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년 겨울 K상고 야구부실로 한 낯선 학생이 감독을 찾아왔다. 다른 학교 야구부원인 이 학생은 K상고로 전학이 가능한지 알아보러 온 것인데, 인원이 이미 찼다는 감독의 설명에 테스트도 받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리고 만다. 이 낯선 학생은 바로 필자였는데 이렇게 필자와 당시 이규석 감독의 첫 만남은 기분 좋은 추억은 아니었다.
지난 7월 KBO의 유일한 원년 심판인 이규석씨가 돌연 20년간 정들었던 그라운드를 떠났다. 프로야구 원년 82년 3월28일 대구 개막전에서 플레이 볼을 힘차게 외치며 출발한 이씨는 2215경기로 최다 출장기록을 보유한 최고참 심판이었다. 그의 판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그만큼 이씨는 포청천의 판관처럼 강한 카리스마가 있었고 결코 팬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필자는 2500경기 출장을 끝으로 명예롭게 은퇴하고 싶다는 그의 포부를 직접 들은 바 있어 갑작스러운 사퇴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이씨는 54세의 나이를 극복하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매일 러닝과 등산으로 체력을 관리해 왔다. 그의 사퇴 이유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은 당사자밖에 없다. 그는 다만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직이 나를 원치 않으니 도리가 없다. 내부적으로 갈등이 있었지만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 않다”며 입을 다물고 있다. 심판으로서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는 일화 한 토막. 92년 이 심판은 팔이 골절되는 부상을 했다. 경기중 파울 타구에 맞아 골절됐다고 공식 발표됐지만 사실은 달랐다. 오심을 자주 범하는 후배를 교육시키는 과정에서 말이 통하지 않자 분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주먹을 벽에다 내리쳐 골절된 것이다.
당시 OB베어스 운영과장이던 필자는 골절상에 좋다는 ‘우족’을 그에게 전하려 했으나 문전박대를 당했다. 이씨는 작은 정성이라도 구단에 약점을 잡히면 자신의 소신이 흔들릴 수 있다며 극구 사양했던 것이다. 이제 15명으로 출발한 원년 심판들은 1군에서 모두 자취를 감추었지만 그들의 혼과 정취는 아직도 그라운드에 남아 있다. 후배 심판들은 어려운 환경속에서 프로야구를 지켜온 선배들의 정신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