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가타 7 - 야마가타성에서 아이누족을 생각하고 초대번주 모가미씨를 만나다!
11월 5일 혼슈 서북부에 위치한 야마가타현의 야마가타역 서구에 있는 도요코인 호텔을 나서
10분을 걸어 가조공원 에 도착해 해자 에 놓인 다리를 건너 야마가타성 으로 들어섭니다.
오랜 세월에도 성벽 은 단단히 남았는데 서양 의학 을 가르치던 제생관 을 지나 2번째인
마른 해자 너머에 견고한 성벽과 성문으로 둘러쌓인 혼마루 本丸(본환) 를 봅니다
혼슈의 서북부인 여기 야마가타 와 아키타 는 엣날에 데와국 (出羽国, でわのくに)
이라고 불리웠는데..... 달리 우슈 (羽州 うしゅう) 라고 불렸다고도 합니다.
나라 시대인 서기 708년에 에치고국 (越後国 니가타현) 내에 쇼나이 지방에 설치된
이데와군 을 기원으로 한다는데... 712년에 독립되어 데와국 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이후 무쓰국 의 오키타마군과 모가미군 을 더해 쿠니(國 국) 로서의 체제를 갖추고 호쿠리쿠
등에서 1천호 주민이 이주 되었다니 "아이누족을 쫓아내고 왜인" 들이 이주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야마토 조정 은 7세기 중반 부터 9세기 초반에 걸쳐 에미시(아이누족) 의 땅에
성을 쌓고 군을 설치해 지배 판도를 넓히는 확장 정책 을 펼쳤던 것인데.....
이는 세종대왕 이 최윤덕과 김종서 를 보내 4군과 6진 을 개척한 것에 비견되는 일이지요!
헤이안 시대 초기에 동북 변경의 에미시 를 서쪽 데와국 에서는 蝦狄(하적) 으로
적고 동쪽 무쓰국 (아오야마현등 일대) 에서는 에조 蝦夷(하이) 로
기록하는데....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오슈 후지와라 씨 가 이곳을 지배하게 됩니다.
1869년 1월 19일 메이지유신 보신전쟁에서 패한 무쓰ㆍ데와ㆍ에치고 여러 동맹제번 중에
데와국 은 현재 야마가타현에 해당하는 우젠국과 아키타현에 상당하는
우고국 으로 양분되었으며 무쓰국 (아오모리등)도 5개 현 으로 분할되어 세력이 약해집니다.
서쪽 데와국(야마가타와 아키타) 은 일본의 율령제 하에서 에미시(아이누족)
와 국경을 맞대었으나..... 실제로는 동쪽 무쓰국(아오모리현) 이
혼슈 북쪽인 동북방의 정치적· 군사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독점 했습니다.
8세기 부터 9세기 초 까지 성과 요새가 데와국 에 활발하게 축조되었고 에미시와의 전쟁 을
거쳐 점차 영역을 북쪽으로 확대했으니 황금 이 산출되어 조정에 공납하는데, 당시
일본은 금이 생산되지 않았지만 백제인 채굴 기술자들이 여기서 사금 을 채취 했던 것입니다.
743년 11월 5일 쇼무왕이 나라 동대사 에 거대한 청동 대불 을 지을때 황금 900냥 을 대불
도색용으로 바친 자는 백제계 후손인 경복 慶福 왕 이라고 하는데 그는 백제부흥군
에 의해 왕에 추대되었던 의자왕의 아들(동생?)인 풍왕의 동생 선광 善光 의 증손자 입니다.
660년 백제가 망하고 의자왕등 1만 2천이 당나라로 잡혀간 후 복신등 부흥운동 이 일어나자
왜국의 제명여제와 나카노오에는 풍에게 5천 왜군 을 주어 백제로 보내 백제 왕위 를 잇게
한후 2만 7천 대군 을 보내나 백강(금강) 에서 당나라 수군에게 화공을 당해 패하게 됩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귀국해서 백제왕에 오른 이는 479년 동성왕과 501년 무령왕 이 있었습니다)
왜군이 철수 할때 백제인들도 대거 왜국 으로 도망치는데, 일본서기에는 663년 백제 부흥운동
실패후에 망명해온 백제인 400여 명을 오미국 간자키군 (오사카 일대)에 거주하도록 했으며...
2,000여 명에게 3년간 관식(官食) 을 지급했다고 하는데, 이때 정착한 백제인 들이
오사카시 북동쪽에 히라가타 枚方 시 를 건설했으니.... 그 후손이 경복왕 이라!
야마토(나라) 와 교토의 왜인 들은 일본의 원주민인 에미시(아이누족) 들을 조금씩 북쪽
으로 밀어 붙이며 영토를 확장해 야마가타와 아오모리 까지 개척(?) 했으나....
미국의 인디언 처럼 쫃겨나던 에미시의 반란(?) 으로 733년에 데와의 고쿠후 는 아키타의
타카키요 미즈오카로 옮겼으나...... 그후에도 에미시의 공격을 피해 여러번 옮깁니다.
이는 마치 세종 시대인 1432년 건주위 추장 이만주 가 침입하자 다음해 최윤덕 이
병사 1만 5000명을 이끌고 평안북도 동부의 여진족 을 정벌 한 것이 연상됩니다.
668년 고구려가 망하고 주민들이 중국으로 잡혀간후 통일신라의 국경선은 황해도에서 원산
인데, 고려가 들어선후 고구려인들이 당나라에 잡혀갔으니 사람이 살지않아 황폐해진
평양을 개척 한 후에 청천강 에 이르고 동쪽은 영흥에 이르렀는데, 서희장군이 거란과
담판해 평안북도 서부 강동6주를 얻었으며 조선초 평안북도 절반에 함경남도 까지 였습니다.
이후 평안북도에 거주하던 여진족 을 내쫒고 여연· 자성· 무창· 우예 네 군을 설치해
남도 백성들을 이주 시키니..... 평안북도 동부지방이 비로소 조선땅 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진족 들은 고구려 시절 부터 천년을 살아온 고향 땅 을 뺏긴지라 침범 을 그치지
않으니 세종은 1437년 이천 에게 병사 8,000명 을 주어 재차 여진족을 격퇴 합니다.
( 고구려는 예맥족 단일민족이 아니고 훗날 여진족으로 불리는 말갈족이 함께 거주 했음 )
고구려 시절 부터 발해와 거란족 요나라 지배를 거쳐 금나라를 세우고 몽고와 명나라시대
까지 한자리에서 천년을 살아온 자기 고향땅을 뺏긴 여진족 들이 집요하게 침범 하니
견디다 못한 조선은 1455년(단종3년) 에 이르러 네 군 중에 여연·무창·우예를 폐지 합니다.
여연· 무창· 우예 세 군을 폐하고 주민을 강계부와 구성부 로 옮기니 우리 국경선이
축소 되었던 것 처럼.... 왜국도 치소를 자주 옮겼던 것 이네요?
조선은 300년이 흐른 후인 정조 시대에야 북상하여 다시 옛 3군에 진을 설치 합니다.
그러니까 일본과 조선이 원주민을 쫓아내고 영토를 넓힌 것이 똑 같은데.... 남이 우리를 공격
해 오면 침략, 침략자 라며 아주 나쁘게 기록하지만, 내가 침략한 것은 "개척", "이주" 라는
용어를 쓰며 부득이한 경우는 침략 대신에 "정벌" 이라는 용어를 쓰니 모두 내로남불 이라....
세종대왕 이 수백년을 살아온 여진족을 죽이고 고향에서 쫓아내서 영토를 확장했으며 광개토대왕 은
잔인무도한 숱한 침략전쟁 으로 백제와 동예, 옥저 및 거란족을 죽이고 노예로 붙잡아 와서
대왕릉을 지키는 묘지기로 강요했는데도 침략자 라고 부르지 않고 위대한 영웅 이라고 부른다는...
이후 헤이안 시대에 키요하라 (淸原) 집안이 데와국의 재정관인 으로서 힘을 길렀던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망하고... 오슈 후지와라 씨 집안이 무쓰ㆍ 데와 양국의 지배자 가 됩니다.
이후 오슈 후지와라씨를 멸망시키고 가마쿠라 막부 를 연 미나모토 요리토모 (源賴朝) 는
데와국 에 다치바나 등 고케닌 (御家人 어가인) 들을 지토(地頭 지두) 로서 배치합니다.
이후 남북조 시대 영주들 사이의 다툼이 활발해지면서 쓰가루 지방에서 에조지(홋카이도) 를
거쳐온 안도 (安東) 가문 과 모가미 가문 그리고 다테 가문 등이 영지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후 센고쿠(戰國) 시대 에는 사타케(佐竹)ㆍ 이와키(岩城)ㆍ 로쿠고(六郷)ㆍ 사카이(酒井)ㆍ
토자와(戶澤)ㆍ 우에스기(上杉)ㆍ 다테 伊達 등 다이묘들이 전쟁으로 영토 다툼 을 벌입니다.
광장에 기마상이 서있는데 모가미 요시아키 最上義光(최상의광) 라.... 데와국 모가미 가문
출신으로 11대 당주가 되어 후일 사타케 요시노부 대신에 야마가타번 초대번주 가 됩니다.
모가미 씨 는 센다이번 초대 번주 다테 마사무네 의 외숙 이 되는 자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무장이었는데..... 여기 히가시 오오테몬 안에 이런 멋진 동상 이 서있는 것이네요?
날렵한 동상 을 보노라니 몇 년전에 서울 광화문에 이순신상 이 낡아 대청소
를 위해 몇달간 옮길 때.... 새로 만들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습니다.
먼저 수군 제독이 배도 없이 보병 처럼 그냥 서 있는 것도 그렇고, 또 이순신 이 입은
갑옷 은 우리나라 조선식이 아니고 중국 당나라식 이며..... 게다가 이순신장군이
왼쪽잡이도 아닌데 오른손에 칼집 을 들고 있으니..... 저건 항복한 자 의 모습 이라?
예전에 보름간 러시아 전국일주 배낭여행시 모스크바 에 들렀을때 강 한 복판에 범선
이 떠 있고, 그 위에 날렵하게 서 있던 페트르 대제 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니...
수군 제독 이순신 상이라면 판옥선 배 갑판 지휘대 에 칼을 치켜들고 서거나 아님 북채라도 쥐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4방의 대(臺)에는 한산도 대첩 거북선 을 조각하고
그외 대(臺) 를 돌아가며 명량과 노량 등 여러 전투 모형을 실감나게 돋올새김 하면 좋을 것을....
그 옆 숲에는 또 기념비가 있으니 보병 제32연대 라..... 뒤쪽 숲을 뒤져 다시 기념비를
발견하니 바로 시보가네요리 이니.... 광명사에 소장된 화상을 제작한 것이라나요?
그러고는 발길을 돌려서 새로 중건한건지..... 문이 온존한 형태로 남아있는 동문 을
빠져나가 홍예교 다리로 해자 를 건너 모가미 요시아키 기념관 으로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