금 청와대 경내에 있다. 이를 육상묘(毓祥廟)라 불렀는데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각별했던 아들 영조는 왕이 된 후 이를 궁으로 높였다. 그때부터 육상궁(毓祥宮) 혹은 육궁(毓宮)으로 불렸다. 임금의 정실부인이 아니면서 왕이나 왕자를 낳은 다섯 후궁의 신위를 이곳에 모시면서 육궁(六宮)으로 불리다가 1929년 숙빈 엄씨의 덕안궁과 합쳐 칠궁(七宮)이 됐다.
숙종은 이 무렵 장희빈에게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미모의 장희빈이 인간적인 품격까지 갖췄다면 좋았겠지만 숙종은 실망이 늘어만 갔다.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가 포도대장에서 쫓겨난 것도 그 즈음으로 이미 숙종의 마음은 눈에 띄게 장희빈에게서 떠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장희빈에게 많이 의존하고 있던 남인세력에게도 위험이 찾아오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침내 숙종20년(1689년) 전격적으로 단행된 갑술환국으로 남인들은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고 서인이 득세하니 숙종은 서인의 소론을 중심으로 정국을 이끌어 나간다.
정권은 다시 서인으로 돌아오고 1계비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어 궐로 돌아 왔지만 1700년(숙종 26) 원인 모를 병에 걸려 35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는데, 희빈 장씨의 거처 부근에서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한 신당이 발견되어 이에 분노한 숙종은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린다. [무고(巫蠱)의 옥(獄)] 숙종에게 결정적인 밀고를 한 장본인은 바로 숙빈 최씨다.
그녀는 숙종의 왕후와 빈들의 후사를 둘러싼 싸움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니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올라 영조가 된다.
숙종의 왕비 3명과 장희빈까지 모두 서오릉에 묻혀 있으며, 숙빈 최씨도 멀지않은 광탄의 소령원에 묻혀 있다.
2계비 인원왕후 김씨
숙종의 두 번째 계비 인원왕후는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딸로 1687년(숙종 13) 태어났으며, 1계비 인현왕후가 승하함에 따라 1702년(숙종 28)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남편인 숙종이 먼저 승하한 후 1720년(경종 즉위)에 대비가 되었고, 1724년(영조 즉위)에 대왕대비가 되었으며 1757년(영조 33) 71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명릉의 오른쪽 언덕에 예장되었다.
후사가 없던 인원왕후는 연잉군(훗날 영조)을 극진히 사랑하고 아꼈으며, 이에 영조는 인원왕후의 뜻을 받들어 숙종의 오른쪽, 임금보다 상석에 모시게 된것이다.
2007년 2월 숙종의 세 번째 부인이었던 인원왕후가 당시 궁중 생활을 기록하여 엮은 『선군유사(先君遺事)』와 『선비유사(先比遺事)』가 세간에 소개되었다. 선군유사는 아버지에 관한 회상, 『선비유사』는 어머니에 관한 회상을 말한다.
아버지 어머니는 행여 당쟁에 휩쓸릴까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았고 딸이 잘못될까 노심초사하며 지냈다고 한다.
이 두 권의 기록에서 인원왕후는 궁에 들어와 부모님을 그리는 마음과, 중전으로서 부모님과 사사로운 정을 나눌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훗날 인원왕후는 이 기록을 친정으로 보내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이 두 권의 문집과 더불어 발견된 세 권의 문집은 인원왕후가 노년에 썼을 가능성이 높으며, 단아하고도 기품 있는 글솜씨가 당시 그녀의 학문과 독서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ㅇ 현종때의 예송 논쟁
16대 인조는 정비 인렬왕후가 죽은 후 44세로 15세 장렬왕후 조씨를 계비로 맞이하니 소현세자보다 열두 살, 봉림대군보다는 다섯 살, 막내 인평대군보다 두 살이나 아래로 인조는 아들들보다 어린 새 왕비를 맞은 것이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장렬왕후는 대비가 됐고,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대왕대비가 됐다.
효종 국장 때 대왕대비 장렬왕후의 상복 입는 기간을 놓고 정치적 논쟁이 벌어졌는데 1년만 착복하면 된다는 서인 송시열의 기년설로 복상을 치렀다. 하지만 이듬해 남인 허목 등이 대왕대비의 복상은 3년을 입어야 한다는 3년설을 제기하며 서인을 공격했지만 현종은 논쟁을 금지시키고 기년복으로 결정하니 이후 서인이 정권을 주도 하였다. (1차 예송논쟁)
1674년 효종의 비 인선왕후 장씨가 승하하자 다시 시어머니인 대왕대비(장렬왕후)의 복상 문제가 제기되어 서인은 대공설(9개월)을 주장했으나 남인은 기년설(1년 복상)을 주장하며서인을 공격하니 결국 남인의 기년설이 채택돼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된다. (2차 예송논쟁)
ㅇ 숙종의 환국정치
숙종이 14살에 즉위하자 생모 명성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려 하였으나 당시 집권세력인 남인들의 도움을 받아 바로 친정을 시작 할 수 있었으며, 이후 숙종은 왕의 고유권한인 용사출척권(왕이 정계를 대개편하는 권한)을 통한 환국정치로 세 번에 걸쳐 정권을 교체함으로써 붕당내의 대립을 촉발시키고 충성경쟁을 유발하여 왕권을 강화시킨 치적을 기록하였다.
경신환국 (庚申換局), 또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 1680년 (숙종 6)
1674년(현종 15년)의 복상 문제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은 남인은 전횡이 심하였고, 숙종으로부터도 별로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영의정 허적이 조부 허잠의 시호를 맞이하는 잔치를 연 날에 숙종의 허락도 없이 군사용품인 유악(油幄; 비가 새지 않도록 기름을 칠한 천막)을 빌려가자 숙종이 분노하여 군권을 남인에서 서인으로 대거 교체했다.
이때 서인 김석주 등은 허적의 서자인 허견 등이 역모한다고 고발하여 옥사가 일어나는데, 이를 '삼복의 변'이라 한다. 이리하여 종실인 복창군 3형제와 허견은 물론, 허적과 윤휴도 살해되었고, 나머지 일파는 옥사·사사·유배되니 남인은 큰 타격을 받고 실각하였다.
기사환국 (己巳換局), 또는 기사사화 : 1689년 (숙종 15)
숙종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장소의가 왕자 윤(昀)을 낳았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원자로 삼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서인들은 노·소론(老少論)을 막론하고 왕비 민씨(인현왕후)가 아직 젊으니 후일까지 기다리자고 주장하며 이를 반대하였다.
숙종은 서인의 요청을 묵살하고 남인들의 도움을 얻어 1689년(숙종 15) 원자의 명호(名號)를 정하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하였다. 송시열은 두 번이나 상소를 하며 반대 하였다. 하지만 장희빈에 푹 빠져있던 숙종은 국왕의 고유권한을 원로대신이 나선다하여 송시열을 제주도에 유배시킨 후 직접 국문하겠다고 다시 소환 하던 중 정읍에서 사사(賜死)하였다.
송시열을 따랐던 서인 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 등이 파직 유배되고 권대운(權大運) 등이 등용되어 다시 남인이 정권을 잡았다.
갑술환국 (甲戌換局), 또는 갑술옥사 : 1694년 (숙종 20)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비시키고 장희빈을 왕후의 자리에 올렸지만, 장씨의 거동이 매우 방자하여 폐비 사건을 후회하고 있던 차 1694년 김춘택 등이 폐비의 복위 운동을 꾀하였다. 민암 등 남인들은 이를 계기로 소론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숙종은 오히려 민암, 이의징 등을 사사하고 장희빈의 오라비인 한성판윤 장희재를 제주에 원방부처하는 등 남인 일파들을 일거에 축출하고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니 서인들이 다시 재집권을 하게 된다.
이후는 줄곧 서인의 세상이 되었다.
ㅇ 날 때부터 임금이었던 숙종
조선왕실은 명종의 원자 순회세자가 1563년 13살에 죽으면서 적통(嫡統)이 끊어진다.
조정에서는 중종 때로 거슬러 올라가 중종과 후궁 창빈 안씨의 덕흥군 셋째 아들을 왕위에 옹립하니 그가 바로 첫 번째 서자출신 임금 선조이다. 선조의 후사 역시 공빈 김씨 소생 광해군에게 넘어 간다.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김씨가 생산한 유일한 적자(嫡子) 영창대군은 비참하게 죽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는 선조와 인빈 김씨 소생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이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는 의문사를 당하고 동생 봉림대군이 왕위를 오르니 그가 효종이다.
효종은 인선왕후 장씨와의 사이에 외아들을 두었다. 그가 현종(1641~1674)이다.
그러나 현종이 태어날 당시는 소현세자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그저 대군의 아들이었다.
숙종은 달랐다. 숙종은 아버지가 임금으로 있을 때 원손(元孫)도 아닌 원자로 태어났다.
신하들이 “100년 동안에 없던 큰 경사”라고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원자로 태어나서 왕위에 오른 임금은 드물다
그 첫 번째 경우가 아이러니하게도 연산군이다. 이어 인종은 불과 8개월 재위에 그쳤다.
다행이 숙종은 부모의 극진한 사랑과 신하들에 의한 체계적인 제왕학 훈련으로 다소 병약한 체질이었지만 학문연마에도 뛰어난 성취를 보였으며 14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지만 당당하고 명민한 숙종은 그 어떤 임금보다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 할 수 있었다.
ㅇ 숙종의 경제정책과 문화예술 부흥
숙종은 우선 경제적으로는 대동법의 적용 범위를 전국에까지 확대시켰고 이 시기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통용시켰다. 조선의 경제는 안정적으로 발전하며 병자호란 이후의 위기감에서 점차 벗어나며 농업 생산력 증대와 유통 경제 발달을 배경으로 사회상은 역동적 변화를 보이게 된다. 임진왜란 이후 단절된 중국과 일본간의 중개 무역을 통한 막대한 이익은 조선사회 중흥의 밑거름이 되었다.
또 대외적으로는 일찍부터 종래의 북쪽 변경에 무창(茂昌)과 자성(慈城)의 2진(鎭)을 설치, 옛 땅의 회복운동을 시작하였으며, 청나라와의 국경선 분쟁이 일어나자 1712년 청나라측과 협상하여 그 유명한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다.
특히 숙종부터 정조까지를 조선왕조 문화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 진경시대라고 하는데 문학쪽에서는 구운몽을 지은 서포 김만중과 시(詩)로 이름을 떨친 삼연 김창흡 등이 크게 활동했고, 그림에서는 자화상을 그려 유명한 공재 윤두서가 있었으며 서예에서는 각체(各體)를 잘 써 유명한 낭선군 이우와 조선적 예서를 창안한 곡운 김수증이 모두 이 시기에 활동한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다.
ㅇ 명릉 (明陵)
숙종과 1계비인 인현왕후, 2계비인 인원왕후 세 사람을 모신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릉으로 나란하고, 인원왕후의 능은 다른 언덕에 단릉이다.
보통 우상좌하 원칙으로 동원이강릉의 오른쪽 언덕을 왕이 차지하는 일반적인 왕릉과 달리 명릉에서 가장 낮은 서열의 인원왕후 능이 가장 높은 자리인 오른쪽 언덕을 차지하고 있다.
명릉은 숙종의 명에 의해 능역에 드는 인력과 경비를 절감하여 부장품을 줄이고 석물 치수도 실물 크기에 가깝게 하는 등 간소한 제도로 조영하였는데, 이는 조선 능제의 분수령을 이루게 되었다. 8각 장명등도 4각으로 바뀌었으며, 능침에는 병풍석을 두르지 않았다.
1계비였던 인현왕후가 1701년(숙종 27) 승하하자 숙종은 능호를 명릉이라 하여 현재 위치에 능을 조영하였다. 조영 당시 능의 오른쪽을 비워두라는 우허제(右虛制)를 전교하였다. 1720년(숙종 46) 60세의 나이로 승하한 숙종은 생전에 바라던 대로 인현왕후의 오른쪽 빈자리에 잠들게 되었다. 아마도 인현왕후 생전에 온갖 모진 고생을 시킨 것이 미안해 사후에는 함께 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인현왕후 승하 후 2계비로 들어왔던 인원왕후는 사후 부군인 숙종의 곁에 묻히기를 소원하여 인현왕후와 숙종이 잠든 명릉에서 약 400보 떨어진 언덕에 자신의 능지를 미리 잡아두었다. 그러나 인원왕후가 1757년(영조 33) 71세로 승하하였을 때, 영조는 미리 정해둔 자리를 두고 지금의 자리에 그녀를 모셨다. 인원왕후가 정해둔 자리에 능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넓은 소나무 숲을 벌채하는 등 막대한 인력과 국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연으로 인원왕후는 생전에 소원했던 것보다 숙종과 더 가까운 곳에 묻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숙종의 능보다 높은 자리인 오른쪽 언덕에 잠들게 되었다.
숙종의 묘자리는 살아 생전 미행시 만난 갈처사가 잡아주었다는 야사가 전해온다.
원비 인경왕후의 능인 익릉(翼陵)도 서오릉 경내에 조성됐다.
흥미로운 것은 장희빈이 묻힌 대빈묘(大嬪墓)도 서오릉에 있다는 것이다. 원래는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에 있었으나 1970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장해 서오릉에서 가장 후미진 곳에 작은 규모로 조성됐다. 어떤 의도가 있어 이곳으로 옮겨왔는지 모르지만 숙종과 관계된 왕비들과 장희빈이 사후에 모두 한 지역에 모이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구한 인연이다.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동이)의 소령원도 이곳에서 멀지 않은 광탄에 있으니 역시 예사롭지 않다.
명릉의 석물은 실물 크기와 비슷하게 제작돼 왜소하게 보이나 조각 솜씨는 매우 사실적인 편이다.
능 주위에는 문·무인석을 비롯해 석마, 석양, 석호 등이 설치돼 있으며 봉분에는 난간석을 둘러 놓았다.
이색적인 것은 능역의 중앙에 세워진 장명등이다. 왕을 모신 조선시대의 왕릉에는 태조 건원릉이래 약 300년 동안 8각 장명등을 설치했는데, 이런 전통이 숙종에 의해서 바뀐 것이다. 숙종은 단종을 복위하고 장릉(莊陵)을 후릉(厚陵·2대 정종의 능)의 예에 따라 간소하게 조성하도록 했는데, 이때 4각형 장명등이 왕릉 역사상 처음으로 채택됐고 자신의 능에도 4각 장명등을 세운 것이다. 이후에도 4각 장명등은 경종의 의릉, 영조의 원릉, 정성왕후의 홍릉, 헌종의 경릉 등에도 설치돼 그 전통이 계승됐다.
서오릉은 숙종의 가족묘 같은 곳이다. 숙종과 1계비, 2계비가 묻힌 명릉이 오른쪽에 떨어져 있고
다른 릉들과는 군부대로 들어가는 도로가 양분하여 갈라 놓았다. 출입문도 따로 따로 사용한다.
왼쪽으로는 숙종의 정비릉인 익릉과 의경세자를 모신 경릉, 예종을 모신 창릉, 영조비 정성왕후릉 홍릉이 있다.
그밖에도 숙종의 장희빈을 모신 대빈묘와 순회세자의 순창원, 영빈이씨의 수경원등이 복잡하게 조영된 곳이다.
<서오릉을 양분한 도로 오른쪽에 주차장과 공사중인 재실겸 관리사무소(사진)가 있고... 그 오른쪽이 명릉이다.>
<명릉 전경..... 홍살문에서 참도를 지나 정자각까지 평지로 이어진다. 정자각 뒷편이 숙종과 1계비 인현왕후 쌍릉...
왼쪽에 조금 높은 단릉이 2계비 인원왕후 릉이다. 모두를 묶어서 명릉이라고 부른다.>
<명릉의 참도는 조선왕릉 참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기본적으로 신도와 왕도를 설치하였으되 좌, 우로 신하들이 걷는 '변로(邊路)'가 설치되어 있다.>
<오른쪽으로 수복방의 흔적이 보인다.>
<전형적인 모습의 정자각이다. 그 뒷편으로 쌍릉이 보인다.>
<정자각 정침의 문을 통해 올려다본 능침.... 역시 윗부분 일부만 보이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정자각 뒤에는 강(사초지)으로 건너가는 神橋만 간단하게 놓여있다. 사실은 이곳이 정자각 앞면이라나?>
<예감... 사각의 표준형이다.>
<모두가 모범적이고 표준적인 모습인데 비각만은 다른곳보다 유난히 커보인다.>
<숙종대왕과 1계비 인현왕후 비석....>
<2계비 인원왕후 비석.... 비각안에 3명을 위한 2개의 비석이 세워져있다.>
<능침에 올라 본 전경.... 숙종과 1계비 인현왕후의 쌍릉... 중앙에 장명등과 각각의 혼유석 2개를 놓았다.>
<문석인과 무석인이 잘 세워졌다. 뒷편으로 2계비 인원왕후릉이 올려 보인다.>
<석양과 석호가 능침 안으로 둘러싼채 지키고 있다.>
<왼쪽의 숙종 왕릉... 난간석을 둘렀으며 혼유석을 4개의 고석이 받치고 있다.>
<오른쪽 왕비릉.... 왕비릉이 먼저 조영되고 19년후에야 숙종이 묻혔다.>
<난간석으로 연결된 왕릉과 왕비릉....>
<숙종때부터 8각장명등이 4각으로 바뀌었다....>
<숙종릉에서 바라본 2계비 인원왕후릉... 소원대로 남편 곁에 묻혔으되 더 높은 자리를 잡았다.>
<2계비 인원왕후릉에서 바라본 숙종과 1계비 인현왕후릉.... 둘이 함께인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떨까?>
<2계비릉 전경.... 역시 4각 장명등에 난간석을 둘렀다. 모범적인 왕릉 모습이다.>
<망주석이 세워지고.... 석양과 석호가 릉 주변을 둘러싸고 지키고 있다.>
<문석인과 무석인을 잘 만들어 중계, 하계에 세웠다....>
<잉에서 바라본 2계비릉.... 단릉인지라 아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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