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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3:21-22) 예수님이 물세례를 받으신 까닭은?
누가복음 강해 (19)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눅3:21-22)
물세례를 받은 예수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죄를 회개케 하는 물세례를 베풀면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자, 많은 백성이 메시아를 더욱 소망하며 혹시 그가 그리스도가 아닌지 궁금해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정체를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가 오시는 길을 곧게 하는 엘리야일 뿐이라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대신에 이제 곧 능력이 크신 이가 와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인데, 자기는 그분의 신발 끈도 풀 수 없는 신분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한마디로 요한의 물세례는 메시아의 오심을 준비하는 의미라면, 예수님의 성령과 불세례는 하나님으로서 인간을 구원과 심판으로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고도 불합리하게 예수님이 거꾸로 요한의 물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 의미가 자못 궁금한데, 누가는 객관적인 사실만 아주 간략하게 기록했기에 다른 복음서와 연결해서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요한은 백성들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메시아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라고 극구 말렸습니다. (마3:14) 자기가 예수님의 세례를 받아야 할 죄인인데, 거꾸로 당신이 나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다니 꿈도 꾸지 못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세례는 이마에 물을 뿌리지 아니하고 전신을 물속에 완전히 잠겨지게 한 후에 다시 일어나게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세례’의 헬라 원어 ‘밥티조마’도 그런 뜻이므로, 사실은 세례(洗禮)보다는 침례(浸禮)가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우상을 숭배했던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에 침례를 주는 것도 율법을 거역하며 부정하게 살았던 모든 죄악과 그로 인해 오염된 그 사람의 전신을 깨끗이 씻어낸다는 의미였습니다.
따라서 머리까지 포함해 물에 완전히 잠기는 것은 시신이 무덤에 눕혀지는 것을 상징하므로 죄에 찌든 옛사람은 죽었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다시 일어서는 것은 죽음에서 새 생명으로 되살아났다는 것,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상징합니다. 현대 교회에서 행하는 세례식도 그 형식이 어떠하든 동일한 의미입니다. 자기만 높이며 하나님을 거역 대적했던 죄로 타락한 자신의 옛사람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성령의 간섭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다고,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는 의식입니다.
누가는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라고, 즉 백성들과 동일한 방식과 의미로 세례받았다고 증언합니다. 주님에게 회개해야 할 죄가 있다는 뜻은 전혀 아니며, 자신이 구원을 주어야 할 인간 죄인과 동등한 신분의 위치에 서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의 죗값을 대신 감당하는 제물로서의 조건을 갖추려 하신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도 주님이 ‘물에서 올라오실 새’라고, 즉 요한에 의해 물에 완전히 잠겨졌다가 다시 끌려올려졌다고 설명합니다. (마 3:16, 막 1:10) 주님에겐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중생의 필요가 전혀 없었기에, 장차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표한 셈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당신을 말리는 요한에게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라고 진지하고도 단호하게 다시 요청했습니다. (마3:15) 당신께서 요한의 물세례를 받아야만 공사역을 시작할 수가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하나님이 당신을 이 땅에 보내신 구원 계획이 성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모든 의’가 이뤄진다고 했으므로, 따지고 보면 요한의 구원 문제도 이 세례에 달렸다는 뜻이 됩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만약 너도 정말로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지금 나에게 세례를 주어야만 한다고 깨우쳐 준 셈입니다.
아무리 친척 간이라 해도 당시는 왕래가 힘들었기에, 이는 사전에 서로 만나서 상의한 내용이 전혀 아닙니다. 주님이 당신이 사역하실 때가 되었기에 메시아의 오심을 외치는 요한이 있는 곳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지금 그래서 이종사촌 형제가 아니라 요한이 실토했듯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과, 또 그분의 신발 끈도 풀 수 없는 비천한 죄인으로서 서로 대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요한으로선 십자가 구원의 구체적인 뜻은 몰랐을 것이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 땅에 실현될 하나님의 의를 소망하며 아주 황송한 마음으로 주님께 물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가시적으로 강림한 성령
아직은 요한과 예수와 그 부모들을 빼고는 아무도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면 사람들은 예수에게 뭔가 회개할 죄가 있는가보다 오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주님이 요한에게 물세례만 받고 끝나면 백성들은 예수를 자기들과 동격으로 취급할 것입니다. 요한이 주님을 아무리 메시아라고 선포해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자기 뒤에 오는 이의 능력이 훨씬 크다고 선포한 것도 거짓말이 되어버립니다.
주님이 물세례를 받자마자 성령이 강림하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게 된 가장 기본적인 이유입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았지만, 백성들처럼 죄가 있다는 뜻이 전혀 아니고, 나아가 세례 요한과도 비교될 존재가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예고한 대로 이 사람이 바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메시아라는 사실을 온 천하에 알려주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만 유일하게 주님이 세례받고서 기도했고 그러자 하늘이 열렸다고 기록했습니다. 주님은 공생애 내내 스스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항상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성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행하였습니다. (요8:28,29) 주님은 당신의 모든 사역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쳤기에 마태와 마가는 굳이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누가는 힘없고 불쌍한 백성들을 위로 상담 치료하신 인간 예수에 주목했기에, 주님의 기도를 강조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잠시 묵상으로, 혹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기도했고 그러자 곧바로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주님이 어떤 내용으로 기도했는지 기록하지 않았으나, 당시 상황을 살피면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우선 당신이 물세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는 데 필수라는 사실을 요한에게는 말해주었지만, 아직 잘 모르는 주변의 백성들과 이스라엘 전체가 알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또 그래서 이제부터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달성하는 일에 당신이 온전히 쓰임 받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주님의 위에 강림’했습니다. 우선 ‘비둘기 같은’이라고 했으니, 비둘기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고 비슷한 모습이었습니다. 또 ‘형체’라고 했으므로, 영어 번역은 in bodily form,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분명한 형상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강림했다’라고 했으므로 하늘 위에서 그런 모습이 주님의 머리 위에 내려온 것이며, 그 또한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보인다는 것은 어떤 물체에 태양 빛이 반사되어서 눈의 망막에 그 잔상이 남는 것입니다. 성령은 물질이 아니므로 원칙적으로 눈에 보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삼 년 후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강력히 임할 때에도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행2:3)라고, 이 복음서와 같은 저자인 누가가 증언했습니다.
누차 강조했지만 누가는 의사로서 성경 저자 중에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거기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데오빌로 각하에게 헌정하는데 억지 과장이나 지어낸 이야기를 포함할 수는 절대로 없었기에 근원부터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누가는 두리뭉실하게 ‘성령이 임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은 분명히 지금은 비둘기 같은 형체로 주님 위에, 또 오순절에는 불같은 모습으로 제자들 위에 가시적으로 임했던 것입니다.
왜 비둘기 모습인가?
하나님에게 능히 못 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물질은 영이 될 수 없으나, 영이신 하나님은 물질 안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가장 확실한 예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에 흑암의 세력에 갇혀서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 세상에는 하나님의 참 빛이 사라졌습니다. 모두가 갈 바 모르는 목자 잃은 양 떼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마저도 형식적으로 그분을 섬겼을 뿐입니다. 인간에게 참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는 인간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사탄의 거짓이 활개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 백성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으며, 때가 차매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의 의를 실현하시기 직전입니다.
따라서 요한이 선포한 대로 길 잃은 양 떼에게 예수님에 의해서 이제 곧 이 땅에 천국이 실현될 것이라고 깨우쳐 주어야만 했습니다. 요한이 메시아이길 바랄 정도의 가난한 마음을 지닌 이스라엘에게 정작 믿고 따라야 할 분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밝혀준 것입니다. 완전한 비둘기 모습은 아니라도 비슷하게, 그럼에도 성령이 확실히 강림했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게 해준 것입니다.
성령이 비둘기와 비슷한 모습으로 강림한 까닭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영을 그렇게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 성령이 비둘기 같은 모습이라는 명시적 설명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의 전승에 따르면 창세기 1:2의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말씀에서, 수면 위에 성령이 운행하는 모습을 비둘기 같은 움직임에 비유해 왔습니다.
하나님은 죄가 만연한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시면서 당대의 의인 노아를 통해 새로운 세대를 시작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온 땅을 덮은 비가 사십일 간 주야로 내린 후에, 노아는 땅이 드러났는지 확인하려고 비둘기를 날려서 혼돈의 물 위를 돌아다니게 했습니다. (창 8장) 창조 때에 질서가 잡히지 않은 수면 위를 성령이 운행하셨던 모습이 노아에 의해 재현된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기 12:8에 따르면 양이나 염소를 바칠 수 없는 가난한 자는 비둘기로 정결 제물을 대신할 수 있게 했습니다. 마리아도 아들 예수를 낳고서 40일 후에 흘린 피를 깨끗게 하는 정결례를 드릴 때 집이 가난하여서 비둘기를 바쳤습니다. 자신의 모든 죄와 더러움을 비둘기에게 전가한 후에 죽여서 그 피를 제단에 바침으로써 인간 예배자는 깨끗함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을 비둘기 형상으로 인식한 것에는 하나님의 임재, 새 창조의 시작, 하나님과 화해하여 얻는 평화, 신자의 낮아지는 겸손 등의 의미를 지닙니다. 지금 예수님에게 성령이 비둘기 모습으로 임재한 것도, 앞으로 주님이 메시아로서 행할 사역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그 모든 의미를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주님이 요한에게 이렇게 해야 모든 의가 이뤄진다고 하신 말씀을 성령이 보장해 준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직접 하늘에서 예수님에게 기름을 부어서 메시아로 세운다는 뜻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모두가 확인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강림하는 것과 동시에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는 소리도 들린 것입니다. 이는 마태와 마가의 기록과도 일치하므로 현장에 있던 모든 백성도 명료하게 알아들었다는 뜻입니다.
하늘에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당신의 아들이라고 인정하는 음성이 들렸으니까 그 말씀은 당연히 성부 하나님이 발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 하늘에서 성령이 예수님 위에 임했습니다. 결국 삼위 하나님이 백성들이 보고 들리는 모습으로 한 공간과 시간 안에 함께 임재한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아도 세 분 하나님은 분리되지 않고 항상 함께하십니다만, 당신의 백성들 앞에 공개적으로 세 분이 가시적으로 드러난 경우는 성경 기록상 지금이 유일합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때 하늘에서 들린 ‘하늘에선 영광 땅에선 평화’라는 찬송은 천사가 노래한 것입니다. 주님이 공사역 중에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을 때 지금과 동일한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눅9:35) 그때 성령도 분명 함께했을 것이나 가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습니다. 성경 기록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삼위 하나님이 물질계인 이 땅에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방식으로 동시에 임재한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 유일무이한 절대적 사건이므로 인간이라면 반드시 그 의미를 알아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는 아들
가브리엘 천사는 예수에 관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며, 영원한 왕으로서 그가 다스리는 나라가 무궁할 것”이라고 그의 생모가 될 마리아에게 불현듯 나타나 예언해 주었습니다. (눅1:32,33) 이제 성부 하나님이 직접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칭했는데, ‘사랑하는’의 헬라어 ‘아가페토스’ 뒤에 아들이나 딸이 오면 유일하다는 뜻도 됩니다. 성부 하나님에게 예수님 외에 아들이 있을 리도 없지만, 이 선언의 뜻을 이참에 정확히 알아두셔야 합니다.
인간이 아들과 딸을 낳듯이 성부가 성자를 낳은 것은 아니며, 또 예수가 성모 마리아에게서 인간 아들로 태어났다는 중의적 의미도 아닙니다. 영어로는 “the only begotten Son”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beget이라는 동사는 엄마가 낳는다는 동사 bear와 구분해서 아버지에게만 적용합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고전 영어로, 그 단어만으로도 일반적인 출생이 아니라는 의미가 됩니다. 예컨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다고 할 때 그 단어를 사용하는데, 아버지니까 생물학적 출산을 한 것은 당연히 아니며 하나님의 언약을 실현할 약속의 씨로 하나님께 받았다는 뜻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계시인 시편 2:7에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노라.”라고 선언했습니다. 여기서 ‘낳았노라’의 히브리어 ‘야라드’도 바로 그런 의미로, 영어로 begotte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이 메시아를 당신의 아들로 세워서 언약적 관계를 맺었다는 의미입니다. 독생자(獨生子)라고 칭하는 의미도, 헬라어 ‘모노게네스’의 뜻대로 ‘같은 본질을 가진 유일무이한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라고 말할 때는 그 출처가 성부라는, 정확히 말해서 성부와의 관계적 차원에서 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브리엘도 마리아에게 마리아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고한 후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라고 계시해 준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을 기뻐한다고 말한 것도 단순히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애정을 표시한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 주신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는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 것이라”(사42:1)라는 예언대로 실현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예수가 성령의 권능으로 메시아 사역을 시작할 것이므로 기뻐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특별히 이방에 정의를 베풀 것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모든 민족을 이스라엘과 차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다스릴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받을 때 성령과 성부가 함께 등장한 것을 두고,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대관식이라고 해석합니다. 주님이 물에 완전히 잠기는 것은 죄인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상징했습니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자 곧바로 성령과 성부 하나님이 그를 영원한 왕이라고 선언한 셈입니다. 주님이 무덤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여서 성자의 영광을 다시 회복한 후에 하늘 보좌로 승천하실 것을 암시한 것입니다.
주님의 물세례는 인류 구원에 없어선 절대 안 되는 결정적인 두 사건,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빈 무덤에서 부활을 계시한 것입니다.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주님의 물세례는 죄인의 자리에까지 낮아진 것이며, 그 후에 하늘에서 성령이 임하고 소리가 들린 것은 주님이 바로 인류를 구원과 심판으로 나눌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증이었습니다.
예수 물세례의 증인들
그런데 대중들은 물론, 정작 주님께 물세례를 베푼 요한은 십자가 대속 죽음의 구원 은혜를 아직은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의 정체성을 알고 있었고 주님이 영적 권위를 갖고서 강권했기에 그대로 순순히 따랐을 뿐입니다. 안타깝게도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훨씬 전에 헤롯 안디바스에 의해서 참수당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여서 맡기신 엘리야처럼 외치는 자로서의 소명에 충성한 그의 구원은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십자가 구원의 진리를 온전히 깨닫지 못했고, 또 주님과 교제 동행하는 은혜를 전혀 누리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그래서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마 11:11)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 같은 신약 신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면서 운명하셨듯이, 십자가의 구원 은혜를 완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후로도 주님이 재림하실 마지막 날까지 진정한 사랑으로 주님과 교제 동행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기록을 접하는 모든 신자는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죄인을, 더 정확하게는 바로 나 같은 천하의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지식적으로 이신칭의 교리를 아는 것으로는 많이 부족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주님의 십자가 구원을 온몸으로, 체험적으로 인식하고서 그 은혜 안에서만 살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대로 당신께서 다스리는 천국에서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신이 물에 완전히 잠겨서 옛사람이 죽어야 하고 물에서 올라오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었다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더러 그렇게 되라고 물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요한이나 예수님에게서 직접 세례를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날 주일 예배에서 사도신경을 함께 낭송하듯이, 그들이 예배에서 고백한 신앙을 바울이 빌립보서에 그대로 인용해 놓았습니다. 그 내용은 놀랍게도 복음서가 기록한 주님의 물세례 사건을 풀어서 진술한 것입니다. 진리의 영인 성령이 사도들과 신자들에게 예수님이 받은 물세례를 십자가 구원 진리와 연결해서 정확히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신앙 고백의 전반부는 주님이 받은 물세례의 의미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그 후반은 성부 하나님이 들려준 음성대로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칭함을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8-11) 성부 하나님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보신 후에 아들의 위치로 올려준 것이 아닙니다. 시편에서 예언된 대로 주님이 창세 전부터 가졌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신앙 고백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매 주일 예배에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정도로는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초대 교인들은 로마 황제가 자신을 주인으로 모시라고 강요했을 때, 자신에겐 예수님만이 주인이므로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서 죽음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바”(요일1:1)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영원한 참 생명이 그들 속에 실제로 강력하게 역사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만났는가?
우리는 주님을 직접 만날 수 없으니까 그들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반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습니다. 바로 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참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을, 나아가 그분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믿는 것입니다. 현대 신자들이 예수님을 알 수 있는 통로는 오직 성경뿐입니다. 복음서를 필두로 예수님을 보고 듣고 만지려는 간절한 열망을 갖고서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며 성경을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그 모든 말씀이 정말로 죽음과 생명으로 나누는 절대적 진리인가를 진정으로 알고 싶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지금 나를 찾아 와서 만나 주시고 보여 주시고 들려 달라고 기도하면서 주님을 깊이 묵상하고 또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십자가 구원 진리를 정확하게 모르면 예수님을 절대로 개인적으로 만날 수 없으며 순전하게 믿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교회에 성실히 다니며 자기 시간과 물질을 바쳐가며 열심히 섬겨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를 온전히 믿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 것이며,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하는 영역 바깥에 서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흑암의 세력에 묶여서 거짓의 아비 사탄의 자녀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종교적 선입관, 편견, 선지식, 체험 등 모든 것을 완전히 내려놓고서 백지상태의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면서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도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성경이 잘못된 것입니다. 요한은 온 땅을 덮을 만큼 주님에 대해서 기록할 수 있었으나, 줄이고 또 줄여서 요한복음을 저작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 축약된 기록만으로도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라고 선언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반드시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마음의 자세가 있습니다. 현실의 형통 내지는 안식을 바라는 마음을 완전히 없애는 대신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지금 자신이 그분과 어떤 관계인지 알고 싶다는 열정, 아니 갈급함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자신의 진짜 영적 실체를 온전히 발견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에선 아무리 해도 온전한 만족, 행복, 기쁨은 물론이고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없어서 너무 허망하고 갈급하므로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해달라는 절규가 터져 나와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에 관해 깊이 묵상하고 또 묵상하면 어느샌가 골고다 십자가 앞에 발가벗은 채로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주님의 무한하고 조건 없는 사랑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자신의 너무나 추하고 가난한 존재에 아무 소망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각자에게 합당한 고유의 방식으로 찾아와서 따뜻한 사랑의 손길로 붙들어 주십니다. 그 순간, “예수님 나 같은 천하의 죄인을 구원해 주신 은혜가 너무나 경이롭기에 진정으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도 흘리게 됩니다.
그렇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지금까지 세상의 헛된 것을 쫓던 모습대로 계속 살아서는 절대 안 된다는 너무나 분명한 각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 그분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나를 위해서, 나아가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은혜를 정확히 깨달았기에, 이전처럼 세상에서 나 자신을 높이려고 들었던 생활은 도무지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도덕적 종교적 의무 차원이 절대 아닙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골고다 십자가 언덕 앞에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엎드린 적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이전과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져 있습니다. 현실의 삶에서도 점점 주님이 주신 참 생명의 향기와 영광스러운 광채를 주변에 드러낼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이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강림하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 것이 이천 년 전의 옛날이야기가 절대 아닙니다. 주님이 바로 우리를 대신해서 물에 잠겼다 올라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실제로 그분의 참 생명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초대 교인들은 삶으로, 나아가 죽음으로 자기들이 고백한 신앙을 실천했습니다. 우리도 사도신경을 낭송만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이미 받은 자답게, 현실 삶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매일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고 있어야 합니다.
(1/18/2026) 박진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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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수코리아 카페에서 알려드리는 글입니다
도움을 주셔야만 문서 선교를 할 수 있습니다
한분이라도 도와주시길 거듭 부탁드립니다..
카페에 후원이 필요합니다 카페지기는 아주 어렵게
지냅니다 투병중에 생활고로 어렵습니다
도와주신 분들께 박경옥 전도사가 하루 두번
기도해드리고 있습니다 다
먹을것도 없습니다 한 분이라도 도와주셔서...
용기릏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후원이 없다 보니 공과금도 못내고 먹을것도 못삽니다
1만원 이라도 도와주시면 카페지기는 큰힘을 얻습니다
건강문제로 박스나 고물도 줍지 못합니다
앿값이 없는데 먹을것을 사야합니다 오늘은 도와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용기를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먹을것도 못사고 공과금도 밀리고 치료비도 없습니다
공지글에 수급자에서 탈락되는 이유를 올렸습니다
지병으로 투병하며 카페일로 소일하며 지냅니다 수입이 전혀 없이 살고 있습니다
예수 코리아 카페를 도와주실분을 기다리고 작정기도합니다 매월
자동이체 정기후원 회원님이 계셔야 카페를 운영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동이체 회원이 없습니다
카페지기 전화입니다 010.2261~9301
카페후원계좌-국민은행 229101-04-170848 예금주.황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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