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21일 금요일
[(녹)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 베드로 다미아니 주교 학자
말씀의 초대
사람들이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우고 이름을 날리려 하자, 주님께서 사람들의 말을 뒤섞어 놓고 온 땅으로 흩어 버리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며,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우리가 내려가서 사람의 말을 뒤섞어 놓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1,1-9
1 온 세상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들을 쓰고 있었다.
2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주해 오다가
신아르 지방에서 한 벌판을 만나 거기에 자리 잡고 살았다.
3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 내자.”
그리하여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
4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5 그러자 주님께서 내려오시어
사람들이 세운 성읍과 탑을 보시고 6 말씀하셨다.
“보라, 저들은 한 겨레이고 모두 같은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일 뿐,
이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
8 주님께서는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성읍을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9 그리하여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땅의 말을 뒤섞어 놓으시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34-9.1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38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9,1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그리스도인으로 세례를 받고도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은 감추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세상살이에서 필요하고 유리할 때는 내세우지만 불리하고 걸림돌이 될 때는 감추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살면서 주어지는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기 위한 두 가지 조건으로 제시하신 ‘자기를 버림’과 ‘십자가를 짐’은 사실 힘겨운 일입니다. 힘겨운 일도 기꺼이 즐겁게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순교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순교의 그리스도교적 의미는 고통과 죽음이 아니라 바로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기를 잊고, 사랑 때문에 십자가를 끌어안으며, 사랑 때문에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물론 목숨을 스스로 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할 때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참생명을 찾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혼자 그 모든 어려움을 감당하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명령하신 것을 우리가 실행할 수 있도록 몸소 도와주십니다.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두렵다면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더해 주시도록 그분의 도우심을 청합시다.(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진화의 메커니즘은 ‘돌연변이’에 있다고 합니다. 돌연변이는 환경의 변화와 위기의 상황에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주기도 합니다.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가 팬데믹 위기를 가져왔을 때입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면역체계를 가졌다면 인류는 더 큰 재앙에 빠졌을 겁니다. 그러나 인류는 저마다 다른 면역체계가 있어서 코로나의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생각과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면서 더 많은 지지를 받은 정당이 국가를 운영하는 제도입니다. 비록 그 과정에서 갈등과 분열이 생기지만 그보다 더 좋은 제도를 찾지 못하였기에 대부분의 나라는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파시즘, 봉건제도, 제국주의가 하나로 힘을 모아서 좋을 것 같지만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처럼 인류는 그런 제도로 인해서 많은 전쟁과 폭력을 경험했습니다. 아직도 형식은 왕을 인정하는 국가가 있지만 정치의 형태는 대부분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벨탑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단순히 하느님께 반역한 인간이 벌을 받은 사건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우리의 자리가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게 합니다. 최근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이 창조 질서를 스스로 결정하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DNA 돌연변이를 연구하고 유전자 편집을 시도하는 이 시대는, 어쩌면 또 다른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해 왔습니다. DNA 돌연변이는 인간의 생존과 적응을 가능하게 하였고, 여러 환경 속에서 다양한 인류 집단이 형성되었습니다. 과학적으로 보면, 인간의 다양성은 자연스러운 진화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으로 볼 때, 이는 단순한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는 과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하나의 틀에 가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각자가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자신의 지혜를 맹신할 때 발생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 유전자를 조작하고 인간을 통일된 존재로 만들려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바벨탑을 쌓는 것이 될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을 보면, 인간들은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며 "하늘에 닿는 탑을 쌓자"라고 합니다. 이는 단순한 건축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 없이도 스스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교만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 인간의 통일과 협력을 방해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하나의 방식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 속에서 참된 조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세상을 보면, 다양한 민족과 문화, 언어가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분열"이라고 하지만,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는 "조화로운 다양성"입니다. 만일 인간이 하나의 언어만을 사용하고, 하나의 문화만을 강요하며, 한 가지 방식으로만 살아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 될 것입니다.
바벨탑의 혼란은 신약에서 놀라운 방식으로 치유됩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성령 강림 사건이 나옵니다. 성령께서 임하자, 사도들은 여러 언어로 복음을 전했고,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들의 언어로 그 말씀을 이해하였습니다. 바벨탑에서는 인간이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려 했고, 그로 인해 하느님께서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하지만 성령 강림 사건에서는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성령 안에서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참된 뜻입니다. 인간이 강제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각자의 고유한 모습으로 일치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느님 없이 자신을 통일하려 하면, 그것은 오히려 파괴와 혼란을 초래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성령 안에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조화를 이루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일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으니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부른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앞서가는 사람을 끌어 내리는 탑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뒤에 따라오는 사람을 밀쳐내는 탑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동료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는 탑을 말씀하십니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탑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가지 않는 길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우리를 영적인 갈증을 풀어 주는 샘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길만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고, 죽어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르는 길>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십자가를 지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십자가를 짊일밖에
낮추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낮춤일밖에
비우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비움일밖에
품으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품음일밖에
베푸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베풂일밖에
섬기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섬김일밖에
돋우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돋움일밖에
이루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이룸일밖에
살리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살림일밖에
십자가를 지신 분을
따르는 길은
오직 십자가를 짊일밖에
오늘의 성인
성 베드로 다미아노(Peter Damian)
신분 : 추기경, 교회학자
활동지역 : 오스티아(Ostia)
활동연도 : 1007-1072년
같은이름 : 다미아누스, 다미아니, 다미안,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의 어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성 베드로 다미아니(Petrus Damiani)는 어릴 때에 고아가 되어 형의 도움으로 성장하였다. 그의 형은 라벤나의 사제였는데, 그에게 다미아누스(Damianus, 또는 다미아노)라는 이름을 붙여준 뒤 파르마(Parma)로 보내어 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그는 여기서 교수가 되었으며 1035년에는 베네딕토회 회원이 되었지만 자신은 성서 연구에 전념하면서 은수자로 생활하였다.
1043년경 수도원장이 된 그는 은둔소를 다섯 군데나 더 세웠다.
그는 특히 이 세상을 초탈한 인물로 또 성직매매를 극도로 반대했던 인물로 높이 평가받는다. 1057년 그는 교황 스테파누스 9세(Stephanus IX)로부터 오스티아의 추기경으로 선임되었다. 그 후 수도자의 위치로 돌아온 그는 주로 교회의 개혁운동을 주도하였는데, 특히 대립교황에 대해 끝까지 반대하였다.
그는 연옥, 성체에 관한 글을 남겼고, 사제 독신제 옹호를 비롯하여 사제들에 관한 많은 글을 남겼다. 그는 공식적으로 시성되지는 않았지만 사후에 즉시 그에 대한 지역교회의 공경이 시작되었고, 1823년 교황 레오 12세(Leo XII)가 그에 대한 공경을 승인하며 보편 전례력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1828년 교황 레오 12세는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성 로베르토 사우스웰(Robert Southwell)
활동년도 : 1561-1595년
신분 : 신부, 순교자
지역 : 영국(UK)
같은 이름 : 로버트, 로베르또, 로베르뚜스, 로베르투스
영국 노퍽(Norfolk)의 호샴 세인트 페이스(Horsham Saint Faith) 출신인 성 로베르투스 사우스웰(Robertus Southwell, 또는 로베르토)은 궁중 관리의 아들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두에(Douai)로 유학을 떠났다가 파리(Paris)로 건너갔고, 그 다음에는 로마(Roma)로 가서 예수회원이 되었다.
그는 1584년에 사제로 서품되자 그 길로 영국 선교 길에 올랐다.
그는 런던(London)에 살던 애런델(Arundel)의 앤(Anne) 백작부인의 도움으로 성공적인 선교활동을 하다가 그리스도인임이 발각되어 앤의 남편과 함께 런던탑에 갇혔다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옥중에서 여러 편의 시를 썼는데, 이것은 가톨릭 신자들을 격려하는 목적 외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화합을 노래한 것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그 외에도 그는 '장례식에서 흘린 마리아 막달레나의 눈물', '위로의 편지' 그리고 '죽음을 이긴 승리' 등의 글을 남겼다.
그는 1970년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Wales)의 40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복자 노엘 피노트(Noel Pinot)
활동년도 : 1747-1794년
신분 : 순교자
지역
같은 이름 : 나딸레, 나딸리스, 나탈레, 나탈리스
노엘 피노트는 프랑스의 앙제(Angers) 출신으로 교구사제였다.
그는 한 두 본당의 보좌신부를 거치는 동안에 병자들에 대한 지극한 정성으로 존경받는 사제로 통하였고, 1788년에는 루루 베코네(Louroux-Beconnais) 성당의 주임사제로 활약했는데, 그의 뛰어난 열성과 신심은 많은 영적인 결실을 맺었다.
1790년 루이 16세에 의하여 반포된 소위 '성직자의 시민헌법'은 가톨릭의 체제를 뿌리부터 흔든 악법이었기 때문에 많은 성직자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물론 노엘 신부도 끝까지 반대하였다. 그는 앙제 법원에서 2년간의 자격박탈을 강요당하였으나 비밀리에 사제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윽고 방데(Vendee) 지방의 봉기가 어느 정도 성공했을 때 그는 공식적인 활동을 재개하며 항거하기 시작했으나 재차 체포되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1926년 10월 21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그는 나탈리스 피노트(Natalis Pinot) 또는 나탈레 피노트(Natale Pinot)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