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가정과 신앙 공동체가 생활하던 곳
수원교구 수리산 성지(전담신부 이헌수 요셉)는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1804~1839, 1984.5.6.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와 복자 이성례 마리아(1801~1840, 2014.8.16.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시복)와 이 에메렌시아(1800~1839)가 순교하기 전 2년간 신앙생활을 하며 살았던 곳을 기리는 성지이다.
수리산(해발 489미터)은 경기도 도립공원으로 북동쪽으로는 안양시, 동남쪽으로는 군포시, 서쪽으로는 안산시와 접해있는데 산세가 깊고 수려한 곳이다. 수리산 성지는 이 깊은 산자락,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 병목안로 408에 위치하고 있다.
성지로 가기 위해 안양역 앞에서 버스를 타고 병목안 삼거리까지 갔다. 이곳부터 성지까지는 걸어가기로 했다. 약 2Km 거리다. 4월 중순, 성지로 들어가는 길은 푸르름이 가득하다. 이쪽을 보아도 저쪽을 보아도 산자락에서 ‘나 연두야’ ‘난 연초록!’ ‘난 홍단풍~’ 하느님의 들숨 날숨인가 골짜기 바람으로 나뭇잎들이 온몸을 다해 소리친다. 우리의 순례길을 반기는 것인가!
순례자성당(좌) 십자가의 길(우)
길옆에는 들꽃이 가득하고, 이따금 만나는 집 담장 밑에는 주인이 심은 이름 모를 꽃들이 가지런히 피었다. 제법 큰 밭에서 부부가 모종을 심는 곳도 지나고, 대추나무가 가득 심어진 과수원도 지나고, 비가 오면 물 내려가는 소리가 만만치 않을 개울도 지났는데, 가는 길은 도로 확장공사로 파헤쳐지고 중장비가 왔다 갔다 한다. 어느덧 수리산 성지 성당이 보인다. 그리 크지도 않고 아담하게 지어진 성당 안으로 들어가 경배 드린다.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이 박해 피해 정착한 교우촌
가톨릭 성인전에 의하면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고향 청양 다락골에서 한양으로 이사한 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으며 박해를 피하여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1837년 7월 이곳 과천골 뒤뜸이로 들어와 정착하였다고 한다. 첩첩 가파른 산으로 둘러싸여 인적이 드물고 박해를 피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이곳은 이미 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모여 담배를 재배하며 생계를 이어갔기에 담배촌이라는 유래가 되었단다.
정착 후 그는 자기 본분을 지키며 종교 서적을 자주 읽어 교리에 해박하고 신심이 깊었으며, 가난 중에도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푸니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며 그의 권고를 듣기를 즐기고 멀리서도 찾아와 그의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후에 아들 최양업 토마 신부는 “저의 부친은 자주 묵상하고 신심 서적을 대하셨으며, 언제나 종교와 신심 이외에는 말하지 않으셨다. 아버지 말씀은 힘 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 주셨다.”라고 회고하였다.
당시의 세습 차별이 심했던 유교 전통사회에서 이러한 그의 모범적인 삶은 천주의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되어 아름다운 교우촌을 일구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1839년 모방 신부에 의해 공소 회장에 임명되고, 기해박해의 시작으로 한양과 인근에서 순교자들이 많아질 때 그는 의연금을 모아 그곳 신자들과 함께 한양으로 올라가 옥에 갇힌 이들을 돌보아 주었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안장해 주었다.
1839년 7월 마지막 날 밤 포졸들이 들이닥쳐 가족과 40여 명의 교우촌 신자들이 함께 잡혀서 서울로 압송되어 갔다. 성인은 공소회장이라는 것, 아들을 유학 보낸 신학생의 아버지라는 것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형벌을 받아 그 상처로 1839년 9월 12일 포도청에서 옥사하였다.
- 고택성당 제대
복자 이성례 마리아는 성인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아내로, 박해로 인한 떠돌이 생활로 궁핍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인내와 지혜로 집안일을 꾸려 갔으며, 체포 후 가혹한 고문 속에도 꿋꿋했다고 한다. 그러나 젖먹이 아들이 굶어 죽어가는 모습에 잠시 배교하는 말을 하고 감옥에서 나왔으나 다시 체포된 후에는 그 어떤 형벌에도 순교의 뜻을 굽히지 않아 1840년 1월 31일 참수당했다.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의 유해가 모셔진 ‘고택 성당’
수리산 성지에서는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11시에 순례자들을 위한 미사가 봉헌된다. 미사가 시작되려면 시간이 아직 멀었기에 조금 떨어져 있는 고택 성당에 가보았다.
통나무 기둥과 서까래를 얹은 지붕이 있고 흙칠을 한 벽이 마음에 든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어두운 성당 안, 대들보에 ‘고택 성당’이라고 팻말이 적혀 있고 그 아래 제대가 있다. 어두움에 익어가자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유해가 제대 앞에 모셔져 있음이 보인다. 그 아래 무릎 꿇고 코로나 엔데믹 시대인데도 아직도 방황하고 있는 신자들이 하루빨리 돌아오는 데에 저도 한몫을 할 수 있도록 도움 주시라고 기도한다.
고택 성당은 바위가 튀어나온 곳은 튀어나온 대로 지형을 품고 지어져 있다. 그리 크지 않아 많은 인원이 들어갈 수는 없지만 사이좋게 어우러져 앉는다면 위 아래층을 합하여 100명은 앉을 수 있지 않을까?
최경환 성인 유해(좌) 이성례 마리아의집(피정의 집)
순례자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갔다. 올라가는 길은 화강암 계단으로 되어 있고, 십자가의 길 각처가 있어 발을 멈추게 한다. 야외미사 터에는 제대가 덮개로 덮여 있지만 언젠가는 순례자들이 이곳 계단에 앉아 찬미 소리 드높이며 미사 봉헌할 때를 머릿속에 그려 본다.
성인의 유해는 1930년 명동성당 지하묘소로 옮겨 안장되었지만, 묘역에는 봉분과 성인의 유해 일부와 순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성인과 같이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1839년 옥사한 순교자 이 에메렌시아의 묘소 표지(1930년 명동성당 지하묘소에 안장)가 있다.
순례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 길은 순교하신 그분들이 체포되어 한여름 땡볕 아래 꽁꽁 묶인 채로 지나는 사람들의 악담과 저주를 받으며 걸으셨던 고난의 길이었기에 발걸음이 가볍지 않다. 순교하신 분들의 기운을 받아 힘내고 기도하며 살아가자!
“순교 성인들이여, 신심이 미약한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6월호, 이경숙 아녜스(수원 Re. 명예기자)]