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9월호
[202209]이달의 훈화
연중 제25주간-연중 제28주간김태현 마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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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현 마태오 신부는 2001년 인천교구에서 서품을 받았으며 2007년 로마 우르바노 대학 선교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인천교구 사목국 새복음화부 담당 겸 인천교구 바다의 별 레지아 담당사제를 역임했으며, 현재 학익동성당 주임과 인천가톨릭대학 선교신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9월 18-24일)
순교의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초대 교회의 순교자들이나 우리나라의 순교자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과 무엇이 다르기에 그리도 당당히 순교하셨을까하는 의문이 듭니다. 더욱이 많은 순교자들이 무명의 순교자들이 된 것은 사회적으로도 소외된 이들이었습니다. 그 순교자들이 우리보다 예수님을 잘 알았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문맹률이 높아 성경책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교리 대부분이 후대에 공의회를 통하여 반포되었듯이 교리 지식도 일천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도 교회의 조직이 어떻게 구성되고, 성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기에, 교리서만 보고 미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사제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명망 있는 이를 사제로 정하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운영한 것을 보았을 때 마찬가지였습니다. 또한 미사나 성사에 참여하는 것도 박해의 위험 때문에 하늘의 별 따기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이름에 자신의 생명을 내어바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로마 시대에는 철저한 계급주의 사회였고, 빈민자들은 사람의 대우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빈민자들은 대부분 로마의 식민지에서 올라온 이들이 많았으며, 로마 귀족들의 자비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로마 귀족들은 외출 시에 빵이나 동전을 던져주었고, 이를 얼마나 많이 주는가가 유력 귀족가문의 척도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노예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도 사람대우를 해주지 않는 이들, 스스로도 그것을 당연시 했던 이들을 그리스도교인들은 형제, 자매로 칭하며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을 통한 사랑의 체험이 자신을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고, 이 체험은 하느님을 고백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가마골에만 가면 거지도 굶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박해를 받아 피난을 왔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멈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을 사람이게 한 사랑체험을 부정하는 것이었기에, 하느님을 고백함으로써 그들은 사람이 되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지켰을 것입니다. 순교가 사랑체험의 절정에서 나온 고백이라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이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삶에서 더 실천할 때 하느님이 계심을 더 잘 알고, 믿음도 더 굳건해 질 것입니다.
연중 제26주간(9월 25일-10월1일)
진정한 행복은 어울림에서
돈 많은 부자에게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에게는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부자인 아버지는 그 아들을 위해 큰 저택을 꾸며 수영장과 놀이 시설도 짓고, 개인 경호원과 운전기사도 두었으며, 원하는 것이 있으면 사람들을 시켜 그것을 이루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무엇을 하려는 의욕도 없고, 행복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부족한 것이 너무 없어 지금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시골에 아들을 한 달 정도 살도록 내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한 달의 시간이 지난 후 아들에게 무엇을 느꼈는지를 질문했습니다. 당연히 시골의 삶이 불편하였고, 부유한 삶이 얼마나 좋은지 아들이 말하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 우리 집에는 수영장이 있지만, 그들에게는 큰 개울이 다 수영장이에요. 우리는 직원들에게 돈을 주고 도움을 받지만, 그들은 그냥 대가없이 서로 도우며 살고 있어요. 과일이나 음식을 서로 나누기도 하고요. 우리는 이 저택이 있는 땅 안에서만 사는데, 그들은 넓은 들에서 뛰어 놀며 살고 있어요. 우리는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들은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어요.”
아버지는 가지고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들은 어울려 살아간다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을 배워서 온 것입니다.
현대인들에서 나타나는 소유에 대한 집착은 여러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쇼핑중독이나 SNS중독도 이에 속합니다. 마음이 허하기에 무엇인가를 사는 행위로 나타나고, 타인의 관심이 필요하기에 SNS에서 실제 모습과는 다른 생활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는 관계의 갈증에서 시작되었음에도 어느덧 관계 맺음에 서툴러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잘 맺기 위한 첫 걸음은 자신을 열고, 나누기 위해 다가서는 자세입니다. 사랑은 신앙 안에서 구원의 열쇠가 될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행복해지기 위한 치료제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는 아직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이들을 향한 경고이며, 사랑의 촉구입니다.
연중 제27주간(10월 2-8일)
주인의 뜻을 따르는 종은 자녀가 됩니다
어느 마을에 현명한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 기적을 행한다는 사람이 찾아와 마을 사람들을 불러놓고 열심히 기도해서 예수님처럼 물위를 걸을 수 있는 은총을 얻었다고 자신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마을 앞의 강물을 걸어갔다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몇 년간이나 기도하여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은총을 얻게 되었습니까?”
그러자 그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대답하였습니다. “2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하여 이 은총을 얻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마을의 뱃사공에게 물었습니다. “이보게, 이 강을 왕복하는 뱃삯은 얼마인가?” 뱃사공은 10달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기적을 행하는 자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20년 동안 빠짐없이 기도하여 오늘 10달러를 벌었군요.”
주일 복음에서 제자들은 믿음을 더 하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이는 무화과나무에게 명령하여 바다에 심듯이 믿을 수 있는 표징을 원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믿음은 기적을 통하여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며 주인의 뜻을 따르는 종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믿음은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일치를 통하여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행함으로서, 이제는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고, 벗이라 부르며, 자녀가 되는 신비를 걸어가는 것입니다.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맡김으로서, 우리의 머리카락 수까지 헤아리시기에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리라고 의탁하며 얻게 되는 은총입니다.
연중 제28주간(10월 9-15일)
호랑이의 기도
어떤 선배 신부님이 주님이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셨을지 맞추어 보라며 퀴즈를 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산길을 걸어가다가 호랑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산길을 뛰어 도망쳤지만 금세 호랑이에게 잡히게 되었습니다. 다른 방도가 없자 두 손 모아 기도드렸습니다.
“주님, 제발 이 위험에서 구해주십시오. 살려만 주시면 정말 당신 뜻대로 살겠습니다.”
그리고는 호랑이를 쳐다보니 호랑이도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과연 산길을 걷던 사람과 호랑이, 둘 중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셨을까요?
심정적으로는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셨으면 했지만, 선배 신부님의 말에 의하면 정답은 호랑이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덧붙여 모든 기도 중에 으뜸은 감사기도이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감사하며 살라고 조언하셨습니다.
주일 복음에서는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는 열 명의 나병환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병은 당시에 모든 일상이 파괴되는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러하였기에 그들의 청원은 간절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의 간절함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병환자들은 사제에게 가는 도중 모두 치유 받았지만, 사마리아 사람 한명만 돌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돌아와 감사를 드린 한 명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에게 더 큰 은총을 내리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나병환자였던 다른 아홉 명의 사람은 그들이 청한 대로 치유를 얻었지만, 감사를 드린 한 명만은 치유뿐만 아니라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청원은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지만, 정작 감사를 드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청원은 문제 해결에 머무르지만, 감사는 하느님을 얻는 열쇠입니다. 감사는 삶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은총의 지름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